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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인성교육진흥법시행, 거시기 하다. 게다가 이게 국회출석 의원 199명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딱 이런 느낌이다. “인성평가 효시 생활기록부… 일제 때 ‘순응하는 조선인’ 만들려 도입”(경향신문).
인성교육관련 한방의 감초처럼 독일교육이 거론되는데, 아마 독일의 개혁교육을 참조하는 걸꺼다. 그러나 개혁교육의 나치하에서의 행보를 볼 때 (참조:http://blog.jinbo.net/ou_topia/387) 이걸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건 좀 잘나가는 중산층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다. 일베의 ‘방종’은 참을 수 있어도, 이런 인성교육진흥법은 참을 수 없다.
독일에서 잘나가는 바덴-뷔르템베르크의 ‘교육법’을 운운하기도 한다. 근데, 교육법이 아니라 주기본법 12조에 명시된 교육지침이 있을 뿐이다.
일케 규정하고 있다.
“청(소)년은, 하나님 경외와 기독교의 이웃사랑 정신에 기반하여 인류애와 평화애호로, [나아가] 민족(Volk)과 고향을 향한 사랑에 기반하여 윤리.정치적 책임감을 [갖도록], 직업.사회적 [어려움을 견디어 이겨내는, calling에 부합하는] 근신을 하도록,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성향(性向)을 갖도록 교육한다.”(“Die Jugend ist in Ehrfurcht vor Gott, im Geiste der christlichen Nächstenliebe, zur Brüderlichkeit aller Menschen und zur Friedensliebe, in der Liebe zu Volk und Heimat, zu sittlicher und politischer Verantwortlichkeit, zu beruflicher und sozialer Bewährung und zu freiheitlicher demokratischer Gesinnung zu erziehen.”)
이런 청교도적인 교육이념땜에 그런가. 암튼, 잘산다. 인품 좋은 사람들도 많고. 녹생당이 집권당이 되기도하고. 그러나 긍정적이지는 만은 않다. 독일 교육환경 모니터링에서 전반적으로 4등, 직업/노동시장지향 항목에서는 바이에른에 이어 2등이지만, 사회통합 부분에서는 12등으로 외국인 혐오 및 외국인 배제가 아직 팽배한 구동독지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출처: http://www.insm-bildungsmonitor.de/2014_best_i_integration.html (왼쪽 맨아래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
각설하고,
죽음을 앞두고 집필한 플라톤의 법률(Nomoi)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본다. 죽음 앞이라서 그런가.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인품교육시행을 주사이 던지기에 비교한다. 그 시행에 해소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더 상세한 정리는 내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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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이면 „도이취란트라디오(Deutschlandradio)“의 9.30-10.00 연재프로그램 „에세이와 담론(Essay & Diskurs)"을 듣는다. „인문주의 교육이념이 남긴 빈공간– 누가 교육 .교양의 정의를 둘러 싼 싸움에서 이길까?(Nach dem humanistischen Vakuum – Wer siegt im Definitionskampf um die Bildung?)“제하 지난 8월 7일 방송된 베른하르트 타우렉(Bernhard Taureck) 교수의 에세이를 번역.소개한다.
[Bildung은 교육.교양으로 번역했다. 교육(Erziehung/Education), 교육학(Pädagogik=어린이를 지도하다) 등은 둘다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요소가 있다. 반면 Bildung에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요소가 스며있다. 교육은 시키는 것이지만 교양은 쌓아가는 것이다.]
남성 화자1:
우리에겐 교육부, 교육정책, 교육계획, 교육개혁, 교육위원회, 교육위임, 교육연구 등이 있다. 교육.교양이 있단 말인가? 교육정책, 교육부 등이 각기 뭘 의미하는지 제시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 교육.교양은 뭘 가리키는가? 이 질문엔 아마 말문이 막힐 것이다.
교육.교양이란 많은 이들에게 잘해봤자 외국어능력 정도로 통용된다. 외국어를 할 줄 알면 장점이 있다. 그러나 외국어능력이 없어서 결코 가난에 빠지지는 않는다. 교육.교양은 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지적 능력에 첨부되는 것 정도로 생각된다. 지적능력 없이 교육.교양이 있을 수 없지만, 지적능력이 있으면 교양을 꼭 갖춰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남성화자 2:
첫째, 인문주의 교육.교양. 이건 이젠 사라져 버린 교육.교양이다.
