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

(§2) <감각적 확신>은 그가 갖는 구체적 내용 때문에 등장하는 순간[1]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그 풍부함이 무한한 인식인 듯이 등장한다. 그 풍부함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서고 또 넘어서려고> 해도, 아니면 그 충만한 내용에서 한 조각을 떼내어 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들어간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감각적 확신은 또한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에서 아직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대상을 고스란히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 때문이란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이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2]것이다. 감각적 확신이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뿐이다: 그것이 <있다>. 감각적 확신이 내놓는 진리는 이러듯 단지 사물의 <존재>일[3]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 안에 나타나는 의식을 살펴보면 그 역시 단지 순수한 <자아>[4]로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확신 안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존재양식이 대등하게 되어 결국, 대상은 집어 찍어 들어올려 보여주는 것[5]이상이 아닌] 순수한 <이것>이[6]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사물화 되어] 단지 [찍어 지적하는] 순수한 <이사람>이[7]되다는 말이다.[8]이런 <이사람>뿐인 자아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통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 안에서 다양한 사유운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펼쳐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으로서의] 자아가 확신하는 <사물>이[9]구별된 성질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10],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물과 다방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위와 같은 양면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자아, 대상 할 것 없이 둘 다 다면·다층적인 매개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면·다층적으로 관념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갖는 자아도 아니고, 다면·다층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11]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사물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있다>라는 것이 감각적인 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존재>,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주름이[12]없는 직접성이 감각적인 지가 내놓는 <진리>란 것의 다다. 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대상에 대한 확신으로서, 이때 대상과의 관계는 [덜 떨어진] 직접적인 순수한 관계다. 결론적으로[13]의식은<나>라는 자아다.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이사람>일 뿐이다. 이런 <개별자>가 순수한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개별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

[2]원문 <sich ausgeben>

[3]원문 <Sein der Sache>

[4]원문 <reines Ich>

[5]아도르노의 <Abhub>

[6]원문 <reines Dieses>

[7]원문 <reiner Dieser>

[8]데카르트의 <성찰>과 함께 훗셀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 이념/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특히 제2장 <현상학적 근본고찰/Die phänomenologische Fundamentalbetrachtung>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원문에는 <Ich>가 두 갈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우림체를 사용한다. 역자는 기우림체를 <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몇 번 언급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성찰은 <Cogito res cogitans cogitatum/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대상을 생각한다.>요약될 수 있겠다. <res cogitans>가 바로 사물화된 의식이다. <Cogito>는 통각(Apperzeption)으로서의 의식이 되겠다.  

[9]원문 <Sache/사물>. 여기선 그냥 대상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물도 자아와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기우림체가 사용된다.

[10]원문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또 머리 아픈 <an ihr selbst>라는 표현이다.

[11]원문 <:>

[12]원문 <einfach/단순한>. 역자는 들뢰즈의 <le pli/주름>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13]원문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 한스 위르겐 크랄

[출처: www.krahlstudien.de/texte/bemerkungen.htm]

 

자본론과 헤겔의 본질논리학의 관계에 대한[몇 가지] 지적 (Bemerkungen zum Verhältnis von Kapital und Hegelscher Wesenslogik)

(aus: Aktualität und Folgen der Philosophie Hegels, Hrsg. O. Negt, Suhrkamp 1970)

 

마르크스 정치경제학비판의 기본개념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레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상품이란 개념은 마르크스 시스템비판의 가장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그 시스템비판의 출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 본질논리학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논리학의 범주들을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풀어내어 정치경제학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정치경제학비판의 핵심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를 따르자면 헤겔 논리학은 자본이 하는 자기운동의 코스프레다. 마르크스는 본질과 현상의 차이를 그의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가치범주에서 다시 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별하고 교환가치를 가치의 현상형식이라고 명한다. 이 점을 전통 경제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물화는 고사하고[이를 바탕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허위의식, 물신화, 신비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서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에  과학Wissenschaft으로 등장하려는 학문Wissenschaft의 자기이해가 달려있다. 이것은 생시몽에서 콩트를 망라한 일명 실증주의를 겨냥하는 프로그램이고 오늘날의 현대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적중하는 프로그램이다. 헤겔 논리학의 학습은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마르크의 정치경제학비판에 시간적으로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존재는 곧 있다는 것이고, 있다는 면에서 존재는 가상이다. 구체적인 자연은 단지 이념의 타자존재, 즉 이념의 외화다. 현존하는 것은 자기가 정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정신,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가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존재는 자기가 가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반성으로서의 본질은 반면 자기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가상이다. 반성은 자기를 아는 가상이다. 이와 같은 한도 내에서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지양하고, 말하자면 그의 물질적 중력을 상실한 것이다. 존재는 이렇게 순수한 사상이 된다.

