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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디가님의 [유시민 지지 문화예술인 ] 에 관련된 글.
너 진짜 노동자 맞아?
겁나는 질문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들통날까 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글쟁이 흉내를 내고 또 글을 가지고 먹고 살려고 바둥대는 쁘띠지만, 두려우면 언어분석철학이라도 들이대고 노동자개념의 외연이니 내연이니 하면서, 육체 노동자니 지적 노동자니 하면서 어떻게든 <나도 노동자다>라고 할 수가 있겠다. 또 펜 돌리는 방법을 조금 배운 쁘띠는 상황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저쪽 편에 서서 그 상황에 맞게 펜을 돌리는 자질이 충분하다는 추궁이 사실무근하지 않고 충분히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뽀록날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겁나는 이유는 나를 향한 이 질문이 나의 계급성을 묻기 때문이다. 계급성을 원론적으로 따지자면야 겁날 것이 없다. 겁나는 이유는 계급성을 이야기하면 그것과 떼어 놀 수 없는 경험 두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광주혁명과 연관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
80년대 한국 운동권 인사들의 독일방문이 잦았다. 그 중 광주혁명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 몇 있었다. 한 목사님은 계엄군이 혁명대열에 발포하자 그 사이에 뛰어들었던 어떤 아주머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뛰어들어 서있어야 했던 자리에 그 아주머님이 뛰어 들으셨다고 자신을 반성했다. 뒷골목으로 도망쳤던 자신을 회상하면서. 다른 한 분은 광주도청사수 마지막 밤의 상황을 전달했다. 한 여고생이 확성기를 들고 도청사수 혁명군 지원을 애타게 간청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전달한 분도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하청청소업체에서 일했다. 시가 운영하는 청소업체 였다. 직원은 약 1000명 정도였다.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난민, 외국인 등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일을 거부하면 사회수당이 감축되는 약간 강제적인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물론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주로 하는 일은 여름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잔디깍는 일이었고 겨울엔 지하철역 등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처우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난민이지만 가장이고 자기나라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던 외국인들이 일하는 동안 내내 술만 처먹고 대마초만 빨아대지만 독일사람이라는 것 하나로 십장이 된 놈들 밑에서 온갖 행패를 다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들었다. 처음엔 거리에서 밥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힘들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심정적으로 해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회사의 구조적인 행패는 날이 갈수록 분노가 쌓이게 했다. 마메드와 공원에서 대마초 피우고 술 먹고 난 다음 날 이었던가? 일이 끝나면 늘 맘이 맞는 서너 명과 어울려 길거리에서, 시내 공원에서 술판을 벌였다. 터기 슈퍼에서 라키(페르노와 같은 터기 독주) 서너 병, 수죽(터기 소시지), 야채, 빵 등을 사가지고 공원에서 고래고래 목청 높여 노래 부르면서 술에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먹고 마셨다. 그날 나는 대마초와 라키에 완전히 뻗어서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등을 타고 스며든다. 한 친구는 어두워졌으니 가야 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투른 독어로 마메드가 말한다. “나 00 혼자 둘 수 없어. 나 알아. 00 완전히 혼자인 것 알아. 00 내 아르카다쉬(형제)야. 00 머리 상했어.” 그러면서 늘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안네 카립”.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마메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무지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깨어나 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마메드는 아직 내 곁에 앉은 체 꾸벅꾸벅하고 있다. 자리를 털고 지하철 역으로 갔다. 헤어지기 전에 마메드가 나를 꼭 껴안으면서 입을 맞춘다. 까실까실한 수염이 살을 그리워하는 내 몸에 포근함으로 다가온다.
회사 경영진에 장황한 편지를 썼다. 조목조목. 기록해놓은 날날의 상황을 다 들이대면서. 이런저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내 몸에 불을 질러서라고 너희들의 행패를 폭로하겠다고 썼다.
이름도 성도 없었던 내가 갑자기 “00씨”라고 불린다. 긴급종업원평의회가 소집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경영진이 불러 대화를 요구한다. 종업원평의회위원장이 참관하고… 그런데 이상하다. 역겨운 감정이 올라온다.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경영진이니 종업원평의회이니 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줄이고…
(§35) 덧붙이자면 이와 같은 서술이 [즉 정신현상학이] 학문의 제1부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정신이 현존하는데 있어서 그가 최초에 취하는 모습은 시작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구별이 없는 뭉쳐있는 것으로서[1] 아직 [자신을 전개하고 나서 다시] 자체 내로 복귀한 그런 시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직접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터전은[2] 그래서 [아직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부정, 다시 말해서 부정된 것을 찾아 나서는 운동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정이 제한으로 나타나는] 규정성[3]이다. 이 점이 학문의 제1부인 <정신현상학>과 다른 곳에서 학문의 제1부라고 하는 것들과 구별되게 하는 점이다. [구별된다고 주장만 할 수 없고] 왜 구별되는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한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몇 가지 고정관념을 논의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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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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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니 여기서 헤겔이 결론을 전제로 삼는 “petitio principii”의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오류가 되지 않으려면 “삶”(Leben)이라는 범주가 빠져서는 안될 것 같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지렁이라도 꿈틀거리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conatus”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스피노자의 “conatus”도 한번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