여성 화자:
200여년 전 까지만 해도 독일에 교육정책, 교육개혁 등이 없었다. 대신 교육.교양이 뭘 의미하는지 주저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인간본성이 자력으로 개발되는 것(Selbstentfaltung des Wesens des Menschen)“이 교육.교양이라고 독일, 아니 유럽에서 공통되게 이야기 되었다.
이어 대답하기를 인간에게는 인간 특유의 본질이 있는데, 이 본질은 대략 „정신과 이성의 지도아래, 그리고 자기와 똑 같은 다른 사람과 조화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뭔가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삶(Antriebe)을 다듬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성 화자 1:
이 대답은 오늘날에 와서 주로 빌헬름 폰 훔볼트란 이름과 함께 이야기 되지만 200년 전에는 상식이었다. 교육.교양에 대한 이런 생각을 교육.교양의 인문주의적 비전 혹은 버전이라고 한다. „인문주의“란 이름은 „사람이면 갖춰야 하는“ 이란 의미의 „humanus“란 라틴어 형용사에서 따 온 것만은 아니다. 인문주의는 뭔가 좀 다른 것을 의향하기도 한다. 인문주의는 인간의 본성, 즉 그 정신성과 사회적 조화를 완벽하게 이룩하여 모든 다른 문화의 모범과 척도가 될 수 있는 문화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모범적인 문화가 고대 희랍-로마 문화였다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고집한다.
여성 화자:
이걸 받아 들이고 따르면 희랍 전설.신화를, 플라톤 철학을, 로마시인 호라티우스의 시를 더 많이 이해하면 할 수록 더 인간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트로이를 둘러싼 싸움, 소름끼치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안티고네의 저항 등 희랍 전설.신화는 오늘날까지 틀림없이 현혹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희랍 문화 전체를 개관할 수는 없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이념]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른다. 희랍어, 라틴어는 수백년 전부터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그런 말들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배울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고대 희랍인이나 로마인이 우리들의 희랍어, 라틴어 실력을 평가하게 된다면 그들은 아마 우리가 희랍어, 라틴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따금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지구에 나타난다면 그 어떤 희랍어 학자도 그와 정말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라틴어 학자도 케사르와 말을 주고 받는 대화를 성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와 케사르는 [뭔 말인가 하려고 애쓰는 상대가] 희랍어, 라틴어 교수가 아니라 실지로는 개그맨일 것이라는 추측으로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남성 화자 1:
여기서 인문주의 교육.교양에 귀결되는 것은 뭔가? 우리가 고대를 다 알아야만 비로서 온전한 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겨우 몇 퍼센트 정도의 인간밖에 될 수 없다. 인문주의 교육.교양버전은 우리가 1내지 10퍼센트 정도의 인간만이 되게 한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제시하는 교육.교양은 명백하게 어떤 사람도 거기에 축 뒤쳐질 수밖에 없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던 희랍의사 히포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가 있겠다. 또 신들로부터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 위로 굴려 올라가야 하는 벌을 받고 매번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바위덩어리를 놓치는 시시포스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무자비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했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인간을 [위에서 이야기 된] 인간 [특유의] 본질로 인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길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화자:
앞에서 이야기 된 어려움에 다른 어려움이 한 짝이 되어 있다.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우는 것은 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는 계층의 특권이었다. 단지 몇몇만이 이런 언어를 배웠다. 그중 다수가 좌절했다. 항상 소수만 끝까지 남았다. 그래서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요구하는 것은 내용상과 실천상의 이중 모순을 갖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고대를 습득함으로써 참다운 인간이 된다면, 이런 습득은 초인간적인 목표가 되고, 우리 모두는 항상 그 목표 달성에 뒤쳐지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고대습득을 통해서 인간존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사람이 인문주의적으로 교육.교양을 쌓아가게 해야지 단지 소수만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남성 화자 1:
고대에 대한 지식으로 인간이 된다는 [교육.교양은] 사회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것이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젠 사라져 버린 교육.교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아직도 매력을 행사하는데, 그 매력은 우리가 인문주의 교육.교양에서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더 크게 보인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의 말소와 함께 교육.교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자체가 제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 화자 2:
둘째, 암묵적으로 [관철되는]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의 교육.교양 패러다임
여성 화자:
누가 교육을 담당하는가? 교사들인가? 물론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단지 급여를 받으면서 능력주위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공공기관이 작성한 교육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능력주의 사회 그 자체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 안에는 견고한 토대를 갖춘 교육.교양의 역량이 있다. 이 역량의 목소리는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이 진행하는 연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상황이 이렇다면 사회엔 이중적인 교육담당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는 돈, 권력, 그리고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民.公적인 능력주의 사회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교육과정에 전제되는 것, 그 진행, 그리고 그 결과를 탐구하는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 일부다.
