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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8)

(§ 8) 결국 의식은 앞의 되풀이를 필연적으로 재개하여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통과하게 된다. 근데 첫 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다. 의식은 이제 지각함이란 게 뭔지 경험한 의식이다. 즉 지각함의 결과와 진리가 지각함의 해체,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걸 경험한 의식이다. 이 경험에 의해서 지각함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짜여 진 것인지 [우리/헤겔뿐만 아니라] 의식에게[도] 분명해졌다. 지각함이란, 의식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단순하고 순수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대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게 분명해 졌다. 의식의 자기 자신 안으로의 뒷걸음질은(Rückkehr=Umkehr?) 순수한 받아들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진리(=대상)에 변화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뒷걸음질이 지각함에게 본질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지각함의 이런 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짊어짐으로써 참다운 대상을 순수하게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 일이 이렇게 되면, 지각함에서도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이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면이 [우리/헤겔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의식의 눈앞에[도] 놓이게 된다. 단지 지금 이 단계에서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좀 다른 의미로 그렇다. 감각적 확신에서는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감으로써 진리가 의식 안으로 이동했다. 이 점에 기대어 여기서도 위와 같은 상황을 마치 지각함의 진리가 의식의 몫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의식은 오히려 지각함에서 일어나는 비진리가 자기의 몫이라고 인식한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의식은 동시에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파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의식은 진리(=대상)를 받아들임에서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구별하여 그 비진리를 정정한다. 이렇게 비진리가 의식의 몫이 되지만, 의식이 이런 수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한에서, 지각함의 참모습이란 의미로서의 진리는 의식의 몫이 된다. 그래서 우리/헤겔이 이제 살펴볼 의식의 태도는 더 이상 [밖으로 향하는 눈길만 되는 몰아지경의] 그저 지각함만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의식하고 이런 반성과 단순한 받아들임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단순한 받아들임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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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지각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나다. 나는 ‘Je suis l'autre’가 아니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첫 문장 관계절에서 ‘ich’를 ‘Ich’로 표기했는데, 이런 내용을 함유하는 것 같다.] 내가 그저 받아들이기만(aufnehmen) 하는 대상은 순전히 일개의 개물(흄: “a single object”=“a unity”=“ein Einfaches”)로 등장한다. 나는 또한 일개의 대상에서 {성질}(=이 {나무})도 알아본다(gewahr werden). 근데 이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별성을 초탈(超脫)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이제 보니까 일개의 모습으로 내 곁에 와 있었던 [명사 Wesen을 동사 wesen의 의미로 번역함] 대상의 첫 존재가 그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지? 어떻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있을 수 있지?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상은 분명 참다운 것이다. 그럼 참답지 않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데? 혹 내가 대상을 잘못 받아들이지 않았나? 맞아, 잘못 받아들인 게 틀림없어. 고쳐야 돼. 개별성을 버려야 해.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의 개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모든 개물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해. 안 그럴 수 없어. 근데 뭔가 좀 다른 {성질}도 보인다. 다른 개물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울타리를 쳐주는(=horizein=bestimmen=제한하다/정의하다/규정하다) {성질}(=body?)이네. 근데 뭔가 또 어긋난다.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든 개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일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개물과 개물의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대상을 잘못 받아들인 게 아니었나? 그런 것 같다. [울타리를 치는] 성질의 특수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뭔가 달리 해야 해. 개물과 개물을 연속성으로 잇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연속성을 절단하여 다른 개물을 [울타리 밖으로 쫒아내고]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해야해. 어, 근데 뭐야?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하나>에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쓴맛, 단맛 등)들이 있잖아. 뭘 또 잘못했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받아들인 게 잘못이야. 대상은 그런 게 아니라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일반(=개물과 개물을 차별하지 않고 이어주는]연속성과 비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갖가지 성질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매체(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가 아닐까? 맞아. 이런 일반적인 공동매체 안에서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다수의 성질들이 존재하는 게 분명해. 근데 이 성질들은 감각적 보편성으로서 각기 홀로(jede für sich) 존재하고, [각 감각기관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다른 성질들을 배척하지 않는가? 그럼 결국 내가 지각하는 게 뭐지? [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das Wahre=참다운 것)이 아닌가? 일반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성질 하나하나(einzelne)를 따로따로(für sich) 지각하는 게 아닌가? 그럼 [감각적인] 성질은, <하나>에 달려있지도 않고 다른 {성질}과 관계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된]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bestimmtes Sein)도 아니지 않는가?

