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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도둑질과 키보드 워리어

뽀삼님의 [학출: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에 관련된 글.

"전파도독질"과" 키보드 워리어".... 잘 어울린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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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드 고야와 공돌이 엔지니어 인문좌파가 다른점

마돈나님의 [진보활동가의 성적강박이라...] 에 관련된 글.

프란시스코 드 고야

출처:  

www.art-magazin.de/.../03_4-Vuelo-de-Brujas.jpg

 

 

이 그림은 어두운 배경에서 스폿 조명을 받으면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고문현장과 그 고문현장을 대하는 두 사람의 행동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두 사람을 당나귀가 바라보고 있다.

 

그림의 위 부분에는 Ku Klux Klan과 같이 삼각모를 쓴 세 사람이 한 사람을 고문하고 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몸을 비틀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 밑으로 한 사람은 보자기를 둘러쓰고 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땅에 엎드려 귀를 막고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프란스시코 드 고야는 귀를 틀어 막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도덕성을 문제시 하지 않는다. 멍청함의 상징인 당나귀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멍청해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멍청함은 게으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저 두 사람이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는 비겁함이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린애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게으름(Faulheit)과 비겁함(Feigheit)을 제시한 칸트가 생각난다.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 다시 보자기를 뒤집어 쓴 행동에는 비겁함이 있다. 그리고 그 옹졸함에는 게으름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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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이선스

오늘 헤겔한테 얻어 맞고 정보라이선스 라인을 1로 하향 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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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3

(§13)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갓 등장하는 단계에서는 전체가 단순함 속으로 침강하여 아직 그 안에 갇혀 있는 상태로만, 달리 표현하면 일반적인 토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의 기억 속에는 지나간 삶에서 영위했던 다채로움이[1] 아직 그대로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다.[2] 그래서 의식은 새로 등장한 형태에서 전개된 내용과 내용이 전개되는 가운데 [보편이 자기 안의 구별을 통해서] 특수한 내용으로 [망울망울] 어우러지는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의식이 이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식인데, 이런 형식에 의해서 비로서 내용적인 차이들이 엄밀하고 구별되고 그들 간의 관계가 [전체 안에서] 확고하게 정립된다.[3] 이와 같은 형식의 연마가[4] 없는 학문에는 보편적인 이해가능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5] 단지 소수의 몇 명이 그들만 소유하고 그들에게만 전수되고  그들만 알아볼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6] 우쭐거림이[7]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우쭐거림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소유물이라는 주장의 실체는 학문이 이제 겨우 [/껍데기]개념으로, 달리 표현하면 개념 속에 깃들여 있는 내면으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소수의 몇 명만의 소유라는 주장의 실체는 등장하는 단계에서 확산되지 않는 학문이 존재하는 양식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문은 완벽하고 명료하게 구별된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서 공교(公敎)적이고 이해될 수가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만 또한 학습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가 있다. 학문의 이해 가능한 형식이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쳐야 하는 학문을 향하는 공평한 길이다. 그래서 오성을 통해서 이성적인 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는 학문으로 나아가는 [학문의 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 내세우는 합당한 요구다. 왜냐하면, 오성이란 사유로서, 순수한 자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능한 것이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고 학문과 비학문적인 의식이 공유하는 것이다. 이 공유를 통해서 비학문적인 의식은 바로 학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



[1] 원문

[2]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하는 의식의 현재와 발맞추지 못하는 동시성(Ungleichzeitigkeit)이 착안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고리타분한 수구보수의 성격, 나아가서는 파시즘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3] 헤겔의 보편에서 특수를 거쳐 개별로 나가는 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성급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이고, 이것은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 될 것이다.

[4] 원문

[5] 원문 <설명하는 그리고>(explikatives Und)

[6] 원문 . 비교(秘敎)·비전(秘傳)

[7] 원문 . 실체가 없는 사이비 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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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2

 

