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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부분적 번역에 앞서

페터 바이스(Peter Weiss) <저항의 미학/Ästhetik des Widerstands>을 번역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로 할 것 같으면 직접적인 동기가 없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놈이라 아직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근데 진보넷 블로거 브르디가님의 블록그 (blog.jinbo.net/unpolished/?pid=73#comment_261158)에서 진행된 토론을 보고서 <저항의 미학>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군데를 번역해 볼까 한다. <저항의 미학>은 예술작품을 노동자가 직접 사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그리고 그런 사유과정에서 의식화되는 노동자를 소개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소설이다.

 

<저항의 미학>은 현재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남덕현박사 외 여럿이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덕현박사는 <저항의 미학>에 대한 논문으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내가 하는 번역이 어쩌면 copyright 문제에 걸릴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진보넷 관리팀이 잘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안되면 <해적질> 할 수밖에 없고

 

우선 3개의 그림을 사유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번역하여 소개하겠다.

첫째 그림은 아돌프 멘첼의 <압연공장/Eisenwalzwerk>, 두 번째는 로버트 쾰러(Robert Koehler) <파업/der Streik>, 세 번째는 뭉크의 <길을 걸어가는 노동자/Arbeiter auf dem Weg>이다.

 

우선 그림을 올려놓고 번역이 완성되는 데로 번역된 글을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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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노동자 맞어?

보르디가님의 [유시민 지지 문화예술인 ] 에 관련된 글.

너 진짜 노동자 맞아?

 

겁나는 질문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들통날까 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글쟁이 흉내를 내고 또 글을 가지고 먹고 살려고 바둥대는 쁘띠지만, 두려우면 언어분석철학이라도 들이대고 노동자개념의 외연이니 내연이니 하면서, 육체 노동자니 지적 노동자니 하면서 어떻게든 <나도 노동자다>라고 할 수가 있겠다. 또 펜 돌리는 방법을 조금 배운 쁘띠는 상황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저쪽 편에 서서 그 상황에 맞게 펜을 돌리는 자질이 충분하다는 추궁이 사실무근하지 않고 충분히 내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뽀록날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겁나는 이유는 나를 향한 이 질문이 나의 계급성을 묻기 때문이다. 계급성을 원론적으로 따지자면야 겁날 것이 없다. 겁나는 이유는 계급성을 이야기하면 그것과 떼어 놀 수 없는 경험 두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광주혁명과 연관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

 

80년대 한국 운동권 인사들의 독일방문이 잦았다. 그 중 광주혁명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 몇 있었다. 한 목사님은 계엄군이 혁명대열에 발포하자 그 사이에 뛰어들었던 어떤 아주머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뛰어들어 서있어야 했던 자리에 그 아주머님이 뛰어 들으셨다고 자신을 반성했다. 뒷골목으로 도망쳤던 자신을 회상하면서. 다른 한 분은 광주도청사수 마지막 밤의 상황을 전달했다. 한 여고생이 확성기를 들고 도청사수 혁명군 지원을 애타게 간청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전달한 분도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 하청청소업체에서 일했다. 시가 운영하는 청소업체 였다. 직원은 약 1000명 정도였다.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난민, 외국인 등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일을 거부하면 사회수당이 감축되는 약간 강제적인 일을 시키는 회사였다. 물론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주로 하는 일은 여름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잔디깍는 일이었고 겨울엔 지하철역 등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처우라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난민이지만 가장이고 자기나라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던 외국인들이 일하는 동안 내내 술만 처먹고 대마초만 빨아대지만 독일사람이라는 것 하나로 십장이 된 놈들 밑에서 온갖 행패를 다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들었다. 처음엔 거리에서 밥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힘들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심정적으로 해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회사의 구조적인 행패는 날이 갈수록 분노가 쌓이게 했다. 마메드와 공원에서 대마초 피우고 술 먹고 난 다음 날 이었던가? 일이 끝나면 늘 맘이 맞는 서너 명과 어울려 길거리에서, 시내 공원에서 술판을 벌였다. 터기 슈퍼에서 라키(페르노와 같은 터기 독주) 서너 병, 수죽(터기 소시지), 야채, 빵 등을 사가지고 공원에서 고래고래 목청 높여 노래 부르면서 술에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먹고 마셨다. 그날 나는 대마초와 라키에 완전히 뻗어서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등을 타고 스며든다. 한 친구는 어두워졌으니 가야 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투른 독어로 마메드가 말한다. 00 혼자 둘 수 없어. 나 알아. 00 완전히 혼자인 것 알아. 00 내 아르카다쉬(형제)야. 00 머리 상했어. 그러면서 늘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안네 카립.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마메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무지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깨어나 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마메드는 아직 내 곁에 앉은 체 꾸벅꾸벅하고 있다. 자리를 털고 지하철 역으로 갔다. 헤어지기 전에 마메드가 나를 꼭 껴안으면서 입을 맞춘다. 까실까실한 수염이 살을 그리워하는 내 몸에 포근함으로 다가온다.

