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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0

(§40) 철학적인 지와 그를 둘러싼 노고에서도 독단적인 사고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를 한마디의 명제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념에서[1]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독단이 말하는 명제란 [직관에 의한] 요지부동한 결과라고 불쑥[2] 내놓는 것이다. [요지부동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케사르가 언제 태어났으며 1 슈타디온은[3] 정확하게 몇 토아즈인가[4] 라는 따위의 질문에는 물론 똑 부러지고 매끈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답은 직각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는 틀림없이 맞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진리라고 운운할 수야 있겠지만 철학적 진리는 이런 유의 진리와는 궤를[5] 달리하는 진리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 희랍에서 사용하던 길이 단위. 달리기하던 반원 모양 운동장(Stadion)의 길이로서 약 190미터. 을 라틴화한 것임.

[4] 원문 . 혁명이전의 프랑스에서 사용된 거리 단위. 2 미터.

[5] 원문 <자연>, <속성>. <>는 임석진 교수의 번역에서 훔쳐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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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9

(§39) 참과 거짓은 [사유행위와 사유된 것을 구별하는 오성으로서의] 사유가 하는 행위의 산물인 명제에[1] 속한다. 오성이 하는 일이란 사유된 것들간에 [참과 거짓을 나누는]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들이 마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통용되는 양 그들을 그 경계선의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그들을 서로 교통하는 법이 없는[2] 요지부동하고 고립된 것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진리를 주조된 동전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바, 우선 진리는 [진짜] 동전마냥 서로 주고 받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가해져야 할 것이고, 이어서[3] [위조된 가짜 동전이 있듯이] 거짓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악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듯이 거짓된 것도 역시 특수한 형태로[4] 존재하지는 않는다.[5] 거짓된 것과 악한 것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악하고 거짓된 속성을 지닌] 악마와 같은 것이 되는데, 그들이 악마와 같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그 무게에 눌려] 삐딱하게 한쪽으로 치우쳐[6] 존재한다면 좀 웃기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저 악한 것, 거짓된 것으로서 [어디에다가도 갖다 붙여놓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은 서로 구별되는 [유령이 아무 곳에서 들어앉지 않듯이] 저마다의 고유한 기질(氣質)[7]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은 여기서 차치하고 거짓만을 살펴보겠다. 거짓된 것이 [독자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지의 내용인 실체의 타자, 즉 실체에 부정적인 것이 되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8] 실체란 본질적으로 스스로 부정적인 것으로서 [거짓된 것에 속한다는 부정적인 것은] 사실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을 통해서 실체는 스스로 내용을 구별함과 동시에 규정하는가[9] 하면, 또 애당초[10] 자기와 지를 확실히[11] 구별한다. 사람인 이상 뭔가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지가 그의 [대상인] 실체와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불일치가 [실체에 스며있는] 본질적인 힘이 되며[12], 그렇기 때문에 실체에 실체 자체를 통해서 구별이 생겨나는 것이다.[13] 이런 구별에 [따른 분열은] 틀림없이[14] [통일을 이루는] 일치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일치가 진리인 것이다. 이때 일치가 진리가 되는 것은 마치 슬래그를 제거하고 순수한 금속만을 취득하듯이, 아니면 완성된 항아리에서 도구로 사용된 틀을 떼어내듯이 하는 불일치를 내팽개쳐버림으로써 남게 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부정으로서의 불일치는 [실체의] 자기로 [앞서 불일치를 거쳐서 생성된] 진리에 [아직 움트지 않은 단순성의 형태로][15] 보존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의 한 마디가[16] 되거나 심지어 진리의 한 구성요소를 이룬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거짓된 것이든지 간에 뭔가 참다운 것이 있다는 식의 표현에서는 참과 거짓이 마치 서로 융화될 수 없는 기름과 물처럼 단지 겉으로만 어울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이 뭔가가 서로 완벽하게 달리 존재한다는 면을 가리킨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완벽하게 구별된 존재양식이 지양된 상태라면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관과 객관, 유한과 무한, 존재와 사유 등의 통일이라는 식의 표현이 어정쩡한 표현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관과 객관 등등의 통일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사용되는 <주관><객관> 등등의 표현이 통일되기 이전에 가졌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통일된 상태에서는 그런 표현이 다른 의미를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된 것도 더 이상 거짓된 것으로서 [생성된] 진리의 한 계기가[17] 되는 것이 아니다.



