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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치면서

<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쳤다. 일을 보고 나면 개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현상학> 번역을 시작한 이유는 번역을 하면 좀 꼼꼼히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정신현상학>의 <사유발자취/Gedankengang>를 <내 힘을 보태 따라가/mitvollziehen> 보겠다는 의지였다.

 

근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많은 부분 <mitvollziehen>을 하지 않고 헤겔 흉내를 내버린 것 같다. 특히 이해가 안된 부분들은 그렇게 넘어간 것 같다. 물론 <mitvollziehen>이 잘 안되어서 헤겔 흉내를 내려고 했겠지만. 그리고 억대 수표를 보고 기가 죽어 동전을 요구하지 못하고 경건한 자세로 취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헤겔 흉내를 내는 나의 행위를 살펴보니 그 근간에는 번역에 대한 오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번역을 저자가 만들어 놓은 항아리를 다른 재료로 다시 똑같이 만들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번역이란 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직 긍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저자가 무슨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조차 틀린 것 같다. 기호, 낱말, 언어에 대한 숙고가 부족해서 이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사유가 언어라는 매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언어도 변증법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럼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변증법적 번역? 이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노발리스가 말한 <뮈토스적인 번역/mythische Übersetzung>과 같은 것일까?

 

 “번역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grammatisch/문법적) 방식, 변형을 주는(verändernd) 방식, 그리고 뮈토스적인(mythisch) 방식이다. 뮈토스적인 번역이 최상스타일의 번역이다. 이런 번역은 개별 예술작품의 순수하고 완성된 성격을 서술한다. 현존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우리 곁에 갖다 논다는 말이다.” (노발리스, 꽃가루 6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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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8, 69, 70, 71, 72 -끝

§68) 철학 고유의 터전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위와 유사한 작태를 볼 수 있다. 정신이란 원래 장구한 도정을 거치면서 풍부하고 심오하게 운동하는 가운데[1]지에 도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내세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반상식을 내세울 뿐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철학하기는 고사하고 철학 외의 지를 놓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을 연마하지도 않은 자가 자기자신을 그대로 정신의 장구한 도정과 운동의 완벽한 등가물로, 아니면 아주 우수한 대체물로 간주하는 작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도사리를 인삼의 대용품으로 치켜세워는 것과 같다. 여러 명제간의 연관성은 고사하고 추상적인 명제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형식도 품위도 갖추지 못한 저속한 자가 자신의 이런 사유야말로 사상의 자유로움과 관용이라고 떠버리는가 하면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천재성이라고 장담하는 장관은 눈뜨고 보기에 참 딱한 사정이다. 요즘 들어 이런 천재성이 철학계를 휩쓸고 다니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한때 시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천재성이[간혹] 정신을 차려 산출한 것은 시라기보다는 삼척동자 수준의 시시한[2]산문 수준이었고, 그 수준을 넘어서는 횡설수설일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자연스럽게 철학하기라는 풍조가 이와 같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런 풍조에 젖어있는 자는 자기가 개념을 넘어선 수준에 와 있고 그런 자질로 개념따위만을 다루기는 아깝다고 자만하면서 이런 개념 결핍증이야말로 바로 직관적이고 시적인 사유가 되는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가 사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상상력은 사상의 힘에 의해 오직 해체될 뿐이므로, 자연스럽게 철학하기 풍조란 이런 해체된 상상력이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합성물을, 생선도 아니고 육류도 아닌, 시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이상 야릇한 조작물을 가지고 장터에 나와 떠벌리는 격이다.

§69) 그런가 하면 이와 대조적으로 또 다른 자연스럽게 철학하기 풍조에 젖어있는 자도 있는데, 이 자는 일반상식이라는 안락침대에 누워 두둥실 떠가듯 여유만만하게 삼척동자도 알만한 시시한 진리를[3]이리저리 꾸며 최상의 것으로 내놓는다. 이때 그러한 진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고 추궁하면 그는 참다운 의미와 그 완성된 모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대꾸하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타인의 마음속에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런 장담은 어쨌든 심정의 순결함, 양심의 순수함 등에 호소함으로써 할말을 다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인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 항변할 수도 없고 더 이상을 것을 요구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철학에서 문제로 삼고 돌진했던 것은 최상의 것을 내면에 방치해 두지 않고 지하 갱에서 파내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위와 같은 유의 최후의 진리를 내놓는 일은 오래 전에 이미 행해진 일로서 이젠 그만두어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따위의 진리는 이미 교리문답서나 민속속담 같은 데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진리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그의  모호성이나 편견성을 꼬집어 반박하고, 그런 진리를 말하는 의식이 뒷면에는[4]흔히 그와 정반대 되는 진리가 있다고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의식은 이같이 자기 안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들춰 보여주면[5]여기서 자기를 건져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또 다른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더 이상 여유만만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6]뭔가를 밖으로 불쑥 내뱉는데, 이것은 모두가 그렇듯이[7]이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저것은 궤변이다라고 발작하는 것이다. — 궤변이라는 말은 일반상식이 자신을 연마한 이성에게 상투적으로 내던지는 말로서 철학에 무지한 자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철학을 일컬을 때 어김없이 사용하는 표현, 즉 몽상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 일반상식은 감정이 자기 내면에 잠식해 있는 신탁이나 되듯 거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과는 나눌 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상식은 자기 내면에서 똑 같은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단다. —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일반상식이 인간성을 뿌리째 짓밟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인간성의 속성은 타인과의 합의를 이루어내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인간성이 존재하는 양식은 오로지 의식들이 서로간의 공통성을 달성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反인간적인것, 짐승적인 것이 존속하는 터전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둥우리를 틀고 오로지 감정에 의해서만 타자와 교제할 줄만 아는 것이다.

 §70) 학문에 이르는 왕도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일반상식에 의존하고 철학저서에 관한 논평을 읽는 것보다 더 편안한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논평을 읽으면 시대와 철학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고, 혹자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8], 해당 서적의 서설이나 첫 몇 단락 정도는 함께 읽으라고 권장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첫 몇 단락은 전체의 바탕이 되는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서설은 주제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은 물론이고 나아가 평가까지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평가라는 것은 평가함으로써 그 대상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집안에서나 입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이런 통상적인 길을 걸으면서 영원, 신성, 무한 등을 운운하는 들뜬 감정은 대제상의 의복을 걸친 마냥 가슴을 내밀고 자신을 곧추세우고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무런 여정이 없는[9]것으로서 곧바로 존재의 중심에 서는 것이며, 심오하고 독창적인 이념과 번뜩이는 사상으로 가득한 천재성이 아닌들 갈 수 없는 길이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깊이 들어간들 본질의 원천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천재성의 로켓이라고 해서 천상 세계에 이미 와 있는 것도 아니다. 참다운 사상과 학문적인 통찰은 오직 개념이 노동하는[10]가운데서만 획득될 수 있다. 오직 개념만이 지의 보편성이 싹트고 자라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생성된 지의 보편성은 일반상식의 천박한[11]모호성과 빈약성이 아니라 교양으로 다듬어져 뚜렷한 윤곽을 갖고 내용이 충만하게 완성된 인식이다. 이 보편성은 또한, 천재성을 자처하면서 그 나태와 아집으로 자신의 맹아를 짓밟아 버리기만 하는 이성이 불쑥 내놓는 비범한[12]보편성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형식으로 힘껏 뻗어나가 무성하게 자라난 진리이다. 지의 보편성이 이런 진리가 되어야 마침내 자기의식을 갖는 모든 이성의 재산이[13]될 수 있다.