 

회사 경영진에 장황한 편지를 썼다. 조목조목. 기록해놓은 날날의 상황을 다 들이대면서. 이런저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내 몸에 불을 질러서라고 너희들의 행패를 폭로하겠다고 썼다.

 

이름도 성도 없었던 내가 갑자기 00씨라고 불린다. 긴급종업원평의회가 소집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경영진이 불러 대화를 요구한다. 종업원평의회위원장이 참관하고 그런데 이상하다. 역겨운 감정이 올라온다.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경영진이니 종업원평의회이니 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줄이고

 

나는 계급성을 사선에서 나타나는 행위이고 한때 느껴보았던 분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겁나는 질문이다. 가끔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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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5

(§35) 덧붙이자면 이와 같은 서술이 [즉 정신현상학이] 학문의 제1부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정신이 현존하는데 있어서 그가 최초에 취하는 모습은 시작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구별이 없는 뭉쳐있는 것으로서[1] 아직 [자신을 전개하고 나서 다시] 자체 내로 복귀한 그런 시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직접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터전은[2] 그래서 [아직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부정, 다시 말해서 부정된 것을 찾아 나서는 운동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정이 제한으로 나타나는] 규정성[3]이다. 이 점이 학문의 제1부인 <정신현상학>과 다른 곳에서 학문의 제1부라고 하는 것들과 구별되게 하는 점이다. [구별된다고 주장만 할 수 없고] 왜 구별되는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한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몇 가지 고정관념을 논의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1] 원문 <직접적인 것>

[2] 원문

[3] 원문 . 헤겔사전(가토 히사타케 외 여럿, 이신철 옮김) 81쪽 마쓰이 요스카즈의 아티클 <당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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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4

(§34) 이와 같이 본질이 순수한 정신인 것들의 운동이[1] 학문성의 속성을 규정하는 절대적인[2] 것이다. 학문성이란 것을 [어떤 학문 안에서 이야기되는 모든] 내용간의 연관성으로 이해하면, 이 운동은 내용이 유기적인 전체로 필연적으로 확대되어 나아가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에 의해서 지의 개념이 획득되기 때문에 그 도정 역시 필연적이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3] 생성이다. 그래서 [지금 <정신현상학>이란 이름아래 절대정신으로 나아가지 위하여 취해지는] 이 예비적인 일은 [흔히 이야기되는 철학이 그런 것처럼] 우연성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철학을[4] 방기한 것이다. 이런 철학은 불완전한 의식이 우연히 마주치는 이러저러한 대상, 상황, 또는 사상에 기대거나[5]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우연한 것들과 부딪치는 현실을 피해 관전(觀戰)하는 자세를 취하고] 우왕좌왕하는 논변, 미루어 판단하고 결론 짖기 등의 행위를 하는 가운데 언제나[6] 어떤 특정한 사상을 쥐어짜 얻은 것이[7] 참다운 것의 근거라고 [보란 듯] 제시하려는 짓이다. 그러나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이 도정은, 개념의 운동에 의하여, 세계와 마주하는 의식이[8] 취하는 [앞서 이야기된 우연한 철학이 취하는 의식형태도 차치하지 않고] 모든 형태를 그 필연성에 따라 포괄할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에서 <사상/Gedanke>이 복수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우연한 철학>이 그때그때 이런저런 특정한 사상에서 진리를 쥐어짜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의미를 <언제나>로 번역하였다.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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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3

