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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1

 

(§1)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1] 확신은 뭔가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참으로 취하지 못한다.[2] 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 항상[3]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감각적 확신/마음과 달리} 지각은 [이렇게] 온통[4] 보편성의 지배를[5] 받기 때문에 지각 안에서 바로 {논리적으로??}[6] 구별되는 두 갈래의 축도[7]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지각이란 보편성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원리는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관조하는 가운데} {스스로??} 생성되어 헤겔/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대한 헤겔/우리의 태도는 더 이상 갓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다르다. 거기서 우리는 {애 달래듯} 감각적 확신의 태도를 취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수용이[8] 아니라 [지각을 관통하는 엄연한] [자기]필연에 따른 수용이[9] 되었다. 이런 [지배로서의] 원리의 발생과 동시에 양대 축이, 감각적 확신의 등장에서는 단지 {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쿡쿡 찔러서} 드러나게[10] 한 것이지만, 지각에 와서는 생성된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되었다}. 이 양대 축의 하나는 뭔가를 들어올려 보여주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도 역시 동일한 운동인데, 여기서는 운동이 단지[11] {아무리 들여올려 보여주고 보여주어도 아무런 접힘/굽힘/주름이 생기지 않는} 단순한 것으로서의 운동일 뿐이다. 전자가 지각함이고[12] 후자가 지각함이 마주하는[13] 것이다.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대상은 지각함의 운동과 동일한 것이다.[14] 지각함의 운동은 [지각의 양대] 축을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대상은 이 [양대] 축이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다. [지각함은 모르고] 우리만 알고 있지만 본디[15]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보편성이 지각에서 꼰대를 세우고 있는 것이고[16], 이 추상에 견주어 보면 지각 안에 구별되는 양대 축,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17] 그러나 양쪽 다 {그들은 모르고 있지만 사실 보편성을 집행하는 것으로서}[18] 실제로는 보편성, 즉 {맑스가 말한 가치와 비교되는}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둘 다 꼰대를[19] 세우는 본질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지각 안에서는 양대 축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이런 대립관계 안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꼰대일 수밖에 없고, 꼰대와 들러리라는[20] 차이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중 {변함 없는} 단일한 것으로 규정되는 쪽, 즉 대상이 꼰대가[21] 되고, 이 대상은 지각되든 안되든 이것과 무관하게 임재해 있는[22] 꼰대가 된다. 반면, 지각함은 운동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내구성이 없는]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직접적인>

[2]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고자 싶어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번역이다. 역자는 사실 <감각적 확신>을 넘기기 힘들었고 아직도 힘들다. 그래서 읽다가 내팽개쳐 버리곤 했는데. 헤겔에게 야단맞는 <감각적 확신>의 편이였기 때문에 그랬고, 26살 배기 헤겔이 횔덜린에게 헌사한 시 <엘로이시스>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겔한테 개기고 개겨보았고 아직 개기고 있다. 근데 이렇게 개기는 가운데 와 닿는 것이 하나 생겼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을 못하는 순이네 엄마의 방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엔 정말 달이 들어있나 끝까지 가서 확인할 작정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얼굴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다. 빈자리 없이 주름으로 가득 채워진 사무엘 베케트의 얼굴이겠지만 회의보다 동심이 살아있는 얼굴이었으면 한다. 구원으로서의 역사에 관해서는 진보넷 블로거 김강님의(blog.jinbonet.minjung)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3]원문 <ihre Wahrheit>

[4]원문 <überhaupt>

[5]원문 <Prinzip/원리>. <Arche>에 기대어 <지배>라고 번역했다. 

[6]원문 <unmittelbar>

[7]원문 <Moment>

[8]원문 <ein erscheinendes Aufnehmen>

[9]원문 <ein notwendiges [Aufnehmen]>

[10]원문 <an ihrer Erscheinung nur herausfallen>

[11]원문 <aber>. 제한의 <그러나>

[12]원문 <das Wahrnehmen>

[13]원문 <Gegenstand>. 기울림체의 의미를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14]<Reflektion des Gegenstandes in sich>?

[15]원문 <für uns oder an sich>

[16]원문 <das Wesen>

[17]맑스의 자본론이 연상된다. 가치(Wert) 차원에서 보면 이쪽 저쪽이 교환하는 동기가 되는 사용가치와 함께 이쪽 저쪽이 비본질적인 것이다.