[1] 원문 . 사유가 이렇게 구별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함으로써 사유된 것을 사유한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는 사상>을 사유결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 사유결과로서의 , , 그리고 언어분석철학이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명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는 이런 명제에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이 적용된다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뭔지 몰라 사전을 뒤적거려 <보리수>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러나 Lindenbaum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리수>란 말을 듣고서 Lindenbaum이 뭔지 알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ein Falsches> 그리고 <ein Boeses>. <개별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부정관사에 주의해야 한다.

[5] 하나 사유에 총력을 기울인 플로틴에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그노시스의 이원론에 대항하여 </malum>이 독자적인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선의 전제아래 존재한다고 한다. “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선의 결핍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Quid est autem aliud quod malum dicitur, nisi privatio boni?) (출처: Enchiridion de fide, spe et charitate Liber unus/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안내서 1, 3.11). 악을 이렇게 이해하는 전통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까지 이어진다. “[선과 악은 관련되어 있는데], 악에 의해서 선의 결핍이 이루어지는 것에 한해서 그렇다. 여기서 자명한 것은 악이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선의 결핍이란 것이다.”(… inquantum per malum privatur bonum. Ex hoc autem ipso est aliquid malum, quod est privativum boni.) (출처: 신학대전 2 1 질문 42)

[6] 원문 악한, 나쁜>. 한쪽으로 기울어진>란 본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7] 원문 . 하면 역자는 꼭 <귀신>이 떠오른다.

[8] 원문

[9] 언어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sortal predicate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이것이 바로 헤겔이 이야기하는 개념의 운동이다.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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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38

{§37-§38에서 <정신현상학> <논리학>이 다루는 것을 개요하고 양자간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 §38이하  §35에서 제기된 문제, <정신현상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재개하여 다룬다.}

(§38) 정신이 경험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에 대한 경험을[1] 체계화하는 것은 정신의 현상만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체계화한 <정신현상학>에서 진리의 [완성된] 형태를 갖춘 진리를 다루는 [논리학이란]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한낱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정신현상학>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거짓된 것으로 이해한 나머지 그런 것으로 귀찮게 하거나 뜸들이지 말고 바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다. 무엇 때문에 거짓된 것을 보듬고 버둥거려야 하는가? 그럴듯한 질문이다. — 왜 바로 학문으로 들어가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요구는 위에서 제기된 바 있는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것을 거짓된 것으로 보는 행위가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과 요구에 다시 한번 답변해 보겠다. 특히 부정적인 것에 관한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2] [의기양양하게][3] 진리에 입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철학적인 지가 숭배하는 수학적 인식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비철학적인 지는 수학적 인식을 철학의 이상으로 삼고 달성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철학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아니면 철학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들 지금까지 거둔 성과가 아무것도 없는 헛수고였다고 핀잔하기를 일삼는다.



[1] 원문 . 여기서 소유격은 동시에 주격 및 목적격 소유격이다.

[2] 원문

[3] 원문 . <특히, 무엇보다>. 역자의 귀에는 <잘난 체하는/vornehm>의미로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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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7

