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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0

 

{서설 §30 번역에 앞서서: 서설 §29에서 이야기 된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은 서론에서 문제되었던 회의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회의주의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저 관조하겠다고 하는 정신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회의주의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회의주의에 나타나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으로 구별되지 않는 끝없는 과거형이다. 이런 회의주의에 시간성을 적용하는 것은 학문(정신=헤겔)이 하는 것이지 회의주의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헤겔은 서론에서 자인한다. 앞 문단 마지막 문장에서 전환하기만(의식의 형태를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Fürsichsein>의 시간성과 연계하여 보면 서론에서 제기된 문제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의식(Für-Sich)이란 의식하는 한 <지금>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성>을 갖는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회의주의를 어떻게든지 현재에 갖다 놓겠다는 것과 같다.

문제는 전환되었다고 해서 과연 의식이 정신의 곁으로 한발 다가 갔는가란 문제다. 서설 §30 첫 문장에 나오는 표현 을 어떻게 번역하냐에 따라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질 수 있겠다. 에 스며있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강제로 취하다> <그대로 영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은 희랍어 나누다, 할당하다, 분배하다; 목장으로 할당하다, 방목하다>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의 명사형이 인데, 어디에 악센트를 두냐에 따라서 목장>이란 의미와 >이란 의미가 있다. 독어에서는 로 명사화 되었다. 전자는 <강제로 취하다>라는 의미가 있고, 후자는 귀를 기울여 듣다>, nunft/이성>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방을 강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행위다.

정신과 형식으로 전환하는 의 운동을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비교하여 살펴볼 수가 있겠다. 손님을 <나의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대접할 수가 있겠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 취하는 자세다. 그런데 손님이 주인(정신) 집에 머무를 때 주인을 과연 <나의 다른 모습>으로 생각할까? <어둠이 깔리기 전에 어둠과 이미 인사를 나눈>[1] 손님이 정신의 집에 숙박과 식사를 구하려 들른다. 정신이야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서 손님이 <나의 다른 모습>이라고 알아볼 수가 있겠다. 관련 한스-디터 바르(Hans-Dieter Bahr)는 손님에게 이름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얼 원하는가 물어보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한 문화도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손님이 주인의 현재시간(presence)으로, 주인의 코앞에 있는 것으로 재현(re-presentation)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또 그래서는 안됨을 느낀 결과라고 한다.[2]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서설 §30 번역에 착수하겠다.}  

     

(§30) 이와 같이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 <자기의식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여기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3]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많지만] 다할 필요는 없다. [특히 힘든 일인] 실존자를 지양하는[4] 운동에는 우리의 노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5] 그러나 [우리가 올라와 있는 경지에서 볼 때] 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뜯어고쳐야[6] 하는 나머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기의식의] 형식을 접해보고 나서 그에 대한 표상을 갖고, 그럼으로써  [자기의식의] 형식을 모두 다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정신의 실체로 환원한 실존자는[7] 위와 같은 최초의 부정을 통해서[8] [자기의식을 모두 다 아는 경지에 올라왔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가 올라온 경지는] 이제 겨우 <자기>라는 [정신의] 터전에 옮겨졌다는 것 외 아무것도 내 놀 수가 없는[9] 상태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란 터전에 이전함으로써 스스로 취득한] 그의 재산이 되는 것은 실존자에서와 같이 [아직] 그것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직접성과[10] [가치가 살아있는 노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어디에나 갖다 될 수 있는 부동의 [절대적인] [11] 성질을 갖는다. 위와 같은 식이라면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는 겨우 [Fürsichsein] 표상으로[12] 이전된 것일 뿐이다. —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가 겨우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확인된[13] 것으로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이[14] 더 이상 취급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은 그것을 더 이상 다루지도 않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실존자를 이렇게 처분하는 활동이 단지 [덜 떨어진] 특별한, 자신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Fürsichsein으로서의] 정신이 하는 운동이라면, 지는 이와 반대로 특별한 정신의 표상에 대립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표상으로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접해본 것이라고[15] 장담하는 [덜 떨어진] [rsichsein]에 대립하는 것이다. 지는 이렇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활동하는 것으로서, [이런 보편성이] 바로 사유가 애써[16] 지향하는 것이다.



[1] Paul Celan의 시집 문턱에서 문턱으로>에 실려있는 시 <손님/der Gast>의 처음 두줄.

[2] Hans-Dieter Bahr, Die Sprache des Gastes, Eine Metaethik, 1994, 19쪽 참조.

[3] 원문

[4] 원문 . <줍다>라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보관하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리다>, <폐지하다>란 세가지 의미가 있다. 변증법적인 운동이 이 세가지를 담보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5] 이 이미 운동을 했기 때문에. 지양하는> 운동의 주체가 실존자/Dasein이다. 에서의 2격은 주어격 2격이다 (genitivus subjectivus).

[6] 원문

[7] 원문

[8] ürsichsein>의 형식으로 전환함으로써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ültigkeit>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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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9

