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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49

§49) 개념의 필연성은 이런 방법들을, 즉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뭔가 확고한 것을 제시하는 탁상담론의 느슨한 진행, 그리고 학문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치장하고 그 위용이 쩔렁 거리는 군대식의 경직된 진행을 학문에서 추방하고 다시는 발 딛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때1 조심해야 할 일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 빈자리가 예감과 열광이라는 몹쓸 방법과2 예언자적인 말을 일삼는 임의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감을 높이 세우고 예언자 풍의 말을 일삼는 [낭만주의]자는 통념적인 학문성이 허섭스레기라는 것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경멸하는데, 문제는 그런 학문성만을 경멸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학문성이란 것 그 자체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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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aber>. 여기서 <aber>는 대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Beeile dich, aber sei vorsichtig!/신중하게 서둘러라!>라는 문장에서와 같은 의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Unmethode>. 독일 동포 인터넷 신문인 베를린 리포트게 게재된 번역(http://berlinreport.com/skin/board/news/mw.proc/mw.print.php?bo_table=news&wr_id=5431)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8

§48) 이러한 운동, 달리 표현하면 학문이 거쳐가는 길에1 관해서 사전에 이런저런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길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담겨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엄밀한 서술은 논리학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지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논리학 그 자체가 바로 학문이 가는 길은 그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자체가 학문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되는 이유는 전체의 구조를 [타자화가 소외로 나타나는 현상계는 사상하고 타자화가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 넘어가는]2 순수한 본질의 형태만을 따라서 완성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간에 통용되는 방법론에 관하여 반듯이 인식하고 지나가야 할 일은 철학이 가야 하는 길에 관한 이런저런 관념을 체계화하여 내놓은 방법론이란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지난날의 교양수준에 속한다는 것이다. — 이 말이, 본인이 의도한 바와 달리, 좀 과시적이고 혁명적인 말투로 들린다면, 이런 말투는 제쳐놓고 설명이니 구분이니 공리니 일련의 명제와 그 증명이니 원칙이니 원칙에 따른 추론과 결론이니 하면서 이런 것들을 [체계화하여] 무슨 왕국이나 되는 모양 수학이 보란 듯이 내놓은 학문적인 체통이3 이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최소한 남루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돌렸으면 한다. 이런 식의 학문적인 왕국의 무용성이 아직 분명하게 인식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전혀 활용되지 않거나 활용된다고 해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일 뿐이다. 이렇게 아예 거부되지는 않지만 기꺼이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 제시하는 학문적 왕국을 평하는데 있어서] 다른 면을 지적하자면 우리는 어쩌면 월등한 것은 반드시 활용되기 마련이고 또 널리 퍼지는 법이라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명제를 내세우고 난 다음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또 그에 대한 반론 역시 근거를 제시하여 물리치는 식의 판박이 수법이 난무하는 형식을 짜놓고 진리보다 그런 판에 등장하라면 진리가 거기에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리란 [스스로 현존재로 현상하여 자신을 전개해 나가면서 자기 몫을 다하는]4 [타자의 운동이 전혀 스며있지 않는] 온통 자기에 속한 그리고 [전혀 타자에 가해지지 않고] 온전히 자기에게만 가해지는 운동인데5 위의 방법은 이와 반대로 소재 밖에서[진리를 이리저리 짜맞추는] 소재를 겉도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몰개념적인 크기상의 관계를 원리로 하고 죽어있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죽어있는 하나라는 수를 소재로 하는 수학에나 어울리는 것이고, 또 수학보다 그러라고 내버려 두어야 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 임의와 우발성을 좀더 곁들어서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교야 일상생활에서는 계속 활용될 것이다. 탁상담론, 또는 인식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인 교훈,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서설 등에서 말이다. 일상생활상의 의식은 감각적으로 구체화된 상식이나 경험뿐만 아니라 사고나 원칙 등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것들을 통틀어 보자면 찍어 들어 올릴 수 있는 것6, 달리 표현하면 확고부동한 존재나 본질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의식은 이러한 것들을 징검다리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간의 연결을 내키는 대로 끊어 임의적으로 내용을 규정하고 다루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태도는 외피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다가 뭔가 확실한 것, 그것이 비록 언뜻 느껴지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의식에게 확실한 것으로 다가오면 거기에서 내용이 기인한다고 확신하고 그 지점이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지점이면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만족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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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Methode> <방법>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Methode>의 어원을 살려 번역하였다. 그리고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운동에 어떤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거쳐가는 길이 바로 방법이라는 면을 살렸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이 부분에서 맑스는 헤겔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헤겔은 현상의 대립을 본질의 대립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맑스는 현상의 대립이 본질적인 대립이라고 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der wissenschaftliche Staat>텍스트로 돌아가기
  4. 여기서 앞 문단에서 진리와 관련하여 사용된 서술어 <durchsichtig>와 <einfach>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진리는 명제(proposition)의 값, 즉 옭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양식(Seinsweise)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정신현상학 서론 §1 첫 문단에 등장하는 <erkennen, was in Wahrheit ist>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진리를 해방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숙제를 남겨놓았는데, 진리는 <durchsichtig>하고 <einfach>한 것이라면 이것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진리개념, 즉 가려지지 않고 자기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것과 비교하여 읽어볼 수가 있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Die Wahrheit ist die Bewegung ihrer an ihr selbst.>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Vorhandenes>. 하이데거의 <Vorhandenheit> <Zuhandenheit>와 비교하여 읽어볼 수도 있겠다. 역자는 아도르노의 <Abhub/허섭스레기>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7