 

[보이스 오버]:

 

{성질}이 {성질}로 규정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에 달려서 (=이 {나무}=bestimmtes Sein/규정된 존재) 다른 {성질}과 관계하는 상황에서만 그렇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것(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으로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일 뿐이다. [지각하는 의식이 이 단계에 오면] 그는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다시 단지 하나의 사념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각의 태동상태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는다.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지각하는 의식]:

 

내가 시시포스야?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수용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야?

 

환장할 일이다. 내가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 또 반복과 반복의 되풀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Kreislauf)에 휘말려 들어가야만 하는가?

 

시시포스야, 넌 어땠어?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는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었어?

 

너도 나와 같이 매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걸 맛보았니

 

[보이스 오버]:

 

ㅋㅋ. 처음과 끝을 연결하여 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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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6) 나머지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지각하는 것은 Taeuschung(착각):<=>Tausch(교환)의 가능성을 [느낌으로=“intimately"]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자기동일성이란] 보편성(안)에서는 [자기비동일성(Anderssein)이 있을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의식도 모르게 (unmittelbar) 뜬금없이(selbst=아무런 관계없이) 등장하는 것일 뿐이지 보편성(안)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이] 거둬치워져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5)

„Sein Kriterium der Wahrheit ist daher die Sichselbstgleichheit, und sein Verhalten als sich selbst gleiches aufzufassen.“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한편으론 대상의] 자기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론] 의식의 태도가 되는데, 이때 의식은 [대상의 자기동일성에 눈을 맞추고] 뭔가를 담아내는데 있어서 [모순을 빗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 [역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도록 처신한다.“


 

이 문장의 쉼표가 이상하다. 그저 잘못 찍은 쉼표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두 개의 문장인지 한 문장인지 아리송하다. ‘und'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보면 문법상 쉼표가 올 수 없다. 두 개의 문장으로 보면 두 번째 문장이 엉터리다. 그래서 'und' 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럼 쉼표가 올 수 없다. 만약 헤겔이 문법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쉼표를 찍었다면, 왜 그랬을까? 지각에서 의식이 자신과 대상이 확고하게 분리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암튼 이런 분리를 ‚한편, 다른 한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의식이 여기서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뭔가를 뭔가로’(etwas als etwas) 파악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변함없는 그릇으로(als sich selbst gleiches) 뭔가를 그저 담아내는 것이다.

 

 

6)

 

„Indem zugleich das Verschiedene für es ist, ist es ein Beziehen der verschiedenen Momente seines Auffassens aufeinander; wenn sich aber in dieser Vergleichung eine Ungleichheit hervortut, so ist dies nicht eine Unwahrheit des Gegenstandes, denn er ist das sich selbst Gleiche, sondern des Wahrnehmens.“


 

„[그러나]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차별되는 것이 함께/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자기가 매순간 뭘 담아냈는지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그건 -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바 - 대상의 비진리가 될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zugleich"와 "verschiedene Momente"을 일관성있게 번역하는 게 어렵다. 여기서 Momente는 통일체(Einheit) 안에서 구별되는(unterschieden) Momente가 아니다. 우선 원문에 “unterschiedene Momente"라 하지 않고 ”verschiedene Momente"라고 하고 있다. 우리/헤겔에게만 통일체 안에서, 통일을 이루게 하는 unterschiedene Momente이지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렇지 않다. 지각하는 의식은 통일을 이루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verschiedene Momente"는 단지 아무런 관계없이 갈라지는, 그저 흐르는 시간적인 의미밖에 없다 (물론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래서 ‘verschiedene Momente’를 ‘매순간’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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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3))