(§12)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나타난 세계는 갓난아기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자기모습을[1] 갖춘 상태가 아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아야 [생성운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갓 등장하는 것은 다만 그것의 직접적인 존재양식, 달리 표현하면 개념만을[2] 갖춘 것이다. 건물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해서 건물 전체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듯이 전체의 개념을[3] 얻었다고 해서 전체가 다 되었다고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떡 버티고 서있는 줄기에 활짝 펼쳐진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참나무인데, 이렇게 완성된 나무 대신 도토리만 불쑥 내놓고 <참나무 봐라> 하면 누가 만족할 것인가[4].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의 정상인 학문이 등장단계에선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새로운 정신이 싹트는  터전은 다양한 교양형식이 지속적으로 변하여 폭 넓은 변혁을 이룸으로써 생산된 것이고 정신이 미로와 같은 도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이것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전하고[5]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새로운 정신의 싹은 정신이 [그전 단계에서] 차례차례 자기모습을 펼쳐나가는 가운데 확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전체를 이룩하고 나서 다시 그 전체를 자신 안으로 움켜쥐어 복귀시킨 것으로서, 말하자면 전체가 다시 단순한 개념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 단순한 개념에 깃들여 있는 전체가 다시 완성된 자기모습으로서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개념 속의 마디마디로[6] 응집되었던 정신의 갖가지 형태들이 새로운 지평 위에서 [이전 단계에서] 생성된 방향성에 맞춰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한다.



[1] 원문

[2] 원문. 이 부분은 서론 §6 <자연적인 의식은 단지 지의 껍데기일 뿐이지 실제적인 지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될 것이다.>비교된다. 여기서 <껍데기>란 유적개념과 같은 틀로 생각할 수가 있겠다. 유적 존재(Gattungswesen)와 비교해 볼 필요도 있겠다. 사람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 사람이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괴물은 되지 말자. 진보넷 블로거 배여자] 단지 유개념만 갖고 있을 뿐이다. 또 낙태법과 관련해서 보면 직접성”(“Unmittelbarkeit”)이란 태아에게 사람이라는 유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냐라는 문제다.

[3] 원문

[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다윗상과 관련하여 한 말은 여기에 대조되겠다. 동상은 내가 끌을 갖다 대기 전에 이미 대리석 블록 내부에 들어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불필요한 돌을 쳐내는 일이다. 관련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한 정신의 무리(Sprituali)의 일원이었고, 이 이단은 청교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다윗상 조각을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하고 그 진행작업에 관한 것들을 거의 다 파괴함으로써 그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가 숨겨버린 사실이다.  

[5] 원문

[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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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1

 

(§11) 덧붙이자면, 우리 시대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맞이한 과도기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정신은 그가 현존하고 또 현존하는 그 정신을 상상하는[1] 지금까지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를 과거의 것으로 침강시키는 사업을 세우고 자신의 모습을 때려 고치는[2] 일에 몰두해 있다. 정신은 절대 쉬는 법이 없이 운동하면서 전진과 전진을 거듭하지만 이것은 잘 감지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마치 태아가 조용히 영양소를 섭취하면서 오랫동안 양적인 성장만을 거듭하는 유유자적함을 최초의 숨결로 단숨에 중단하고 질적 도약을 이루어 보란 듯이 신생아로 태어나듯이[3], 교양을 쌓아나가는 정신도[4]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새로운 형태로 무르익어 가면서 앞서간 세계가 만들어 거주한 집의 이 부분 저 부분에서 미세한 것들을 하나씩 쉬지 않고 빼낸다. 그러나 집의 흔들림은 직접 감지되지 않고, 단지 그 조짐이 우발적인[5] 징후로 감지될 뿐이다. 가벼운 것만 추구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는 행동[6], 그러기에 또한 [진지함이 없는] 권태로만 가득찬 마음이[7] 기존세계에 틈틈이 끼어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알 수 없는 뭔가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 만연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뭔가 다른 것이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는 전조다. 전체의 외관은 그대로 놔두지만 그 속은 점진적으로 산산조각 내는 이 프로세스는 번쩍하는 출현으로[8] 중단되고 단숨에 새로운 세계의 상을 우리 앞에 세워놓는다.



[1] 원문

[2] 원문 변혁

[3] <양의 질로의 전환>(„Umschlagen der Quantität in Qualität“) 이야기되는 대목이다.