§47) 철학은 [유한자의] 규정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찍어올려 보여줄 수 있는] 비본질적인 규정을 고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제한으로 나타나는]1 본질적인 규정만을 고찰한다. 철학의 터전과 내용이 되는 것은 추상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비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으로서 [제한을 뛰어넘어] 스스로 자신을 정립해 나가고 그것을 쫓아 살아 움직이는 내적 생명력을 지니면서 자기개념에 따라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현존재이다.2 이런 현존재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는] 자신의 마디마디를3 만들어내고 이 모든 마디마디를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거쳐나가는 프로세스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는 운동이  [가시화된] 긍정적인4 [완성된] 개념이며 현존재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리는[가시화된] 긍정적인 것 못지않게 [가시화된 것을 뛰어넘는 동력이 되는] 부정적인 것을 내포하는데, [혹자는] 부정적인 것 그 자체만을 따로 놓고서 사상(捨象)의 대상이 되는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것으로서 가시화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사상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가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고찰되어져야 한다.5 이런 고찰은 부정적인 것을 진리와 단절된[엉뚱한] 요지부동한 규정으로 간주하고 진리 밖 그 어딘가에 내버려두어도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도 진리를 부정의 저편에서 안주하는 죽어있는[보란 듯 내놓을 수 있는] 가시화된 그 무엇으로4 여기지 않는다.7 현상계는 발생과 소멸을 통해서 뭔가가 끊임없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발생과 소멸 자체는 발생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애당초부터8 있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진리의 힘과9 운동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진리라는 것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열광에 휘말린 무리와 같은 것으로서 그 무리 안에서는 그 누구도 신들리지 않는 자가 없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열광에 만취된 무리 안에서는 [제멋대로 춤을 추는] 따로 노는 운동이 아무런 매개 없이 그대로 [무리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자신을 해체하는 운동이 되기 때문에 이런 열광, 곧 진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되는] 투명하고 [아무런 겹침이 없는] 죽 펼쳐진 평온의 장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10 생멸운동이 내리는 판결 앞에 정신의 개별적인 형태나 특정한 사상이 따로 존속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부정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는 만큼 그들은 또한 긍정적이고 필연적인 계기를11 이루는 것들이다. — [생멸운동에 휩싸인 개념은 끊임없이 요동하지만] 그 전체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12 이렇게 끊임없이 요동하는 운동의 과정에서 자기자신을 분리하여 차이를 두고 [그때그때] 특수한 형태로 현존하는 정신은13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 속에 보존하는 형태로 현존한다. 이때 그 현존형태는 자기자신을 [자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아는 것이고 또 [과거의]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 그대로 정신의 현존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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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래서 <제한된 부정/bestimmte Negation>이 성립되는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das Wirkliche, sich selbst Setzende und in sich Lebende, das Dasein in seinem Begriffe>. 이 부분을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 기대어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헤겔은 여기서 개념의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seine Momente>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das Positive>텍스트로 돌아가기
  5. <Totalitaet>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das Positive>텍스트로 돌아가기
  7. 예수가 이야기하는 진리 개념이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진리 개념이다(참조: 로마서 8.2).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 <an sich> 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 <Moment>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사도행전 2장에 기술된 오순절 사건이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무런 통역 없이 곧바로 베드로의 설교를 이해하는 사건에 기대어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원문 <Momente>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참조: „Diese Bewegung in sich selbst spricht das absolute Wesen als Geist aus; das absolute Wesen, das nicht als Geist erfasst wird, ist nur das abstrakte Leere, so wie der Geist, der nicht als diese Bewegung erfasst wird, nur ein leeres Wort ist. Indem seine Momente in ihrer Reinheit gefasst werden, sind die ruhelosen Begriffe, die nur sind, ihr Gegenteil an sich selbst zu sein und ihre Ruhe im Ganzen zu haben.“ (PhdG, Felix Meiner 판 535쪽, 강조 역자) 텍스트로 돌아가기
  13. 여기서 정신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개념이라고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구별하여 번역하지 못하겠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의식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있다. 이 문제는 개념의 운동을 정리한 <논리학>이 의식(정신)의 운동을 서술한 <정신현상학>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6