(§29) 학문이란 이렇게 학문을 형성해 나가는 [의식의] 운동을[1]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두루[2] [살펴보고] [각각] 필연성에 따라서 서술하는 가운데 또한[3] 이미 정신의 계기와[4] 재산으로 굳어진 것들이 각기 어떻게 고유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지 서술하는 것이다. 이런 서술이 목적하는 바는 [등장하는 의식으로서의] 정신이 [지에 푹 빠져들어서] 지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5] 통찰하는 것이다. 조급한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중간단계를[6] 건너 뛰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절대]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계기가 하나같이 다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장구한 도정을, 그 도정이 [끝없이] 길다 하더라도, 인내하며 통과해 나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계기에 접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운동을 중지하고 그 계기에  [특정한 시간을 할당하지 않고, 거기에 영원히 머무르겠다는 심정으로,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자/대상에 푹 빠져들어가 영원히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데는 영원을 투자하겠다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곁에 있으면 끝이 없는, 끝이 안 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루함도 느끼지 않고, 알찬 순간순간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하염없이 머물러야[7] 한다. 왜냐하면, [전체 안에서] 한 계기를 이루는 것을 뚝 떼어내어 따로 놓고 보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적으로 완성된[8]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별적인 형태들을 절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란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영원의 관점아래관찰하는 것으로서][9] 이런 관찰이란 계기의 규정성을[10]완성된 형태로, 혹은 [그때그때의 현실에서 완성된 전체를 실현하는] 구체성으로 관찰하는,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개별적인 규정이[11] 갖는 특성 안에서 [궁극적인] 전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 이렇게 인내하는 가운데 세계정신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모든 형식을 하나하나 통과해나가고 세계사의 각 단계에 처할 때마다 거기서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한 자기의 형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취하는 엄청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걸머졌다. 이런 노고가 없었다면, 아니 이런 노고에 미달했다면 세계정신은 자신에 대한 의식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실체가 정신인 이상, 그리고 세계정신이 위와 같은 노고를 해야만 했다는 사태를 놓고 보면 개인도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고로는 자신의 실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시대를 타고나는[12] 개인은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력만 기울여도 된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정신이, 개인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념으로[13]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고의 대상이 되는] [개념의] 내용은 [한때의] 실재성이 다시 가능성으로 완전히 침강하고 응집되어[14] [그 한때의] 직접성을 극복한 상태로 나타나 있으며, [개념의] 형태를 보자면 [손 쓸 필요 없이][15] 간소화된 상태인[16] 단순한 사상의 규정으로 이미 보편화되어[17]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타고난 개인에게] 내용이란 이미 사유된 것으로서 [한 시대가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실체의[18] 재산에 속한다. [그래서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사유의 내용을 갖추려고] 실존하는 것을[19] 개념의 단순성으로[20],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eidos와 같은] 애당초의 본체가 되든 아니면 실존자[21] 속에 스며들어 있는 [to-ti-en-einai로서의 ousia와 같은] 본질이 되든, 아무튼 [과거의] 실존을 애써 개념의 단순성인 형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없다. [시대를 타고나는 개인이 해야 하는 일은 이제]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을[22] 상기하여 의식의 형태를[23]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뭐 한다는 말인지[24]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 원문

[2] 원문 ührlichkeit>

[3] 원문 . 여기서 를 줄인 것으로서 그리고>라는 의미다.

[4] 원문

[5] 원문 . 여기서도 <계사>가 아니라 <존재하다>란 의미로 번역해야 하겠다. <지는 무엇인가>라기 보다는 <>의 실존/현존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6] 원문 . 여기서 <수단>이 아니라 중심, 이런 의미로서 중간에 있는 부분/ in der Mitte befindlicher Teil>이라는 본래적인 의미로 번역함이 옳은 같다. 정신의 도정이 수단만은 아닌 것 같다. 수단이라고 하면 더 좋고 아니면 더 나쁜 수단이 있을 텐데, 헤겔이 이야기하는 로서의 도정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이런 평가(Qualifikation)가 있을 수가 없다. 

[7] 원문 . 이런 의미의 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5부 명제 31에서 말하는 정신은 영원한데 대상을(res) 대하는데 있어서 [이 타자로서의 대상을] 영원의 관점아래 [다시 말해서 영원히 그 곁에 머무르면서] 바라보는 한 그렇다.(Mens aeterna est, quatenus res sub aeternitatis specie concipit.)라는 것에 전제되는 것이고, 이 취하는 태도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Michael Theunissen, Freiheit von der Zeit. Ästhetisches Anschauen als Verweilen. 1990.4.7-6.24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회(GegenwartEwigkeit. Spuren des Transzendenten in der Kunst unserer Zeit) 카타로그, 35-40; Michael Theunissen, Negative Theologie der Zeit 등 참조). 그리고 바로 이점이 횔더린, 헤겔, 쉘링을 스피노자에 빠지게 점이 아닌가 한다.

[8] 원문

[9] 원문 절대적으로 관찰해 보면>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5부 명제 31에서 말한 <영원의 관점아래/sub specie aeternitatis>를 헤겔이 훔친 것이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 바닥에 깔려있는 것으로 질(hyle)로서의 과 같은 보편적인 것이 된 형태.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ürsichseins>

[2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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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렘이 아님) 무슬림 아랍권에서 유태인이 평화롭게 살 수있는 전통이 있을까?

관련 Robert Satloff의 다큐 "Among the righteous" (www.pbs.org/newshour/among-the-righteous)

를 참조해 볼 수도 있겠다. 2차대전시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을 구출한 아랍인에 대한 다큐다. 유태인 학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야드바셈"은 이 아랍사람들을 "정의로운 이방인"으로 기념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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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28