§71) 학문이 실존하는 터전은 개념의 자기 운동이다라고 정립하고 여기게 모든 것을 내걸고 이런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 선 체로[14]진리의 속성과 형태에 대한, 여기서 거론되고 다른 곳에서 드러난, 현대인의 견해를 살펴보면 이 입장과는 맥을 달리하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정반대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학문의 체계를 개념의 자기운동으로 서술하려는 시도가 온건히 수용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 있어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하기 때문이다. 즉, [학문을 높인 받들던 시대라고 자처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철학의 탁월성이 학문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신화에 있다고 여겼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열광의 시대라고까지 불렸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 사변적인 깊이에 심취하여 높이 받들고, 그리고 고대 변증법이 만들어낸 진정 최대의 예술작품이라고 해야 할 플라톤의<파르메니데스>를 베일에 싸인 신적인 삶을 참으로 밝혀내고 그 모습이[온전히] 드러나게[15]표현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욱이 몰아지경을 잘못 이해하여 그 상태에서 산출된 것의 다수가 불투명하기는 했지만 그 몰아지경 자체는 순수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에 들어와 철학 중에서 가장 탁월한 철학이[16]자기가치를 학문성에 두고, 이에 관한 다른 이의 이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지로 오직 학문성만을 통용가치로 인정한다는 점이 또한 나를 자신 있게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하여 내가 또한 감히 희망하는 것은 학문에 다시 개념의 고삐를 채우고[17]학문을 이 같은 개념이라는 학문고유의 터전에서 서술하려는 나의 이 시도가 사태 내면의 진리에 의해서 독자들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이다. 참다운 것은 때가 오면 반드시 뚫고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 또한 믿는바, 진리는 그래서 때가 무르익어야만 비로소 발현하고, 그렇기 때문에 때 이르게 나타나거나 그 진리를 접하기에 아직 미숙한 독자를 만나는 법이 없고, 그리고 이런 무르익음은[18]개인에게도 역시 필요한 과정으로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홀로 안고 버둥대는 문제가 공론에[19]선보이게 되고 거기서 입증됨으로써 처음에는 따로 노는 것에[20]속한 확신에 불과했던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종종 공론/일반대중/독자와[21]이를 대표하거나 대변한다고 자처하고 행세하는 평론가를 구별해 낼 수가 있다. 일반대중은 여러 관점에서 후자와 다른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이와 대립되는 태도까지 보인다. 공론/일반대중은 어떤 철학저서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책에서 받아들일 것이 없다고 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22]자신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먼저 자기에게 돌리는데 반하여 자신의[해독]능력에 대한 확신에 젖어있는 후자는 모든 책임을 저자에게 전가해버린다. 철학저서의 영향력이 공론/일반대중에게는 조용하고 은근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후자는[썩어 문드러지는 것에 파리 떼가  날아들듯이] 죽은 것만 다루는 죽어있는 자로서 바로 이런 자들을 두고<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게/마태복음8.22> 내버려 두라고 했던 것이다.일반적인 통찰력이 전반적으로 보다 높은 교양을 갖추고 호기심은 점점 고조되어 판단 또한 더욱 민첩해진 지금에 와서는 후자의 반응은 더욱 빨라져<[남편을 묻고] 너를 메고 나갈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다/사도행전5.9>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발 빠르게 반응한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나는 평론가의 반응과 공론/일반대중에게서 천천히 이루어지고 영향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영향력에 의해서 평론가의 위압적인 장담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쏠리게 된 이목이[23]바로잡히고 쓸모없다고 내팽개치기만 하는 비난이 교정되는 것이다. 그래서[진정한 철학저서에게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하는 세계가[24]주어지는 반면 평론가들의 평론은 그 시대가 지나면[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름과 동시에 자신의 장례를 치르듯이] 맥이 끊어져 더 이상 후세가 없게 된다.

§72) [천재성으로 번득이는 평론가들에게]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정신의 보편성이 더없이 고무된 결과 이젠 어떤 개별적인 것을 다루나 피차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고, 또 개별적인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그 테두리와 그 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25]풍부함이 보편성에 육박하고[26]또 그런 풍부함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정신의 산출물 전체에서 개인의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은, 학문의 속성상 이미 그럴 수밖에 없지만, 더욱 더[주어진] 자신을 망각하고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가운데 새롭게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개인 자신이 자기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낮출 수 밖에 없는 만큼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1]원문<so breit wie tief/넓고 깊게>. 서설 §10에서 이야기된<Die Kraft des Geistes ist nur so groß als ihre Äußerung, seine Tiefe nur so tief, als er in seiner Auslegung sich auszubreiten und sich zu verlieren getraut./ 정신이 발휘하는 힘은 그 크기가 자신을 밖으로 내치는 힘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깊이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나 무한히 뻗어나가 자기중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가 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헤매는 상태에 도전하는 것 이상이 될 수가 없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2]원문<trivial>. 일곱 가지로 구성된 중세초기의 교육과정에서 초보적인3가지 학문(Trivium)을 가리킨다. 

[3]원문<trivial>

[4]원문<ihrem Bewusstsein an ihm selbst>

[5]원문<anrichten>. <Es ist angerichtet>하면<식탁을 차리다>란 의미가 있다. 의식이 지가 차린 식탁에 무슨 먹거리가 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6]원문<wohl>을 이렇게 풀어 번역했다.

[7]원문<ausgemachtermassen>

[8]원문<gar>

[9]원문<unmittelbar>

[10]원문<Arbeit des Begriffs>

[11]원문<gemein>

[12]원문<ungemein>

[13]원문<Eigentum aller selbstbewussten Vernunft>

[14]원문<setzen>을 이렇게 좀 장황하게 번역하였다.