마르크의 혁명이론 형식은 그의 관념주의 비판에 기반하는데 그 관념주의 비판에는 둘 갈래 축[Momente]이 있다: 인식론적인 관념주의 비판과 추상이라는 개념의 수용이다.

초기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두드러지게 서술되었듯이 원칙적인 관념주의 비판을 전개한다. 요지는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 역시 아직 전통적인 유물론의 결함을 안고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Realität을 주체적인 실천이란 관점, 즉 인간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객체의 관점아래, 관조, 즉 그저 감각적인 것의 관점아래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데모크리크 이후 전수되어온 전통적인 유물론이 관념주의와 대립되게 물질적인 현실을 실재하는 것Wirklichkeit으로 인정하고 이념을 본래적인 실재로 추대하지 않지만 물질적인 현실을 단지 관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한 아직 관념주의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질적인 현실과 관계하는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바라보는kontemplativ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현실을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그 앞에 바뀔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념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태도는 노예를 두는 사회 아니면 농노사회에서 불거지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회형식의 생산자는 자신을 생산자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하나는 생산수단이 대체적으로 토착적인naturwüchsig 공동체의 구성요소로만 드러나고 인간의 생산물로 자명해지기 않기 때문이고2) 다른 하나는 토지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조직형식에서 노예와 농노는 자유로운 임노동자와는 달리 노예주 혹은 봉건영주에 육신 혼 할 것 없이 몽땅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오로지 객체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다시 유물적인 현실이 생산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철학하는 주인의 의식에[그대로] 반영된다.

이와 똑 같은 지적이 감각적인 직관의 자리에 이념을 갖다 놓는setzen 전통적인 관념주의에도 적용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1번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물론에 대립하여 부르주아-신시대 관념주의는 행위라는 면, 즉 실천이란 것을 찾아냈으나 그 실천을 인간의 감각적인 행위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부르주아는 정통 봉건영주와 달리 생산에 관여verstrickt하게 되었지만, 그러나[직접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단지 순환에[상품의 유통에] 관여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노동을 인간과 자연간의 구체적인 물질대사Stoffwechsel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정신 노동으로, 물질대사가 추상된 추상적인 노동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 임노동자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거두어 들이고diskreditiert 정신노동[만을] 실재하는 노동으로 내 놓게 되었다. 여기서는 봉건성과는 달리 생산수단 자체가 생산물이 되었고, 그리고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본가와 맺는 관계가 노예 또는 농도와 같이[전]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계약으로 규정되는 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생산의 원리는 인식되었다.

[이렇게] 생산수단과 자유롭게[이동하는] 노동자간 분리되어 그 결과 이런 식으로 비로서 물질로부터 추상된 순수한 주관성reine Subjektivität,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생산력으로서의 순수한 노동reine Arbeit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신노동의 개념(독일 관념주의가 말하는 개념의 활동Tätigkeit des Begriffs)은 한편 자유롭게 이동하는 노동자를 이상화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개별자본가를 Unternehmerperson 이상화한 것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론 그것이 물질적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하지만 사회적인 객관성에Objektivität 대해서는 수동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사회적 객관성을 생산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객관성에 대한 이런 개념이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는 정신노동이라는 개념과 종합되어 사회적인 객관성이 능동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단지 철학 내재적인 바탕에만 근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포이에르바흐의 실천개념과 현실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행된 물질성과 이상성의 종합, 정신노동과 생산되지 않는 객체의 종합을 근거로 하여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에 속하는 개념을 획득한다. 즉 구체적인 노동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에게는 인간이 그 위에서 그를 지배하는 의식의 꼭두각씨일 뿐이나 마르크스는 인식이 유한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술어와 성질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저서에서 헤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데 앞서 전제하는 것이며 헤겔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는 다시 헤겔의 본질논리학을 수용한다.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인 의식은 가상에 속하지만, 현실성을 갖는 가상이다realer Schein. 즉 자본이다. 자본은 정신현상학이 현존하는 모습이다(Das Kapital ist die daseiend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자본은 현실적인 형이상학이다. 자본은 현실적인 사물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상이지만[현실적인 가상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파울 첼란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쓰디쓰고 너를 잠 못 이루게 했던 것을 세어라,