(§28) 지금까지는[1] 개인이 교육을 통한 교양을 쌓지않은[2] 상태와 입장에서 벗어나 지를 향하도록 하는 과제가 보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것은[3] 보편적인 개인, 즉 자아의식 수준에 와 있는 정신의 형성을[4]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젠[5] [교양을 갖추지 않은] 개인과 보편적인 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편적인 개인 안에서는 모든 계기가[6]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온갖 요소들이 [보편적인] 형식을[7] 구체적으로[8] 취하기, 즉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지기[9] 때문이다. [반면] 특수한 개인은[10] 일개의 형태만을 붙잡고 있는 구체성으로서 모자란/부족한 정신이다[11]. 이러한 정신이 현존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눈가리개가 채워진 말처럼 뜻하는 바가 하나밖에 아닌] 일개의 규정성이[12] 삶 전체를 지배하여 [인상에서와 같이 움푹 페인 선명함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규정성들은 오직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일그러진 흔적으로만[13] 남아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고, 이러 저리 흩트려진 상태로[14]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교양을 쌓아가는 정신은 여러 단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데] 정신이 올라와 있는 지금단계와 그전 단계를 보면 정신이 낮은 단계에서 향유했던 구체적인 삶이[15] 지금단계에선 [잠재적 기억과 같이] 잠잠한[16] 품위(品位)[17] 침강되어있는 상태다. 예전엔 모든 정성과 힘을 들여 붙들었던 일이[18] 이젠 겨우 흔적으로 남아있고, 뚜렷했던 그 형태의 이모저모는 [마치 어렴풋한 느낌에 쌓여있듯이] [아무런 식별이 없는] 단순한 그림자가[19] 되어버린 상태다. [특정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높은 정신의 단계로 계속 올라가는 개인에게는] 바로 그 높은 단계의 정신이 [그런 개인 안에서 태동하는] 실체가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인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위와 같은 [삶의 진행 속에서 누적된] 과거가 되고, 그는 이런 과거를 더듬어 나아가면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데], 이는 보다 높은 학문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오래 전에 터득한 예비지식을 다시 한번 더듬어보면서 그 내용을 되살리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 그러나 기억 속으로 침강한 예비지식을 되살린다고 해서 다시 한번 그 예비지식 자체에 푹 빠져들어가[20] 그것을 움켜 안으려고[21]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또한 내용면에서도 보편정신이 거쳐간 모든 형성단계를[22]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이 통과해야 하는 도정은 보편정신이 이미 그때그때 취하고 벗어놓은 단계적인 형태로서 평탄하게 닦아놓은 도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수준을 놓고 보자면 예전 시대엔 성숙한 정신수준에 오른 성인이나 고민했던 것들이 이제 와선 어린아이들에나 어울리는 지식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연습용으로, 아니 그들의 심심풀이용으로 침강한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의 진학단계에서[23] 세계 교양의 역사를 그림자의 윤곽을 도려낸 것과 같이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신이 과거에 영위했던] 삶을[24] 자신의 소유물로 이미 획득한 보편정신이 [더 높은 정신의 단계로 올라가려는] 개인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실체는 개인에게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외적인 실체로서 정신은] 개인에게 [사람이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관계, 즉 자연의 산물을 먹고 싸는 관계와 유사한] 무기적 자연과 같은 것이 된다. — 이처럼 내용적인 면에서 교양을 쌓으라고 교육이 다그치는 것은[25] 개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와 같이 널려있는 것을[26] 애써 획득하라는[27] 것이다. [자신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무기적인 자연을 다 섭취하고 소화하여[28]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29] 이런 [개인이 교육을 통해서 교양을 쌓아가는 운동을] 실체로서의 보편정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실체가 스스로 자아의식을 발동시켜 자신의 [이리저리 갈라지는 외화로서의] 생성과 [이런 외화에서 다시 단순성으로 침강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1] 원문 . 의 과거형으로서 <그랬다>라는 의미. 

[2] 원문

[3] 원문에 사용되는 는 앞의 것을 설명하는 <그리고>

[4] 원문

[5] 원문에 사용되는 <->가 시각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이렇게 번역하였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ändige Geist>. <불완전한 정신>

[12] 원문

[13] 원문 Zügen>

[14] 원문 . 다른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저 흐트려져 있는 상태.

[15] 원문

[16] 원문

[17] 원어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ädagogischen Fortschreiten>. 아주 단순하게 보면 학교교육과정이란 의미. 

[24] 원문

[25] 원문 , , 에서 사용된 가정법을 이렇게 교육이 내리는 명령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26] 원문

[27] 원문

[28] 원문

[29] 원문 . 에 스며있는 의 의미를 살려 <명령하다, 부리다>란 의미를 번역에 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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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7

 

(§27) [의식이] 이렇게 학문의 [추상적인] 바탕인 보편성의 경지로 올라오는[1], 달리 표현하면 지의 생성을 서술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이다. 지가 취하는 첫 모습, 달리 표현하면 덜 떨어진[2] 정신이 취하는 모습은 감각적인 의식으로서 정신과 완전히 단절되어[3] 있는 모습이다. [사태가 이렇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본래적인 지가 되기 위해서는,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학문이 향유하는 터전인 순수한 개념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서는 머나먼 길을 떠나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과 함께] 자신을 챙기고 또 챙기는 노고를[4]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와 같은 [의식이 스스로 하는 운동인] 생성[을 서술하는 것]은 의식이 취하는 내용과 [이와 함께] 의식 안에서 드러나는 [의식의] 여러 형태를 진행순서에 맞춰 차례차례 정리해놓은 것이 될 터인데, 영리하고 잽싼[5] 혹자는 이것을 비학문적인 의식에 고삐를 채워 학문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쯤으로[6] 생각할 수야 있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또 혹자는 [이 서술을] 학문의 초석을 다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학문에게는 [이 서술이][7] 뭔가 좀 다른 것이다. 더구나 학문의 초석을 다진다는 것을[8] 잘못 이해한 나머지 절대적인 지의 출발점을 알아차려 학문에 바로 탑승했다는 신바람에 총알 날리듯 선언을 펑펑 날리면서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조차 없고 이런 총알 같은 선언으로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처리됐다는 식의 신바람은 더욱 아니다.



[1] 원문 überhaupt>. <überhaupt/자세한 것들은 다 빼놓고, 어쨌든>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힘든 독어에 속한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쓰여질 때  더욱 그렇다. 이 낱말은 <über houbet>란 숙어가 한 낱말이 된 것인데, <머리 없이/위로, 하나하나 자세한 것을 빼놓고, 통째로>라는 의미다. 이런 의미로 원래 가축매매에서 사용되었고, 17세기까지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überhaupt kaufen>하면 고기를 한 근, 두 근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를 <통째로 사다>라는 의미였다.

[2] 원문 . <덜 떨어진 놈>이란 의미.

[3] 원문 . 의 어원은 <단절>을 의미하는 인도게르만어 . 

[4] 원문

[5] 원문 ächst>

[6] 원문 . 공장노동자는 숙련면에서 두 갈래로 구분되는데 전문.숙련노동자> 가 그것이다. 여기서 이란 보통 컨베이어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작업자리에서 직접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가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접두어 에 이런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고삐를 채우다>라는 표현을 첨가해 번역해 보았다.