4)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지각하는 것은... 의식을 갖는다.” 앞에서 이야기된 것과 뭔가 어긋난다. Täuschung:<=>Tausch(교환)하는 의식은 어쩜 필요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교환하겠지만 등가교환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병존하는 의식을 ‘허위의식’(‘falsches Bewusstsein’)이라고 한다.


 

첫 번역에서 뭔가를 잘못했다. 가변적인 '의식', 그리고 이 문장의 ‘지각하는 것’(‘das Wahrnehmende’)과 ‘의식’을 다 같은 것으로 보고, 즉 ‘지각하는 것’에다 어떤 것(etwas)과 함께(=동시에) ‘자기 자신’(‘sich selbst’)을 대상으로(내용으로) 삼는 의식의 구조를 편입시켜 번역했다. 오류다.


 

그럼, ‘지각하는 것’이 ‘Täuschung(착각):<=>Tausch(교환) 가능성의 의식’을 갖는다는 말은 과연 무슨 말이고, ‘갖다’(‘haben')라는 말은 무슨 관계를 표현하는 말인가?


 

'das Wahrnehmende'를 'das Aufnehmende'(수동적으로 뭔가를 그저'담아내는 것')로 읽으면 이건 흄의  ‘impression’과 같다. [흄은 'perception'을 추상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는가하면 또 의식의 내용이 되는 인상(impression)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의식(Bewusstsein)과 그 내용(Bewusstseinsinhalt) 간의 구별이 유동적이다.


 

흄의 key point는 인상들이(impressions) 단지 의식내용일 뿐이라는 점인 것 같다. 그래서 인상들의 속성("nature")에 관하여, 그리고 인상들과 ‘우리’(=[추상적인] 의식) 간의 관계에서illusion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흄은 인상들은 어떻게 생겨먹었던지 간에 다 ‘똑 같은 터전’('on the same footing')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 간에 구별이 있을지라도 오직 인상일 뿐이라고 한다. 인상의 이런 속성("nature")에 illusion이 있을 수 없다. 그럼 illusion이 가능한 영역은 인상들과 ‘우리’(=[추상적으로 통일된] 의식) 사이의 관계(‘우리’와 독립적인, 아니면 ‘우리’ 외부 혹은 내부(예컨대 ‘아픔’)와의 관계)인데, 흄은 여기서도 illusion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모든 행위와 감각”(“all actions and sensations of the mind”)이 인상들의 터전이 되는 의식(consciousness)에 의해서, 정확하게 말해서 오직 의식에 의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impression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사이비가 발생할 수 없다.("esse est percipi"를 여기서는 거꾸로 "percipi est esse"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흄은 인상과 ‘우리’(의식) 간의 이런 혼합된 의식상태(Bewusstseinszustand)를 “feeling"으로 규정하고, 이런 ”feeling"을 인상과 의식 간의 친밀한 의식(”intimately conscious") 상태(Bewusstseinszustand)라고 설명한다. 이런 '느낌'에는 인상들이 달리 나타날 수 없다고 한다(’tis impossible any thing shou’d to feeling appear different.”)


 

이런 논증은 ‘나 아파“(”Ich habe Schmerzen")에서와 같이 의식내용과 의식을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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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3) “Möglichkeit der Täuschung”


 

“Möglichkeit der Täuschung”을 “착각의 가능성”으로 읽으면, 지각하는 의식은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근데 그걸 “바꿔치기의 가능성”으로 읽으면, 의식의 태도가 달라질 것 같다. 바꿔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잘 바꿔치기하려고 할 것 같다. 필요한 것으로 바꾸면서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등가교환’을 하려고 할 것 같다. [여기서 ‘무의식’이 함유하는 걸 전개하려면 <자본론>의 상품 및 가치이론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무의식'='사회적 관계'라고 하고 넘어가자.]