(§33) 표상된 것이 이와 같이 순수한 자기의식이 차지하는 재산이[1] 되게 하는 것, 즉 일단 이렇게 보편성이란 것의 경지로 향해 올라가는 것은  교양의 일면일 뿐이지 아직 완성된 교양은 아니다.[2] 무슨 말인지 살펴보자.[3] 고대와 근대의 학문하기에는 근본적인[4] 차이가 있는데 자연적인 의식이 두루 교양을 쌓는[5] 것은 사실 고대에서만 이루어지고 [근대에 들어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대에서는 자연의식이 자신이 처해있는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오지 않고 대려] 그 생활현장을[6] 붙들어 안고 애쓰는 가운데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철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내용을 속속들이 갖춘 충만한[7] 보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는 추상적인 형식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개인이 하는 일이란 위와 대조적으로 고작 그것을 찍어 올리는 일일 뿐이다. 추상적인 형식을 쫓아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8] 노력은 이젠 내면에 있는 뭔가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꺼내어 놓는 것과 [실재]와 괴리된 보편적인 것을 얼토당토않게 찍어 올려놓는 것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편성이 일상생활의[9] 구체성과 다양성에서 발현되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은 개인을 그가 헤어나오지 못하는[10] 감각적인 생활양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를 동시에 사유대상과 사유실체로[11]만들어 [반성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말라 비틀어진] 고정된 특정 사상에 정신의 힘을 불어넣어 보편적인 것을 실현하는데 있다.[12] 그런데 이와 같은 말라비틀어진[13] 사상에 [정신의] 물이 차게 하는 일이 [경직된] 감각적인 일상생활에 정신이 깃들이게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사상을 규정하는 것은[14] 자아, 즉 부정의 힘, 달리 표현하면 절대적인 현실을[15] 실체로 하고 그것을 터전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로 감각에 따른 규정은[16] 단지 추상적인 직접성, 달리 표현하면 거기 있다는 것 자체 외 다른 것이 없는,  [어쩌다 생긴 자기 나름대로의 힘만 있지 다른] 힘이 없는 직접성을 터전으로 삼는다. [말라 비틀어진] 사상에 [정신의] 물이 차려면 순수한 사유가, 누차 이야기된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직접성이[17], 자기를 [축으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어떤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매개운동의] 힘으로[18] 인식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19] 확신이 자기를 털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털어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20] 이것은 자기를 제거하거나 제쳐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정립의[21] 양극을 이루는 고착관념을[22] 버리는 것이다. , 내용과 분리되고 대립한다는 구체성 외 다른 구체성이 없는 순수한 자아라는 고착관념과 순수사유의 터전에 자리 매김됨으로써 자아의 절대성을[23] 뒷받침하는데 한몫 하는, 내용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다는 고착관념을 모두 다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에 의해서 순수한 사상은 비로소 자신의 참다운 모습인 개념이 된다. 개념이란 [한방에 끝나는 운동이 아니라] 거듭하는 자기운동의 [결과이며][24], [한방에 끝나는 원이 아니라] [그때그때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원에 또다시 원을 그리는[25] 운동이다. 이렇게 개념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될 때 순수한 사상은 그의 실체가 본래 그랬듯이 정신적인 본질이 되는 것이다.



[1] 원문 . 이 개념은 원래 토지지배를 기반으로 하여 유지된 소위 라는 봉건체제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봉건영주가 지배(Herrschaft)하는 땅에 속한 토지, 건물, 거기서 사는 사람 등 모든 것을 이라고 하였다. <봉건농노>는 원래 , 이라는 생활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라는 체제아래서는 소유권이 분명하지 않았고, 다만 지배권을 행사하는 봉건영주에게 일정한 세금/부과금을 징수하는 권리가 있었다. 도시와 자본주의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봉건지배가 붕괴되자, 다시 말해서 에서 지배(Herrschaft)가 사라지고 빠져나가자 소유권이 불분명했던 내에서의 동산과 부동산이 배타적 처분권으로서의 소유(Eigentum)가 되었다. [참조: Peter Blickle, Von der Leibeigenschaft zu den Menschenrechten. Eine Geschichte der Freiheit in Deutschland, 뮌헨 2003]        

[2]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이야기한 이념을 향해 올라가는 운동(anabasis) 다시 동굴을 향해 내려가는 운동(katabasis) 연상되는 대목이다.

[3] 원문 <-> 파렌테시즈.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데카르트의 사유행위> 사유실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데카르트가 <사유행위> <사유실체>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라이ㅍ니츠에 와서는 사유행위가 통각>이라는 전문용어로 구분된다. 이것이 피히테와 쉘링의 <지적 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으로 발전한다.  