[7] 원문 Begründung, der Wissenschaft>. <또박또박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한 대목이다. 처음에 ündung> 다음에 오는 쉼표를 그냥 잘못 찍은 쉼표로 생각하고 <Βegründung der Wissenschaft/학문의 초석다짐>으로만 이해하였는데, 꼼꼼한 헤겔이 아무런 생각 없이 쉼표를 찍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 자세히 살펴보니 내용이 정확하게 잡힌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헤겔이 이야기하는 참다운 <학문>에게 뭔가 좀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쉼표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는 <정신현상학> <학문>과의 관계가 특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헤겔이 말하는 학문을 <논리학>으로 이해하고 <논리학> <정신현상학>의 관계, 달리 표현하면 <정신현상학>이 헤겔의 철학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논란이 있다. 혹자는 [특히 Pöggeler] <정신현상학>의 서론과 서설간에 체계적인 단절이 있다고 주장하고 <정신현상학>을 헤겔 철학시스템에서 제외하는 경향도 있다. 이 문제는 의식의 운동이 정말 스스로 하는 운동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계되어 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또박또박 읽기>와 인문과학발전은 정비례관계인 것 같다. 독어로 <읽다>인데, 이 낱말을 원래 이삭과 같이 흩어져 있는 것을 <주워 모으다>라는 의미다. 옛날 배고픈 시절에 추수한 논밭에 흩어져 있는 씨알 하나를 놓칠까 봐 눈을 부릅뜨고 찾아 헤맸던 배고픔으로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독일 학자들은 이런 배고픔으로 책을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라는 낱말에 스며있는 의미 때문일까?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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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6

 

{인터메쪼 §26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왜 정신현상학>(Warum der Phaenomenologie)이란 질문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25까지는 정신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이 하는 운동을 마치 엑스레이사진처럼 투영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앙상한 뼈만 있고 살과 피, <생명>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요점은 의식이 스스로 운동하는 <자기운동>을 통해서 <정신>, <학문>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긴데, 역자에게는 이것이 아직 설득력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정신현상학> 서론 번역에서 지적하였듯이 <관조하는 우리의> 억지가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왜 정신현상학>이란 질문은 사실 <의식이 자기운동을 하는 힘은 어디서>라는 질문이다. 역자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가 § 26이하 [관조하는 우리의] <정신> <자아의식>간의 다툼으로 다시 불거진다.-역자}

 

(§26) 자기와 완전히 다른 타자존재에서 자기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은 [1] [모든 사물이  에테르[2] 안에서 존재하듯이] 지가 보편자 안에서 존재하는 모습이며, 바로 이것이 학문을 지탱하는 바탕 [3] 및 학문이 자라나는 토지를[4] 이룬다. 철학을 시작하는 마당에서는 자아의식이 이러한 터전에 자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터전은 바로 자기 모습을 갖춘 상태로 나타나지 않고[5] 오로지 그가 생성되어가는 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자기 투명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시작단계에서의] 보편적인 터전은 아무런 매개작용이 없는[6] 순수한 정신일 뿐이다. — [보편적인 것의 실존 양식인] 이와 같은 단순성이 바로 오직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유의 토지가 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7] 정신이 실존하는 터전이 정신의 실체 전반이 됨으로 정신의 직접성이란 무아경에 빠진 실체와[8] 같은 것이 된다. 이때 반성이라는 것도 역시 단순한 반성일 뿐인데, 이것은 [an sich für sich가 구별되지 않는] 직접성이 [이렇게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홀로 우쭐하는[9] 것이다. 정신의 이런 존재양식은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기 안으로만 반성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아의식이 학문의 터전이 된다면] 학문이 자기 곁에 있는 자기의식에게서 바라는 것은 자아의식이 스스로 이와 같은 에테르로 올라온 이유가 학문과 함께 그리고 학문 안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며 사실 그렇기를 바랬다는 것을 깨달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자아의식의 경지에 오른 개인이 학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학문이 서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그의 [자아의식]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들춰 보여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자아의식의 절대적인 자립성에 기반한다. 자아의식이 소유하는 지의 모든 형태는 이와 같은 절대적 자립성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학문에 의해서 그 지가 인정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지는 절대적인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직접적인 자기확신, 이런 표현이 선호된다면, [자아의식 안에 있는] 지의 무조건적인 존재양식이다. 이렇게 대상적 사물이 자기와 대립하고 자기는 대상적 사물과 대립한다는 것이 지의 바탕이 된다는 의식이 취하는 입장은 학문이 보기에는 학문과는 전혀 다른 것[10], 즉 의식이 자기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 되는 반면, 의식에게는 학문의 터전이 의식과는 동 떨어져 있는 피안으로써 의식은 학문의 터전에 들어가면 더 이상 [절대존재인] 자아를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의식과 학문 양쪽 모두는 상대방을 진리의 전도된 모습이라고 우길[11]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적인 의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당기는 것이 있어서, 밑도 끝도 없이[12] 자신을 한번 학문에 내던져보리라는 것은 의식이 돌연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선 자세로 걷는 시도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학문에 입문하려면 이런 익숙치 않는 자세를 취하고 그 상태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구속은 아무런 준비가 없는 홀연한 의식에게는 아주 불필요한 폭력으로, 한발 짝 나아가 그것도 부족해 그 폭력을 자행하라는 부당한 요구로 다가온다. — 학문이 자기야 무엇이라고 말하든 혼자서 그러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러나 학문이 덜 떨어진[13] 자기의식과 관계할 때에는 그것에 상반(相反)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면, 자아의식은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 원리를 갖기 때문에[14] 학문 밖에 있는 자아의식이 보기에 학문은 비실재성 형태를 갖는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학문의 터전을 자기확신으로 나타나는 자아의식과 통일시켜야 한다. 아니 이런 학문의 터전이 자아의식 자체에 속해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떻게 그러한지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학문의 터전과 통일된] 실재성을 갖추지 못한 자기확신으로서의 자아의식은 단지 로서 학문의 내용이 될 뿐이다.  이런 는 단지 아직 내면에 잠겨 있는 목적일 뿐으로서 [전개되어 완성된] 정신이 아닌 정신의 실체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로서의 자아의식은 자아를 완전히 외화하여[15] [외화된] ür sich> 모습을 갖춰야 한다. [자아의식이 학문으로 나아가려면] 이렇게 외화된 것이[16] [이렇게 외화된 자신의] 모습과 자아의식이 하나를 이룬다고 알아봐야만[17] 한다.[18]