 

여기서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내재적인 '힘'으로서의 가능성('kata dynamin',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5권12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간에 [논리적인] 모순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내재적인] 힘에 따르지 않는'('ou kata dynamin', 같은 곳) 단지 논리적인 규정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간 모순이 발생하면, 둘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버림받는다. 이런 무모순성(Widerspruchsfreiheit) 혹은 일관성(=consistency)이 자기동일성(!)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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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이어서

2) Schein


 

케네스 웨스트팔은 헤겔의 <지각> 장이 위에서 언급한 흄의 <인성론>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Täuschung’은 ‚Illusion’의 번역일 것이라고 한다. (Kenneth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hmbarer Dinge, Ffm. 1998, S. 10ff.)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착각=Illusion}은 {착각=Täuschung:<=>Tausch(교환)}이 아닌 것 같다. {착각}이 교환의 의미를 가짐과 함께 {Schein}도 가상(假象)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물자체로] ‚있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넘어가면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가상 혹은 사이비라고 했다. 교환에서는 뭔가 넘어가는 것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독어로 Passierschein이라고 한다. 비자도 이것과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Visum'(비자)는 통과할 때 보여주는 것(‘Sichtbares'=보이는 것)으로서 Schein(=증명서)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건너감’의 상처에 주목하고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지적하고 또 지적했듯이 - '건너감‘은 ’십볼렛‘하는 몸체를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뭘 가지고 건너왔던가? 뭐가 건너가게 해주었던가?


 

이주 노동자는 ‘노동력’만이 ‘건넘’을 허락받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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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5)

4. 넷째 문장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지각하는 [의식은] {착각}의 가능성도 의식하고 있다.“)


 

어? 흄과 칸트에 따르면 {착각=Illusion}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필연성에 가까운 것인데 헤겔은 가능성이라고 한다.


 

헷갈린다. 흄-칸트의 {필연성}은 헤겔의 {가능성}과 같은 것인가?


 

1) 이해 첫 접근


 

{착각}의 맛이 각기 뭔가 다르다. {착각=Illusion}의 필연성하면, 흄과 칸트에게는 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나쁜} 필연성이다. 근데, {착각=Täuschung}의 가능성하면 뭔가 좋게 들린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달리 뭔가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맛을 준다. 말장난 같지만 {착각=Illusion}의 필연성은 {착각=Täuschung}이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착각}행위가 가능해야만 그런 게 아닌가? 그렇다면, 흄과 칸트의 필연성은 현실에서 별 볼일 없는 추상인가?

 

헤겔의 {착각=Täuschung}은 {나쁜} 필연성이 아니라 {좋은}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필연성이라면 {착각=Täuschung}의 의미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착각=Täuschung}이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착각=Täuschung}은 긍정적인(positiv-ponere-setzen-gesetzt-정립된) 것이다. 이 정립은 우선 ‘이것’과 ‘저것(=이것이 아닌 것)’ 간의 관계인데, 어쨌든 ‘이것’과 ‘저것’을 바꾸는 행위다.

 

그래서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ss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은 „지각하는 의식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하는 가능성을 (혹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번역 첫 시도에서 „Täuschung“을 „불량거래“로 번역한바 있다. "täuschen"(기만하다)의 어원 ”tauschen"(교환하다)에 기댄 번역이었다. 이제와서 보니 그리 틀린 번역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번역}이다. „täuschen“의 몸체에 있는 이런 'Schein'이 어떻게 다른 말의 몸체로 {번역}될 수 있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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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4)-이어서

사물의 자기동일성엔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되는] 지속적인 존재가 전제된다.

 

바로 이 문제를 흄이 <인성론> 1권, 4부 2장 'Of skepticism with regard to senses'에서 다룬다.