[12] 원문은 <먼저 것을 나중에 이야기하는/hysteron proteron> 수사학적 표현이다.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순수한 실재>. 이것은 의식 안에서 의식에 나타난 라는 실체다. 그래서 <순수>라는 의미보다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는 <절대>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 파렌테지스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24] 원문 복수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25] 원문 복수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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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손님철학이란?

님의 [10년 이주노동의 땀보다 5억원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 에 관련된 글.

<손님의 철학>을 이야기하면 한약에 감초같이 꼭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 일리아드의 6번째 노래에 나오는 토로이편의 장수 글라우코스와 그리스편 장수 디오메데스에 관한 이야기다.

 

골이 깨지고 창자가 터져 나오는 전투가 한참 벌어지고 있다. 정신 없이 싸우는 가운데 신들까지도 부상시킨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가 맞서게 된다. 디오메데스 이놈 입이 상당히 큰 놈이다. 하는 말을 좀 들어보자.


너 좀 있어 보인다. 추풍낙엽 같은 인간들 중에서 제법 앞으로 나오는데 네놈은 대체 누구냐? 내 창 맛 좀 볼래? 니 애미가 불쌍하다.” 이렇게 까면서도 글라우코스가 혹시 인간의 형상을 입은 신이 아닌가 뒤숭숭한 디오메데스는 글라우코스의 정체를 묻는다.  

 

글라우코스가 대답하기를 내 족보 알아서 뭐 할래? 숲의 나뭇잎 같은 인간의 족보를 따져서 뭐 할래? 어차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인간의 족보를? 따스한 봄이 오면 싹이 터 나뭇잎이 되었다가 다시 사라지는 족보를?”

 

이렇게 말하면서도 글라우코스는 족보를 차근차근 제시하여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글라우코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디오메데스는 창을 땅에 꽂고 글라우코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 그러고 보니 우리 양가 할아버지 때부터 피를 나눈 가족과 같이 절친한 사이가 아닌가? 반갑다.“

 

글라우코스의 할아버지가 디오메데스의 할아버지를 20일 동안이나 집에 모시고 대접했단다. 귀한 선물을 서로 교환하고. 당시의 관습을 보면 글라우코스의 할아버지가 디오메데스의 할아버지에게 부인까지 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는 피가 섞인 한속이다.

 

아무튼 디오메데스는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한다. „내가 작살낼 수 있는 트로이인이 무수히 있고, 또 네가 그럴 수 있는 그리스인이 무수히 있는데 우리 둘이 서로 죽이고 살리고 싸울 필요가 있어? 우리 둘인 그러지 말자.“고 한다. 그리고 우리 서로 무기를 교환하여 다른 사람이 우린 한속인 것을 다 알아볼 수 있게 하자고 한다. 무기를 교환하면서 글라우코스가 엄청난 손해를 보긴 하지만. 100마리 가치의 금장무기를 소 9마리 가치밖에 되지 않은 청동무기와 바꿨으니. 5억원도 청동무기일 뿐 아닌가?

 

단님의 글 <10년 이주노동의 땀보다 5억원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호메로스식 손님철학이 서로 알아보고 다 팔아 넘기는 자본의 "손님철학"이 아닌가 해서 그런가? 그럼 우리 이주노동자의 손님철학은 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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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작불님의 [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 에 관련된 글.

나에게 장애인이란 표현은, 그것을 변형시켜 장애가 있는 사람 아니면 장애를 가지 사람이라고 고쳐 써도 생소하다. 아니 생소하다기 보다는 얼른 목구멍, 혓바닥, 그리고 입술을 넘어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시골고향에서 사람들이 장애인이란 낱말을 쓰지 않아서 귀에도 생소하다.

 

소꼴을 베었던 논둑과 함께 미꾸라지 붕어를 잡고 놀던 개울도 어디론가 사라진 정리된 들판을 걷고 있었다. 저만치서 낫 익은 아저씨가 온다.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는데, 얼굴은 그때 그대로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왔어요.> <, 그래, 00이 왔구나.> 초등학교 다닐 때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데 아저씨는 날 어제 헤어진 사람같이 금방 알아본다. 수많은 날들과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야 셀 수 있는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날 금방 알아본다. 아저씨는 눈이 먼 봉사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날 금방 못 알아봐서 좀 그랬는데, 눈 먼 아저씨가 이렇게 날 금방 알아봐주니 이제야 <고향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 언제부터 이런 말이 쓰여지기 시작했는가?