나도 세어 거기에 넣어라:

 

네가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았을 때 나는 너의 눈을 찾아 헤맸고,

아무도 모르는 한 가닥 줄을 꼬았고

네가 생각했던 이슬은 그 줄을 따라

그 누구의 마음도 찾지 못한 단창구(短唱句)를 지켜 보호하는  

항아리들로 미끄러지듯 흘러 내려갔다.

 

거기서 비로서 너는 온통 너의 것인 이름으로 들어갔고,

흔들림 없게 발을 내디디고 너에게로 당당하게 걸어갔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3-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 54번 뒷부분

정신분석자들이야 타쏘가[1]파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진단하고 말겠지만, 그가 바로 그렇게 공주 앞에 서기만 하면 부들부들 떨고, 결국 목전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명의 희생양으로 희생되기 때문에, [남성들이 이렇게 희생되기 때문에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아델하이드, 클레르헨, 그리고 그레첸의 입은 [음악과 같은/내용과 형식으로 구별되지 않는/그래서 거짓이 있을 수 없는/역사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직관한[2], 억눌림을 당하지 않는 말을[3]한다. 이런 말은 하는 여성은 에던 동산과 같은 패러다이스의 여성처럼 우리 곁에 있게 된다.[4] 괴테가[묘사한]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그 눈부신 생기 발랄함은[5]한 발짝 뒤로 물러섬과 [그 눈부심에 휩싸여 그것을 취하거나 거기에 빠지지 않고 대려 그것을] 피함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단지 [종이 주인의 딸을 욕망할 수 없다는] 현실질서의 승리 앞에서 굴복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 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돈 후안은 [타쏘에] 완전 대비되는 남성으로서 감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통일의 상징이다. 돈 후안을 보자면 거기엔 감각성이 원리로 파악되어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는 감각성의 비밀에 근접하게 다가서서 그것을 알아보고[6]있다. 감각성의 거센 눈길에는, 그런 눈길에 자성이[7]솟아오르지 않는 한, 바로 위에서 이야기된 이름을 상실한 것[8], 즉 불행을 동반하는 보편성이 찰싹 붙어있고 이런 [불행을 갖다 주고 자초하는] 보편성은 그 것의 음화상[9], 즉 제멋대로 다루고 처리하고 지배하고 행동하는1 사상의 통치권[10] 내부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숙명으로 재생산된다.



[1]괴테의<토르콰토 타쏘>에 등장하는 주인공.

[2]원문<angeschaut>.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다. 아도르노의<철학자가[사용해야 할] 말에 대한 테제>를 소화해야 할 것 같다. 소화하기 힘들다. 우선8번 테제의 원문을 소개한다.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8.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3]<Sprache/언어>를<입이 말하다>로 번역하였다.2

[4]원문<die zum Gleichnis von Urgeschichte sie macht.> 여기서<Gleichnis von Urgeschichte>를<원역사의 비유>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Gleichnis>는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뭔가를 직관할 수 있게 우리 곁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닌가 한다.

[5]원문<Schein des Lebendigen>. 여기서<Schein>은 거짓의 의미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나오는 뭔가 눈부시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할 때 그 여인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까? 여기 진보블로그에 <생기 발랄한 민중신학>이라는 제목의 블로거가 떠오른다.