흄은 [지각]외부존재의 진실성은  이성적으로(by reason) 증명할 수 없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인데도, 우리는 그걸 안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건 인간 본성상 선택의 여지가 없고(“Nature has not left this to his [회의주의자의] choice.”) 모든 추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That is a point, which we must take for granted in all our reasonings.”)이라고 한다. 그래서 외부존재로서의 ‘사물’('body')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단지 어떤 원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body')의 존재를 믿게 하는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흄은 이어서 [외부]사물의 존재를 [지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하는] 지속적인 존재라는 측면으로 나눠 다루면서, 외부존재에 대한 믿음이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추적한다. 감각(senses), 이성(reason), 그리고 상상력(imagination)이 그 영역들이다.


흄은 외부존재는 오류와 환영 같은 것에 의해서("by a kind of fallacy and illusion") 오로지 믿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절대 감각과 이성의 영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감각은 자기를 기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선 감각은 사물의 지속성이란 관념(notion)이 발생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논리적으로] 없다. 왜냐하면, [감각에서] 대상이 사라졌는데 대상이 계속 있다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으로서 감각이 중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각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에서 가능한 사념은 단지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이 인상들(impressions)을  [외부존재를] ‘재현하는 상’으로 아니면 외부존재 자체로 제시해야한다 ("and in order to that, [senses] must present their impressions either as images and representations, or as these very distinct and external existences.") 

 

근데 감각은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은 인상들을 “일개의 단순한 지각”(“a single perception",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eine einfache Wahrnehmung', 즉 아무런 접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 둘로 갈라짐이 없는 일개의 지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은 ”이중존재“(”double existence")를 생산할 수 없다. 뭔가 다른 것, 즉 이성 혹은 상상력의 개입으로 이중존재라는 환영이 발생하고 그 이중존재 간의 관계가 “흡사”(“resemblance”)니 “야기”(“causation”)니 하는 기만이 행해질 수 있다.

 

인상을 재현으로 보는 배경에는 가상(Schein)이 자리하고 있다. 가상은 의식의 소여(所與)태에서 뭔가가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고 가정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근데, 감각에서는 현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They [인상들] must necessarily in every particular  appear what they are, and be what they appear.") 가상의 배경을 이루는 현상과 존재의 분리는 감각영역 밖에서 혹은 감각이 아닌 다른 것이 감각영역에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 감각과 다른 뭔가는 감각의 내용들을 감각의 영역에서 현존재의 영역인 존재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결국, 착각의 문제는 영역의 문제다.

 

상품은 시장생산을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배 하에서 이중성격을 지니는 상품이 되듯이 사물의 이중성(정확히 말하면 Einheit-Eins-Eigenschaft로 짜여 진 삼중성) 역시 어떤 영역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 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무엇의 지배아래 누가/무엇이 감각의 영역 이쪽저쪽에 등장하여 뭘 사고파는지 궁금하다. 착각, 기만, 불량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게 뭐지?

 

흄은 인상의 이중성은 상상력이 감각의 영역을 지배할 때 그렇고 이성(reason)이 지배하면 현상과 존재의 분리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 같다.

 

칸트도 감각에 대한 견해에서 흄을 따르는 것 같다.

 

칸트는 우선 현상과 가상을 구별하고, 가상의 위상은 진리와 같은 것으로서 대상과 오성 간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감각(Sinne=senses)은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오성은 형식적 진리를 산출하는 법칙을 준수하기 때문에 절대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다. 근데 감각과 오성 외에 다른 인식원천이 없기 때문에 오류는 단지 감성(Sinnlichkeit)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알 수 없게(unbemerkt) 오성을 침범(Einfluss=영향)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A294).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감각과 오성은 함수적인 관계에서와 같이 직접 관계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데, 감성이 그러지 않고 오성행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벌어지고 , 그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포인트는 흄과 같이 이와 같은 오류는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단지 칸트는 이런 오류를 심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선험적 가상(transzendentaler Schein)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한다.