 

장애역사(Disability History)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사람을 특정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특징에 기반하여 <장애>, 그리고 <정상>이란 범주를 적용하여 구별하였는지 연구한다. 이런 접근은 <장애>라는 범주를 적용하는 것과 [항상] 연계되어 있는 권리침해, 차별대우, 그리고 제외를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물적 역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차단의 결과물로, 그리고 문화적 가치, 기대, 그리고 사회적 행위(practique)의 생산물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장애> 혹은 <정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체제 안에서 <장애><정상>의 상호종속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학문적-정치적 담론에서, [노동력을 관리하는] 관료주의적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범주다.” 이런 맥락에서 19세기 말 생리학에 기반한 의학이 마련한 바탕에서 진행된 장애담론에서 “[인간의 기계적] 성능과 생산성이 결정적인 사회적 가치기준으로 형성되었다”. (Elsbeth Bösl, Die Geschichte der Behindertenpolitik in der Bundesrepublik aus Sicht der Disability History.  in: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201023 참조)

 

무슨 말인가?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 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합리화>란 이름아래 몸과 마음을 기계적인 작동체계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분리한 자본은 우선 육체노동을 완벽하게 빨아먹기 위해서 몸의 동작을 스톱워치를 가지고 분석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차대전을 전후로 해서 독일에서 개발된 <정신공학/Psychotechnik>을 한번 살펴보자.

 

<정신공학>이 발전하게 된 배경은 일차대전 후 노동력이 절대로 부족한 상황에서 상이군인을 노동전선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관련 진행된 연구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신체분석, 출처: Staatliche Kunsthalle Berlin und Neue Gesellschaft fuer bildende Kunst의 1984년 전시회 "합리화" 82쪽)

 

 

(좌계표로 줄질하는  동작분석. 출처: 같은 책 83쪽)

 

(팔이 잘린 상이군인. 출처: 같은 책 85쪽)

 

 

("정상"인과 "팔없는 사람"이 줄질하는데 소요하는 시간. 초로 계산되어 있음. 출처: 같은 책 88쪽)

 [놈들은 이렇게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먹기 위해서 면밀하게 분석한다. 다 빨아먹은 몸뚱이는 폐기처분하는 경향이고, 이제 정신노동이란 것을 집중적으로 빨아먹기 위해서 갖은 분석을 다하는데 이번에도 놓치면 안 되겠다.]

 

(Heinrich Hoerle, Denkmal der unbekannten Prothesen/무명의 인간장구 기념. 같은 책 76쪽)

 

(Heinrich Hoerle, 공장노동자 1922. 출처: 같은 책 91쪽)

[자본이 몸을 어떻게 보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애담론"은 자본주의에서 진행되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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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2

 