[1] 원문 . 말이야 엄청 멋있지만 이 말이 뭘 의미하는지 현상적으로 명시되지 않으면 그냥 멋있는 말뿐일 것이다. 정신현상학관련 폐단이 있다면 [현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주문을 외우듯이 달달거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어쩌면 역자도 이미 이런 폐단에 빠져있을 수도 있겠다. 이런 폐단은 또 구멍가게에서 사탕하나 사면서 백만원짜리 수표를 꺼내는  짓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정신현상학>도 리트머스테스트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닌바, <정신현상학>을 읽는데 <임금님 발가벗었네>하는 더럽혀지지 않은 눈과 마음가짐도 필요한 것 같다.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라는 표현일 것이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정신>에 대하여 한가지만 살펴보고 지나가자. <철학 개념사 사전/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에서 <정신> 대한 논문 일부를 맡은 풀다(Fulda) 헤겔이 1797년까지 칸트주의자였고 그때까지 <정신>을 몽테스키외와 헤르더식으로 이해했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게 된 계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횔더린(Hölderlin)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였다고 한다 (같은 , 3 191 f. 참조).

 

하나님 나라(Reich Gottes)라는 구호를 다짐하고 헤어진 세 친구 횔더린, 헤겔, 쉘링 사이에는 편지와 만남을 통한 교재가 계속 이루어진다. 그러나 헤겔과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에서와 같이 장기간 심도 있게 교재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말(철학)동무 없이 외롭게 철학 외 경제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다방면으로 학문을 쌓아가던 헤겔은 횔더린의 알선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도주유통업으로 부자가 된 고겔(Gogel)의 가정교사가 되어 1797 1월 프랑크푸르트로 오게 된다. 당시 횔더린은 1796.1.10 이후 곤타르드(Gondard)란 은행가의 집에서 가정교사(Hofmeister)로 일하고 있었고, 가정교사병(Hofmeisterkrankheit)에 걸려 집안주인 주제트(Susette)에게 홀딱 반하고, 그런 상태에서 <휘페리온>을 집필하고 있었다.

 

헤겔이 훨더린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는가는 그가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권고에 답하는 시 형식의 1796.8 답장에서 엿볼 수가 있다. 횔더린에게 헌사한 란 제목의 이 시에서 헤겔은 횔더린을 사랑하는 자여(Geliebter, 요새말로는 자기쯤 되겠다.)라고 부르고 횔더린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의 모습이, 사랑하는 자여, 내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너의 모습과 함께 지나간 날들의 환희(Lust)가 살아난다. 이렇게 [과거를 상기시키는] 환희를 맛보지만 그보다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더욱 달콤한 기대가 나를 사로잡는다. 그런 가운데 너를 얼싸안는 사무친 사모와 열정의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친구의 마음가짐, 몸가짐, 뜻하는 바가 헤어진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가 서로 훔쳐 살펴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지난 언약을 버리지 않고 지켜 더욱 견고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발전시킨 친구를 만날 것이라는 확신이 주는 기쁨(Wonne)으로 이어진다. 아무런 맹세는 없었지만 우리 가슴 속에 뿌리내린 이 언약은 오직 자유로운 진리만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 생각과 감각에 족쇄를 채우는(regeln) 겉치레와는 (Satzung) 절대,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이었지 않는가. ( [...] Dein Bild, Geliebter, tritt vor mich,/ und der entfoh'nen Tage Lust; doch bald weicht sie/des Wiedersehens süssern Hoffnungen -/ Schon mahlt sich mir der langersehnten, feurigen/ Umarmung Scene; dan der Fragen, des geheimern/ Des wechselseitigen Ausspähens Scene,/ was hier an Haltung, Ausdruk, Sinnesart am Freund/ sich seit der Zeit geändert, der Gewisheit Wonne,/ des alten Bundes Treue, fester, reifer noch zu finden,/ Des Bundes, den kein Eid besiegelte,/der freien Wahrheit nur zu leben,/ Frieden mit der Satzung/ Die Meinung und Empfindung regelt, nie nie einzugehn. Peter Härtling, Hölderlin (2001) 400쪽에서 재인용).

 

주제트와의 연인관계가 소문거리가 되어 횔더린은 결국 곤타르트의 집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 횔더린의 광기는 심해지고 친구들, 특히 신클레어(Sinclair)의 보살핌으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남독 지하혁명세력에 간여하지만, 프랑스 보르도에 가정교사자리가 생겨서 거기까지 걸어갔다 온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미쳐버린다. 역자는 횔더린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횔더린은 자아의식(Selbstbewusstsein) <자유의 감옥>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식의 <자유의 감옥>에서의 탈출구를 <사랑>에서 찾았지 않았나 한다.

 

아무튼 위에서 언급한 <철학 개념사 사전>에서 풀다는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 Hegel und Hölderlin, in: Hegel im Kontext (1971) 22ff.)와 하넬로레 헤겔(Hannelore Hegel: Isaak von Sinclair zwischen Fichte, Hölerlin und Hegel (1971) 68ff.)을 참조하여 헤겔이 횔더린을 만남으로써 [자아의식의] 자유개념을 모든 현실의식의 바탕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칸트식으로 자기관계(Selbstbeziehung)로만 파악해서는 충분하지 않고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Hingabe/헌신으로 보충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지적한다. , 대립을 빗는 자유의 행위가 (entgegensetzende Tätigkeit) 통일(Vereinigung)이라는 상위원칙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원문 <Äther>. <파란 하늘>이란 의미. 불을 지르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래 <불타는 것>이란 의미.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사는 영역인데, 헤라클리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런 어디에 있는 무엇에든지 적용되는 우주질서는(Kosmos) 어떤 신이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 우주질서는 어디까지나 항상 있었던 것이고 현존하고 또 앞으로 존재할 영원불멸(aeizoon)(pyr)로서, 자기 자신의 리듬과 절()에 따라 불거지고 사그라지는 불이다.(Kosmon tonde, ton auton apanton, oute tis theon oute anthropon epoiesen, all en aei kai estin kai estai pyr aeizoon, haptomenon metra kai aposbennymenon metra. (DK[Diels Kranz] 22 B 30). 이런 의미에서 에테르는 근원소재라는 의미를 갖는다. 관련 에테르는 자연과학발전에서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광학에서 빛의 굴절의 법칙 등을 고민한 데카르트에서 시작해서 빛, 중력, 전기파 등의 작동을 담보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것도 한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이클슨 모올리 실험을 거쳐 상대성원리에 이르면 에테르는 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지만 양자이론에서는 다시 에테르를 가정하는 경향도 있다. 에테르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현대물리학자한데 가서 한번 물어봐야 할 사항이 아닌가 한다.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ärte Wesenheit>