(§37) 의식 안에서 발생하는 자아와 자아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실체로서의 정신[1] 간의 불일치는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행사하는 부정의 힘으로서 본래 [자기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힘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은, [분열되어 대립하는 양자에게 각기 그 부정적인 것이 모자란], 결핍으로 간주될 수 있겠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에 스며있는 혼, 달리 표현하면 그 혼을 운동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여기에 몇몇 고대 철학자들이 공허함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허함과 무(Nichtsein/비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고] 부정적인 것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는 파악하였지만 바로 이 부정적인 것이[2] 자기라는 것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 부정적인 것이란 이런 것인데 [부정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분열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불일치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런 불일치는 또한 실체로서의 정신이 [부정의 힘에 의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자신과 관계하는 가운데 발생한 불일치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와 지의 대상이라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는[3]] 실체로서의 정신 외부에서 그것과 무관하게 일어나고, 실체에 反하는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체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줄 때 비로소 정신은 자신이 현존하는 양식과 그 본질 간의 일치를 완성하게 된다. 이때 정신은 [왜곡되지 않고 완성된] 자기 모습을 대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덜 떨어지고 지와 진리를 따로 떼어놓던 행위가 왕성했던 추상적인 터전이 극복된다. 이때 모든 것은 [더 이상의 매개가 필요 없는] 절대적으로[4] 매개된 양식으로 존재한다. 무슨 말인가?[5]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우선] 실체로서 [정신의] 내용임과 동시에 이젠 아무런 매개 없이 그대로[6] 자아의 재산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내용 자체가 자기 운동하는 주체이며[7], 곧바로 [완성된] 개념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 정신현상학은 약속된 목적을 달성하고 완성된다. 정신이 정신현상학에서 마련한 것은 지의 경지로서 정신에 깃들어 있는 갖가지 계기들에[8] 의해서 전개되는 정신이 [이젠 더 이상 대립과 분열을 빚지 않고] 대상과 자아로 갈라지는 않는 단순성 형식을 띠면서 확장되어 나가는 그런 경지다. 이때 정신의 계기들은 더 이상 존재와 지 사이의 대립으로 갈라져 뻗어나가지 않고, 지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면서 참다운 형식을 갖춘 참다운 것이 된다. 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용상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정신에 깃들어 있는 계기들의 운동을 단순성의 형태로 전개하여 유기적인 총체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논리학 또는 사변철학이다.



[1] 원문 . 이 문단에서 를 그냥 <실체>로 번역하지 않고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번역하였다. 앞 문단과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의식과 정신 간의 관계이며, 나아가 <정신현상학> <논리학> 간의 관계다. 이와 관련 제기되는 문제는 의식이 자기의 힘으로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정신현상학>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학문>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이다.

[2] 부정의 힘에 의해서 타자가 된 것을

[3] Bewusstseinsdifferenz

[4] 원문 . 여기서 역자는 스피노자의 영원의 관점아래>를 듣는다. 

[5] 원문 <>. 파렌테시스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6] unmittelbar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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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36

(§36) 정신의 덜 떨어진[1] 존재양식인 의식은 반드시[2] 지와 지에 부정적인[3] 대상이라는 두 축을[4] 갖는다. 정신은 이런 의식의 터전에서 자신을 현상화하고[5] [의식이 갖는 두 축의 이편저편에] 자기 안에 엉겨져 있는 것들을[6] 전개하여 줄줄이 늘어놓기[7] 때문에 이것들간에는 앞서 말한 대립이 성립하고, 그것들 모두 의식이 취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줄줄이 이어지는 도정에 관한 학문이 바로 의식이 체험하는 경험에 관한 학문이다. 정신이 이렇게 학문의 대상이 되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신의 실체와 정신의 운동이 어떻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점에 제한하여 다루어진다. 의식은 그의 경험 안에 있는 것을 그저 알 뿐이지 그가 경험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파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경험 속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정신적인 실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완성된 정신의 모습이 아니라] 단지 대상화된 정신의 실체만이 [의식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신이 이렇게 대상이 되는 이유는 정신이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다른 것이 되는, 달리 표현하면 자신을 대상화하는 운동이고, 이어서 자기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8] 지양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운동이 바로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런 운동 안에서 덜 떨어진 것[9], 그것이 감각에 매달려 존재하는 자가 말하는 [코앞에 있는] 직접적인 것이든 아니면 사유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단순성이란 [요지부동의] 직접적인 것이든 하여간 추상적이고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은 [붙어 있는 것에서 뚝 떨어져 나와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는 행인이 되어] 자기가 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낯선 것이 되고, 그 다음 이러한 자기소외로부터 다시 자기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운동이 완성될 때 덜 떨어진 것은 비로소 그 실재와 진실이 완전히 서술되고 드러나 드디어 의식이 이젠 더 이상 상실할 수 없는 재산이 된다.