[18]또다시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교환을 참조하면 좋겠다.

[19]원문 <Wesen>

[20]원문 <des Unwesentlichen>

[21]원문 <Wesen>

[22]원문 <W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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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제목 <사물과 불량거래>에서 <불량거래>의 원문은 <Täuschung/사기, 기만>이다. 어원이 <tauschen/교환하다>와 같다. 그래서 <tauschen/교환하다>에는 <거짓말로 속여서 받아들이게 만들다>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그래서 <불량거래>라고 번역해 보았다. 이 번역이 <지각>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맞아 떨어지는지 두고 봐야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후기(Nachlese)-이삭줍기

요즘엔 곡식을 거두어들인 논밭에서 이삭 줍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낫으로 나락을 베고 보리를 베던 때에는 이삭 줍는 일이 아낙네들과 아이들의 몫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좀 재미있었던 것은 고구마를 캐고 난 밭을 다시 한번 샅샅이 파 헤쳐보는 일이었다. 흙에 촉촉한 고구마 큰놈이 하나 나올 때의 기쁨, 그 기쁨을 캐보지 않은 사람이야 알리 없겠지만.

 

감각적 확신을 번역하면서 많이 흘리고 온 것 같고 감춰진 것을 다 캐내지 못하고 온 것 같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야훼의 명령이 생각난다. 나의 무능을 야훼의 명령으로 캄푸라치하고 그냥 가고 싶은데 흘리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밭으로 가게 만든다. 결국 “거두어 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라고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고 이삭을 줍고 있다.

 

야훼의 명령은 벌받지 않고 거역할 수 없나 보다. 알맹이 곡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흘리고 온 어설픈 것들만 보인다. 내비두고 그냥 가자. 내가 흘린 것이 알맹이라면 누군가가 거두어들이겠지. 허섭스레기라면 지나가는 바람이 치워버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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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1

(§21) {말하거나 보여주는 순간 사념하는 것과 대립되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은 감각적 확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면서}[1] 이와 같이 [감각적인<이것>이 의식이 마주하는 진리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주장을 네세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앞 문단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자기가 사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스스로 그것과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감각적 확신의 속성에 대하여 숙고해보도록 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의식 저편에[2]있다는 대상들의 [내 감성에 와 닿는 거기 그자리/그때에 있다는] 현존을[3]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하는] 대상들을 더 정확히 규정하여 실재적이고, 절재적으로 개별적이며, 온통 개성적이고 개체적인 사물들이라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는 것도 다른 것과 전적으로[4]동일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현존이 절대적인 확신과 진리의 대상이란다. [절대적인 확신과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기대고[5]있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니 이미 다 써버린 이 한 조각의 종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념하는/기대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말은 [사실] 안 그런다.[6] 그들이 사념하는/기대고 있는 이 한 조각의 종이를 정말 말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들의 언사행위의 참뜻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고/사념한다고 하는 감각적인 <이것>은 애당초 보편성이란 터전에 둥지를 튼[7]의식의 친족인[8]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이것>의 진리를 확신하는] 의식이 감각적인 <이것>을 정말로 말하려고 시도한다면, 의식은 그러는 동안 썩어 문드러져버릴 것이다.[9] 그래서 감각적인 <이것>의 기술을 시작한 사람은 [그 동안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에]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고, 넘겨 받은 사람들도 모두다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에[10]결국 존재하는 것으로 붙잡을 수 없는 사물에 관하여[11]지금까지 말해 왔다고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12] 그들이 바로 <여기> 이 한 조각의 종이를 사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여기>에 와서 보면 위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있다. 그래도 그들은 고집하여 “실재하는 사물, 의식 저편의 있는 혹은 감각에 와 닿는 대상, 절대적인 개별존재[13]” 등을 [계속] 운운한다. 그러나 그들이 감각적인 사물에 대하여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14]일컬어지는 것은 [사실] 별다른 것이 아니라 비진리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사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뭔가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진짜 있는[15]사물, {의식 저편} 외부에 엄연히 있는 대상이라는 것 외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때 그 사물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이야기되고 그럼으로써 다른 것과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그 사물이 모든 것과 동일함을 표현할 뿐이다. 내가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을 말한다고 하자. 이와 동시에 내가 [사실] 말하는 것은 [사념된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이기 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이 일개의 개별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라는 말은 아무것에나 상관없이 다 적용된다. [적용 범위를 좁히려는 의도로] 좀더 정확하게 <이 종이 조각>이라고 해도 모든 종이가 예외 없이 하나의<이 종이 조각>이 되는 바, 내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언사행위란 사념을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뒤집어 놓고 뭔가 다른 것으로 만들고 이렇게 사념의 말문을 틀어막는 신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라는 자아는 말문상실의 보안책으로 사념하는 종이조각을 들어 보여줄 것이지만 이때 자아는 실로 감각적 확신의 진리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봐라 하면서] <이> 종이조각을 <여기>로 들어 보여 줄 때 이 <여기>는 다른 <여기>의 <여기>이기도 하는, 달리 표현하면 <이 여기>라고 보여주는 행위 자체에 다수의 <여기>가 {서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굽힘/접힘/주름이 없이} 단순하게 그저 한군데 모아져 있음이 드러나는[16]보편적인 것임을 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언사행위에 이어 지시행위의] 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아는 이제 [나와 떼어 놀 수 없는/내가 찰싹 붙어있는] 직접적인 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눈을 뜨고] 지각하게 된다.