[6]원문<rühren>

[7]원문<Selbstbesinnung>

[8]원문<Anonyme>

[9]원문<Negativ>

[10]원문<Souveränität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원문 "schalten" 불을 껐다 켰다 한다는 말인데, 유대인 수용소에서 쓸모있는 육신과 쓸모없는 육신을 가르는 "Selektionsrampe"에 서서 생과 사를 가르는 짓을 생각하게 만드는 낱말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der Mund redet wahr" "입이 진실을 말한다". 파울 첼란의 시 "corona"에서 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3-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 54번

[...] 쉴러는[사물을 바라볼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괴테와 비교해 볼 때 [사물에 완전히 밀착해 있는] 감각과 동시에 [사물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무감각을 보이기도 한다. 성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추상적이다. 직접적인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모든 것을 행위의 대상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든다. [...] 카사노바의 여인들은 이름대신 알파벳으로 지명되고 서로 아무런 구별이 없는데 이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사람을 육체의 기능과 뚫린 구멍 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사드의 오르겔에 의해서 복잡한 피라미드를 구성하는데 기계적으로 배치되는 육신들과 같다. 이와 같이 그대로 박아대는 성욕1, 즉 구별에 무능력한 유의 것이 관념주의의 거대 사변시스템들 안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생동하고 있다. 이렇게 독일 정신과 독일의 잔인한 야만성이 서로 발목을 쥐고 있다. 목사란 자들이 설교강단에서 내리치는 위협으로 겨우 제어되는 촌부의 탐욕이 형이상학에서는 자율로 등장하여 용병들이 점령한 도시의 여성을 마구 다루듯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아무런 형편도 보살피지 않고 그대로 [그저 구멍이라는] 본질로 절감하는 권리를 고집한다. 순수한 사행(reine Tathandlung)이란 별 가득한 하늘에 투영된 겁탈이다. 이와 달리 하염없이 그저 바라보는 눈길은, 사람과 사물이 그 안에서 비로서 자신을 전개하는 눈길은 언제나 객체에 돌진하는 충동이 꺾인, 반성된 눈길이다. 아무런 폭력이 없는 관조, 진리가 주는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되는 이런 관조는 관조하는 자가 객체를 먹어 삼키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 떨어져 가까이 있는 것이다(Nähe an Distanz.).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원문 Roheit/조야텍스트로 돌아가기

자료

이북 3대 세습

행인님의 [배교(背敎)를 원하는 걸까?] 에 관련된 글.

 

이북3대 세습.

 

물론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니까 말을 절제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보편적인 시민사회이념을 받들어 언성을 높이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이북선교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물론, 언성을 높이는 사람에게 하늘천 했으니까 따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늘천하고 그만 두어도 할 말이 없다. 단지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국제시민사회이념을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시민사회가 안 보이는 이북에 국제시민사회이념의 체 게바라라도 보내겠다는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자칭 진보의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은 북한선교보다 못하다. 이북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이 단지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한 한마디”뿐이라는 역비판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말도 하지 말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단지 실천이 결여된 것은 진보란 이름을 적법하게 걸칠 수 없으니 그냥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다.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은 오리엔트에 오리엔트 양식이 있다는 것보다 서양이 오리엔트를 겉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형태라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이를 비판하는 자칭 진보나 이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위대한 나라”의 헌법에 명시될 만큼 가시화된 보편적인 이념이다. 통과. 문제는 둘 다 이북에 3대세습을 비판하는/반대하는 이북시민사회를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소한 왜 그런가 이론이라도 내 놓아야 하지 않는가? 탄압이 심해서, 이북체제와 이북인민이 사이비종교집단과 같이 뭉쳐있어서, 아니면 지하시민사회가 있는데 공개하기 곤란하다든지…

 

내정간섭 배제 논리도 만찬가지다. 내정간섭 배제 논리는 국가간 모든 국가의 주권을 상대화한다는 논리다. 30년 종교전쟁의 결산이다. 요지는 어는 특정 국가가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유효하지만 “위대한 나라”가 종종 위반하는 국제법이다. 한 국가와 그 시민간의 관계에는 다른 국가가 간섭할 수가 없다. 단지 시민사회만, 그 시민사회가 어떤 국가의 틀 안에 있든지 간섭할 수 있다. 아니 시민사회의 속성상 실천적으로 간섭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의 문제와 똑 같은 문제다. 평양에 가서, 아니면 어느 나라 이북대사관 앞에서 1인 데모라도 해야 한다. 아니면 진보란 이름을 내려놓고 비판하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북선교를 지지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2