[9] 원문 ür sich>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cogito ergo sum과 비교

[15] 원문 äußern>

[16] 원문

[17] 원문

[18] <사랑>의 운동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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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바람&quot;이 보고 싶다.

뜬금없이 <바람>이 보고싶다.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좁은 집에서 기를 수 없어서 집 없는 동물을 보호하는 에 넘겼는데, 그날 <바람>은 잡혀가지 않으려고 침대 밑에 숨어서 마지막까지 발광(?)했다.

 

<고양이>는 - 기르던 암컷 고양이를 이렇게 불렀다 지하고 싶은 데로 했다. 지 맘에 내키면 다가와 죽 늘어져서 주물러 달라고 했다가도 딴데 가고 싶으면 훌쩍 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나갔다가 아침에 되면 대문 앞에서 문 열어 달라고 <야옹>하기 일쑤였다.

 

어느날 집 앞에서 유난히도 <야옹, 야옹> 하던 수컷을 따라 나가더니 근 한 달이 다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별 걱정을 다 했지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근데 어느날 아침 <고양이>는 대문 앞에서 문 열어 달라고 <야옹>했다.

 

얼마 후 <고양이>는 옷장에서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람>이다. 제일 약해보여서 그랬던지 내가 각별한 정성을 드린 놈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아침에 일어나보면 <바람>은 늘 내 머리맡, 아니면 발 밑에서 자고 있었다.

 

(제일 앞에 있는 놈이 "바람"이다.)

 

("고양이" 가족. "고양이"가 야단을 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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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5

 

진리가 실재적인 것이[1] 되려면 체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2], 또는 실체의 참모습은[3] 주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은 정신이라고[4] 실토하는[5] 표상에 표현되어 있다. 최근 들어서는 정신이 가장 숭고한 개념으로 취급되고 또 종교에서와 같이 숭배되는 관념이 되었다. [이런 최근 유행사조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보면]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며, 본질,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과의 관계밖에 있는] ‘물자체적으로존재하는[6]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이란 [타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있는 물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존재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신의 규정성을 자각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것은 이와 같은 규성성 안에서, 달리 표현하면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 규정성을 부여 받기 때문에 자신을 벗어난 외부에 달려 존재하는 상태지만] 자신을 벗어난 타자존재양식에서도 [자신을 상실하는 법이 없이 자기가 애당초 펼쳐놓은 본질로서의 테두리인]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애당초의 본질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것을 온전히 실현해 나가는 존재다[7]. 그러나 [정신이 출현하는 단계에서는][8] 이와 같은  ürsichsein>[정신의 운동을 관조하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으로서[9] 정신은 아직 자기자신을 [정신으로] 자각하지 못하는[10] 실체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실체는 [운동을 통해서] 자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지와 함께 자기자신이 정신이라는 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말은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인데 이때 대상은 [아무런 실천적인 매개작용이 없는 듯이 보이는] 자기 안으로 직접 반성된 형태로 지양된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 또한 [정신의 운동을 관조하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정신은 이런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정신의 ür sich> 형태가 된다.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이러한 정신의 형태는 정신의 내용이 위와 같은 대상을 통해서 스스로 산출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정신이 이런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기자신과 관계한다고 자각하기에 이르면 정신이 산출하는 것이 순수한 개념이 되며, 이 순수한 개념이 바로 정신이 현존하는 대상적인 터전이 된다. 이때 정신은 대상으로 존재하면서 자신이 바로 자기 안으로 반성된 [자기 규정성을 갖는] 대상이 됨을 자각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자기자신이 정신임을 알아차리는데, 이 정신이 바로 학문이다. 학문은 이렇게 정신의 실재이며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터전 위에 쌓아올린 왕국이다.



[1] 원문

[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계적인 것이 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체계적으로 되어야 비로서 실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3] 원문 . <본질적으로>. 여기서 역자는 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으로서의 본질>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4] 정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5] 원문

[6] 원문 . 칸트가 이야기한 를 찾아 나서는 당시의 유행을 꼬집는 것 같다. 헤겔은 여기서 이런 유행이 <정신>, 더 정확이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의 연장선에서 <자아의식/Selbstbewusstein>로 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신>이 의미하는 것을 전개하고 있다.

[7] 원문 ür sich>. <즉자대자적> 혹은 <완전무결>로 번역되는데, 역자는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춰 <본질과 그것을 자작하는 가운데 실현해 나가는 존재>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8] 원문

[9] 원문 ür uns>

[10]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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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4


