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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8/05/23
    2018/05/23
    ou_topia
  2. 2015/05/02
    번역: 최소한의 도덕 65.(1)
    ou_topia
  3. 2012/09/06
    미학 비판(17)
    ou_topia
  4. 2012/03/24
    2012/03/24(1)
    ou_topia

2018/05/23

1.

불편하다. 속이 상한다. '남이야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던'. 물론, 68세대의 자유분방한 미학에 젖은 눈으로 보기엔 촌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들을 멀리하고 싶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책에서 답습한 역사를 늘어놓으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왜 그렇게 사는지. 끈질기게 질문한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이번엔 문외한의 무지에 도피한다. 그래도 놔주지 않는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So nicht(이건 아니다).“

이북에 대한 평가였다. 아니다. 결국, 나에 대한 평가였다. 자유분방함을 만끽하고 싶은 나의 거부감이었다.


2.

어느 한 지인이 서명운동 서명지를 들이댄다. 박근혜 청와대에 청원하는 내용이다. '재독한인 1세대를 좀 살게 해 달라.' 연금으로 기초 생활을 할 수 없거나 빡빡한 생활을 해야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속을 찡그리면서 서명한다.

문재인 청와대에 별반 청원이 있다. 속이 찡그러지는 건 마찬가지다.


3.

'진정성의 정권'에 진정 어린 청원.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관계의 범주에 '성'이 붙어서 '거리 둠'이 없는 구체적인 혼합물이 되었다. 폐쇄회로. 개념이 아른거린다.  

도보다리 회담은 가시적이지 투명하지 않다.  


4.

진정성이 아니라 게임이다.  "삐딱한 관점"(der linkische Gesichtspunkt, 횔더린)에 미래가 있다. 역풍엔 돛을 삐딱하게 달고 좌우 지그재그로 나아가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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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최소한의 도덕 65.

수염이 열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 노동자 특유의 말투들과(Dialekte) 지식인의 말하기를(Schriftsprache) 갈라 서로 맞서게 하는 건 반동적이다. 한가로움은 – 그게 비록 교만과 방약무인으로 물든 한가로움일지라도 – 상류층의 말하기(Rede)에 어느 정도의 자주성과 자제력을 부여한다. 그 때문에 지식인의 말하기는 자기소속의 사회영역인 상류층과 대립하게 된다. 지배자들에게 명령하기를 원하는 지식인의 말하기는 바로 그런 말하기를 [비지배자에 대한] 명령으로 오용하는 지배들에게 반항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복무를 철회한다. 반면 억압된 자들의 언어는 오로지 지배의 자국으로만 얼룩져 있고, 이런 지배에 의해서 아무런 뒤끝없이 감히 지식인의 말하기를 하는 자유인 모두에게 훼손되지 않고 자율적인 말이 약속하는 올바름(Gerechtigkeit/정의)마저 박탈 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이 받아 쓰게 한 언어다. 가난한 자는 말들을(Worte) 씹고 또 씹어 공복을 채운다. 그는 말들의 객관적 정신에서 사회가 거부하는 영양가 있는(stark) 양식을 기대한다. 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보태어 입에 가득 담아 (den Mund voll nehmen)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 한다. 그는 지배자들이 사랑하지 못하도록 한 언어의 몸을 욕보이면서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을 무력한 힘으로 되돌린다. 재치있는 즉흥적인 답변과 타고난 기질로 요약될 수 있는 베를린 북부의 [노동자 거주지 베딩의] 사투리나 런던 사투리의 정수라 할지라도 절망스런 상황들을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고 그럼으로써 세상의 흐름을 정당화하는 한 병들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문어체가 계급간의 소외를 성문화한다고 해서 이걸 구어체로의 퇴행으로 철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더없이 철저한 언어의 객관성의 귀결로 철회될 수 있다. 글쓰기를(Schrift) 자신의 내부로 끌어안는 말하기가(Sprechen) 비로소 인간의 주고받는 말하기(Rede)를 그게 이미 인간적이다란 거지거짓말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원문:

Kohldampf. - Die Dialekte der Arbeite r gegen die Schriftsprache ausspielen ist reaktionär. Muße, sogar Hochmut und Arroganz hat der Rede der Oberschicht etwas von Unabhängigkeit und Selbstdisziplin verliehen. Dadurch wird sie in Gegensatz zu ihrem eigenen sozialen Bereich gebracht. Sie wendet sich wider die Herren, welche sie zum Befehl mißbrauchen, indem sie ihnen befehlen will, und kündigt ihren Interessen den Dienst. In der Sprache der Unterworfenen aber hat einzig Herrschaft ihren Ausdruck hinterlassen und sie noch der Gerechtigkeit beraubt, die das unverstümmelte, autonome Wort all denen verheißt, die frei genug sind, ohneRancune es zu sagen. Die proletarische Sprache ist vom Hunger diktiert. Der Arme kaut die Worte, um an ihnen sich sattzuessen. Von ihrem objektiven Geist erwartet er die kräftige Nahrung, welche die Gesellschaft ihm verweigert; er nimmt den Mund voll, der nichts zu beißen hat. So rächt er sich an der Sprache. Er schändet den Sprachleib, den sie ihn nicht lieben lassen, und wiederholt mit ohnmächtiger Stärke die Schande, die ihm selber angetan ward. Selbst das Beste der Dialekte des Berliner Nordens oder der Cockneys, Schlagfertigkeit und Mutterwitz, krankt noch daran, daß es, um verzweifelte Situationen ohne Verzweiflung überstehen zu können, mit dem Feind zugleich auch sich selbst verlacht und so dem Weltlauf rechtgibt. Wenn die
Schriftsprache die Entfremdung der Klassen kodifiziert, dann läßt diese nicht durch Regression auf die gesprochene sich widerrufen, sondern nur in der Konsequenz der strengsten sprachlichen Objektivität. Erst das Sprechen, das die Schrift in sich aufhebt, befreit die menschliche Rede von der Lüge, sie sei schon mensch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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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비판

"[미학의] 형식적 차원인 <추하다-아름답다>는 내용적으로 사회적 관점을 감추고 있다. [부르주아가] 추한 것을 허용하게 된 동기는 반봉건이었다. 농부들도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랭보에 이르면 그 차원이 보들레르의 <순교자>가 보여준 것보다 더 철저하게 추적된다. 형체가 해체된 시체를 노래한 랭보의 시에서 튈레리엥 궁전으로 쳐들어가는 아낙네는 "그래, 나 병신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제4계층, 롬펜프롤레타리아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상황을] 뒤집어엎어 버리기를 욕망할 때 그 모습은 추한 사회의 아름다운 삶의 규범에 비춰보면 거칠고, 원한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강제된 노동, 더욱이 육체노동의 짐에 눌린 굴욕의 상처(Mal)가 깊게 패어있다.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서 우아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잔치상을 지불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권에는 그런 굴욕을 기억하게 하는 패인 상처를,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전체에 전쟁을 선포하는 그런 상처를 그들의 [본래] 모습으로 허용하는 [아량도] 얹혀 있다. 예술은 [옛적부터 귓속말로 이어져와] 추하다고 추방된 것을 자신이 다뤄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추한 것을 한 구성요소로 짜 맞추거나 좀 부드럽게 하거나 혹은 가장 역겨운 것보다 더 역겨운 유머를 통해서 추한 것과 화해하고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한 것을 자기의 모습에 따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세계를 추한 것 안에서 까발리기 위해서다. 예술이 이렇게 된다고 해도 굴욕에 동의하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가능성이, 깔아뭉개진 자들과의 동정이 쉽게 이런 긍정으로 전복되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말이다." (ou_topia, 강조역자)
 

 

아도르노, 미학이론  (Gesammelte Schriften, Bd. 7, S. 79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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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4

신의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절대자를 상실한 사유는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준이 확 떨어진다.

보토슈트라우스의 아직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따르는 „Paare, Passanrten“(짝을 맺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은 보물 창고인데, 실존 사회주의 붕괴에 한방 얻어 맞고 나 자빠져 „이젠 할 수 없어도, 단번에 멍청해 지더라도 변증법을 버리고 사유해야 한다“면서 포퍼를 따르는 „Beginnlosigkeit“(시작이 없는 상태)는 횡설수설의 표본.

변증법이 절대자를 사유하는 것이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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