[4] 원문

[5] 원문 <개별적인>

[6] 원문

[7] 원문

[8] 원문 .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하이든의 성담곡 <창조> 1 <혼돈의 상상>(Vorstellung des Chaos)이 떠오른다. 우르렁 거리는 혼돈상태에서 높은 C와 함께 번개가 번쩍하듯 빛이 생성되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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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0

 

(§10) 이와 같이 학문은 포기하고, 학문대신 시시콜콜한 것에 만족하고 옹졸하고 인색한 사람이 뭔가 드높은 것에 취하여 휘황찬란해진[1] 상태를 학문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제발 그만두었으면 한다. 이렇게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나 되는 양 그런 말투를 일삼는 사람은 자기가 정말 중심을 지키고 심층까지 파고 들은 상태라고 착각하고[2] 명석함을[3] 경멸하고 意圖적으로 개념과 필연성을 멀리한다. 이런 것들은 단지 보잘 것 없는 무의미한 이승에서[4] 겨우 연명하는[5] 반성일 뿐이란다. 그러나 넓다고 자못 자랑하지만 텅 빈 것이 있듯이 깊다고 엄숙해 하는 것이 텅 빈 경우도 있다. 무의미하게[6] 이리저리 갈라지고 또 갈라지기만[7] 하는 힘만[8] 있지 그 갈라진 가지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없는 실체가 [9] 있듯이 역으로 제자리 걸음하면서 방방 뛰기만 하지[10] 밖으로 뻗어나가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안으로만 뻗어나가는, 그러기 때문에 껍데기일 뿐인 힘도[11] 있다. 정신이 발휘하는 힘은 그 크기가 자신을 밖으로 내치는[12] 힘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깊이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전개하는 가운데[13] 중심에서 벗어나 무한히 뻗어나가 자기중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가 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헤매는 상태에 도전하는 것 이상이 될 수가 없다. 여기에다 몰개념적이고 [침강한 신적] 실체에 기대어 있는 지가, 신들려, 자기의 특성은[14] 두루 계신다는 신적 존재에[15] 침강시키고 그 안에서 참답고 성스럽게 철학하고 있다고 내세우지만 그것은 사실 지가 신 앞에 부복(仆伏)해 있다기보다는 절도와[16]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은[17] 모두 상실한 나머지 우왕좌왕하여 자기 안에 우발적인 내용이 난무하게 내버려 두는가 하면 내용 속에서도 독단만 난무하게 내버려 둔다는 이면을 은폐하기 위한 짓이다. 아무렇게나 부글거리는 실체에[18]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식을 뭔가에 휩싸이게 하고 오성을 버림으로써 이젠 잠을 자는 가운데 신의 지혜를 받기에 마땅한 신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고 착각한다[19]. 그들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자는 동안[20] 뭔가를 받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줄줄이 토해내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1] 원문 <Trübheit>. 서론 §3 역자주 28 비교. 의 의미는 <혼탁>이지만 괴테의 색채론에 따르면 이런 <혼탁>을 매개로 하여 다사로운 색채가 나타난다. 이 색채론에 기대어 <Τrübheit> <휘황찬란>으로 옮겨보았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히로뽕먹고  홍콩간 상태다.

[2] 원문

[3] 원문 . Horos , <한계를 짓다><정의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경계선><정의/definition>이라는 의미가 있다. <규정성>으로 번역하지 않고 정의가 갖춰야 할 <명석함>으로 옮겨보았다.

[4] 원문

[5] 원문 <집같이 않는 집에서 살다><비참한 삶을 살다>라는 의미가 있다.

[6] 원문 . 무슨 말인지 영 알아먹기 힘들다. “유한한 다양성”?? 다양성을 이야기 하면 보통 거꾸로 끝없는 다양성이라고 하는데. 생각을 고쳐 를 다시 살펴보자. <목적>이라는 의미로서의 가 눈에 뜨인다. 예를 들어 쉴러의 질문Ende studiert man Universalgeschichte?>(무슨 목적/의미로 세계사를 공부하는가?)에서 <목적><의미>라는 의미를 갖는다.

[7] 원문 ssen>. 접두어 에 있는 의미를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과 같이 반복을 통해서 살려보았다.

[8] 원문 . 여기서 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외연>은 적적하지 않는 것 같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힘이라고 해야겠다.

[9] 원문

[10] 원문 . 독어에 이런 표현이 있다. lauter Kraft nicht laufen.><그는 힘이 넘쳐서 걷지 못한다.> 보디빌딩으로 몸이 근육으로 부풀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힘뿐이지 그것을 조정하여 밖으로 나가는 운동이 되게 모른다는 것이다.