(§32)[1] 표상을[2] 분석하는 일은 [인식론의 시초자 데카르트가][3] 본격적으로 했던[4] 일인데, 그가 그런 분석을 통하여 지향했던 것은 이미 그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표상의 형식, [뭔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형식을 걷어치워 없애버리는[5] 일이었다[6]. 어떤 표상을 그 근원적인[7] 요소로[8] 분해하는 일이란 표상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 그 표상을 지탱하는 축을[9]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최소한 갖춰야만 했던 것은 어디에서인가 주워온[10] 것들과 같이 표상된 것의 내용에 속하고[11] 표상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축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12] 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런 자기가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고, 이 축은 또 자기가 소유하는 재산의 전반이 되었다.[13]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분석은 [아쉽게도] 다시 단지 알려져 있고, 고정되어 있고, 자족하는[14] 규정뿐인 사상으로 [15]이어졌지만, 하지만 이 분석이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는데][16] 그 핵심은 이와 같이 [현실계의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거기서 분리되어 나와[17] [존재의 자기근거를 갖는] 저승세계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는 혼과 같은 자기라는 것이다.[18] 왜냐하면, 구체적인 <>[19]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찢어내어 자신에서 벗어난[20] 현실 저편의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찢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오성이 발휘하는 힘이고[21] [끊임없이] 진행하는 작업이다. 오성은 이렇게 경이롭기 그지없고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인 강제력이다[22]. 실체로서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아 그 요소들이 그 실체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고 모든 요소들이 결집된 상태로 자존하는 원은 이런 경이로운 관계를 자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원은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둘레의] 점 하나하나를 다[23] 유지하는 실체로서 바로 알아볼[24]수 있는 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원의 둘레에서 벗어난 일개의 점이 홀로 존재하는 것 마냥, 어쩌다 뚝 떨어진 것이[25], 다시 말해서 [사유 주체로서의 자기가 반듯이 사유에 묶여있듯이] 다른 것에 꽉 묶여있고 다른 것에 기생하여야만[26] 비로서 실재성을 갖는 것이[27] 독자적인 존재와[28] 아무런 구속이 없는[29] 자유를 획득하게 해준다는 데에 부정의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유, 즉 순수자아의[30] 에너지다. 앞에서 말한 현실 저편의 것을 죽음이라고 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고, 이렇게 두려운 것을 확실히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하는 것인바 부정의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다. 힘없는 아름다움은 오성을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오성이 힘없는 아름다움이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이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모든 폐허와 겁탈로부터 자신을 지켜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삶이다. 정신이란 어찌해도 다시는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까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즉 절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자기를 찾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31] 차지하게 된다. 부정된 것에서는 눈길을 떼는 긍정으로서의 정신이 이 같은 강제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대할 때 흔히 그러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거기를 떠나 다른 무언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정된 것에[32] 눈길을 고정하고 들여다볼 때, 다시 말해서 그 곁에 하염없이 머물러[33] 있을 때 정신은 비로소 위와 같은 강제력이 된다. 이와 같은 하염없는 머무름이[34] 사지로 부정된 것을 다시 존재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마력이다.[35] 이 마력이 앞서 [그림자 같은] 주체라고 일컬었던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자기의 터전에서 [부정된 것들이] 규정성을 갖는 내용으로[36] 존재하게 하는 가운데 자기의 추상적인 직접성, 다시 말해서 자기란 것을 찍어 올려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덜 떨어진 직접성을[37] 지양하고 참다운 실체가 된다. 바로 이런 실체가 존재의 터전이 되는데, 이때 존재는 매개운동을 외부에 두는 직접성이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된 매개운동을 스스로 하는 직접성이다.



[1] 이 문단은 진보넷 블로거 행인님의 <다시, 당을 희망하며>라는 글과 토론(blog.jinbo.net/hi/?pid=1293)에서 받은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한 것이다.

[2] 원문 . 이 개념을 한번 쭉 훑어 보았으면 한다.

[3] 원문 . <예전에>. 물론 데카르트의 <첫째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원문

[5] 원문 . 걷어치워 보관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6] 데카르트가 한 이 일은 단지 <성찰>뿐이었다. 진보는 이런 <걷어치워 없애버리는 작업>을 실천적으로 한다.

[7] 원문 ünglich>

[8] 원문

[9] 원문 . 역자가 이해한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의 내용에 기대어 흔히 <계기>로 번역되는 를 여기선 <지탱하는 축>으로 번역해 보았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지탱은 축은 였다.

[10] 원문

[11] 을 사용할 때 보통 <표상된 내용> <표상 자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12] 원문

[13]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된 것을 생각하면서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생각 주체가 하는 행위와 생각을 구분하는 것이다.

[14] 원문 . <움직이지 않는>

[15]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이 분석한 3대 요소, cogito(사유 주체의 행위), res cogitans(사유 주체의 실체), 그리고 res extensa(사유 대상)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사유 주체인 cogito [변증법적] 운동이 없는 자족하는 행위가 되었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 한번 쭉 훑어봐야 할 개념인데 우선 을 라틴어로 번역한 을 다시 독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질과 형식이 혼합된>이란 의미로 쓰여진다고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20] 원문 . 보편자가 되려면 자신의 터전[고향]을 떠나는 것과 함께 자기자신과 작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마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21] 원문

[22] 원문 . 베버

[23] 원문 . 여기서는 원의 역학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24] 원문

[25] 원문 . <우연적인 것>인데 라틴 원어 를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어디에 불현듯 자빠져 떨어지다>라는 기본의미에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26] 원문

[27] 원문 Wirkliche>

[28] 원문

[29] 원문

[30] 사유행위 주체인 . 달리 표현하면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conscientia).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으로 <양심>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31] 원문

[32] 원문 . 아도르노의 가 울리는 개념이다. <동일>, 즉 논리의 올가미에 묶이지 않는 것으로서 서양철학이 배제한 것. §19 역자주 1, 2 참조.