남성 화자 1:
권력, 돈,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력을 다른 사회구성원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주의 사회의 민.공 세력은 그들의 권력을 효율적인 조직, 상호연대, 엘리트 특유의 자기정당화, 재원 독점, 그리고 꼭 최후 수단으로만 사용되지 않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으로 견고하게 할 줄 안다. 사회적 권력형성과 권력유지의 과정은 보통 이와 같은 특징을 동반한다.
여성 화자:
이런 특징은 [가치]평가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사실이다. 사회에는 조직적으로 효율적인 행동을 취하고, 조직원들간 연대하고, 엘리트란 자기이해, 리소스 독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그룹들이 있다. 여기서 기술되는 것은 무슨 범죄집단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아주 평범한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는 무력은 예를 들자면 승진방해, 이직, 정직, 아니면 단순하게 해고 등이다. 위협 자체가 무력의 일부를 이룬다. 위협하면 이직, 정직, 해고 등에 대한 불안으로 번뇌한다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참여하기로 동의한 사회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되는 것에 대한 불안.번뇌(Angst)다.
남성 화자 1:
그렇다고 해서 권력, 돈, 그리고 대중매체 영향력을 점유하는 사람들이 [지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지배적인 사회이념으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 사회이념을] 나름대로 고려해야 하는 일정한 숙제로(vorgaben)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권력, 소유자산, 대중매체를 통한 영향력 등 그들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준수해야 하는 보편주위란 법적 제한을 받는 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들은 이 보편주의를 다른 이질적인 사회일 경우 항상 요구한다. 모든 사람은 똑 같이 여러 권리와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자산소유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특권을 보호한다.
여성 화자:
권력자와 자산소유자는 말하기를 인권은 보편적으로 유효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는 어쩔 수 없이 제한된구성원으로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전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자국민에게도 복지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그들은 그들에게 표를 던져주는 유권자(Klientel)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정상이고 심지어 그렇게 해야 좋다고 줄지어 이야기 한다. 보편성에 대한 진정어린 고백이 강력한 자기이익 보호주의와 한 짝이 되는 순간이다.
남성 화자 1:
교육.교양에 대한 어떤 생각이 이 능력주의 사회그룹에 부합할까? 이 답은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교육.교양은 가치 높은 재산(ein hohes Gut)이다. 아니 가치평가의 원천 그 자체다(die ursprünglichste Wertschätzung überhaupt). 교육.교양이 가장 원천적인 가치평가 를 제시하기 때문에 가치생산에 기반하는 경제사회가(in einer ökonomischen Verwertungsgesellschaft) 절대 상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관철시킨다. 그들의 교육.교양을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가치평가로서의 교육.교양은 가격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교육.교양은 [차후] 소득을 보장하는 가치인증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견해로 보면 시험점수 혹은 학교성적은 교육.교양의 가치인증에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되고, 이렇게 교육.교양의 가치인증은 주식과 금괴를 유치한 금고와 같이 짜여진다. 교육.교양은 [내가 시험성적 등으로 이미 보여준] 검증된 능력으로서 역량의 형태를 띄고, 이런 역량으로서의 교육.교양은 [차후] 급여의 형태로 내게 돌아올 반대급부를 위한 것이다.
여성 화자:
Bachelor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의 첫 단계에서는 학기마다 30 점(Credits)을 배당하여, 6학기 동안 180점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교육.교양은 셀 수 있는 Input이 된다. 그런데 Input과 output의 관계산정이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기업이 Bachelor를 어디서나 환전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Bachelor로 Master 과정에 진학할 수 있는가를놓고 다투고 있다. 시장경제는 알다시피 유동하고(instabil) 위험이 따른다. 이런 논리는 대학졸업장이란 Output보장[증] 역시 유동성 있게 유지 되어야 한다고 한다.
남성 화자 1:
당사자들이 이걸 고분고분 받아 들일까? [1989년] 유럽전환의 해 이전1988년부터 대학생들이 반복해서 교육파업(Bildungsstreik)에 들어서고, 이에 초.중.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이 합류한다. 그들은 교육.교양 지출이 너무 많이 삭감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유럽전환의 해 이전과 그 이후 어떤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가? 정부는 아무 일 없다고달래면서 눈가리기로 교육에 좀 더 지출하는 척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삭감정책을 펴고 있다.