[15]원문<positiv>

[16]칸트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17]원문<die Wissenschaft dem Begriffe vindizieren>

[18]원문<Effekt>. 어원<efficere/ausbauen, ausbilden/ 완성해 나가다.>란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19]Publikum

[20]원문<Besonderheit/특수성>

[21]원문<Publikum>

[22]원문<gutmuetigerweise>

[23]원문<Aufmerksamkeit>

[24]원문<Mitwelt>

[25]원문<gebildet>

[26]원문<auch jene an ihrem Umfang und gebildeteten Reichtum hält>. 이 문장의 주어는 보편성이 아니라<Einzelheit/개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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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7

§67) 이렇게 이리저리 따져보는 형식적인 사유 못지않게 철학에 열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태도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고 와서 그것들이 무슨 어렵게 발견한 [보배나 되는 양] 진리라고[1]내놓는 환상이다. 이런 환상에 젖어 진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문제가 해결된바] 이젠 더 이상 [계속해서] 진리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젠 아무런 논변도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환상적인 진리들을 발판으로 삼고 [2][또 그런 진리들의 대변인인이나 되는 양] 그런 진리들의 속내용을 다 떠버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런 진리들의 힘을 빌어먹는[진리왕국의] 법정관이 되어 최종판결을 내리거나[3][진리왕국의 시민권을] 박탈하는[4][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철학을 이런 귀족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다시 평민이 되게 하여] [석공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민이 직업을 연마해서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듯] 진지한 사업(事業)으로[5]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학문, 예술, 재주, 수공업 그 무엇을 보더라도 그 어느 한가지를 몸소 읽혀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노력에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모두가 확신한다. 그런데 철학에 대해서는 이상한 편견이 현재 팽배한데, 눈과 손이 있고 가죽과 공구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에 있어서는 아무나 아무런 준비 없이 곧장 철학하고 철학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이다. 누구나 타고난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그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모두가 발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구두장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더 안타까운 것은] 철학이란 것을 무슨 소유물로 간주하고 지식과 [탐구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횡성수설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진정한] 지식과 연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철학따위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철학은 흔히 형식적이고 내용이 텅 비어있는 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지식이나 학문이 내용상의 진리라고 내놓을 것이 진리란 그 이름을 적법하게 걸치기 위해서는 그것이 철학에 의해서 산출되어야만 한다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타 학문이 철학을 제쳐놓고 이리저리 따져보는 사유를 가지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철학 없이는 그 안에 어떠한 생명도 정신도 진리도[6]획득할 수가 없다는 통찰이다.



[1]원문<ausgemachte Wahrheiten>. 복수형<Wahrheiten/진리들>을<자질구레한 것들>로 번역하였다.

[2]원문<zugrunde legen>. <Hypokeimenon/Substrat/바탕>이 엿 들리는 표현이다.

[3]원문<richten>. 법정관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낱말이다.

[4]원문<absprechen>.

[5]원문<ernsthaftes Geschäft/진지한 일>. 역자는<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Sache>를 소크라테스의<pragma/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계속 추진했던 일>란 의미로 번역했다. 슐라이어마허는<pragma>를 <Geschäft>로 번역하고 역자는<Geschäft>를 <사업(事業)>으로 번역했다. 맑스 베버의<Beruf/직업/Calling/소명>이란 의미도 엿 들린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거론되지 않지만 헤겔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과 특히 <Ernst>와 함께 사용된 <Geschäft>란 낱말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ernsthaftes Geschäft>를 그냥 <진지한 사업>으로 번역하고 지나가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귀족, 평민 등을 운운하면서 좀 장황하게 번역했다. <Ernst>란 낱말은 이미 여러 번 등장했다. <정신현상학>이 인간이 교양을 - 역자는 교양이란 말을 들으면 [전문과목 외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교양과목이란 말이 연상되어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Bildung>의 번역으로 쓰고있다 – 쌓아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면 <Ernst>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Ernst>가 서설 §4에서 동식물과 같은 무의식적인 일상생활에서 빠져 나오는 교양과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핵심에 서있다. 거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태의 심층까지 들어가는 <Ernst des Begriffs/개념의 Ernst> 수준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태를 경험하게 하는 <Ernst des erfüllten Lebens/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혹은 생계를 이어가려고 발버둥 하는] 직업/사회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Ernst des Begriffs>란 테마는 서설 §58에서 <Anstrenung des Begriffs>로 변형되어 재개되어 이 문단에서<ernsthaftes Geschäft>로 이어지고 서론 §1에서 다시 <철학이 해야하는일>로 언급되는 것 같다. 이렇게 <Ernst>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유출된 개념인 것 같다. 서설 §19에는 삶이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Ernst, der Schmerz, die Geduld und Arbeit des Negativen>와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Ernst mit dem Anderssein und der Entfremdung, so wie mit dem Überwinden dieser Entfremdung>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로 학문에, 그리고 [실천이성으로서의] 변증법적 운동에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 삶을 아무런 유머 없이 <tierisch ernst>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삶이 칼데론 델 라 바르카(Calderón de la Barca)의 <El Gran Theatro del Mundo/세상이라는 거대한 극장>에서 연기하는 것이라면 삶에는 분명 <놀이>라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신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노는 것이기 때문에 잘 놀아야 한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글라디아토 같이… <Ernst>와 <Spiel>의 변증법은 뭔지 궁금하다.

[6]원문<Leben, Geist, Wahrheit>. 이 세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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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6

§66) 혹자는 변증법적 운동 역시 명제[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또는 명제라는 터전에서 전개된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들춰본 난점이 거듭 대두하고, 사태 자체에 스며있는 난점인 것처럼 보인다. — 이런 상황은 일상적인 증명에서 바탕으로 사용되는 것이 다시 다른 바탕에 세워져야 하고 이렇게 끝없이 소급해 올라가야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근거를 제공하고 찾아 나서는 형식은 변증법적 운동과 [유]를 달리하는 증명에 속하는 것으로서 외피적인 인식의 산출물일 뿐이다. 이와 달리 변증법적 운동은 유일한/순수한 개념을[1] 그 터전으로 삼기 때문에, 이때 내용은 [언명의 대상이 되는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가 태동하고/맴돌고[2]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선 내용이 [형식적 사유에서와 달리] 바탕[Hypokeimenon/Substrat]에 깔린 [무의미한] 그 무엇이란 것으로서의 주어로 행세하고, [단지] 거기에 따라붙는 술어를 통해서만 의미를 부여 받는 그런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사유가 [내용을 갖춘] 명제라고 내놓는 것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불쑥 꺼내놓는[3] 것과 같은 공허한 형식일 뿐이다. — [이런 반박이 무서워] 감각적으로 직관하거나 표상적으로 마주했다는/한다는 [그 자체란 의미로서의] 자기(自己)란[4]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명제형식을 직관한 내용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지 사변적인 명제형식으로 지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의 자기는 [지가 무슨 월등한 것이라는 되는 양 행세하지만] 순수한 주체, 즉 공허하고 개념이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라는] 일체를 표기하는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5]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직관으로 영특한 자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이라는 이름과 같은 낱말이 그대로 [무슨 거창한]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토대 구실을 하는 주어로서 견고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란 고유명사의 본래적인 의미 그 이상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란 이름대신 존재 혹은 일자, 개별성, 주체 등을 운운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낱말들을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로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낱말에는 달리 덧붙일 필요 없이[6] 그 자체에 개념이 스며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이 이름을 높이 불러 마주하는 주체에 관하여 사변적인 진리를 진술한다고 해도 그 진리의 내용은 [주체에] 내재하는 개념으로 전개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체는 단지 부동의 주체로서 허섭스레기와[7]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변상황아래 사변적인 진리란 쉽게 뭔가 장엄한 것[을 소리 높여 불러] 그 앞에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는 형식을[8] 갖게 된다. —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변적인 술어를 명제의 형식에 따라서만 파악하고, 개념이나 본질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상적인 사유의 폐습은 철학을 강연하는 방식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감소될 수도 있는바 거기에는 분명 철학의 잘못이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서술은 사변적 사유의 속성을 통찰한 결과에 충실하게 변증법적인 형식을 견지하면서 개념적으로 파악되어 개념이 되는 것 외 다른 것을 취급하지 않는데 있다.