[1] 원문

[2] 원문 정관사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3] 원문

[4] 원문

[5] 원문 <사진을 현상하다>란 의미도 있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타자존재

[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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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뭉크의 <길 가는 노동자들>

 

 

그때 뭉크가 그린 <길을 가는 노동자들>이란 제목의 그림이 엄습하듯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은 그림자를 무겁게 늘어뜨리면서 길고도 긴 황량한 길을, 끝없이 이어지는 리듬에 맞춰, 해 뜨는 이른 아침에 혹은 해지는 저녁에 가고 있었다. 쾰러의 그림과 함께 한 인생의 도정을 묘사한 이 그림이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림 중간에 구부정한 자세에 움푹 들어간 눈으로 앞만 빤히 바라보면서 길을 가는 짧은 수염의 노동자의 형상에서 나는 항상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림의 복사본이 쇠사슬을 끊는 회색의 노동자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우리 부엌 벽을 장식하는 유일한 그림들이었다. 한 그림은 파업과 봉기를 표현하였다면 다른 그림은 지속되는 도정과 다시 작업을 재개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이든 사람,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매일의 노동량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다가 다시 집으로 보내는 사이렌 소리에 따라 오고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노동에 본질을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이쉬만에게 이 그림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흐름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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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쾰러의 <파업>

 

 

나는 아이쉬만에게 쾰러라는 화가가 생산관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1886년 미국의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파업>이었다. 브레멘에서 살 때 우리는 오래된 하퍼스 위클리지에서 이 그림의 복사본을 오려 내어 부엌에 걸어놓았다. 189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전시된 이 그림은 색상에 있어서 멘첼의 그림과 달리 생동감이 넘치고 뭔가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신 붓질이나 그림구성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춘 삽화적인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주의가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고 오직 내용에만 머무르게 했다. 그림 왼쪽엔 공장주가 열주현관의 문을 열고 나와 서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층계 맨 위에서 무쇠로 만든 장식이 어우러져 있는 난간 뒤에 스탠드 칼라에 커프스 단추와 실크해트 차림으로 서있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이를 악문 표정이었다. 마치 시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오른손의 손가락을 약간 치켜 들고 있었지만 손은 비어 있었고 그 손동작은 놀라움과 힘없는 방어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노동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의 자세 또한 아직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계급의 자신감에 젖어있었지만, 그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해서 그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네모진 마름돌이 버티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하인은 그를 이미 반쯤 떠난 상태였다. 위엄을 부리고 서있었지만 그 위엄은 아무런 핏기가 없었고, 그에게 용기란 것이 있다면 노동자들이 층계를 밟고 올라와 그를 층계참에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무지에서 나오는 용기일 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수히 이 그림을 보아왔고, 그리고 부모와 토론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번 새로운 해석으로 치닫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주었다. 공장주의 집 앞 툭 터진 공간에 모인 노동자 그룹이 불거진 분쟁의 발전가능성이 다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 그룹의 대변자는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뿌연 연기로 희미한 지평선에 있는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연기를 내뿜지 않는 공장을 가리키면서 층계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공장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위협하는 태도를 다양하게 취하는 가운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건지 기다리면서 대변자와 공장주간의 충돌을 지켜보고나 아니면 서로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한 여성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뭔가를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몸짓으로 보여주는 한 노동자를 달래고 있었다. 그림 오른쪽엔 종이를 접어서 만든 모자를 쓴 한 노동자가 먼지가 가득한 땅에서 []돌을 주워 들려고 몸을 굽히고 있었다. 산성과 같은 시커먼 갈색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들고 나와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몸을 깎아내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노여움이 가득 찬 상태로 언덕을 달려 층계 앞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마지막 종업원들이 그을음으로 시커먼 공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기 뒤편에 보이는 마부도 움푹 패인 질퍽한 땅에 마차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고 있었다. 그림의 뒤 배경에서 반복되는 []돌을 움켜쥐는 동작은 이젠 오직 무력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뻣뻣하고 얼어붙은 자세로 홀로 서있었고, 노동자들의 기세는 그를 금방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공장주를 보호하여 그에게 다가설 수 없게 하였다. []돌은 던져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발전시켜 나아가려고 애를 써도 그 모든 것이 층계 앞에서 멈추어 섰다.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의 동작은 분노가 가득했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벽돌집 가까이에 와서는 그런 모습이 누그러져 주저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용기를 상실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주의 집으로 쳐들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썩어 문드러질 주인의 거만을 보호해주는 무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장주의 집 뒤에는 볼 수는 없지만 중무장한 방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오렌지나무가 즐비한 오솔길을 따라서 다시 강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쉬만에게 층계를 올라가서 그 늙은이를 한방에 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할 수가 있었던 일인지 자주 그려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절름발이 상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여기 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단순한 행위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노동자들이 층계를 올라가는 내디딤을 했던 것이었다. 노동하는 대중이 그림 안에서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무르익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지속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층계를 뛰어오르는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해한 것이지만 이 그림이 묘사한 사건이 들끓는 동요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 내포하고 있었다. 화가는 유토피아적 사고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명백하게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직접 보고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멘첼과 다를 바 없이 학습하고 훈련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육중한 육체성을 그리는데 있어서 프로이센 궁중화가와는 달리 노동자들을 상품생산의 마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종으로 묘사하지 않고 자기를 자각한 주체로 그렸다. 노동자들은 불거진 투쟁행위에서 착취자와 대립하고 서있었다. 멘첼의 압연공장에서는 착취자가 성가시게 하는 노동자가 없이 아직 묵상을 즐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노동자들이 층계 앞에서 멈춘 것은 이성이 강요한 것이다. 개별적인 공격은 무의미하고 곧바로 총탄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분에 찬 기다림,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뒤흔드는 행동은 조직[]를 통해서 이행될 조치를 알리는 징조였다. 검은 복장으로 층계 위에 서있는 저 놈을 볼 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뭔가에 나도 역시 사로 잡혔다. [그러나 차분히] 그림을 분석하고 토론하면 화가의 지혜로움과 역사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886, 이 해는 미국에서 대중파업이 개시된 해였다. 1 8시간 노동제를 위해서 데모하고 시카고에서는 경찰이 노동절 집회에 모인 노동대중을 유혈 진압한 해였다 1850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17년 미네아폴리스에서 가난하게 죽은 쾰러의 그림은 계급간의 적대적인 대립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증인으로서 오늘날에도 그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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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물