[11] 원문 . <안으로 뻗어가는 >

[12] 원문 <Äußerung>. <외화>의 의미가 있다. <감각적인 확신>에서는 <Äußerung><말로 표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 어려운 개념이다. 고대그리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덕(Tugend, Virtus, Arete)에 속함. 델피 아폴로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hon)<절대 절도를 넘지 말 것>(mäden aga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헤겔은 <논리학>에서 를 고대그리스에 기대어 이것을 유한성과 무한성의 매개로 보고 반성철학의 악무한”(惡無限, schlechte Unendlichkeit)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반성철학에서는 무한이 유한자가 다다를 수 없는, 수학에서 n+1를 반복하듯이 똑 같은 것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진정한 무한에 다다를 수 없는 그런 무한으로 사유되는데 헤겔은 이것을 악무한이라고 규정한다.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 <꿈속에서>. 독어에 이런 표현도 있다. <아무런 노고 없이/꿈속에서와 같이 손쉽게 [주기도문과 같이] 달달/줄줄 외어둔 것을 말하듯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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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9

 

(§9) 이와 같이 [속이 텅 비어있어] 구할 줄도 모르고 [시시콜콜한 것만 받아도 만족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줄줄 모르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옹졸한 태도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학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만[1] 몰두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갈라지는 자신의 삶과 사상은 신성이라는 두루뭉실한 안개로 덮어놓고 그런 불분명한 신성이나 어떻게 든 향유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런 것을 찾아 나서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2]. 아무튼 그는 쉽게 뭔가 고무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이것을 수단으로 하여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양 으쓱거릴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을 지켜 경건한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3] 빠져서는 안된다.



[1] 원문

[2]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3]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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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8

 

(§8)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억지에 가까운, 다른 이에 뒤질까 봐 앞을 다투듯이 하는,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노력이 있다. 아무튼 이런 노력으로 관능적이고 비속하고 개별적인 것에 뿌리를 내리고 기생하는 사람들을 뽑아내어 그들의 눈길을 하늘높이 떠 있는 별들로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신적인 것은 모두 망각하고, 흙과 물만으로 모든 욕구를, 발생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충족시키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로 떨어졌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예전에는 하늘은 온갖 사상과 형상으로 충만하게 꾸며진 상태였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의미를, 그것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빛의 줄기를 통해서 부여 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승의 지금 이 자리에[1] 머무르는  대신 늘 하늘에 머물렀고, 이승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들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저승의 영원한 현재로[2] 늘 흘러 올라갔다. 이러한 정신의 눈을 하늘에서 떼어내  이승을 바라보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천상계에서만 가능했던 명료함을[3] 몽롱하고 어지러운 것[4] 외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었던 이 세상에도 스며들게 노력하여[5] 현재적인 것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 즉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중요하고 유효한 것으로 수용되도록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젠 다시 그와 정반대 되는 빈곤을[6]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7] 지상계에 너무 강하게 뿌리를 내린 상태여서 이를 다시 위로 치켜 올리려면 예전과 같은 강제력이 필요해 졌다는 것이다. 정신의 빈곤함은 사막을 헤매는 자가 한 모금의 물 외 다른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극심한 상황이 되어서 신적인 것을 한번 느껴보기만 하자고,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갈증을 축여보자고 애타게 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이 이따위 것에 만족하는 데에서 그의 상실이 얼마나 큰가를 가름할 수가 있다.



[1] 원문 현재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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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7

 

(§7) 철학에서 이와 같은 요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다 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자기자신을 자각하는 정신이 현재 처해 있는 단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자각적인 정신은 주어진 삶에 온전히 순응하는 삶에서 교양에 의해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사상의 터전에서는 바탕이 견고한 삶을 영위해 왔었는데[1] 이제 와선 사상의 터전에서도 그런 견고한 바탕을 상실하고 거기서 벗어나 떠도는 상황에[2] 처해있다. 다시 말해서 [루터와 같은] 믿음의 직접성[3], 또는 [데카르트와 같은] 확신이 주는 안정과 안심[4],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면서 뭔가 확실하고 견고한 것을 찾아 나섰던] 의식이 다시 신과의 화해를[5] 통해서 신이 대내외적으로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다는 만족에서 벗어나 있다. 자각적인 정신은 위와 같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젠 아무런 바탕도 없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는[6]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붙들어 쥐는 반성이라는[7] 반대의 극으로 흘러 갔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성에서도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간 상태다. 자각적인 정신은 본질적인 삶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상실과 더불어 자신의 내용이 되는 것은 이젠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남은 것이라고는 죽는 일밖에[8] 없다는 점도 의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에 맞선 정신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갈 곳을 모두 상실하고 부랑하는 찌꺼기와 함께 방황하는 일은 그만두고 이젠 덜덜 떨고만[9] 있다고 자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굴욕적인 자기 모습을 한탄하면서 철학에게 요구하기를 현존하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게 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예전과 같이 알차고 견고한 삶의 터전이[10] 먼저 철학을 통해서 다시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구를 받아들여 철학은 이제 침강한 실체성을[11] 열어 젖혀 다시 자각으로 끌어 올리고 어지러운 의식이 사유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12] 다시 입도하도록 하는 일은 그만두고, 사상의 배설물을 모두 한데 쏟아 부어 잘 흔들어서 구별을 두는 개념은 제어하고 위대한 존재자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만을[13] 만들어 내어, 심층적인 자기통찰보다는 뭔가 위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수습하는데[14]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종교, 그리고 사랑은 모두 위와 같은 것을 덥석 물게 하는 충동을 주는데 요구되는 미끼일 뿐이다. 개념이 아니라 망아의 경지가, 냉정하게 전진하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니라 부글부글하는 영감이 알찬 삶의[15] 풍요함을 영위하는 태도이며 그 풍요함의 지속적인 확대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1] 원문