[1]원문의 <auch/역시>를 풀어서 번역하였다. 여기서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는 사람은 일상의식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2]원문 <äußerer>. <외부>로 번역하지 않았다. <의식 저편>이라 해야 정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다.

[3]원문 <Dasein>

[4]원문 <absolut>

[5]원문 <meinen>

[6]원문 <Aber was sie meinen, sagen sie nicht.> 좀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헤겔이 어쩌면 의도적으로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을 선택했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nicht>는 물론 <sagen/말하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는 행위의 대상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말은 하면서도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지만, <nicht>를 말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이다. 헤겔과 감각적 확신을 옹호하는 사람간 대화가 끊길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다.

[7]원문 <dem an sich allgemeinen>. 의식의 <an sich>가 정말 보편성인가? 프로이드가 말하는 <언사행위상의 실수/Fehlleistung>를 보면 의식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에서 떨어 나오지 못하고 달라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외부 대상이라는 의식의 저편과 무의식이라는 의식의 저편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의 옹호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외부대상과 무의식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언사행위의 결과는 바닥이 드러나고 또 그 바닥이 보이는 투명성(Luziditaet)을 견지해야 하는데 사실 안 그런다. 언사행위의 결과를 보면 외부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무의식이 교차한 흔적을 안고 있기 때문에 투명하다기보다는 대려 꾸정꾸정하다. 아니면 언어도 변증법적 운동을 하여 <an sich>, <fuer sich>, 그리고 <an und fuer sich>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된다는 말인가? 아무튼 프로이드의 등장은 괜한 것이 아닌 것 같다.

[8]원문 <angehören>. 동사를 <Angehörige>로 명사화하여 번역하였다.

[9]원문 <Unter dem wirklichen Versuche, es zu sagen, würde es vermodern.> 좀 애매모호한 문장이다. <es>가 두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es>는 분명 감각적인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두 번째 <es>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좀 불분명하다. 두 번째 <es>가 첫번째 <es>와 같은 것이라면 {역자의 언어감각으로는} 두 번째 <es> 대신 첫번째 <es>를 지시하는 <dieses>가 와야 하는데 안 그런다. 그래서 역자는 두 번째 <es>를 감각적 확신을 주장하는 <의식>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하였다. 문맥상으로도 맞는 것 같다.

[10]원문 <zuletzt/최후에>

[11]원문 <von einem Ding, das nicht ist>

[12]<vermodern/썩어 문드러지다>란 표현에서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의 생애 일부와 <Sigé>란 두 단편으로 엮어진 보토 슈트라우스의 <Fragmente der Undeutlichkeit/깨지고 깨져 불분명한 글들,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불분명의 단장들>이란 책이 생각난다. 특히 로빈슨 제퍼스의 <메데아> 마지막 부분에서 메데아가 야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해변에 가서 니가 타고 다니던 배에 기대여 썩어 문드러져 백골이 될 때까지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봐라.”라고 번역했던 것 같다. 이 책이 옆에 없어서 장담은 못하겠다. 민주주의를 멀리하고 민주주의적 일상생활을 피해 외지에서 부인과 단둘이서 삶을 개척한 제퍼스에 기대어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좀 반민주주의적이고 반학문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해한 전체”를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해서 다시 읽어보고 더 말할까 한다. 그리고 문학이 존재하는 터전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 목소리를 건져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 아닐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보면 개별자에 대한 학문이란 있을 수 없지만 개별자를 구원하는 문학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13]원문 <einzelne Wesen>