§46) 수학은 선험적인 것을1 다룬다고 해서 순수수학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시간을 공간에 대치하여 제2의 고찰소재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역시 시간 그 자체가 다루지는 것은 아니다. 이동이나2 그밖에 실재적인 것을 다루는 응용수학의3 경우 시간 그 자체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은 복합적인 명제를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개념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이 갖는 성질에5 관한 명제를, 경험에서 추출하여 전제로 사용하고 이렇게 전제가 되는 이런 명제에만 [수학]공식을 적용할 뿐이다. 수학에서는 이런 유의 명제를 증명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지렛대의 평형에 관한 명제나 낙하운동에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관한 명제 등을 증명하는 일 따위를 증명이라고 내놓고 또 그렇게 통용되는 사실은 인식에게 증명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수학적 인식에서 볼 수 있듯이[참다운] 증명이 없는 곳에서는 그것의 껍데기라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붙들고 안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증명을 비판하는 일은 방기할 수 없는6 일로서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 비판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수학의 매끈하지만 거짓된 화장을 깨끗이 씻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학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수학과는 다른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밝힐 수가 있겠다. — 공간에 대치되는 다른 소재로 순수수학 제2부의 소재가 된다는 시간은 사실 시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면7 개념이[운동하고] 현존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개념 없는 차이만을 들추어내는 크기라는 원리와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하나됨일 뿐인 일치라는 원리로는 살아있는 것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동요로서의 시간과[그런 시간의 동요에서] 절대적인 차이로[나타나는 대립을] 포착할 수가 없다. 수학에서는 이와 같은[생명과 개념의] 부정성이 단지 마비된 것으로, 다시 말하면 분절된 하나라는 것으로8 인식의 제2 소재가 되는데, 이때 인식은 단지 사태의 외면을 겉도는 행위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을 소재로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여[시간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외면적이고 생명이 없는 내용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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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immanent>. <immanent>를 <내재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번역하였다. 칸트는 시간을 경험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인 관념이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참조: 순수이성비판 B46)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Bewegung>.텍스트로 돌아가기
  3. 여기서 응용수학은 역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칸트는 시간이 유개념과 같은 <보편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저런 시간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이 유일하고 동일한 시간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래서 시간에 대한 관념은 유일한 대상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유일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직관이라고 한다. 시간은 직관의 대상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명제는 복합적(synthetisch=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이 짬뽕된 것)인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서로 다른 시간이 [공간과 달리]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는 일반적인 개념에서만 추출해 낼 수 없고 시간에 대한 직관과 관념에 뗄 수 없이 붙어있는 (unmittelbar) 것이라고 한다. (참조: 순수이성비판 B 47)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Verhaeltnisse> <관계>로 번역하지 않고 <성질>로 번역하였다. 동사 <verhalten>에 기댄 번역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merkwuerdig>. <이상하다>란 의미이지만 옛날에는 <의미 있는>이란 의미로도 사용됨.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was die Zeit betrifft>텍스트로 돌아가기
  8. McTaggert의 물리적 시간과 비교해 볼만하겠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5