(§24) 이렇게 이야기된 바에서 이런저런 귀결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차대한 것은 지는 오직 학문 또는 체계로서만 실재적이고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이다.[1]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면 철학의 원칙이나[2] 원리라고[3] 불리는 것은, 그것이 참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이나 원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 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귀결이다. — 그래서 원칙을 반박하기는 쉽다. 여기서 반박은 원칙의 부족함/모자람을[4]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다. 원칙이 [모자란 놈이라는 의미의] 모자란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시초가 되는 원리만이라는 데에 있다. 근본적인 반박은 원칙 자체에서 반박의 논거를 취하고 전개해야지 반박대상이 되는 원칙과 대립되는 단언이나 착상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여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반박의 실상을 따져보면[5] 원칙을 발전시켜 원칙의 모자란 점을 보안해 나가는 것이다. 반박이란 이렇게 [전개를 통한 보안]이란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박의 부정적인 행위만을 골라잡고, 이런 부정적인 행위 안에서의 진행과 결론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초를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일은 따져보면 역설적으로 시초를 부정하는 태도다. 이 태도는 원칙의 일면적인 형식, 바로 코앞에 떨어져 있는 것, 혹은 목적이라고 하는 것만이 되는 형식을 부정하는 태도다. 행위다. 그래서 [원칙을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은] 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박이란 체계의 근본이니 원리니 하는 것이 사실 시초 이상의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1] 원문 <wirklich ist und dargestellt werden kann.> 여기서 를 설명하는(explikativ) 그리고로 이해하면 wirklich/실재와 Darstellung/서술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신현상학> 서론 §1 역자주 4에서 잠깐 언급하기만 하고 줄곧 <실재적>, <실재성>으로 번역한 , 는 사실 그 개념이 정확히 잡히지 않는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원사전에 따르면 <현실적인, 사실적인/real, wahr, tatsächlich>라는 의미와 <활동하는, 작용하는/tätig, wirksam, wirkend>이라는 두 갈래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과 어원을 같이 하고, erk>는 그리스어 <ergon>,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결과, 예컨대 <작품>이라는 것과 어원을 같이 한다. , <ergon> 등은 다시 엮어 짜다/새끼를 꼬다(flechten)란 의미의 인도게르만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런 의미로서 는 또 지렁이>와 어원을 같이 한다. 지렁이>자기 몸을 비트는 자라는 의미가 있고 생성되다>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이란 원래 <돌리다/drehen><뒤집다/wenden>라는 의미의 연장선에서 <상황이 뒤집혀 전개되다/sich zu etwas wenden>란 의미로 발전하고 <무엇이 되다>란 의미가 되었다 [Duden, das Herkunftswoerterbuch 참조]. 를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헤겔이 <철학사 강의> 서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Der Weg des Geistes ist die Vermittlung, der Umweg. Zeit, Mühe, Aufwand – solche Bestimmungen aus dem endlichen Leben gehören nicht hierher.“(„정신이 걸어가는 길은 갈라진 것을 하나로 엮어내는 실천이며, [지렁이와 같이]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길이다. 시간, 노고, 들어가는 비용 등과 같은 짧은 기간동안 이세상에 와서 사는 개별자의 삶에 적용되는 규정들을 정신에 적용하여 정신보다 지름길을 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함께 진보넷 블로거 <공돌>님의 블로그 소개 글도 떠오른다. „아마도 우린 300년을 떠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망할 것도 없다.“(http://blog.jinbo.net/laborman) 의 개념이 이렇게 <현실/Realität> <생성/werden>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에 이것을 , 등 라틴계 언어로 번역하면 의 의미가 정확하게 잡히지 않고 대려 혼동을 야기한다고 T. Trappe G. Baptist. Zur Uebersetzungsproblematik in den romanischen Sprachen. Hegel-Studien 34 (1999)“을 참조하여 지적한다. [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철학 [개념]사 사전, 12, 829쪽 참조.] 라이브니츠가 일찍이 지적하고 또 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영미철학에서는 <실존/Existenz>, <현존/Dasein>으로 이해되고, 유명론의 연장선에서 의식과 무관하게, 의식 밖에 존재하는 대상, 혹은 대상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지평에서는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의 인식가능성여부가 문제가 되는데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이 <순수이성비판>의 칸트다.

어원사전에 기대어 마련된 위와 같은 에 대한 개요(exposition)를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석에 관하여, 혹은 명제론>에서 구별한 <가능/dynaton/possibile> <불가능/adynaton/impossibile>, 그리고 <우연/endechomenon/contingens> <필연/anagkaion/necessarium>이란 이분법에 기대어 설명해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연> <필연>, 그리고 <우연> <가능>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다. <명제론>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생성되어 현존하는 것과 보편적인 것에 관한 명제에서는 그 명제와 부정 둘 중 하나는 항상 참이라는 배중율의 원칙이 관철된다고 확인하고 나서, 그렇지만 미래에 일어나는 개별적인 것에는“(„kath hekasta kai mellonton“)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에 일어나는 사건에도 배중률의 원칙이 유효하면 미래는 이미 정해진 필연적인 것이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일의 바탕(arche) [어떤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한] 숙고 및 상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특정한 실천적인 행위(praxis)에 종속“(„arche ton esomenon kai apo tou bouleuesthai kai apo praxai ti“)되는 사실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힘을 발하지 않는 것들의 안에서는“(„en tois me aei energousi“) 미래에 일어날 일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대칭적인 5050이 된다 („to dynaton einai kai me hoios“).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가능>으로서의 <우연> <불가능>을 제외한 모든 것 - <필연>까지 포함한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포함하는 것이 된다 (같은 책 13장 참조). <우연>의 논리적인 개념보다 자연과 존재의 [존재론/인식론적이 아닌] 존재적 생성에 관심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 13장에서 가능태> 란 의미의 현실태>란 개념을 도입하여 <우연>을 살펴보고 존재하는 것을 3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to ex anagkes on“)은 항상 현실태 모양“(„kat’ energeian“)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구애를 받는 가능태 모습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것을 원초적인 본질“(„protoi ousiai“)이라고 한다. 둘째 존재자는 현실태와 가능태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이 존재자에서는 속성적으로는 현실태가 앞서가지만 시간의 전개 속에서는 현실태가 가능태의 뒤를 따른다. 셋째 존재자는 현실태가 전혀 없는 그저 가능태로만 있는(„dynameis monon“) 것이다. 첫번째 존재자는 중세 스콜라학이 이야기하는 신의 다른 이름인 순수행동>과 유사한 것 같은데 이것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인지 아니면 둘째 존재자의 존재양식이 그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으로는 어원사전에 기대어 살펴본 의 개념에 스며있는 <프로세스>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가 있어야 <가능태>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이런 가능태를 실현한 것이 다시 라면, 이것은 <형상/eidos>이 동시에 <동력인/causa efficiens>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지름길이 있을 법한데 이것은 정신의 행보는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Umweg>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태> <현실태>라는 맥락으로는 <서술/Darstellung>간의 관계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의 행보가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서술이라는 표현이 쓰여지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헤겔을 따라 가보자. 어쩌면 헤겔이 이야기하는 <체계>가 문제해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체계>에 대하여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이야기할 때 까지 기다려보자.