[14]원문 <das Unaussprechliche>.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Unum igitur verum nomen cuiusque imparticipabile atque, uti est, ineffabile esse necesse est. “그래서 모든 사물의 참다운 이름은 하나로서 나누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가 말할 수 없는/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필연이라는 말이다.”(De coniecturis, 2부 6장, www.hs-augsburg.de/~harsch/Chronologia/Lspost15/Cusa/cus_c206.html 참조). 이어 <Idioda de mente> 등 쿠자누스의 언어철학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부정변증법>을 이야기한 아도르노의 <{부르는} 이름>에 관한 묵상과 함께. 읽어 볼 것이 넘 많다.

[15]원문 <wirklich>

[16]원문 <an ihm selbst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 H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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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0-후부

의식인 이상 모든 의식은 이와 같은 진리, 예컨대<여기는 나무다> 또는<지금은 대낮이다>라는 따위의 주장을[세움과 동시에] 스스로 파기하고 그 주장과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다>. 나아가 의식은 처음 주장을 파기하는 다음 주장에 처음 주장에서와 같이 감각적으로 와 닫는<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 그 것을 지체 없이 파기해버린다. 그래서 의식이 감각적 확신 안에서[끝내] 정말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언사행위 혹은 지시행위로서의} <바로 이것>이[온통]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감각적인<이것>이 의식이 마주하는 진리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내세우는} 앞의 주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 {<이것>의 실체를 주장하는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앎/지로서의} 보편적 경험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는{정신현상학에서 나중에 이야기 되는 생명체, 즉 욕망으로서의 결정체를} 앞당겨{모든 생명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뭘 하는지라는} 실천적인 차원을 적용해 보는 것이 어쩌면 보다 알맞겠다.[1] 이와 같은 차원에서 감각에 와 닫는 대상의 실재가 진리이며 확신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학교의 가장 낮은 수준, 즉 고대 엘로이시스 고장에서 행해졌던 케레스신과 바쿠스신의 비밀 종교 의식을 배우는 반으로 되돌아가 우선 빵 먹는 비밀과 포도주 마시는 비밀부터 터득하라고 꼭 일러주고 싶다. 왜냐하면, 이런 초보적인 비밀을 전수 받고 나면 감각에 와 닫은 사물의 존재가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헷갈리게[2]될 뿐만 아니라, 헷갈림이 심해져서 갈기갈기 찢긴 만신창이가 되고 도무지 자신과 대상을 간추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3], 한편으로 스스로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의 공허성을[4]{먹어치움으로써} 집행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적으로 와 닫는 존재들이{스스로} 그 공허성을 집행하는 것을 본다. 동물도 역시 이와 같은 지혜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가장 깊숙이 빠져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동물은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을 불변의 존재로[5]생각해서 그 앞에 멈춰서는 법이 없고, 오히려{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이 공허성을 알아차리고??} 이런{공허한??} 실재에 찢기고 또 찢기어[6]그 사물의 공허성을 완전히 확신하는 가운데 그것을 거침없이 낚아채 집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엘로이시스 비의는 사실 감춰진 비의가 아니다.} [이 비의는 동물과 함께 자연 전체에 드러나는/계시된 것으로서] 자연은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의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비의의 축제를 공공연히 벌이고 있는 것이다.