모뚜님의 [세계이주민의날 한국대회 기념 이주민발언대 - 난민] 에 관련된 글.

모뚜님의 글 <세계이주민의 날 한국대회 기념 이주민발언대 난민>에 트랙백을 달아본다. 이 글에 달려있는 ppp님의 덧글 때문이다. 뭐라고 말하기 참 힘든 덧글이다. ppp님의 글이 논리적이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힘든 것이 아니다. 인성 자체가 참으로 힘들다. 그런 느낌이 물씬 다가온다.

 

<우주의 신비>를 알기 이전부터 이주민으로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ppp님의 덧글을 읽으면서 이상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가도 ppp님과 같은 사람들과 상대하고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여기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것이 사람의 생각을 저렇게 결정지을 수가 있구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알 수야 없겠지만. 개구리 하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레토와 리키아 농부들의 이야기다.

 

제우스의 쌍둥이를 임신한 이유로 헤라의 미움을 받아 이리 저리 쫓기다가 레토는 다른 신들의 도움을 받아 출산하고 아르테미스와 아폴로를 낳는다. 그러나 헤라의 질투는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레토는 쌍둥이를 안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어느 날 탈진된 상태로 한 연못에 도착한다. 고루하고 옹졸한 리키아 농부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속한 연못이었다. 레토가 엎드려 목을 축이려 한다. 그때 농부들이 와서 물을 못 마시게 한다. 레토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뭐라고요? 물 마시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요? 물은 만인이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해와 공기를 자연이 특정인의 소유물로 만들었단 말인가요.
그리고 흐르는 물을? 나는 만인의 소유물을 취하려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빕니다. 나에게 물을 허락해 주십시오.

지친 몸과 축 늘어진 팔과 다리를 씻자는 것도 아니고,
오직 타는 목을 축이자는 것입니다. 목이 타서

말도 제도로 안 나옵니다.” (오비드, 변신, 6, 349-354)

 

레토가 이렇게 애원하고 품에 안긴 갓난아기들까지 손짓으로 간구하는 데도 불구하고 리키아 농부들은 물을 못 마시게 할뿐만 아니라, 아예 연못에 뛰어 들어가 흙탕물을 만들어 물을 마실 수 없게 만든다. 이에 분노한 레토는 그들이 영원히 그런 짓을 하게 만든다. 개구리가 되게 한 것이다. 오비드는 리키아 농부들의 본성이 원래 개구리 본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욕지거리를 일삼는 혓바닥을

그만두지 못하고 물속에서도 연습하고 얼굴 붉힐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으로 소리를 높이고 있다.