[2] 원문

[3] 원문

[4] 원문 . 고대그리스에서는 <부족한 놈> 라고 했다. 는 영어 바보>의 어원이다. <자기 것 밖에 모르는 놈>이다. <공동체/polis>에서 존재하고 공동체를 실현하는 존재, 즉 맑스가 이야기한 <유적존재/Gattungswesen>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이 빠져있는 부족한 놈이라는 것이다. 가 바로 개인>이다. 그래서 아주 스마트한 개인들이 사실 바보다. 여기서 는 라틴어 약탈된 상태, 부족함>에서 유래하고,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테마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철학(sophia)은 특정한 원리/바탕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이다 (he sophia peri tinas archas kai aitias estin.)라고 결론 짖고 첫째 원인과 원리(prota aitia kai archai)에 대하여 앞서간 철학자들이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 살펴보고 비판한다.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 <여럿>의 문제인데, 개념(logos)세계에서의 동일성과 지각(aitsthesis)세계에서의 다양성이 바로 그 문제다. 관련 플라톤은 두 가지 원인을 적용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다. 하나는 개념세계, 즉 정의(horismos)에 적용되는 본질에 관한 원인(he tou ti esti aitia/무엇인가(ti esti)에 대한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인 차원에서의 원인(he kata ten hylen aitia) (형이상학, 988a)이 된다. 질의 차원에서는 (hos hylen) 크고 작음 (to mega kai to mikron)이 원칙이 되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hos ousian) 하나(monos)가 원인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987b). 크고 작음이 두개/여럿이 되는 원칙이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부재(apousia)약탈/부족(steresis)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철학개념을 정리해 논 <형이상학> 5(Δ)에서 도 설명되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뭔가를 display하고 perform할 수 있는 능력이 넘쳐흐르는 개인의 심적.정신적 상태>와 연계하여 3가지 경우를 구별한다. 첫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취해야 한다고 할만한 것이 있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 (이 경우 식물도 눈을 <약탈>당한 상태다), 둘째, 무엇인가가 개별 혹은 유적본질(e auto e to genos)상 취해야 합당한 것이 있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 (사람이 맹인인 경우 개별적으로 맹인이고, 두더지는 유적으로 그렇다), 셋째, 때에 따라 뭔가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pephykein) 갖췄는데,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다 (형이상학, 1022b). 는 소위 부정하는 <α>, 우리말에서는 </>라는 접두어로 표현된다. 이런 차원에서 와 대립(antikeimenon)을 이루는 관계다. <>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인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는 또 <부정>과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의 대립관계에서 steresis는 유적존재로서의 완성과 그 비완성간의 대립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7, 1378 f. 참조)  

[5]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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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3

절대적인 것을 주체로 상상하지[1] 않으면 뭔가 아니다라는 느낌은[2] 이런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은 영원하다>, <신은 도덕적인 세계질서다>, <신은 사랑이다> 등과 같은 명제를 사용하였다. 이런 명제에서는 참된 것이 밑도 끝도 없이 주어의 자리에 주체로[3] 앉혀질 뿐이지 자기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운동으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런 유의  명제의 첫머리에는 과 같은 낱말이 자리하고 있는데 낱말은 그 자체로 보면 한낱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며 이름 이상의 것이 아니다.[4] 술어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텅 비어 있는 이름뿐인 주어를 채워서 의미를 갖게 한다. 공허한 시초가 이렇게 매듭지어져야만 비로소 실재적인 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집어치우라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술어의 자리에 오는 영원, 도덕적인 세계질서 등에 관해서만, 혹은 철학의 시초기에서 그랬듯이 순수개념, 존재, 일자(一字) 등에 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소리는 덧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고집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고집할 수 없는 이유는 과 같은 낱말이 주어의 자리에 앉혀질 때 명시되는 것이 존재, 본질, 혹은 한낱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 즉 주체적인 것이 주어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가 이렇게 주체로 설정되었다고 해서 이 주체가 참다운 주체가 된 것은 아니다[5]. 단지 주체라고 미리 내다본[6] 상태일 뿐이다. 여기서 주체는 고정된 점으로 상정되어 있고 어딘가 기대야 하는 술어를 거기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격이다. 이렇게 주어에 술어를 주렁주렁 달아주는 운동은 단지 주어가 되는 주체에 관하여 지식을 소유한 자가 하는 운동일 뿐이지 결코 점으로 상정된 주체 자체에 속하는 운동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으로 얻어지는 성과는 단지 [지식을 소유한 자의 운동에 기대고 있는] 내용만이 주체로 서술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의 운동은 주어로 상정된 주체에 속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유의 운동이 임의로 다른 성질의 운동이 될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7] 주체가 단지 고정된 일개의 점으로 설정되어 있는 한 운동은 위와 같을 성질일 수밖에 없고 주체의 외각을 맴도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절대적인 것이 주체라고 영리하게 잡아채는 예지는[8] 절대적인 것의 개념이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예지는 개념을 부동의 점으로 묵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실재는 이와 반대로 자기운동을 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rfnis>

[3] 원문 . 이라고 번역한 라틴어를  독어화 한 외래어로서 <주어>라는 의미와 <주체>라는 의미가 있다.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범주론, 형이상학을 살펴보고, 최소한 데카르트가 를 어떻게 사유했는가 살펴봐야겠지만 우선 지나가겠다.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해야 할 일을 보면서 <정신현상학>을 제대로 읽으려면 생애의 일부분을 투자해야 한다는 Ludwig Sieb의 말을 실감한다.

[4]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논리학적인 <주어-술어>의 관계를 이름-표현>이라는 개념으로 대치한다.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 누군가를 한참 까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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