남성 화자 2:
셋째, 교육관련 학과들의 미미한 항변
여성 화자: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교육학 등 교육.교양관련 제2 사회실상(Instanz)은 교육.교양을 현저하게 다르게 본다. 이들간 특히 교육.교양분석에 적합한 방법을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교육.교양에 가치-가격-관계가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실정에 대비해 보면, 이들은 그 차이를 소통하여 교육.교양은 뭔가 좀 다른 것이라고 합의할 수 있겠다. 권력과 자산소유 엘리트는 교육.교양과정에서 인간의 지적, 창조적 잠재력이 현실[적인 힘으]로 (Geltung) 출현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 간과하는 것 같다. 학교수업이 어느 정도 그리고 정말로 그 잠재력을 적절하게 장려하는지, 아니면 대려 왜곡하거나 장려에 실패하는지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교성적에서 당사자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유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성적이 마치 화폐가 유통되듯이 [대학진학 등] 어디엔가 들어갈 수 있는 권리[증으]로 유통된다면, 이건 [분명] 위조화폐일 것이다.
남성 화자 1:
권력엘리트가 염려하는 것은 학교가 교육.교양관련 학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교육.교양관련 학문은 수업을 통해서 학습잠재력이 왜곡되고 돈으로 학습상의 이익을 구매하는 것은 저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 화자:
교육관련 학문과 권력엘리트간 서로 무시하고 배제하는 게임은 얻을 것이 없고 재미없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권력점유자는 교육.교양관련 학문을 지적으로 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관련] 학자들은 이런 장점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그마하기 짝이 없는 실험앞마당을 가꾸는 것에 만족하고(sich beschränken) [저 멀리] 큰 밭은 권력, 돈, 대중매체영향력 소유자들에게 다 내준 상태다.
남성 화자 1:
그들의 태도에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문주의 교육.교양 이후의 모든교육.교양은 더 이상 예전처럼 총체적인 성격(umfassender Zug)을 띄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교양은 [내가 시험성적 등으로 보여준] 능력으로, 즉 이런 역량의 대가로 내게 돌아 올 반대급부, 즉 급여로 이해 될 뿐이다.
남성 화자 2:
넷째, 특권으로서의 교육.교양과 철학에 기반한 교육.교양간의 대립
여성 화자:
교육.교양에 대하여 총체적인 안목으로(im Ganzen)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사회실상은 없는가? 있다. 예술활동,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그것이다. 이런 말은 들으면 공론장에 등장하기를 꺼리는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의 구성원은 틀림없이 흐뭇해 할 것이다. 예술적, 그리고 철학적 활동! 이건 그들이 보기 좋아하고,기꺼이 장려하고, 인용하고, [궁에] 초대하여 상을주는 문화를 생산하는 소수다. 이들은 절대 불편하게 하기 않기 때문에 잡아다가 감옥에 처 넣을 필요가 없다. 대려 자유롭게 내버려두는데, [궁정] 광대이기 때문이다.
남성 화자 1: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류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교육.교양이 그들을 죽음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치품 없이 살면서 정복자에게 햇빛 가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류의 사람들이다. 법이란 가면을 둘러 쓴 폭군을 폭로하는 사람들은 안티고네류의 사람들이다. 자신을 장교로 착각하고 [배타적인 개인]소유 없이 마음의 조화를 재료로 하여 건설될 새로운 황금시대를 되돌려주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nomadisch) 돈키호테류의 사람들이다. 정도에서 빗나간 시대를 바로 잡으려고 길에 오르는 사람들은 햄릿류의 사람들이다. 인간살육(Menschenschlachtung)의 제국을 인간존중(Menschenachtung)의 제국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괴테의 이피케니류의 사람들이다.
여성 화자:
예를 들어 살펴보자. 풍자가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건 1789년 프랑스에서그랬던 것처럼 오직 저들이 이미 위기에 빠져 있을 때만 그렇다. 당시 희극에서 하인 피가로가 주인의 초야권에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때가 아니면 풍자가 까고 또 까도 권력엘리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행동한다. 이건 스페인의 영화대가이며 초현실주의를 추종한 루이 브누엘 감독의 1972년 작품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La charme dicret de la bourgeoisie>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부르주아를 환영(Fantasma)에 쫓기고, 그 환영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여준다. 자진해체(Selbstauflösung) 된다는 환영이다. 요리와 성적 쾌락 등 욕망 대상을 즐길 겨를이 더 이상 없다. 코카인을 매매하면서 테러와 카운터테러로 범벅 된 길을 목적없이 배회한다. 권력-돈 엘리트는교육.교양의 저편에서 행동한다. 교육.교양은 이미 소득과 교환해 버린 것이다.