 

선험적 가상은, 내재적 원칙과 초월적 원칙 중에서, 내재적 원칙을 남용하면서 그 남용을 초월적 원칙에 따른 순수오성의 확장이라고 뻐기는데 있다고 칸트는 설명한다(A296).

 

이런 뻐김은 선험적 비판을 통해서 단지 허구라는 것이 폭로되어도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주관적인 인식능력이 이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건 주관적인 인식능력일 뿐인 근본규칙(Grundregel)과 그 사용에 관한 격률(Maxime)이 객관적인 원칙(Grundsätze)의 탈을 쓰고 오성의 편에 서서, 우리가 우리의 개념들을 어떻게든 연결해야 하는 주관적 필연성을 개관적인 필연성으로, 즉 물자체의 규정으로 돌리는데 있다.  그래서 이런 착각("llusion")은 전혀 회피할 수 없다(A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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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4)

3. 셋째 문장:

 

“Indem der Gegenstand das Wahre und Allgemeine, sich selbst Gleiche, das Bewußtsein sich aber das Veränderliche und Unwesentliche ist, kann es ihm geschehen, daß es den Gegenstand unrichtig auffaßt und sich täuscht.”

(“[의식에게] 대상은 참답고 보편적인 것이며 자기동일성인 반면 의식은 자기가 보더라도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의식에게는 대상을 잘못 담아내어 착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3.1 대상="das sich selbst Gleiche"

 

“das sich selbst Gleiche"를 ‘자기동일성’이라고 번역했는데, 무슨 말이지?

 

우선 지각에서 대상이 어떻게 규정되었는가 보자.

 

우리/헤겔에게는 (für uns oder an sich) 대상과 의식이 단지 지각의 Momente일뿐이다. 단지 지각하는 의식에게만 양대 Momente가 분리되어 대상과 지각하는 의식으로 대립한다. 이때 대상은 1) 지각하는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Wesen=Sein), 즉 지각하는 의식[행위]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 되며, 이런 독립적인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단순한 것(“das Einfache")으로 규정된다. 반면,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허깨비 혹은 있으나마나한 허섭스레기와 같은 것(das Unwesentliche)으로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내구성이 없는 것(das Unbeständige)으로 규정된다. (지각 장, (§1))


(§6)에서 “das sich selbst Gleiche"라는 규정이 추가되는데, 이게 단지 ”das Einfache"(단순한 것)의 다른 표현인지, 아니면 대상의 새로운 규정인지 아리송하다.

 

“das Einfache"를 ”단일성“("Einheit")으로 읽고  ”das sich selbst Gleiche"를 ‘수적 동일성’으로 해석해보자.

 

그러면 ‘지각하는 의식은 변화는 것으로서 시점t1와 t2에 행해지는 지각 W(t1)와 W(t2)는  동일 할 수 없으나 W(t1)의 대상 G(t1)와 W(t2)의 대상 G(t2)는 동일하다’정도가 되겠다.

 

근데 영 이상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W(t1)=W(t2), 고로 G(t1)=G(t2)하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지각은 서로 다른데 대상은 안 그렇다고 하면 뭔가 영 말이 안 된다. 대상의 자기(수적)동일성을 확인해 주거나 담보해 주는 뭔가 다른 게 있다면 또 몰라도.


 

3.2 지각하는 의식의 착각(unrichtig auffassen, sich täuschen)

 

3.1의 연장선에서 지각하는 의식의 착각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겠다.

 

G(t1)=G(t2), 그럼에도 불구하고 W(t1)≠W(t2)


 

근데 의식에겐 W(t1)와 W(t2)가 동일 할 수 없으므로, 둘 중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건 필연적인데, 그럼 과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각 이전에 어떤 기만 혹은 속임수가 있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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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3)

2. 둘째 문장: "reines Auffassen"

 

"es hat ihn nur zu nehmen, und sich als reines Auffassen zu verhalten; was sich ihm dadurch ergibt, ist das Wahre. Wenn es selbst bei diesem Nehmen etwas täte, würde es durch solches Hinzusetzen oder Weglassen die Wahrheit verändern.”