[1]역자가 사용하는 마이너 판에는 <der eine Begriff/유일한 개념>이라고 되어 있다. 잘못된 인쇄인지 아니면 내용의 흐름상 더 적절해서 <rein> 대신 <ein>을 삽입했는지 모르겠다. 앞의 산만한 근거와 대비해 보면 <ein>이 더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2]원문 <Subjekt an ihm selbst>

[3]원문 <unmittelbar>

[4]원문 <das Selbst>

[5]원문 <Name als Name>

[6]원문<unmittelbar>

[7]원문<vorhanden>. 죽어있어서 찍어올릴 수 있는 허섭스레기

[8]원문<Form der Erbaulichkeit>. <신에게 예배 드리는 것이 곧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란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서론  §19 역자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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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2 -수정

§62) 지금 말한 것을 설명하는 예로 <하느님이 유일한 존재다>[1]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여기서 술어는 <유일한>[2] 존재가 되겠다. 여기서 <존재>는 실체적인 의미가 있고, 이런 실체적인 의미로서의 <존재>에는[3] 주체가 [이미] 녹아 들어가 있다. 그래서 <Gott ist das Sein>이란 명제에서는 <존재>가 주어에 따라붙는 술어가 아니라, [즉 그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그저 있다는 것을 지양한] 본질이[4]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제[문장]상의 위치로 보면 [주체로서] 견고부동의 주어가 되어야 하는 하느님이 더 이상 그런 주어가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는 듯하다. — 이때 [자연 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본래] [과감하게]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런 이행의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주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소심하게 되어] 어찌할 줄 모르고 망설이다가 결국 주체로서의 주어를 잊지 못해 [주체를 개념운동의 주체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식주관으로 파악하는 [형식주의] 사상으로[5]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유는 술어라는 것 그 자체가 주체의 속성을 남김없이 안고 있는 <유일한> 존재[6], 즉 [그저 있다는 것이 반성이란 부정을 통해서 지양된] <본질>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또한 술어에서 직관적으로[7]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사유는, [술어로 이행했지만 그 안에서 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해서??],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인식주관이라는 주체가 되어] 술어를 이리저리 따져보는 자유로운 입장에 들어가기보다는 아직 내용에 몰두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내용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구를 몸소 느끼는 상태에 있다. —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주어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그 술어 안으로 스며들어가 술어가 주체가 되게 한다. 이 명제에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는 단지 술어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편적이란 것이 부정의 반성으로 지양되어 특수한 것이 되는] 본질이[8]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특수한 본질이 바로 실재적이란 것이다.] — 이렇게 사유는 변함 없는 부동의 토대라고 여겼던 주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실은 술어로 이행한 뒤에 주체로 다시 복귀하는데 있어서 자기 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내용의 주체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주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9]



[1]원문 <Gott ist das Sein>. 헤겔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문장을 고른 것 같지 않다. 어떤 모양의 문장인지 한번 살펴보자. 주어인 <Gott>와 술어명사로 사용된 <das Sein>이 <sein> 동사의 변형인 <ist>로 연결되어 있다. <Gott>는 관사 없이 사용되고 <Sein>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 문장을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자. <Die Katze ist ein Haustier./고양이는 애완용 동물이다.>라는 문장에서는 주어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모든 고양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고양이>란 낱말의 외연, 즉 <고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다. 정관사가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는 정관사대신 부정관사를 사용해도 문장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 <Eine Katze ist ein Haustier.> 여기서<eine>는<하나>라는 의미이지만 <고양이>로 구분된 것을 대표하는 <하나>라는 의미다. 술어명사로 사용된<Haustier>에는 부정관사가 딸려있다. 술어명사에 부정관사가 딸리면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Einstein war ein sehr musikalischer Mensch./아인슈타인은 매우 음악적인 사람이었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단칭명사가 주어로 사용되면 그 단칭명사가 가리키는 개별자를 평가하는 의미가 있고, <Der Mensch ist ein lachfächiges Wesen./사람은 웃을 수 잇는 존재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일반명사가 주어로 사용되면 주어로 사용되는 일반명사가 적용되는 모든 개별자를 정의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근데 <Gott ist das Sein>이란 문장은 <Die Katze ist ein Haustier.>란 문장과 뭔가 틀리다. 우선 정관사와 부정관사 사용이 상이하다. <Gott>는 <Einstein>과 같이 부르고 청할 수 이름으로 사용되는 단칭명사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Gott>를 존칭을 표현하는 <님>이 따라붙는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럼 <das Sein>은, 특히 여기서 사용되는 정관사는 무슨 의미인가? <Das Sein>이 <Gott/하느님>을 정의하는 술어명사는 아닌 것 같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의할 때는 <부정관사>가 사용되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그럼 <Er ist der Verbrecher./그가[바로] 범인이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개별자 확인/Identification>용으로 사용되는 정관사인가? 아니면 술어명사 <Sein>이 <Gott>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Er ist Arzt./그는 의사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관사가 와서는 안 되는데... 주어로 사용된 <Gott>가 <Einsstein>과 같은 단칭명사가 아니고 다른 것일까? <감자는 남미에서 유럽으로 도입되었다.>라는 문장을 독어로 번역하면 <감자>에는 반드시 정관사가 따라 붙어야 한다. <Die Kartoffel wurde von Südamerika nach Europa eingeführt.> 정의에서와 달리 부정관사가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관사는 <감자>란 것의 외연이 아니라 그 속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라면 <der Gott>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독어문법에 기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Gott>가 <Einstein>과 같은 단칭명사이며 <Sein>도 주어를 정의하는 술어명사이기 보다는 어떤 특별한 개별자를 구별해내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가 결여된 문장이다. 예컨대 <Er ist der Verbrecher, den wir gesucht haben./그가 바로 우리가 찾았던 범인이다.>해야 완벽한 문장이 되듯이.