물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악꾸악 욕지거리를 일삼는다.“ (같은 책 374-376)
(Quamvis sind sub aqua, sub aqua maledicere temptant.)

 

법은 만인이 공유하고 만인이 사용하는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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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공부하자는 게 왜 문제인가

http://www.ohmynews.com/NWS_Web/Article/tb/index.aspx?cntn

 

"목숨 걸고 공부하자는 게 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오리지날 보수"의 유양초등학교 최창해 교장에게 드리는 답.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유태인학살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들어가는 문에는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다른 유태인학살수용소 <부헨발트>에 들어가는 문에는 <각자에게 자기 몫을>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오리지널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장은 목숨 걸고 교장을 해야 하고, 선생을 목숨 걸고 선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 4권에서 이야기 한 이 가치에 기대는 보수는 이 구호가 유태인학살수용소의 간판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본질을 보여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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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아돌프 멘첼의 <압연공장>

 

이런 내용의 대화를 뚜렷하게 상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화의 내용이 또한 멘첼이 그린 폭 2.5 미터 넓이의 <압연공장/Eisenwalzwerk>이란 그림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의 컬러인쇄판을 놓고서 아버지가 노동을 주제로 하는 이런 그림이 왜 이제 가능하게 되었는가 설명했었던 적이 있었다. 의식화된 노동자계급의 성장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 주류 예술계에서도 이런 그림이 걸릴 수 있도록 한자리를 내주고 거기서 맘껏 해보라고 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다시 이런 아량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슬며시 회수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 그림의 원본은 후에 국립미술관에서 직접 보게 되었지만, 아무튼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노동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그림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중공업 공장의 분위기가 거기서 사용되는 기계와 도구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실감나게 재현되었다. 뿌연 수증기, 굉음을 내뿜는 대형망치, 크레인과 잡아당기는 쇠사슬의 삐걱거리는 소리, 기계에 부착된 플라이휠의 회전, 타오르는 열기, 가열된 철의 백열, 불끈 하는 근육, 이런 모든 것을 그림에서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림의 중간에는 대장장이들이 무리를 지어 타오르는 금속블록을 뒤쪽을 약간 치켜 올린 손수레 차에서 룰러 밑으로 밀어붙이는 장면이 보이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찌그러진 양철 판의 보호아래 철관과 쇠사슬 사이에 맥이 풀린 듯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쉬는 몇 명의 노동자가 양철 그릇에서 밥을 떠 먹고 있고, 물병을 입에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림 왼쪽 구석에는 교대가 끝난 노동자들이 웃통을 벗고서 목과 머리를 씻고 있었다. 장구(裝具)를 가지고 손을 놀리고 몸을 굽히는 모든 동작, 그 뿐만 아니라 지치고 파김치가 되어서 한 구석에 그저 주저 앉아있는 모습 이 모두가 거대한 공장내부의 한 부분을 그리고 있었다. 힘을 전달하고 버티는 축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는 사이에 노동자들이 죄이다시피 널려 있었고, 저 멀리 몇 군데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세상의 빛은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이 땀에 범벅 되어 기계와 노동자가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묘사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자들이 여기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었다. 번쩍 들어 올리는 힘과 그 힘에 의한 진동을 점차 멈추게 하는 것이 습득한 데로 빈틈없이 진행되게 하는 것, 집게잡이를 거머쥘 때의 더 없는 집중, 신경을 곤두세우고 압연블록을 받아낼 지렛대를 잡은 작업반장, 그을음을 뒤집어 쓴 몸을 문질러 닦는 모습, 그리고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몸뚱이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은 단 한가지만을, 즉 노동, 달리 표현하면 노동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원칙이 말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나서 비로서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노동은 아버지가 이야기한 자기실현의 과정으로서의 노동이 아니었다. 이 그림에 나타난 노동은 어디까지나 최하가격으로 이루어진 노동이었으며, 노동력을 구매한 자에게 최고 이윤을 남겨 주기 위한 노동일 뿐이었다. 