§45) 수학은 이와 같이 모자란 인식이 명료하다고 자랑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철학에게<너도 그럴 수 있어>하고 우쭐거리지만, 사실 그런 명료함은 수학적 인식의 목적이 빈약하고 그 소재가 불충분한데 근거할 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런 유의 인식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 수학의 목적 또는 개념은 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사태의] 본질과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적 지의 운동은 표면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태 자체, 즉 사태의 본질이나 개념에 다다르는 법이 없어서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운동이라 할 수 없다. — 수학이 흐뭇해 하면서 이런저런 진리로 가득찬 보물창고를 의연하게 내놓는데, 그것의 소재는 <공간>과 <하나>라는 수다. 수학이 말하는 공간이란 공허하고 생명이 없는 터전으로서 [크기를 따지는]  개념이[크고 작음의] 차이를 새겨넣는 [종이쪽과 같은] 현장일 뿐이며, 이런 터전에 새겨진 차이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임도 생명도 없는 것이다. 공간의 실재는 수학에서 그러듯이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수학이 다루는 것들이 이와 같이 비실재적인 것들인데 구체적인 감각적 직관이나 철학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리가 없다. 이런 비실재적인 터전에 진리가 있다고 한들 이것 또한 단지 비실재적인 진리로서 박제한죽은 명제일 뿐이다. 그래서[인식의 운동을] 아무데서나 그만 둘 수 있다. 앞의 명제가 다음 명제로 스스로 전진하는 일이 없어서 사태의 속성 그 자체에 따른 명제와 명제간의 필연적인 연관이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명제로 넘어갈 때 앞의 명제와 아무런 상관없이 따로 새로 시작하게 된다. — 수학이 고수하는 공간과 하나라는 원리와 터전이 바로 형식적인 명료함이 존속하는 바탕이 된다. 여기서 수학적 지가 하는 일이란 일치라는 등식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은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차이로 나아가 본질상의 대립 또는 불일치를 이루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본질상의 대립관계에서] 대립자가 이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가는 질적이고 내재적인 자기운동으로 나아가는 일이 없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이유는수학이 오직 크기, 즉 비본질적인 차이만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스스로 각 차원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 운동하여 공간을 쪼개고 각 차원으로 나눔과 동시에 그들 간의 연관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의 연관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사상해 버린다. 그래서 수학은 예컨대 선이 면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이런 수학적 개념을 넘어선 것들을 살펴보려고 해도] 원의 지름과 원주를 비교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 간에 불가양성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불가양성의 관계는[크기를 따지는] 수학적 개념에서 보자면<이것이다>라고 딱 잡아뗄 수가 없는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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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4

(§44) 수학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더 본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 [그 행위를 넘어서] 아예2 인식 그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과 함께 애당초부터3그가 소재라고 다루는 것에 결함이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인식 그 자체의 결함을 말하자면, 먼저 작도의 필연성이 오리무중이라 인식이 알아 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작도는 정리의 개념에서 나오지 않고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 지시되는 것일 뿐이다. 무수히 많은 선 중에서 왜 꼭 그 선을 그으라고 애 손잡고 글 가르치듯 지시하는지 알 수야 없지만 그것이 증명을 진행하는데 적절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맹종하면서 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맹종한 데로 일을 다 보고 나야만그 합목적성이 드러난다.4 이 합목적성이란 단지 외피적인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바로 증명이 다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그 합목적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디. — 이와 마찬가지로 증명이라는 것도 어떤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길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그 길이 뒤에 나오는 결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다. 이런 증명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밑도 끝도 없이 불쑥5 [길 따라 쭉 널려있는] 특성이나 관계 중에서 이놈은 주워 먹고 저놈은 그냥 내버려 두는데, 도대체 어떤 필연성에 따라서 그러는지 전혀6 알아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결국7 [마치 인민의 혁명을 통하지 않는 흠정헌법에서와 같이 군주가 인민에게 강요하듯]8 외부적인 목적이 증명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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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aber>를 이렇게 번역했다. 연장전 추가시간에 승부가 뒤집힌 흥미진진하게 진행된 축구경기를 보고 난 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Das war aber ein Spiel!” “진짜 재미있는 경기였다”는 의미다. 여기서 <aber>는 일반적인 경험에 기반하여 기대할 수 있는 경기에 대비되는 경기였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eigentlich>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ueberhaupt>텍스트로 돌아가기
  4. 전 독일 총리 콜이 즐겨 사용하던 문구가 생각난다. “Wichtig ist, was hinten rauskommt.” „중요한 것은 뒤에 나오는 것이다.“란 말인데 똥싸는 일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diese Bestimmungen und Beziehungen>에서 <diese>가 의미하는 직접성을 이렇게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unmittelbar>. 여기서 <unmittelbar/직접>는 생성의 운동에서 후자와 전자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에 사용된 <regieren/정권을 쥐다/지배하다/다스리다>란 낱말에 기대어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이 문단은 유사한 단어가 등장하고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순수이성비판>의 서설과 대비하여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수학적 인식에 대한 헤겔비판의 요지는 인민이 주체로 서지 못하고 단지 지배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이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43