[2]원문<das>

[3]원문<Es hat substantielle Bedeutung.>에서 <es>가 앞 문장의 <Prädikat>를 수식하지 않고<Sein>을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4]원문<Wesen>. 여기서<Wesen/본질>은 정의에서와 같이 주어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 즉<essentiell>이란 의미가 아니라 <aufgehobenes Sein/지양된 존재>란 의미가 아닌가 한다.

[5]원문 <Gedanken des Subjekts>. 의미가 부동(浮動)하는 표현이다. 우선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주체에 관한 사상이란 의미와 함께 주체, 즉 인식주관이 갖는 사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동>한다고 하는데 <부동>하는 가운데 역자의 생각도 뭔지 붕 떠있는 것 같다. 이성이 자신을 도려내는 칼을 빌려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cogito [res] cogitans cogitum/나는 생각하는 실체로 생각대상을 생각한다>에서와 같이 사유는 <사유행위/cogito(나는 생각한다)>와 <인식주관/res cogitans>으로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는 사유행위(cogito)를 <Apperzeption/통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하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내용이 전혀 없는 표상으로서의 자아“(„die einfache und fuer sich selbst an Inhalt gänzlich leere Vorstellung: Ich“)다. 이 자아가 „의식 외 아무것도 아닌 것“(blosses Bewusstsein), 즉 의식활동이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것이고, „[수학 공식에서의x와 같이 텅 비어있는] „미지의 선험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x“)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B404 참조). 선험적 주관이 [의식의 내용물을] 하나로 엮어내는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는, 다른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통각의 절대적 통일“ („die absolute Einheit der Apperzeption“)이 된다. 이렇게 „사유“(Denken/cogito)와 „사유주체로서의 주관“(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은 „규정하는 자기“(„das bestimmende Selbst“=Denken)와 „규정되어지는 자기“(das bestimmbare Selbst=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단지 통각에 의한 사상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통일이 [개관적인 통일이 지각되어 사상의 주관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칸트는 이런 가상(Schein)이 [단지 동반하는 행위일 뿐인] 의식을 [res cogitans와 같이] 사물로(„das hypostasierte Bewusstsein“/실체화된 의식)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끌려가기에 알맞은 유혹과 „기만“(„Subreption“)이라고 한다.(칸트, 순수이성비판A 401, 402 참조).

[6]원문<das Sein>

[7]원문<unmittelbar>

[8]원문<Wesen>. 역자주4에서 이야기한<본질>이다.

[9]헤겔은<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칸트의 인식론을<자연 발생적인 생각/natürliche Vorstellu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통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이 대려 자연적인 표상이고 기만이라고까지 비판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런 칸트의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헤겔의 개념논리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서설 §57 역자주에서 헤겔이 개념논리학을 사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대인논증으로 쉽게 넘어간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대인논증이, 즉 형식적 사유가 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비판은 헤겔이 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과 같이 순수(이론=Theoria)이성과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으로 구별하지 않고 플라톤을 따르는데 기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제쳐놓고 헤겔철학과 칸트철학도 통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단지<정신현상학> 서설의<문체/Textkörper>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 문단에서와 같이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Das Allgemeine soll das Wesen des Wirklichen ausdrücken.)는 당위성을 표현하는 „Sollen“이라는 낱말에서 단지 감지한 것뿐이다. 칸트의<통일철학>에 대한 비판이 헤겔의 논리학에도 적용된다면, 변증법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맑스의 실천개념과 칸트의 헤겔비판에 기대어 변증법을 실천이성으로 보다 정확하게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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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4 -수정

      {가면 갈수록 태산이다. 첩첩산중이다. 웬만큼 헤매고 나면 밝은 곳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것 같다. 헤겔이 독일 사람이라 그를 따라 들어간 숲도 당연히 독일식 숲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독일식 숲이라면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국당대회 광장에 당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위대한 존재자”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뚫어놓고 서 있듯이 반듯이 “Lichtung”이란 것이 있다. 나무를 다 베어 만든 툭 터진 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즐겨 걷던 길이다.

     헤겔이 인도한 숲은 원시적인 밀림인 것 같다. 그리고 밖으로 인도할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아니 밖으로 나가서도 안되고 밀림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그 속에 살고있는 생명체 하나하나를 다 보기 전에는 빠져 나갈 수도 없단다.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등불>(이사야 42.3)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야훼와 같이 되란 말인가?

      §66을 번역하다가 뭔가에 꽉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후진하게 되었다. 뭔가 알 것 같아서 죽죽 번역하고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게 아니다. 한번 본 것 같은 지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고, 결국 엉뚱한 데로 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없는 헤겔의 정신에게야 엉뚱한 곳이란 없겠지만...

      §64의 번역을 다시 올린다. 여기서 이야기된 내용이 어떤 지형에서 이야기되었는지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번역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64 논쟁구도를 보자면 <사변적인 방식>, <논변위주 방식>, 그리고 <입체적인 방식> 등 3자가 등장한다. 역자는 처음에 2인으로 생각하고 <사변적인 방식>과 <입체적인 방식>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 <사변적인 방식>은 아마 쉘링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입체적인 방식>은 헤겔 자신, 즉 <변증법적 방식>을 가리킨다.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논변위주의 방식>과 함께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논점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도 <논변위주의 방식>을 비판하는데,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보자면 둘 다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64) 이때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이 [하는 짓이 둘 다 비슷해서] 둘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둘을 혼합하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명제의 부분인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는바 이를 엄격하게 배제하는 철학적 드러냄만이[3]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이 될 것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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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3, 64, 65

§63) <철학서적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라는 불평은 대부분, 당사자가 철학서적을 이해할 만한 여타 조건을 교육을 통해서 갖춘 상태인 경우, 위와 같은[다른 학과의 서적에서는] 당해보지 못한 장애물 앞에서의 망설임에서 기인한다. 특히, [한두 문장도 아니고] 다수의 문장들을 [줄줄이] 반복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된다는 식의 철학 저서에 자주 가해지는 고질적인 비판은 지금 이야기된 내용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 이런 비난은[이젠 아무리 권해도 더 이상 듣지 않고 아예 책을 내 팽개쳐버리겠다는 식의] 무례한 행동과도 같은데, 이런 생각이 한번 곧추세워지면 달리 달랠 방법이 없다고 들 한다. — 이 비난의 정황은 위에서 거론한 것에 비춰보면 훤해진다. 철학적 명제도 역시 명제이기 때문에 이를 대하는 일반인은 일반명제에서와 같은 상투적인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떠올리고 이에 익숙해진 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런 지의 태도와 사념은 철학적 내용에 의해서 파괴된다. 여기서 사념, 즉 독자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자기가 사념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사념을 정정해야 함은 지로 하여금 명제로 되돌아가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달리 파악하도록 강제한다.