이 문단에서 <unmittelbar>가 뭘 의미하는지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자. <unmittelbar>가 이 문단에서 네 번 사용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같은 선상에서 사용되므로 세 가지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zuerst>란 의미로, 다음엔 <seiend>란 의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aufnehmend>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세 가지 낱말들이 모두 <의식>이 주인공이 되는 <정신현상학>이라는 드라마의 1막 1장에 등장하는 <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1막 1장에 의식이 <지>로 등장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무엇에 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이므로 <나는 무엇을 안다/Wissen von etwas>라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말일까? 아무튼 <정신현상학> 드라마에 의식이 취하는 첫 모습은 <지>다. 헤겔은 이 <지>를 <직접지>라고 하고 위의 세 가지 낱말로 설명한다. <나는 무엇을 안다>라는 <지>의 구조를 살펴보면 세 가지 축이[Momente] 구별된다. 지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이 둘 간의 관계다. <zuerst>는 <맨 처음>이라는 의미로 시간적인 의미이지만 <지>에 위의 세 가지 축이 스며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지의 주체를 설명하고, <seiend>는 지의 대상을, 그리고 <aufnehmend>는 지의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zuerst>란 의미의 영어 <first>와 독어 <Fürst/영주>의 어원은 같은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떠한 매개에 의하지 않고 [홀로 직접]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eiend>도 역시 아무런 매개에 의하지 않는 <그저 있다>라는  의미다. <aufnehmend>도 이런 주체와 객체간 아무것도 끼어 들 수 없는 그런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보면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unmittelbar>는 <직접적인 것이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뭔가 완전히 옹그려져 아무런 구별이 없는 상태다. 꿈꾸는 상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Mémoire involontaire>에 나타나는 것은 목전에 있는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다. 그 동기야 마르셀 푸르스트에서 볼 수 있듯이 <das Diese/바로 이것>이 되겠지만, 차 한잔에 곁들어 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에 의해서 솟아오르는 것은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라 <한 세계/eine ganze Welt>다. 여기에 <직접지>가 <가장 풍부한 인식>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헤겔은 이 문단에서 이런 <무의지적 기억>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전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왜 의식에 <무의지적 기억>이 등장하는가 아닌가? 여기서 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의식>이 능동적인 원리라면, 완전 수동적인 <무의지적 기억>은 의식의 터전에서 자리잡을 수 없지 않는가. 훗셀의 현상학과 함께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가서 알아봐야 할 내용인 것 같다.

 

그래서 철학이 등장하는 지를 향해서 취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 철학은 <직접지>가 취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지>가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을까. <태도>의 의미에는 대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역자가 이해한 것과 같이 <직접지>가 대상화 이전의 의식상태라면 <직접지>에게 능동적인 태도는 없는 것 같다. 비교하자면 유아가 태 속에서와 같이 <보살핌>과 <돌봄> 안에 있듯이 <직접지>란 대상 안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꼭 <지>라고 할 필요도 없겠다.

 

그리고 철학이 이런 의식을 대상화할 수 있을까? “How can we know the dancer from the dance?”  대상화한다면 대상화된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의식이, 아니면 온전히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지적 기억>이 취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선상에서 보면 철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조/Zusehen>라는 것에 억지와 폭력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이런 요소[Moment]는 <Zusehen>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있다. “Sieh zu, dass du das schaffst!” „주변을 잘 보살펴 그것을 달성해라!“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달성 못하기만 해봐라“란 위협도 스며있다. 철학의 <Zusehen>에는 이런 위협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의식의 형성에 <눈총>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다.

 

다듬고 방향을 주는, zurichten하는 <Zusehen/눈총>아래 의식이 형성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눈총>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학이 아니면 문학이 다루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 우리가 탐구를 시작할 때 맨 처음, 달리 표현하면 곧바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뭔가를 안다>는 지(知)일 수 밖에 없는데[1], 이 지는 <뭔가>를 바로 알아보는, 달리 표현하면 <있는 것>을 아는 직접적인 지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직접적인 지의 태도와 다름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지가 그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그 대상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지에 대하여 그렇게 하면 된다. 즉 우리가 직접 관계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나타난 직접적인 지에 어떠한 변경도 가하지 않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개념의 운동이[2]개입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다.



[1]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2]원문 <das Begreifen>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