[1]원문 <Bei dieser Berufung auf die allgemeine Erfahrung kann es erlaubt sein, die Rücksicht auf das Praktische zu antizipieren.>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알쏭달쏭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antizipieren>하면 나중에 이야기되는 것을 미리 언급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일어나는 일을 미리 내다본다는 의미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뭘 내다본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das Praktische>를 앞당겨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럼 이 <실천적인 것>이란 건 도대체 뭔가? 역자는 우선 이 <실천적인 것>을 의식이 등장하는 첫 모습, 즉 <앎/지>와 대조되는 것으로 보고 이어서 <실천적인 것>을 의식이 등장하는 다른 모습, 즉 욕망의 결정체인 생명체(Leben)와 연관시켜 이해한다. 여기서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확신은 절대로 앎(Wissen)의 차원에서, 즉 이론적인(theoria/관조하는) 차원에서 <이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욕망을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이것>이 공허한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또 무슨 말인지 두루뭉실하지만 이런 말에는 익숙한지라 뭔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문제에 달리 접근할 수도 있겠다.  역자는 서설 §26에서 헤겔이 1796년 8월 횔더린에게 헌사한 시 <엘로이시스>을 언급하였다. 그러니까 <정신현상학>을 완성하기 10년 전에 쓴 시다. 이 시에서 헤겔은 엘로이시스 비의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실체와 하나되어 직관이 되는 것을 숭배하면서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서 헤겔이 취하는 입장은 <엘로이시스>시에서 그가 취했던 입장과 정반대인 것 같다. <엘로이시스>에서는 „아무런 맹세도 없었지만 우리 가슴 속에 뿌리내린 이 언약은 오직 자유로운 진리만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 생각과 감각에 족쇄를 채우는(regeln) 겉치레와는 (Satzung) 절대,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이었지 않았던가.“(Des Bundes, den kein Eid besiegelte,/der freien Wahrheit nur zu leben,/ Frieden mit der Satzung/ Die Meinung und Empfindung regelt, nie nie einzugehn.)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Satzung)를 Meinung과 Empfindung에 족쇄를 채우는 감옥으로 생각했지만 <감각적 확신>에 와서는 언어야 말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Meinung은 막스 폰 쉔켄도르프의 시 „Freiheit, die ich meine“(“내게 진정 사무친 자유“)에서 <meinen>이 사용된 것과 같이 번역해야 올바를 것 같다.} 이 문제는 아무튼 두고 더 살펴봐야 할 문제인 것 같고, 나중에 생명체와 더불어 욕망을 이야기할 때 되돌아와서 다시 한번 살펴볼까 한다.

[2]원문 <Zweifel/의심>

[3]원문 <Verzweiflung>. <헷갈림이 심해져서 … 상태>로 좀 장황하게 번역해보았다. <절망>하면 라틴어 <desperatio>에서 유래된 말들 (despair 등)과 똑 같은 구조다. <desperatio>는 어쨌든 간에 <희망/spes>과 관계하고 있고, 이것은 <절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어의 <Verzweiflung>은 희망이 아니라 <Zweifel/둘로 갈라짐, 의심>과 관계하는 것으로서 <갈라짐>이 심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M. Theunissen의 철학개념사 사전의 Artikel <Verzweiflung>참조. 서론 §8과도 비교해 보아야 할 것 같다.

[4]원문 <Nichtigkeit>

[5]원문 <an sich seiend>

[6]원문 <verzweifelnd an ihm [am Sein der sinnlichen Dinge]>. 번역은 했지만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뭐에 <verzweifeln>한단 말인가? 사물의 실재에? 아니면 실재라고 생각하고 애타게 쥐어 붙드는 것이 매번 공허한 것이 되어서? 동물이 이런 절망을 보인다?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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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재앙의 근원

Wurzel alles Übels

 

Einig zu sein, ist göttlich und gut; woher ist die Sucht denn

unter den Menschen, dass nur einer und eines nur sei?

 

 

모든 재앙의 근원

 

서로 마음을 합하는 것은 성스럽고 좋은데, 근데 오직 한 놈만 그리고 오직 한 가지만 있다는 인간들 사이에 횡행하는 지랄병은 어디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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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0-상부