 

§64) 이때 꼭 피해야 할 일은 이해를 어렵게 하는데 장본인 역할을 하는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을 혼합하는 일이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명제에서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변적인] 관계만을 밝혀낼[3] 때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적 [내용이] 드러날 것이다.

 

§65) [그렇다고, 철학왕국의 시민권이 없다고 해서 논변위주의 사유를 그냥 내쫓을 수는 없다. 이점이 어렵다.] 사실 사변적이지 않는 사유도 그 나름대로의 정당한 [존재]권리가 있다. 다만 사변적인 명제의 방식이 거들떠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주어와 술어를 따지는] 일반명제의 형식이 지양되어야[4] 한다. 이것은 단지 직접적인 방식으로, 즉 위에서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명제의 형식이 그 내용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대들고 그 형식을 파기해서만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아래와 같은 엇갈리는 운동이 속속들이 표현되어야[5] 한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언급한 형식적 사유의 내적 망설임만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이 내적 망설임을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렇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서술해야 한다. [이런 서술이 완성될 때 비로서[6] 명제의 형식이 지양되는 것이다.] 이 운동이야말로 흔히 이야기되는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명제가 스스로 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오직 이 운동만이 실재적으로 사변적인 것이며 또한 오직 이 운동을 속속들이 표명하는 것만이 사변적인 서술이다. 명제에 그치는 사변적인 것은 단지 내적 망설임일 뿐이고 아직 본질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 등장하여 서술되지 않은[7] 그런 복귀일 뿐이다.그래서 우리는 어떤 철학서적을 들어다 보면 첫 장에[8] 이와 같은 내적 직관을 보란 듯이 내놓고 그것을 따르고 있고 또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명제의 변증법적 운동을 서술하는 [정작 걸머져야 할] 짐을 덜어보려는 작태다. —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표현하는 것이 명제라고 한다. 그러나 진리란 본질적으로 주체다. 그리고 이런 주체로서의 진리는 오로지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자기자신을 산출하고, 이끌어 나가고, 그리고 자기 안으로 돌아가는 발자취[9]다. — 여타 인식에서는 증명을 떠맡는 장본인이 이와 같이 내면성을 [내적 직관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 증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변증법과 증명이 서로 분리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사실 증명의 개념조차 상실된 상황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밝혀내다>와 <드러나다>로 번역하였다.

[4]원문 <aufheben>. <주어올리다>의 의미에서 <파기하다=주어올려 버리다>, <보존하다=주어올려 선반 등에 놓다>, 그리고 <발전하여 한단계 위로 올라가다=한층 북돋은 지위(aufgehobene Stellung)에서와 같이>란 의미가 있다. 사변적인 개념이다.

[5]원문 <aussprechen>. 여기선 <속 시원하게 내놓고 전부 말하다>란 의미인 것 같다.

[6]원문 <dargestellt sein>의 현재완료를 <비로소>로 받았다.

[7]원문 <nichtdaseiend>

[8]원문 <Exposition> 소나타의 첫 장을 <Exposition>이라고 하는 것에 기대여 번역했다.

[9]원문 <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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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2

§62) 지금 말한 것을 설명하는 예로<신은 존재다>[1]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이때 술어가 되는<존재>에 실체적인 의미가 있고, 주어는 술어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사라진다. [명제가 실지로 주장하는 것은] <존재>가 주어에 따라붙는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제상의 위치로 보면 견고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신이 더 이상 그런 주체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 이때[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본래] [과감하게]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런 이행의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주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소심하게 되어] 어찌할 줄 몰르고 망설이다가 결국 주체로서의 주어를 잊지 못해[주체를 인식주관으로 파악하는 형식주의] 사상으로[2]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유는 술어라는 것 그 자체가 주체의 속성을 남김없이 안고 있는<존재> 또는<본질>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술어 그 자체 안에서 [본질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를 찾게된다. 이때 사유는, [술어로 이행했지만 그 안에서 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자신이 인식주관이라는 주체가 되어] 술어를 이리저리 따져보는 자유로운 입장에 들어가기보다는 아직 내용에 몰두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내용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구를 몸소 느끼는 상태에 있다. —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주어로서의 현실적인 것은 그 술어 안에서 사라진다. 이 명제에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는 단지 술어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 이렇게 사유는 변함 없는 부동의 토대라고 여겼던 주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실은 술어로 이행한 뒤에 주체로 다시 복귀하는데 있어서 자기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내용의 주체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주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1]원문<Gott ist das Sein>. <Gott ist Sein>이란 명제와 다른가?

[2]원문<Gedanken des Subjekts>. 의미가 부동(浮動)하는 표현이다. 우선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주체에 관한 사상이란 의미와 함께 주체, 즉 인식주관이 갖는 사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동>한다고 하는데<부동>하는 가운데 역자의 생각도 뭔지 붕 떠있는 것같다. 이성이 자신을 찢어내는 칼을 빌려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의<cogito [res] cogitans cogitum>에서와 같이 사유는 인식행위 <cogito/나는 생각한다>와  인식주관/주체<res cogitans/생각하는 실체>로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는 사유행위(cogito)를 <Apperzeption/통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하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내용이 전혀 없는 표상으로서의 자아“(„die einfache und fuer sich selbst an Inhalt gänzlich leere Vorstellung: Ich“)다. 이 자아가 „의식외 아무것도 아닌 것“(blosses Bewusstsein), 즉 의식활동이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것이고, „[수학 공식에서의x와 같이 텅비어있는] „미지의 선험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x“)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B404 참조). 선험적 주관이[의식의 내용물을] 하나로 엮어내는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는, 다른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통각의 절대적 통일“ („die absolute Einheit der Apperzeption“)이 된다. 이렇게 „사유“(Denken/cogito)와 „사유주체로서의 주관“(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은 „규정하는 자기“(„das bestimmende Selbst“=Denken)와 „규정되어지는 자기“(das bestimmbare Selbst=das denkende Subjekt)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단지 통각에 의한 사상의 종합에서 나타나는 통일이 지각된 통일이 사상의 주관/주체(res cogitans)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칸트는 이런 가상(Schein)이[단지 동반하는 행위일 뿐인] 의식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das hypostasierte Bewusstsein“/실체화된 의식)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끌려가기에 알맞은 „기만“(„Subreption“)이라고 한다.(칸트, 순수이성비판A 401, 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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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1