남성 화자 1:
이 영화는 영화사의 대작으로서 우리 문화의 일부다. 그리고 자진해체의 환영은? 그 영화가 제작된지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어쩌면 브누엘 감독이 意圖했던 것을 따라, 어쩌면 자기가 민주주의의 기둥이라는 권력엘리트의 자기이해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브누엘의 영화에서는 아직 부르주아가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귀찮게 하는 자진해체라는 환영때문에 행위 무능하게 보이지만 오늘날에 와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자진해체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연출에서 질서유지세력(Ordnungsmacht)으로 등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금융-경제위기도 양면성이 있다. 이런 위기는 전체시스템을 위협하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전체시스템을 구조하는 영역(Ort)도 된다.
여성 화자:
이 모든 것은 교육.교양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에게 교육.교양이란 물질적인 output을 위한 비물질적인 Input일 뿐이다. 비물질적인교육.교양input의 저편에서는 현실(Wirklichkeit)이 조작된다. 이건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고 한마디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이런 조작에 새로운 위협적인 요소가(Züge) 결합되어 있다. 권력엘리트는그들의 종말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다. 그들은 곧 죽을 것이라고 통보받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것을 믿는 가운데 자신들의 신변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권력엘리트는 민주주의를 살아남는 것이 관심거리다. 권력엘리트는 점점 더 세상은 교육.교양저편에 있고, 조작 가능한 모든 것이라는 확신에 빠질 수도 있다.
남성 화자 1:
그럼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에 대립하는교육.교양의 사회실상으로서(Gengeninstanz) 예술적 철학적 활동이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가 임의적으로 점점 더 전권을 갈취하는(Selbstermächtigung) 상황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뭔가라는 질문은 당연하다. 예술적, 철학적 옵션이 교육.교양에 대한 정의를 내릴 아무런 권력, 돈, 대중매체에 기반한 영향력, 실증적인 절차(empirisches Verfahren) 등이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부정적인 기술은 이 정도면 되겠는데 긍정적으로 표기할 수는 없을까?
여성 화자: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가능한 것을 모델링하는 것이 교육.교양이다. 이것이 예술적, 철학적 활동이 교육.교양테마관련 기여하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권력엘리트는 대대적인 조작[세계]로 부상하기 위해서 교육.교양을 졸업한다. 이 조작의 목적은 그들의 해체를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생명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가짜를 생산하는 조작에 모델링은 대립되는 것이 아닐까.
남성 화자 1:
가능한 것의 모델링? 이 교육.교양정의가 공론장에서 토론된다면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처음엔 아무런 문제를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역으로 좋다고 할 것이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이런 교육.교양에서 픽션텍스트의 해석을 포함한 음학적인 과목이 목적하는 것 정도를 볼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것의 모델링도 [성적 등의 인증을 거쳐서] 소득요구에 근거를 제시하는 비물질적인 교육.교양의 일부로 [여긴다]. 하지만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는만은 않다. 권력엘리트는 여기서 뭔가를 혼동하고 있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가능한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예술, 음악, 문학수업은 그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인 것을 다룬다. 이건 성적을 통해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 화자:
이런 자리에 철학적 사유가 참여하면 가능한 것의 모델링은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안티고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없고, 그녀를 만날 수 도 없으며, 그녀와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방식, 국법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런 법이 독재자의 폭군적인 의지일 뿐이라는폭로 등은 모든 사람이 가능한 행위로 생각하고 가능에서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행위다. 그래서 안티고네-읽기는 비무력적, 무력적(zivil und nicht zivil) 불순종을 야기할 수 있다.