(§20) [그런데 아직 뭔가 안개에 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감각적 확신에 적용되는 변증법이[1]단지 감각적 확신의 거동 혹은 행적을[2]{우리가 보고 나열한} 단순한 사건의 전개일[3]뿐이고, 그리고 {감각적 확신이 사건의 전개를 스스로 반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각적 확신은 {자신의 거동과 행적에 온통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전개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안개가 좀 걷히고 훤해질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의식도 역시 {이리저리 헤매는 가운데} 항상 이 같은 결론으로 떨어진다. 즉 감각적 확신의 거동과 행적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필연적인} 진짜배기는[4] 바로 감각적 확신이 사건 전개 이상의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자연적 의식은 이렇게 [갖은 과정 끝에] 감각적 확신의 진짜배기가 뭔지 겪게 되지만 {그 필연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얻을 때마다 {그 결과를 축적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오직 망각할 뿐이고 그래서 다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 운동을 새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기 망각적인 경험을 반복하는 감각적 확신을 놓고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려 그것을 근거로 하여 감각적 확신이 매번 귀착하는} 결과와 달리[5]찍어 지시하는 개별적인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감각에 와 닫는 사물로서의 외적 사물의 실재나 존재가 의식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주장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또는 철학적인 주장으로, 아니면 심지어 회의주의를 거친 결론으로까지 내세워지는 것을 보면 말문이 콱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따르면 보편적인 경험이란 감각적으로 와 닫는 개별적인 <이것>이 <이것>의 저편에 있는 의식이 마주하는 진리라고[6]경험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다.



[1]원문 <die Dialektik der sinnlichen Gewissheit>. 여기서 소유격이 주격 소유격인지 아니면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정확하게 구별해야 할 것 같다. 역자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즉 여기서의 변증법이 감각적 확신이 스스로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라  강요된 변증법적 운동이라고 이해하고 번역했다. 이유는 우선 헤겔이/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강요하여 말하게 만들고 그리고 보여주라고 부추기기 때문이고, 다음 감각적 확신이 자발적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망각할 확률이 낮은데 자꾸 망각하기 때문이다.

[2]원문 <Bewegung oder Erfahrung>. 여기서 <Erfarung>을 <Bewegung>과 동선에 놓는 것을 보아 <경험>보다는 <erfahren>이란 동사의 원래 의미의 하나인 <durchziehen/어디를 통과하여 지나가다>란 의미로 쓰여진 것 같다. <Erfahrung>이 <행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면 <Bewegung>에도 주체의식이 깃든 <운동>보다는 <거동>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3]원문 <Geschichte>. 여기서 <Geschichte>는 헤르더에 의해서 그 의미의 폭과 깊이를 갖게 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geschehen>에서 유래된 이 <Geschichte>는 <역사>외에 <일어난 일>, 그리고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란 의미가 있다.

[4]원문 <was an ihr [der sinnlichen Gewissheit] das Wahre ist>. <an ihr>에는 <필연적>이라는 Moment도 있는 것 같다.

[5]원문 <gegen diese Erfahrung>

[6]원문 <die Wahrheit des sinnlichen Diesen für das Bewusstsein>. <für>를 <이것의 저편>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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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9

