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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이어받으면서 이에 대립하는1 윤리학.
현재 태동하고 어느 날 우리 앞에 나타날 형이상학은 온통 도덕의 몫이 될 것이다. 윤리학을 다루는 칸트가 제시한 실천적인 [이성의] 요청 두 개는 단지 장차 윤리학의 언저리에서만 놀았지 [그 진수를] 다 길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윤리학은 모든 이념들을, 혹은 이와 다를 바 없는, 모든 실천적인 요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우르는 체계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첫째 이념은 물론 자기 자신을 절대 자유로운 존재(Wesen)로 표상하는 관념이다. 자유로운,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와 함께 동시에 총체적인 세계가 - 무로부터 등장한다. [이것이야 말로] 참답고,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는(gedenkbar) 유일한 무로부터의 창조다. - 여기서 나는 물리의 영역들로 내려간다. 이때 제기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도덕적인 존재 앞에서 세계는 어떤 성질을 갖춰야 하는가? 나는 우리들의 더딘, 실험에 기대어 힘들게 앞으로 나아가는 물리에 날개를 달아주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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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준비하는데 등산화가 걱정이다. 등산화를 사러 갔다. 상점주인이 등산화 한 벌을 가져온다. 신어보니 영 불편하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 짝이 안 맞는 것 같다. 이리저리 불평해도 상점주인은 적극 권한다. 손님께서 계획하시는 산행에 최적 등산화라고. 요새 제일 잘 나가는 명품이란다. 한 짝에는 ‘스피노자’, 다른 짝에는 ‘ 제임스 조이스’라는 라벨이 달려있다.
우째 이런 일이.
사유를 shopkeeping 정도로 상상하는 사람은 물건정리(개념혼동)를 잘못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관용이 풍부한 사람은 서로 다른 짝을 한 벌로 보고 신어서 자기 걸로 만들라고 한다.
이런 것도 있는 것 같다. 백만 달러 수표를 흔드는데 어찌 동전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근데 필히 동전을 요구해야 한다. 깨물어 봐야 한다. 의심이 진리로 가는 길이고 진리가 자유를 준다면 아니 자유 안에서 비로소 진리가 나타난다면 필히 그래야 한다.
스피노자의 감정론이 제대로 된 것인가? 백만 달러 수표 흔들기 전에 동전을 보자.
- 의심 1
스피노자의 수치[심](verecundia)의 정의가 제대로 된 것인가? 수치심은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서 이에 대립되는 뻔뻔함(impudentia)은 감정이 아니라고 한다. 그 설명을 다른 곳에서 하겠다고 약속하나 내 눈이 어두운지 안 보인다.
verecundia가 짬뽕이란 건 앞 포스팅에서 지적했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토막 난 것들이 어지럽게 혼합되어 있는’(mutilatae et confusae, 에티카 3부 감정론, 요청 2, 명제 1) 관념이란 것. 이건 수치심이 뭔가를 능동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혼잡한 관념의 원인으로 - 이런 게 신에게 있어서는 없지만 - 정신의 essentia(=adaequata idea/타당한 관념) 외에 다른 사물들의 정신들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란 것. 이런 혼잡한 관념은 필연적으로 뭔가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
- 의심 2
욕망, 기쁨, 슬픔 3대 감정을 기본으로 하여 감정의 타블로를 만든다. 근데 놀라움(admiratio)과 경멸(contemptus)은 각 감정 정의 4번째, 5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봐서 중요한 감정인 것 같은데, 3대 기본 감정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각 감정은 결국 ‘어쩌고저쩌고하는 슬픔이다, 기쁨이다, 욕망이다’ 이렇게 정의되는데 놀라움과 경멸은 완전히 달리 정의된다.
놀라움과 경멸은 기독교의 화두다.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이다. 하나님 찬양 아니면 하나님 경멸. 경멸이란 밀턴이 ‘실락원’에서 말했듯이 어디서나 머리가 되는 것.(to reign is worth ambition though in hell better to reign in hell than serve in heaven). 그래서 대표 기도할 때 ‘어디가나 머리가 되게 해 주십시오’하면 절대 ‘아멘’해서는 안 된다. 큰 소리로 ‘사탄아 물러가라’해야 한다.
부끄러움에 달리 접근해야 하지 않는가 한다. 더 공부해야 할 문제. 아마 사르트르에 기대어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너와 나의 사회적 공간이 형성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강신주도 아마 이걸 목적하고 있을 것이다. 씹어서 미안.
그리고 ‘죽은 사람들’에 혼합되어 있는 관념들 하나하나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먼저 한국지식인을 지배하는 심급들이 더블린의 지식인을 지배하는 심급들과 비교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근데 게이브리엘의 눈물에 천안함 앞에서 정호승이 짜내는 눈물이 겹치는 건 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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