남성 화자 1: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항상 자신들이 청소년소녀, 문화, 교육.교양을 장려하고 관대하다는 소식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관대는사회도 보호해야 한다고 한다. 학교는 불순종의 학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적나라하게 보면 저 결합체는 그들에게 위협할 수 있는 [공]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화자:
공론장에 발동이 걸려 토론이 진행된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것의 모델링이 교육.교양이라고 정의하려는 노력은 첨예화될 수도 있다. 질서[유지명령권] 소유자는 순종을 요구한다. „생각은 모든 사람이 지 알아서 해도 되지만, 순종은 달리 해야 한다.“(„Jeder denke selber, aber er gehorche!“)라고 칸트가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대변해서 말했다. 계몽주의 절대군주는 법에 대한 순종의 대가로 생각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와 달리 민주주의는 지배가 인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행해진다는 것에 기반한다. 그래서 모두에게서 나와서 모두를 굽히는 일반의지가 요구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게하는 민주주의 사회계약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세운 규율을 준수한다. 그러나 이것은 루소가 이미 명백하게 인식하였듯이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민주적인 사회계약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권력엘리트의 손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일반질서 대변자로 행세하면서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남성 화자 1: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일반질서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데 있다. 전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자국민복지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몇몇 시민이 그들이 소유하는 부때문에 다른 시민들보다 더 쓸모있기 때문에 보편주의에 대한 냉대한 인정은 소수를 감싸고 도는 뜨거운 보호와 한 짝을 이룬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전인류의 이름으로 특권자들의 일(Sache)을 공표하고 추진할 줄 안다. 이런 권력의 한 리소스는 교육.교양이란 [내가 이미 보여준] 검증된 비물질적인 능력이 차후 소득이라는 물질적인 반대급부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이해다. 특권자들을 위한 교육.교양이다. 앞에서 지적한 철학적 시각은 이에 대립된다. 교육.교양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가능한 것의 모델링이다. 이때 가능한 것이란 기존질서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 화자:
이렇게 되면 특권자들을 위한 특권으로서의 교육.교양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능한 것의 모델링으로서의 교육.교양간의 대립이 확연해 질 것이다. 이런 대립이 없다고 하거나 침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다시 출현하거나 아니면 예전보다 더 큰소리로 이야기 될 것이다. 시스템은 이 대립을 권력점유자에게 유리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들의 해체를 연출하여 시스템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연장하려는 시도는 여기서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진해체의 연출을 권력엘리트가 스스로 [기획하고] 착수 했을 때만 작동하는 것이다. 불만에 가득 찬 남녀학생들이, 내외적인 압박에 감응저항을 보이는 남녀교사들이 저항의 가능성을 모델링하는데 정성을 다 쏟는다면 그들은 [권력-돈-대중매체결합체]의 조정을 받지 않는 판을 깨는 파손자가 된다.
남성 화자 1:
초인간적인, 소수에 적용되는 인문주의 교육.교양이 사라진 후 교육.교양은 지속적으로 고소득에 접근하는 특권으로 이행 가능하게 하게끔 교육정책, 교육개혁, 교육계획 등을 완전히 행정적으로 관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가상은 기만이다. 민주사회에서 교육.교양은 소수의 특권과 모든 사람을 위한 가능성모델링이란 대립을 빗을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교양의 정의는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또 말없는 권력행사(Machtsetzungen)로 단락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화자:
언제 이 대립이 나타나는가?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가 교육.교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순간 이 대립은 나타난다. 사실적으로(faktisch) 관철된 교육.교양정의에 대한 일괄적인 침묵을깨는 순간 이 대립은 나타난다. 교육.교양정의에 대한 침묵의 종말과 함께 비로서 교육.교양을 둘러 싼 정의에 대한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권력-돈-대중매체 결합체는 이 문제를 잘 처리하여(sorgen) 지금까지 침묵을 키키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자신의 지적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말하는 것이 그들의 강점이 아니다.
남성 화자 2:
다섯째: 선입관 파괴로서의 교육.교양?
남성 화자 1:
교육.교양은 가능한 것을 모델링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교육.교양은 가능한 것의 현실적인 모델링으로 진행된다. 현실적인 모델링이란 아무도 혼자 떨어져서 교육.교양을 쌓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교양은 주기 전에 먼저 뭔가를 취한다. 괴테의 토르쿠와토 타쏘를 인용하자면 „어떤 이가 무엇이 되는 것은 내내 갚을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다.“ 모델링은 함께, 공유하는 것을 위해서 진행된다. 가능한 것의 현실적인 모델링은 그래서 사회적인 플라스마다.
여성 화자:
사회적 플라스마란 의미로서의 교육.교양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조그만 스토리 하나 를 이야기하겠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이야기되는 동굴비유다.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 이야기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시사적인 이야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 교육.교양은 이 이야기를 현대화하여 현실적인 모델링으로 새롭게 발견하지 못했다.