(§19)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고정시켜 [도려낸] <여기>도 위와 마찬가지다. 내가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한1<여기>라고 하지만 사실<여기>는 내가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할 수 없는 것으로서2 내가 지시하는 <여기>는 앞뒤, 위아래, 좌우 등 수많은 <여기>를 [동반하는] <여기>다. <위>를 따로 떼어놓고 봐도 마찬가지로 <여기>가 다시 위아래 등등 수많은 다른 존재가 된다. 찍어 보여주려고 하는<여기>는 매번 다른<여기>들 속으로 사라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3 다른<여기>들 역시 다 사라진다. {그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지시되어 고정되고 존속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이것>이다.4 <이것>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이것>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누가/헤겔 혹은 우리가 부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여기>라고 지시하고  그<여기>를 자기가 지시하는 데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 뿐인데 우리가 감각적 확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여기>가 스스로 자신을 파기하기5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하면서 보여주는<여기>는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수많은 <여기>들만이 모인 {집합체로서 그 안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단순한 총체다.6 [감각적 확신이] 쏠려있고/마음을 두고/헤어나지 못하고/사랑하는7 <여기>는 점과8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그러나 감각적 확신이 meinen하는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여기>가 이런 점으로 존재한다고 보여주는 행위는 이렇게 행위하는 가운데 스스로 직접적인 지가 아니라 사념된 <여기>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여기>를 거쳐서 보편적인 <여기>로 귀착하는 운동임을 스스로 드러낸다.9 이런 {운동결과로서의 보편적인} <여기>는 하루가 <지금>의 단순한 다수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의 단순한 다수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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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dieses>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nicht dieses>.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할 수 없는 것>으로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aber>. <abermals>란 의미로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ein negatives Dieses>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sich aufheben>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eine einfache Komplexion vieler Hier>. 여기서 <Komplexion>을 키케로가 “투스쿨란에서의 대화” 5권 10.20 “cumulata bonorum complexio”에서 <complexio>를 “Inbegriff”란 의미로 사용한 것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나쁜 것은 다 빼고] 좋은 것만 모아 논 것”이란 의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meinen>. 헤겔을 따라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란 의미로 번역하지 않았다. 감각적 확신의 입장을 최대한 강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롤랑 바르트의 <punctum>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punctum>에 관한 이야기는 데리다의 <롤랑 바르트의 죽음들>과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를 제대로 읽어보고 나서 자세히 하고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가 그의 가슴을 꽉 찌르는 사진, 즉 엄마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는데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대충]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사진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은 오직 저에게만 존재합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진입니다. 절대 우연적인 대상이 발현하는 수천가지 모습 중 그 하나일 뿐입니다. 잘해봤자 스투디움(studium)이란 맥락에서 당신의 관심을 끌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진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www.lustauflesen.de/2010/barthes.shtml에서 인용.번역) 이렇게 보자면 점(puctum)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이고, 보여줘 바야 보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점일 뿐이다. 여기서 점의 존재가 문제인가?텍스트로 돌아가기
  9. 헤겔은 롤랑 바르트의 <studium>만 이야기하고 있는가?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8-후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지금>과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 [단순하기는 한데], 이 어는 것도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 아무런 접힘/굽힘/기울임/주름이 없이/들지 않게 존재하거나 또는 들어 보여줄 수 있는] 자기 안에 아무런 매개를 갖지 않는 그런 단순한 것이[1] 아니라 둘 다 [다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서] 각 단계마다[2] 굽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3] 자기도 모르게 갖고 [그것을 줄줄이] 밖으로 드러내는 {다단계적인} 일개/일련의 [총체적인] 운동이[4] 되는 성질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바로 이것>이라고 내놓는다[5]. 근데 내놓고 보니 뭔가 <다른 것>을 내놓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바로 이것>이 파기된[6]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젠] <바로 이 다른 존재>[7], 달리 표현하면 처음의 존재가 파기된 것으로 존재하는데,  이것 역시 다시 파기되어 처음의 존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 존재는 [시간적인 맨 처음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헤겔이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리적인? 처음을[8]] 자기 안으로 반성한 제일 존재로서[9] 이 존재는 [시간적인] 맨 처음의[10] 존재와 온통 동일한 것이 아니다. 즉 맨 처음의 존재[양식]이었던 일개의 [굽힘이 없는] 직접적인 것이[11]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12] 자기 안으로 굽혀 들어간 것이다.[13]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으로 존재해도 [거기에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유지하여 흩어짐이 없는] 단순한[14] 것이다.  <지금>은 개별적인  [쪼갤 수 없는] 하나로서[15], 이것을 [나누고 또 나눠봐도 모두가 다 <지금>이 되는]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16] 다수의 <지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이 정말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지금>을 쪼갬이 없는[17] 하루라고 하면, 이 하루는 [아무런 쪼갬이 없이] 온통 <지금>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지금>, 즉 시간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시간이라는 <지금>은 수많은 분을 <지금>으로, 일분이라는 <지금>은 수많은 초를 <지금>으로 포함하고 있고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지금>이 참으로 무엇인지 전부 다 말하는[18] 운동이다. 즉 <지금>이란 결과, 즉 수많은 <지금>을 하나로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을 보여주는 것은 <지금>이 [모든 <찰라>가 빠짐없이 갖는]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1]원문 <ein unmittelbares Einfaches>

[2]원문 <verschieden/다양한>

[3]원문 <Moment/계기>

[4]원문 <eine Bewegung, welche verschiedene Momente an ihr hat.> 여기서 <an ihr>는 <자기도 모르게 갖고 밖으로 드러내는>으로 번역하였다.