§61) 방금 말한 것은 형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판단이나 명제라는 것은 그 속성상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 주어와 술어라는 차이를 내포하는데, 이 속성이 사변적인 명제에 의해서 파괴되고, 이렇게 주어와 술어가 갖는 관계가 반격을 받음으로써 처음에 등장하는[표상적 사유의] 명제가 동일성 명제가 된다는 것이다. — [말로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주어와 술어란 차이를 갖춘] 일반명제의 형식과 바로 이런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운동]에 의한 통일 간의 대립은 운율에서 박자와 악센트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비슷하다. 운율은 어느 한 쪽이 중심이 되는 통일이 아니라 그 중심이 부동(浮動)하는 양자의 통일에서[1]나타나는 결과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명제에서도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일반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그들의 구별을 말소해서는 안 되다. 이와 반대로 이 통일은 어디까지나 조화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명제의 형식은 특정한 의미가 나타나는 모습으로서 그 의미가 [치우쳐] 규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바, 이런 명제의 형식은 의미의 완성도를 강약으로 가르는 악센트와 같은 것이다.술어가 실체를 표현하고 [주관으로 일관하는] 주어/주체가 스스로 보편자의 위치로 뛰어들어감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통일은 악센트가 운율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일이다.



[1]원문<aus der schwebenden Mitte und Vereinigung beider>. 무슨 말인가? 헤겔이 피히테가 갈아논 밭에서 뭔가를 가져온 것 같다. 노발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Fichtisiren>하고 있다.1 <Schwebende Mitte/부동하는 중심>은 피히테가 <구상력/Einbildungskraft>과 관련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1794/95년<전 학문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에서 피히테는 구상력에 의해서 <직관/Anschauung>이 형성된다고 한다. „종합하는 능력은 대립하는 것을 통일하는, 양자를 하나로 사유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수행할 수 없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립하는 양자를 통일시킬수 없는 무능력과 그렇게 하라는 요구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갈등 안에 정신은verweilen/[하염없이 머무르다]하면서 양자 사이에, 그 과제를 수행하라는 요구와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능력 사이에 부동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이런 상태에서만, 양자를 동시에 굳게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다.“(„Das Vermögen der Synthesis hat die Aufgabe die entgegengesezten zu vereinigen, als Eins zu denken, .... Dies vermag sie nun nicht; dennoch aber ist die Aufgabe da; und es entsteht daher ein Streit zwischen dem Unvermögen, und der Forderung. In diesem Streite verweilt der Geist, schwebt zwischen beiden; schwebt zwischen der Forderung, und der Unmöglichkeit, sie zu erfüllen, und in diesem Zustande, aber nur in diesem, hält er beide zugleich fest.“ 강조역자) 1804년 <학문론/Die Wissenschaftslehre>에서는 확신이란 대립하는 a와 b라는 양자 사이에서 „a 에서 b로 그리고 다시b 에서 a 로 [왔다갔다하면서] 부동하고, 이렇게 부동하는 가운데 양자에게서 모든 것을 퍼가는 것으로서 이런 [왔다갔다하는] 이중적인 부상 사이에 다시 부상하는 것“("schwebend von a zu b, und wiederum von b zu a, und erschöpfend durchaus beides, also schwebend wiederum zwischen dem zwiefachen Schweben." 강조 역자)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부상>이 매개프로세스와 매개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schwebedende Mitte/부상하는 중심>은<Vermittlung/매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Christoph Asmuth, „Das Schweben ist der Quell aller Realität, http://www.jp.philo.at/texte/AsmuthC1.pdf 참조. 피히테 인용은 동 문서를 따름). <Vermittlung/매개>를 이렇게<부상하는 중심>으로 이해하면 우선 <중재/Mediation>와는 거리가 멀뿐만아니라 <중간> 등 어딘가에 자기자리를 갖는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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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가 얼마나 <hegelisieren>하는지도 궁금하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헤겔과 맑스의 [학문적] 관계를 상상하면서 헤겔이 죽으면서 맑스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한 녀석만 나를 이해했는데, 그 놈도 나를 오해했다.” (Wolfgang Haug, Parteillichkeit und Objektivität, http://www.wolfgangfritzhaug.inkrit.de/documents/Parteilichkeit-und-Objektivitaet.pdf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60

§60) 이것으로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논변 위주의 사유에 대한 고찰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1] 위의 고찰에 덧붙여 논변 위주의 사유가 내용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때 논변 위주 사유의 다른 면이 부각된다.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그것이 표상에 속한 것이든, 사상에 속한 것이든, 아니면 양자를 혼합한 것이든 하여간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로하여금[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분명해진다. 논변 위주의 사유가 갖는 이런[서커스에서 어릿광대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일로 불거지는지 모르는 체 뭔가를 계속 해서 관중을 웃기듯이] 가관할 만한 꼴은[2]사실 위에서 이념이라고 했던 본질[3]그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논변 위주의 웃기지도 않는 꼴이 바로 이념이 어떻게 운동으로 등장해서 파악하는 사유가[4]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논변 위주의 사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自己)가 되어 그 안에[모든] 내용을 함몰시킨다. 그런데 그가 여기선 앞과 달리 내용을 갖는 긍정적인 인식으로 등장한다. 이때 자기(自己)가[5]되는 것은[스스로 운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앞자리에 갖다놓여진[6]주어와[7]같은 것이고, 내용이란 이런 주어에 따라붙는[8]술어일 뿐이다. 논변 위주의 사유에서는 이와 같은[주어로서의 막연한] 주체가 내용을 지탱하는 것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운동이란 내용을[술어로 하여] 이런 주체에 붙였다뗐다하는 것 뿐이다. 개념적인 사유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여기서 자기란 대상 고유의 것으로서 대상이 생성되어가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가 바로 개념이[9]되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란 딸린 것들을[10]묵묵히[11]그저 지탱하는 부동의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에 딸린 규정들을[12]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운동 안에서는 논변위주의 사유가 기대고 있는 부동의 주체가 해체되어 정말 밑바닥으로 깔려 들어가[13]스스로 차이와 내용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때 주체는[따라붙어있는] 규정들 저편에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규정들을, 즉 구별된 내용과 내용에 구별을 주는 운동을 완성하는[동력인][14] 것이다. 이렇게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사유가 부동의 주체에 기대어 굳게 서 있다고 믿는 확고한 토대가 흔들리게 된다. 단지 이런 운동만이[개념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용으로 충만한주체는 더 이상의 내용을 찾아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Akzidenzen이나 술어로 채워질 여지도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용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산만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통제아래 한묶음되어 있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게 어떤 주체에 묶여있기 때문에 속해있는 주체를 떠나서 여러 주체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용은 사실 더 이상[주어에 갖다붙이는 술어가] 아니라[주체가 생동하는] 실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유의 대상인 본질과 개념인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그 사실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표상적 사유는 말 그대로[15]뭔가 떠올리는 것을[주어에] 술어로 갖다붙이는 행위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고, 또 이렇게 갖다붙이는 것이 술어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16]그런 것들을 넘어서서[본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유는 쭉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명제에서[본질이 아니라] 고작 술어 형식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 실체이기 때문이다. 술어를 고작 주어에 딸려붙어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사유가[실체를 맞이하고] 붙잡히게 되는 셈이다. 주체가 무슨 불변하는 토대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던 차에 표상적 사유가 발견하는 것은- 술어가 사실 실체가 되기 때문에- 주체가 술어쪽으로 넘어가[이젠 더 이상] 주체구실을 못한다는[17]점이다. 단지 술어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렇게 내용의 전반을 이루고[어디에 붙었다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심점을 갖는] 독립적인 질량이 되기 때문에 표상적인 사유는 더 이상 자유롭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못하고 그 질량의 중력에 의해서 제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형식적 사유는 주체를 대상화하여 고정된 자기(自己)라는 토대로 삼는다. 그리고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유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규정으로, 달리 표현하면 술어로 나아간다. 이때 앞에서 이야기된 [자기 운동하는] 주체의 자리에 자아가 지적 주체로[18]들어서서 술어를 엮어내고 그것을 지탱하는 주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표상적 사유가 주어라고 생각했던] 주체가 규정에[속속들이] 스며들어가 그것의 혼이 되는 상황에서 지적 자아인 형식적 사유의 주체는 표상적 사유가 말하는 주체를 빨리 처리하고 나서 다시 자기 안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만 표상적 사유의 주체가 아직 술어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지적 자아는 더 이상 표상적 사유가 주어로 삼는 주체에 이런저런 술어를 붙였다떼었다하는 운동으로 일관하는 논변위주의 사유로 남을 수 없고, 오히려[그런 술어의 운동 속에서]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das Selbst]를 접하고 있는바, 더 이상[운동의 힘을 발휘하는] 자기는[das Selbst] 자기 혼자라고[fuer sich] 우쭐하지 못하고 내용의 자기[das Selbst]와 그 자리를 공유해야하는 외압적인 수모를 당하는 꼴이다.