("[이때] 의식은 대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rein=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의식에게 안겨지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거기서 이야기된 자연[발생]적인 의식은 이미 감각적 확신이 사념하는 {대상}+{의식}의 직접성(Unmittelbarkeit={의식}과 {대상}이 떨어지지 않고 찰싹 붙어서 하나인 상태=비분리성)이 허구라는 걸 경험한 의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확신이 자기 자신이 이미 의식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구별함과 동시에 그것과 관계하는 것”(정신현상학 서론 §10)이란 의식구조가 감각적 확신에서는 즉자적이었던 것이 지각에 와서는 대자적인 것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언뜻 보면 지각하는 의식은 아직 감각적 확신에서 덜 떨어진 것 같다.

 

지각하는 의식이 아직 덜 떨어졌다는 느낌은 그가 처음 취하는 태도를 볼 때 그렇다. 그는 대상을 단지 취하기만 하면 된다("ihn nur nehmen")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nur'는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제한과 함께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는, 손쉬운 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식이란 단지 절대적인 것을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우리 곁으로 당겨오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에(정신현상학 서론) 상응하는 태도다. 이런 인식에 아무런 노력(노동?)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감각적 확신과 같지 않나 한다.

 

지각하는 의식의 ‘취함’(nehmen)은 ‘nur'에 의해서 모든 능동성을 빼앗긴 온통 수동적인 태도다. 뭔가를 담아내는 그릇과("아교“ 정신현상학 서론 §1) 같다.  그래서 ’Auffassen‘을 능동성이 아직 약간 남아있는 ’파악‘으로 번역하지 않고 ’담아내는 그릇‘(Fass=통)으로 번역했다.

 

이런 태도는 대상과 의식 간의 분리는 전제하지만 그것이 의식과 대상 간의 관계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상의 이중구조도(정신현상학 서론 §10) 인식하지 못한다. 분리의 이런 절대화는(“schlechthin", 정신현상학 서론 §1) 의식으로 하여금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지각하는 의식은 자기가 필연적으로 이런 사이비적인 가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알아채는 순간 회의주의에, 즉 대상의 진리는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뚝 떨어져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나 한다.

 

감각적 확신과 지각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점은 오성 역시 마찬가지다. 사념, 지각, 오성은 다들 ‘의식의 양식’("Weisen des Bewusstseins“)으로서 사라지게 된다(‚오성’ 장 마지막 부분).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때, 사념, 지각, 오성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는 것, 즉 자기의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다. 의식의 이 길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로 향하는 길이다.

 

근데 왜 모르지? 감각적 확신이 지각하는 의식이 된 것은 단지 우리/헤겔이 그를 꾹꾹 찔러서 그렇게 되어서 그런가? 지각하는 의식이 대상을 손님맞이하듯이 받아들이지만, 손님과 함께 찾아온 ‘제3자는 불청객’(‘der ungebetene Dritte')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근데 사람들이 왔다.”/"Wir haben Arbeitskräfte gerufen, und es sind Menschen gekommen." Max Frisch) 아니면, 손님은 손님뿐이어서 거기에 참관할 수 없는(=주체가 될 수 없는) 제3자일뿐이기 때문인가?(“Ich bin hier nur ein Gast.“/”나는 여기 단지 손님일 뿐이다.“=여기 참관할 수 없는 제3자일뿐이다)

 

불청객으로 찾아온 제3자란? 감각적 확신을 꾹꾹 찔러서 단지 말하게 혹은 지시하게 하지만 않고 채찍질 하여 일하게/노동하게 하는 주인? 그런 관계아래 대상과의 관계가 그저 받아들이는 관계가 아니라 ‘노동하는/실천적인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자기의식이 발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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