남성 화자 1:
우리는 모두 다 고정관념에 쇠사슬로 묶여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우리는 진실로 여긴다. 신문, TV 채널, 인터넷사이트 등은 뭐가 사실인지 신뢰할 수 있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는 사물과 사람의 그림자를 사물과 사람으로 여기는데, 우린 기꺼이 장님이 되어 이런 오인에 빠진다.
여성 화자: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지식사회에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지식이 뭔지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뭔가를 안다고 믿는다라고. 우리는 지식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믿는다. 믿음과 앎이 뒤섞인 참 이상야릇한 표현이다. 믿는다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근거들을 무효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뭔가가 이렇고 저렇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면 뭘 의미하겠는가. 반면 내가 뭔가를 알면, 반대근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뭔가를 긍정하는 것이다. 앎과 믿음은 이렇게 비교적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어 [따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 악질은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란 믿음 외 다른 것이 아닌데 앎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남성 화자 1:
고정관념의 쇠사슬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둔함, 관습, 그리고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단 하나의 인식판단만 있으며 그 사슬은 나노 초에 파괴된다. 가능한 것을 현실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은 우둔함, 관습, 그리고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을 깨부수는 파괴에서 시작된다. 나의 나노 초가 너의 나노 초가 되고 또그의 나노 초가 된다. 근데 아직 사슬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숨통을 죄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지들이 뭐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우리는 뭐라고? 그림자? 그림자가 그림자를 질식시키겠다고?
여성 화자:
소리높여 외치자.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나노 초에 일어나는 파괴의 한 순간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파괴의 때가 될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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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빈곤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의 오른쪽에 보수 부모들이 있고 왼쪽에 진보 부모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 가한 부모들이 있다” “보수적인 부자 부모는 막강한 자본력과 승리의 상관관계를, 진보 인텔리 부모들은 전투를 수행하기 무난한 자본과 최적의 문화자본을 활용한다. 타고난 공부 천재가 아닌 이상 돈도 문화자본도 없는 서민 부모의 아이가 그 아이들을 이길 방법은 없다.”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
“부모의 학력이 높을수록 본인[자녀] 역시 고학력자일 확률이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부모의 교육연수가5년 이하일 때 본인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일 확률은14.0%였으나 부모의 교육연수가6-9년으로 증가하게 되면 그 가능성은2배가 넘는32.5%로 커지고 부모의 교육연수가10년 이상인 경우에는 그 가능성은 다시2배 증가하여63.1%가 된다. 반면, 부모의 교육연수가10년 이상일 때3.8%에 불과한 중졸 이하의 자녀비중은 부모의 교육연수가6-9년으로 감소하게 되면, 17.1%로 커지고, 부모의 교육연수가5년 이하가 되면 동 비율은43.7%로 크게 증가하였다.”
빈곤의 세습이 교육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인가?
“지금까지 이야기된 바, 노예가 폐지된 자유국가에서의 가장 확실한 부는 노동빈민이 바글바글하는데(multitude of laborious Poor) 있다는 것이 확연하다. (…)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도 쉽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들 대부분이 가난할 뿐만 아니라 무지해야 한다. (…) 그래서 국가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어떤 국가나 왕국이나 다 노동하는 빈곤자들(Working Poor)의 앎(Knowledge)이 그들이 하는 일(occupation)의 테두리를 내에 갇혀있고, 그들이 숙명적으로 [생각하고] 하는 일(Calling)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뛰어넘어 확장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 일[만]해야 하고(laborious), 기운을 다 앗아가고(tiresome), 그리고 쓰라림이 가득한(painful) 자리(Station)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삶을 마감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와 같은] 무지에 하루라도 빨리 종속시켜야 그들이 덜 반발하고 지금 서술된 상황에 영원히 복종할 것이다. (…) 어떤 생명체도 그와 동등한 자에게 기꺼이 복종하지 않는다. 내가 타는 말이 나 만큼 안다면 나는 그 말을 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교육 엘리트들이 바보란 데에 있지 않는가? 자기 밥그릇에 갇혀 그 바깥을 보지 못하는 교육엘리트들이 문제가 아닌가? 교육엘리트들이 복잡한 리스크계산방법을 동원해서 원전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사람들이 엘리트대학의 엘리트들이 아니었던가? 