[1]원문<aber>

[2]원문<merkwürdige Natur>. <특이한 성질/속성>. 좀 빈정대는 투가 들려서 위와 같이 번역했다.

[3]원문<Wesen der Idee>. 소유격을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번였했다. 본질이 이념의 성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원문<denkendes Auffassen>

[5]원문<das Selbst/자기>. 이건 도대체 뭔가?

[6]원문<vorgestellt>. 관념적인 표상이라는 의미와 문장에서 주어를 앞에 갖다논다는<voranstellen>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낱말이 갖는 은유적인 의미와 직접적인 의미를 혼합봐여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subjekt>란 낱말에도 여러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Hypokeimenon>으로서 실체를 이루는<바탕>이라는 의미,  문장의<주어>란 의미, 주체란 의미가 있다.

[7]원문<Subjekt>.

[8]원문<Akzidens>. 어원<accidere>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9]원문<[…] der Begriff [ist] das eigene Selbst des Gegenstandes>. 강조 역자. <개념이란 대상 고유의 자기다.> <정신현상학> 서설 § 56에서 이야기된<die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를 뭔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인 것 같다. 헤겔은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사물이 그 사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안에 내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개념의 활동을 통해서이다./Der Begriff ist vielmehr das wahrhaft Erste, und die Dinge sind das, was sie sind durch die Tätigkeit des ihnen innewohnenden und in ihnen sich offenbarenden Begriffs.“ (헤겔, 철학엔치클로페디아, § 163, 첨언2, 글로크너 판)라고 한다. 사물이 이런 식으로, <자기>의 계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다. 키에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야기되는<자기>란 것에 기대어 사물에서 활동하는<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관계하는 가운데 하나로 통일되어 완성되는 것과 그렇게 하는 힘>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아무튼<das Selbst>로 명사화하여 찍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의<개념>에 대한 개념을, 소유개념을 예로 삼아 설명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소유개념에서 소유에 관한 규정을 연역하고 또 역으로 이런 내용을 소유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이<애당초부터 아무런 내용이 없는 형식/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념이 그저 형식이라면 거기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 그런 텅 비어 있는 형식뿐인 개념으로 내용을 환원한다는 것은 내용의 규정성을 빼앗을뿐이지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 („Man spricht von der Ableitung eines Inhalts, so zum Beispiel der das Eigentum betreffenden Bestimmungen aus dem Begriff des Eigentums und ebenso umgekehrt von der Zurückführung eines solchen Inhalts auf den Begriff. Damit wird aber anerkannt, dass der Begriff nicht 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 ist, da einerseits aus einer solchen nichts abzuleiten wäre und andererseits durch Zurückführung eines gegebenen Inhalts auf die leere Form des Begriffs derselbe nur seiner Bestimmtheit beraubt, aber nicht erkannt werden.“ (같은 책 § 160, 첨언). 이것은 수긍이 가지만 사물도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참 힘들다. 헤겔이 논리학은 신학의 변신 아니면 자기모습을 감춘 신학[Kryptotheologie]인 것같다. 논리학의 바탕엔<신에 관해서 알고있는 인간의 정신은 단지 신의 정신 그 자체일 뿐이다./Der Geist des Menschen, von Gott zu wissen, ist nur der Geist Gottes selbst.>(종교철학강의, WW. [글로크너 판, 1927] XII, 496쪽)란 표현에 스며있는[기독교적 교리의] 운동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변증법이<가만히 바라보기만/reines Zusehen>해도 되는 이론적인(theoretisch=spekulativ=가만히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실천적인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변증법이 이론=아리스토텔레스의Theoria=헤겔의speculatio=Zusehen의 이론인가 아니면 실천의 이론인가 하는 문제다. 맑스를 따른다고 하면서 변증법을 운운했던/운운하는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했던/하는 것 같다. 맑스가 실천이라고 했던  <gegenständliche Tätigkeit>를 좀더 살펴봐야 하겠다.

[10]원문<Akzidenzen>

[11]원문<unentwegt>

[12]원문<Bestimmungen>

[13]원문<zugrunde gehen>의 이중적인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해체되어 멸망하다>란 의미가 있는가 하면<Hypokeimenon/바탕으로 침강하다>란 의미가 있다. 진정한<Hypokeimenon/바탕/실체>가 된다는 이야기다.

[14]원문<ausmachen>

[15]원문<seine Natur>

[16]원문<mit Recht>

[17]원문<aufheben>. 형식적 사유가<aufheben>의 변증법적 운동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사라지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18]원문<das wissende 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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