(§43) 수학적 인식에서는 통찰이 사태의 외부를 겉도는 행위다. 그 결과 [사태에 침몰하여 사태/개념의 운동을 따라 잡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은[1] 이런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행위로 대치되고 변질된다. 그래서 [수학적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작도나 증명 같은 수단이 [형식논리적으로] 다 맞는 말들만[2] [줄줄이] 포함하고 있다고 자긍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들의] 내용은 왜곡된 것이라는 점이다.[3] 앞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삼각형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 찢어진 부분들은 작도하는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그 삼각형의 언저리에 작도되는 다른 도형에 때려 붙여진다. 이렇게 인식이 전진하는 과정에는 원래 다루려고 했던 삼각형은 안중에서 사라지고 단지 조각난 상태로만 다른 총체에 예속되는 것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본래 다루려고 했던 삼각형이 복구된다. —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개념의 운동에서와 같이 내용의 부정성이[4] 발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거기서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확고한 사상이 사라지는 것을 놓고 [그 확고한 사상의 그릇됨을 이야기한다면] 여기서는 더욱더 [수학적 인식의] 내용의 그릇됨을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1] 원문 . 서문 §1 에서 이야기된 내용과 비교할 수도 있겠다.

[2] 원문 . 역자의 귀에는 하면 <겉치레>라는 의미가 들린다.

[3] 명제가 맞더라도 그 명제의 개념에서 증명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개념의 운동에서 새로운 내용이 생성되는 과정은 수학적 인식에서와 다르다는 것이다. 서설 §18과 대비하여 읽을 수 있겠다.

[4] 원문 . 또 소유격이 문제다. 주격 소유격인지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구별해야 할 것 같은데, 좀 헷갈린다. 운동의 원동력이 <부정성>이라면 주격 소유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수학적 인식의 증명과정에서는 <부정성>이 운동의 원동력이 아닌 것 같다. 이 문단전체가 알듯하면서도 뭔가 좀 아리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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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2