알아서 기는 교육엘리트들이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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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원숭이를 유전자적으로 비교해 보면 차이가 거의 없다. 수백만 년 전에 길을 달리했지만 그 유전자는 아직도 99% 똑같다. 근데 왜 사람만 언어를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사회적인 조직, 기술을 투입한 생산방식 등과 같은 복합적인 구성체를 가능하게 한 인식능력을 개발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새로운 답을 라이프찌히 소재 진화인류학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제시하고 있다.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인간문화 발전을 이해하는 열쇠는 어떻게 배우는가에 있다는 전제하고 원숭이와 사람간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조사. 결과 사람과 원숭이간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를 흉내내면서 배우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 원숭이의 경우 실생활을 마스터하는데 흉내내면서 배우면 충분하다는 것. 하지만 „문화“란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이런 흉내로 발전될 수 없다는 것. 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울 때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자신을 이입시켜 배운다는 것. 그래서 사람이 배우는 방법은 흉내내기가 아니라 „같이 생각하기(Mitdenken)“, „같이 경험하기(Miterleben)“라는 것. 이런 식으로 사회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성되고, 세대적으로 전수되고 확대되는 문화적 전통이 생성된다는 것. 사람은 배움에 있어서 사회적 요소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 즉, 사람은 뭔가를 하는 다른 사람을 관찰할 때 그가 그걸 어떻게 하고, 왜 하는가에 집중하면서 그 사람 안으로 자신을 완전히 이입시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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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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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관련 몇가지를 첨언한다.1. Schmuddelkind – Schmuddel은 지저분한 음식 혹은 음식을 지저분하게 먹다라는 의미로서 Schmuddelkind는 <지저분한 아이> 정도로 번역되겠으나 계급적 의미를 가미하여 <저급한 아이>로 번역하였다.
2. Oberstadt – 독일의 전통적인 도시는 귀족, 그리고 수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가 거주하는, <아크로폴리스>에 상응하는 Oberstadt와 서민, 노동자가 거주하는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상류층 거주지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3. Mach’s wie deine Brüder – 직역하자면 <네 형들처럼 해라> 정도가 되겠지만, 여기서 사건/사태의 지평을 가리키는 대명사
4. Sechundsechzig spielten – 66점을 먼저 만드는 카드놀이
5. Rattenfängerlieder – 독일 동화 „하멜른의 쥐잡는 사람“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소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참조
6. Rumpf und Wörter beugen – 소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기초로 명사변화 (Deklination)를 배우는데
7. vor dürren Tantengreisen – 직역하기 힘든 표현이다. 그래도 직역하자면 <삐적 마른 노인아줌마들 앞에서> 정도가 되겠는데, 여기서 <노인아줌마>란 문화를 겉치레로 삼는 (kulturbeflissen), 특히 귀풍을 흉내내려고 노력하는 부유층 아줌마를 일컫는 말 정도가 되겠다.
8. unter roten Rattenwimpern –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빠알깐 쥐속눈썹 아래>
9. par cur – 어원은 불어인데 "par coeur/달달 외워서
"를 말하는지 아니면 "parcours/장애물 경마 코스"를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역자는 후자를 선택했다.
10. geigen, klimpern –서투른 피아노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를 의성적으로 번역해 보았다.
11. verklemmt - <어딘가에 꽉 끼어>라는 의미인데 성적인 함의가 있다. 성적감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여 오그라진 사람을
12. Knochen morsch und morscher schreien – 이 표현의 번역에 앞서 먼저 그 맥락을 살펴봐야겠다. 전후 어린이/청소년 책 작가로 알려진 한스 바우만이 17세의 보이스카웃으로 작시한 노래에서 유래한다. 이 노래의 1절은 다음과 같다. „Es zittern die morschen Knochen der Welt vor dem roten Krieg. Wir haben den Schrecken gebrochen, für uns war's ein großer Sieg. Wir werden weitermarschieren,
wenn alles in Scherben fällt; denn heute, da hört uns Deutschland,
und morgen die ganze Welt.“(赤군과의 전쟁을 놓고 세상의 문드러진 뼈따귀가 떨고 있다. 우리는 그 공포를 깨뜨리고 큰 승리를 다졌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날지라도 우리는 행진을 계속할 것이다. 오늘은 독일이, 내일은 전세계가 우리에게 귀를 기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적인 노래다.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의 hören (듣다)를 gehören(속하다)로 고쳐서, 즉 „오늘은 독일이 우리 것이며 내일은 전세계가 우리 것이다“란 의미로 나치 돌격대 SA가 불렀던 노래다 (이 버전은 금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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