[2] 서론 §8와 비교해 볼만 하다.

[3] 원문 . <아무런 중매가 없는 믿음의 직접성>. 헤겔은 이것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신이 주는 안정과 안심>도 폄하하지 않는다. 전자는 루터를 두고 하는 말이고, 후자는 데카르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헤겔이 폄하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더 높은 단계의 사유를 요구하고 또 그럴 바탕이 마련되었는데, [헤겔이 보기에] 그 밑을 기면서 그것을 별난 것으로 내놓은 동시대의 글쟁이들이다. 루터의 <믿음의 직접성>, 즉 신과 나 사이에 아무도 중매자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즉 교황도 그럴 수 없다는 믿음이 루터로 하여금 1521.4.17보름스 종교재판에서 황제와 교황사자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있는 힘이 되었다. <믿음의 직접성>이 의식에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양심>이다.

[4] 원문 . 여기서 테마가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다. 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신이 있다면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다루는 제3성찰까지 한번 살펴보고 지나가자.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신의 사기꾼여부문제는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1성찰에서 학문에서 뭔가 견고하고 항구적인(“firmun et mansurum”) 것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조금이라고 의심이 가는 것이 있으면 완전히 없는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방법을 (“Satis erit ad omnes rejiciendas, si aliquam rationem dubitandi in unâquâque reperero.”) 세운다. 2성찰에 들어가 제1성찰에서 세운 방법을 적용하여 무너지지 않는 것”(certum inconcussum)을 찾아 나서는데 무너지지 않는 것이 없다. 사기꾼 신이 나를 갖고 놀 수 있다는 개연성(Sed est deceptor nescio quis, summe potens, summe callidus, qui de industriâ me semper fallit)과 오성의 오류를 보면 확신할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와중에 확실한 것이 나타난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기꾼이 나의 혼을 가지고 장난질한다고 해도 그가 달성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는 뭔가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Haud dubie igitur ego etiam sum, si me fallit; & fallat quantum potest, nunquam tamen efficiet, ut nihil sim quamdiu me aliquid esse cogitabo). 그래서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나를 의식적으로 파악할 때 필연적인 진리는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라는 (quoties a me profertur, vel mente concipitur, necessario esse verum.) 것이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내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것인데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내 몸을 포함해서 다 떼어놓을 수 있는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cogitatio. (“Cogitare? Hic invenio, cogitatio est, haec sola a me divelli nequit.”/생각? 여기서 나는 찾는다. 바로 생각이다. 이것만이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res cogitans”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Res cogitans <> <바탕/본질>(Substanz).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세계다. 모든 것이 의심이 되어서 없다고까지 했는데 그럼 외부세계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신은 존재하고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신이 될 수 없다는 성찰이 이루어지고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res extensa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안심과 안정이 되는 바탕을 신과의 화해를 통해서 얻게 된다. 신에 대한 논리전개는 다음에 살펴보자.

[5] 원문 öhnung mit dem Wesen>

[6] 원문

[7] 원문

[8] 원문 유한성. 죽음. 의미 없는 것.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Substanz를 의식으로 만드는 문제, 즉 주체로 만드는 문제는 §17에서 다루어지는데 <정신현상학>, 아니 헤겔 철학의 정곡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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