(§42) [수학적 진리에서는 이와 같은 근거제시가 더욱 중요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를 달달 외어 겉으로만[1] 알뿐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을, 거꾸로 표현하자면 [그 정리가 왜 성립되는지] 속속들이[2] 알지 못하는 사람을 기하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여러 직삼각형의 변을 측정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세변이 갖는 관계를 제시하는 것에 만족스러워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학적 인식에서는 증명이 이렇게 중요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인식 역시 아직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도 이런저런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는 사실이 사상된 역사적인 진리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수학적 인식에서도 증명의 [노력과 과정이] 본질적이라고 하면서도, 그런 것들이 [지양되어] 결론 자체에 스며있는 계기를[4] 이룬다는 의미와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되지는 않는다. 대려 결론에 이르면 증명의 노력과 과정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지나간 일이 된다. [증명의 노력과 과정을 통한] 결론이어야 비로서 참된 것으로 통찰된 정리가 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인식]주체와 정리와의 관계에서 뭔가가 달라진 것이지 [정리 자체에] 내용적으로 뭔가가 더해진 것은 아니다. 수학에서 증명이란 이름아래 행해지는 운동은 [대상에 파고 들어가 대상이 스스로 하는 운동을 따라 잡는] 대상에 속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태의 외부에 머무르면서 사태에 가해지는] 외면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증명을 살펴보면] 직삼각형이 스스로 자기 속성에 따라 자신을 해체하고 조각 내어 [a2 + b2 = c2 이라는] 변의 관계를 정립하는 명제를 증명하는데 필요한 작도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식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인식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럼 철학적 인식에서의 생성은 어떠한가?[5] 철학적인 인식에도 역시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대타적인] 현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생성이 있고 또 이런 생성은 사태의 본질, 혹은 내적 속성의 생성과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인식은 수학적인 인식과 다르다. 철학적인 인식은 첫째 앞의 두 가지 생성을 다 포함하는 반면, 수학적 인식은 이와 대조적으로 현존재의 생성만을 기술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수학적 인식행위는 사태의 속성이 사태 외부에, 즉 인식 내부에 [인식의 목적으로] 있는 것으로 하여 [이런 목적에] 짜맞춰 현존재를 생성하고 기술할 뿐이다.[6] 다음으로 철학적 인식과 수학적 인식이 다른 점은 철학적 인식은 특별한 양상으로 나타나는[7] 이 두 갈래 운동을 통일시킨다는 점이다. 이 두 갈래 운동은 떼어 놀래야 떼어 놀 수 없는 운동이다. 실체의 내적 발생 혹은 생성은 동시에 자기 외화를 이루는, 달리 표현하면 대타적인 현존재가 되는 운동이며, 현존재의 생성은 거꾸로 동시에 [과거의] 외화된 자신이 본질로 접어드는[8]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렇게 이중적인 프로세스로서 총체를 생성하는 운동이다. 이런 이중적인 프로세스 안에서는 [한 쪽이 다른 쪽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다른 쪽을 정립하는 동시에 그 다른 쪽을 통해서 정립되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양쪽이 지니는 이런 이중적인 운동이 두 개의 관점으로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양자가 어울려 총체를 이루는데, 이때 양자는 자진 해체하여 총체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

[6] 스피노자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유의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이, 즉 신이 할 일이 없어서 무슨 기업의 매니저나 되는 모양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상/현존재를 관리한다는 생각을 비판한 대목이 떠 오른다.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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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소리


비가 온다. 비 내리는 소리. 바람에 휘날리지 않고 그저 중력의 법칙에 순종하듯 차분히 내린다. 의식과 무의식간의 경계를 씻어버리는 비 내리는 소리를 타고 무의식은 의식이 되고 의식은 무의식이 되어 아무것도 가눌 수 없는 혼미한 것으로 배회한다.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다. 차분하게 내리고 있다. 독일의 기후가 아열대가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올 여름은 무덥다.

 

 

거실로 자리를 옮겨 창문을 열어놓고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참 좋다. 평화란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비 내리는 소리

 

 

작년, 사람의 체온이 부족해 이젠 말라 비틀어지고 더 이상 반들거리지 않는 마루턱에 앉아서 앞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산허리를 갈라 만든 길에는 남도의 황토가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같이 붉었다.

 

 

살며시 내리는 보슬비 소리만 변함없이 나를 찾아오고 차분히 내리는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더위 한여름 마루턱에서 낮잠을 자던 어린 아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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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1

(§41)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고 싶은 것은 [이렇게 비철학적인 진리를 운운하는 사람들도] 역사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그런 독단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를 순수한 사건으로만 제한해서 살펴보면 역사적인 진리라는 것은 [사건을] 개별적인 존재로 다루는 것이고 그 내용은 우발성과 자의성에 의한 특수한[1] 것이고, 그리고 이런 우발성과 자의성이 개별적인 존재에서 규정하는 것은 [태어난 날과 같이] 필연적이지 않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진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시피 앙상한 진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진리라도 자기의식의 운동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유의 진리 하나를 알기 위해서도 많이 비교하고 서적들을 참고해야 하며 또한 어떤 식이든지 간에 연구도 진행해야 한다.[2] [역사의 앙상한 진리 하나를 알기 위해서도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데, 직관이라고 해서 다를 수가 있을까?] [직관을 운운하는 사람이야 다른 것은 다 팽개쳐버리고] 앙상한 결론만을 놓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취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알맹이라고[3] 말하겠지만 뭔가를 직관하고 있다고 해도[4] 그에 관한 지식에 근거가 곁들어져야 비로소 참다운 값어치가 있는 진리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1] 원문 <einen Inhalt> 강조 역자. 번역에서 부정관사에 주목했다.

[2] <토아즈/Toise>가 뭔지 사전도 뒤적거려보고 인터넷검색도 해 보았다.

[3] 원문

[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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