[5]원문 <setzen>

[6]원문 <aufheben>

[7]원문 <dieses Anderssein>

[8]원문 <erst>. 여기서 <erst>는 영어 <first>, 독어 <Fürst/영주>, 라틴어 <princeps/시간적으로 그리고 열의 제일인자>, 희랍어 <arche/처음, 시작, 원리, 지배>라는 말들과 가족관계를 이루는 것 같다.

[9]원문 <dieses in sich reflektierte erste>

[10]원문 <zuerst>

[11]원문 <ein Unmittelbares>

[12]원문 <eben>

[13]원문 <ein in sich Reflektiertes>

[14]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의 “eine edle Einfalt, und eine stille Größe“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페터 스존디(Peter Szondi)를 따르자면 [참고: 페터 스쫀디, 시학과 역사철학 I] 독일의 이상주의/관념주의는 빈켈만의 논문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그리스가 남긴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관한 고찰”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로 시작하는데, 이 논문의 핵심표어가 라오콘 동상의 음미의 결과로 산출된 “edle Einfalt”와 “stille Größe”를 접목시킨 것이다. 빈켈만은 이 두 가지를 바다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폭풍이 일면 바다가 표면적으로는 사납게 요동하지만 깊숙이는 항상 조용한 것처럼 그리스 조각품의 석상들도 [표면적으로는] 모든 격정을 보이지만 [안으로는] 자기 중심을 갖는 묵직한 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Das allgemeine vorzügliche Kennzeichen der griechischen Meisterstücke ist endlich eine edle Einfalt, und eine stille Größe, sowohl in der Stellung als im Ausdrucke. So wie die Tiefe des Meers allezeit ruhig bleibt, die Oberfläche mag noch so wüten, ebenso zeiget der Ausdruck in den Figuren der Griechen bei allen Leidenschaften eine große und gesetzte Seele.“ 이 “edle Einfalt“와 „stille Größe“를 역동화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아닌지 모르겠다.

[15]원문 <ein Jetzt>

[16]원문 <absolut>. <서로 떨어져 상관하지 않는>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17]원문 <einfach>

[18]원문 <ausspre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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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8-첫 부분

(§18)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지금>을 위와 같이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주는 행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단지 하나의 운동일 뿐이고 이 운동은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갖는다. 1) 나는 <지금>을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준다. 여기엔 이렇게 찍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금>이 [참으로] 담고있는[1]것이라는 주장이 스며있다[2]. 그러나 사실 나는 <지금>을 한때 그랬던 것 혹은 {버리지 못하고 소중히} 간직해 둔 하나의 그 무엇으로[3]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지금>이 [지금/현재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담고있는 것이라는 첫번째 [찍어 보여주는] 행위에 스며있는 주장을[4]파기한다[5]. 2) 이제 나는 <지금>이 한때 그랬던 것 또는 버리지 않고 간직해 둔 것을 담고있다고 주장한다.[6]3) 그러나 한때 그랬던 것은 [지나가고 사라져서 더 이상]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때 그랬던 것 혹은 버리지 않고 간직해 둔 것이 <있다>는 두 번째 주장을[7]파기한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주는 <지금>이 [한때 그랬던 것으로] 부정된 것을 다시 부정하여 결국 <지금>은 [한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있다는 첫번째 주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8]



[1]원문 <das Wahre>

[2]현재완료 수동태를 <스며있다>로 담아냈다.

[3]원문 <als Gewesenes oder als ein Aufgehobenes>. <aufheben/지양하다>란 동사가 갖는 의미를 이하 전개하고 있다.

[4]원문 <Wahrheit/진리>

[5]원문 <aufheben>

[6]원문의 <als die zweite Wahrheit/두 번째 진리로>는 번역하지 않았다. 주장에는 항상 <내가 주장하는 것은 진리다>라는 moment가 있기 때문이다.

[7]원문 <Wahrheit>

[8]이 운동이 정말 필연적인지 모르겠다. 서론 §13 이하 역자주에서 언급하였듯이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의식이 어떻게 이런 운동을 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빈스방어(Binswanger) 등이 이야기한 [미래적인 시간을 상실하고 과거에만 머물러있는] “내인성 우울증”(endogene Depression)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운동이 필연적임이 아님을 보여주지 않나 한다.  그리고 이런 우울증이 부정적으로 미래의 다른 모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우울증이 진보하는 시간/역사가 아니라 지나간 것을 구원하는 시간/미래/역사를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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