[33] 원문

[34] 원문

[35] 벤야민이 말한 <햇빛을 향하는> 만물의 성질도 생각나는 대목이다.

[36] 원문

[37] 원문 überhaupt seiende Unmittelbar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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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엔 약이 없다?

에헤야님의 [약사 일기1-독한 약이란 무얼까?] 에 관련된 글.

오래전 일이다. 한 번은 서울에 볼일이 있었다. 근데, 하루는 몸이 으스스해지고 맥이 풀리고 영 기운이 없다. <볼일 보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주변에서 약방에 왜 안 가느냐는 권고에 밀려 큰맘 먹고 약방에 같다. 폐결핵에 걸려 오래 투병생활을 하고 약을 디지게 먹어서 그런지 약이라면 딱 질색이다. 그리고 여기선(독일), 최소한 내가 찾아가는 의사는, 감기나 독감 걸려 찾아오면 물 많이 마시고 일주일 푹 쉬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감기나 독감 때문에 의사를 찾아가는 일이 없다. 더구나 의사의 처방 없이 약방에 간다는 것은 없고. 처방해도 기침이나 콧물 정도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약방에 찾아갔는데 약을 한 주먹 주더니 한꺼번에 털어 넣으라고 한다. 감기가 뚝 떨어진다고 한다. <왠 사기꾼 약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많은 양의 약을 털어 넣었다. 감기나 독감 걸리면 독일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는데, <약 먹으면 1주일, 약 안 먹으면 7> 고생하는 병이 감기고 독감이라는 말이다.

 

근데 웬걸, 감기가 정말 귀신같이 뚝 떨어졌다. 몸이 홀가분해지고, 맥이 살아나고.. 마약도 집어넣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상쾌해졌다.

 

바쁜 세상에, 한 순간 처지면 마치 <생의> 버스를 놓치는 것처럼 뛰어야 하는 세상에 어쩌면 그런 약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감기로 일주일씩 병가를 낼 수는 더욱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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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1

(§31)[1] [대상을 찍어 올려 박제하는 식으로] 확인한 것은[2] 바로 그렇게 겉으로만 접해본 것이기[3] 때문에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4] 아니다. 인식하는데 있어서 무언가를 이미 접해보고 알려진 것으로[5] 전제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신을 속일 뿐만 아니라 남을 기만하는 아주 천박한 행위다. 이러한 지는[6] [앞으로 나아가려고 무지 노력하고] 우왕좌왕하는 온갖 논설을 갖다 대지만 웬일인지 발전은 하나도 없고 제자리걸음만 한다. [이런 지가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모든 것을]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식으로 갈라놓고, 그리고 [이런 구분 안에서] 신이니, 자연이니, 오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들을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고 텁석 물어[7] 바탕으로 삼고, 그렇게 갈라놓은 것을 확고한 출발점과 귀착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운동은 고정되어 있는 두 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만 뭔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갖게 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파악이나 조사란 각자가 따로따로 하는 일로서 고작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의 표상에서[8] 찾아볼 수 있는지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지 또는 접해본 일이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는지 따져보는 일일 뿐이다.



[1]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헤겔은 항상 누군가를 겨냥하여 말을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그 대상이 누군가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정확히 잡히면 이해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단에서는 §30에서 이야기 된 두 가지 ür-Sich 의식형태>, <덜 떨어진/unmittelbar> ür-Sich 의식형태>와 자신을 보편성으로 이해하는 ür-Sich 의식형태>에서 먼저 덜 떨어진 ür-Sich 의식형태>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

[2] 원문 . 실증론자들이 내놓는 지식을 허섭스레기>라고 비판한 아도르노를 참작한 번역이다. 스트로슨의 <개체: 기술적 형이상학 시론>도 한번 살펴보면 좋겠다.

[3] 원문

[4] 원문 . 접두어 는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5] 원문

[6] §30에서 자신을 <보편적인 지>로 알아보지 못하는, <덜 떨어진/unmittelbar> ür-Sich 의식>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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