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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9

(§29) 학문이란 이렇게 학문을 형성해 나가는 [의식의] 운동을[1]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두루[2] [살펴보고] [각각] 필연성에 따라서 서술하는 가운데 또한[3] 이미 정신의 계기와[4] 재산으로 굳어진 것들이 각기 어떻게 고유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지 서술하는 것이다. 이런 서술이 목적하는 바는 [등장하는 의식으로서의] 정신이 [지에 푹 빠져들어서] 지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5] 통찰하는 것이다. 조급한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중간단계를[6] 건너 뛰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절대]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계기가 하나같이 다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장구한 도정을, 그 도정이 [끝없이] 길다 하더라도, 인내하며 통과해 나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계기에 접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운동을 중지하고 그 계기에  [특정한 시간을 할당하지 않고, 거기에 영원히 머무르겠다는 심정으로,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자/대상에 푹 빠져들어가 영원히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데는 영원을 투자하겠다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곁에 있으면 끝이 없는, 끝이 안 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루함도 느끼지 않고, 알찬 순간순간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하염없이 머물러야[7] 한다. 왜냐하면, [전체 안에서] 한 계기를 이루는 것을 뚝 떼어내어 따로 놓고 보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적으로 완성된[8]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별적인 형태들을 절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란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영원의 관점아래관찰하는 것으로서][9] 이런 관찰이란 계기의 규정성을[10]완성된 형태로, 혹은 [그때그때의 현실에서 완성된 전체를 실현하는] 구체성으로 관찰하는,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개별적인 규정이[11] 갖는 특성 안에서 [궁극적인] 전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 이렇게 인내하는 가운데 세계정신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모든 형식을 하나하나 통과해나가고 세계사의 각 단계에 처할 때마다 거기서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한 자기의 형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취하는 엄청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걸머졌다. 이런 노고가 없었다면, 아니 이런 노고에 미달했다면 세계정신은 자신에 대한 의식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실체가 정신인 이상, 그리고 세계정신이 위와 같은 노고를 해야만 했다는 사태를 놓고 보면 개인도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고로는 자신의 실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시대를 타고나는[12] 개인은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력만 기울여도 된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정신이, 개인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념으로[13]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고의 대상이 되는] [개념의] 내용은 [한때의] 실재성이 다시 가능성으로 완전히 침강하고 응집되어[14] [그 한때의] 직접성을 극복한 상태로 나타나 있으며, [개념의] 형태를 보자면 [손 쓸 필요 없이][15] 간소화된 상태인[16] 단순한 사상의 규정으로 이미 보편화되어[17]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타고난 개인에게] 내용이란 이미 사유된 것으로서 [한 시대가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실체의[18] 재산에 속한다. [그래서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사유의 내용을 갖추려고] 실존하는 것을[19] 개념의 단순성으로[20],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eidos와 같은] 애당초의 본체가 되든 아니면 실존자[21] 속에 스며들어 있는 [to-ti-en-einai로서의 ousia와 같은] 본질이 되든, 아무튼 [과거의] 실존을 애써 개념의 단순성인 형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없다. [시대를 타고나는 개인이 해야 하는 일은 이제]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을[22] 상기하여 의식의 형태를[23]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뭐 한다는 말인지[24]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 원문

[2] 원문 ührlichkeit>

[3] 원문 . 여기서 를 줄인 것으로서 그리고>라는 의미다.

[4] 원문

[5] 원문 . 여기서도 <계사>가 아니라 <존재하다>란 의미로 번역해야 하겠다. <지는 무엇인가>라기 보다는 <>의 실존/현존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6] 원문 . 여기서 <수단>이 아니라 중심, 이런 의미로서 중간에 있는 부분/ in der Mitte befindlicher Teil>이라는 본래적인 의미로 번역함이 옳은 같다. 정신의 도정이 수단만은 아닌 것 같다. 수단이라고 하면 더 좋고 아니면 더 나쁜 수단이 있을 텐데, 헤겔이 이야기하는 로서의 도정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이런 평가(Qualifikation)가 있을 수가 없다. 

[7] 원문 . 이런 의미의 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5부 명제 31에서 말하는 정신은 영원한데 대상을(res) 대하는데 있어서 [이 타자로서의 대상을] 영원의 관점아래 [다시 말해서 영원히 그 곁에 머무르면서] 바라보는 한 그렇다.(Mens aeterna est, quatenus res sub aeternitatis specie concipit.)라는 것에 전제되는 것이고, 이 취하는 태도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Michael Theunissen, Freiheit von der Zeit. Ästhetisches Anschauen als Verweilen. 1990.4.7-6.24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회(GegenwartEwigkeit. Spuren des Transzendenten in der Kunst unserer Zeit) 카타로그, 35-40; Michael Theunissen, Negative Theologie der Zeit 등 참조). 그리고 바로 이점이 횔더린, 헤겔, 쉘링을 스피노자에 빠지게 점이 아닌가 한다.

[8] 원문

[9] 원문 절대적으로 관찰해 보면>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5부 명제 31에서 말한 <영원의 관점아래/sub specie aeternitatis>를 헤겔이 훔친 것이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 바닥에 깔려있는 것으로 질(hyle)로서의 과 같은 보편적인 것이 된 형태.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ürsichseins>

[2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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