그림에는 노동자들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거기서 하는 일에 투자한 듯이 보이고 그들이 공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자들이 불빛에 비춰 무슨 동상이라도 되는 듯 힘있게 그려지고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중에 국립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놓고 아버지는 첫눈에는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우성(Dominanz)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톱끄트머리까지 분업의 법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노동자들이 마치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지만 노동자들은 오직 타자가 소유하는 기계와 장비에 묶여 실존하고 있었다. 소유하는 타자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물건으로 예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쓰레기범벅인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노동자들은 이런 얽매임에서 한 순간 자유롭게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오직 다음 신호가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강력한 힘은 오직 그들이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에서만 발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 팔뚝의 움직임은 전혀 위협적인 면이 없었다. 그들은 그 팔뚝을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만 쓸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였다. 노동의 찬양은 노동의 억압에 대한 찬양이었다. 불 튀기는 불똥을 뒤집어 쓰면서 훨훨 타오르는 철물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자들, 파김치가 되어서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밥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삶에 찌들인 눈빛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빈 잔들을 바구니에 챙기는 젊은 여성, 이들 모두가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의 깊이는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없게 희미했다. 수직수평의 철 기둥과 관이 즐비하게 무슨 격자구조물과 같이 끝없이 이어졌다. 형체가 연기 속으로 뿌옇게 자취를 감추는 공장은 [예속의 쇠우리]에서와 같이 도주가 불가능한 그런 세계였다. 오늘날에 들어서 우리는 이제 사내식당이 있고, 샤워실이 있고, 옷 갈아 입는 방이 따로 있고, 그리고 기술적인 개선을 통한 혜택을 기대해 볼 수가 있지만, 생산과정 자체는 멘첼이 [파리]꼬뮨이 가루가 된지 4년이 지난 1875년 묘사한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한 곳에 모아 나중에 철도레일, 포신의 받침대, 포신이 될 철물을 생산하는데 다 투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적인 속성을 녹여 폭력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그 폭력은 그들이 알아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서 그들을 항해 가해지는,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그런 폭력이었다. 오른쪽 맨 앞에 눈이 푹 꺼진 여성의 모습에서는 그녀가 야생동물의 굴과 같은 지하구멍에서 살고 있고, 그녀의 아이들은 배고픔을 달래고 있다는 것이 역연히 드러났다. 화가는 그녀의 빈곤을 선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는 노동을 재현하였다. 화가는 노동자들이 몸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하는 열악한(unwürdig) 상황을 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아무런 분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려, 뭔가 숙명적인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내놓고 있었다. 노동하는 사람이 행위의 주체였다. 빈틈없이 그리고 자신 있게 주어진 업무를 척척해 나가고 있었다. 모든 손놀림, 모든 동작이 노동자에게 자기의식이 가득한 위대함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능률은, 아버지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오로지 보이지 않는 돈궤와 금고를 채우기 위한 목적 외 다른 목적이 없이 강제되는 노동이었다. 화가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 이리저리 깊게 페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뜨거운 불길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장구를 불끈 거머쥔 노동자들이, 당시 이미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알려지고, 소개되고, 그리고 노동자의 조직으로 사회적으로 실재하였지만 그것과는 괴리되어 묘사되었다. 알파라발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나는 멘첼이 누구를, 감탄하는 구경꾼들 앞에 내놓았는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제국의 독일노동자를, 공산당선언이 스며들 틈이 전혀 없는 독일노동자를, 독일제국에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유일한 존재사유인 독일노동자를 내놓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번쩍이는 불빛에 어우러지게 묘사된 형상들은 철의 하수인이었다. 이 철에는 뭔가 원소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열과 함께 철은 그냥 금속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산업제국주의의 팽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받는 임금 외 다른 가치가 없었다. 생생하게 묘사된 공장은 [그림]전문가를 기쁘게 하겠지만, 공장의 주인공은 노동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얗게 타오르고 슬래그를 내뿜으면서 룰러 밑으로 깔려 들어가는 쇳덩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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