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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6

(§6) {그런데 그런 것이 어떻게 스스로 표면에 드러나지? 대답하게 물어보면 되지…} 그럼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닌 감각적 확신에게 직접 물어보자. 감각적 확신아, 너 <바로 이것, 이것>하는데 <이것>이란게 도대체 뭐냐? [말해봐.] <이것>이라는 [지시적인 것의] 이중적인 존재양식, 즉 <지금>과 <여기>라는 면을 차례로 살펴보면, 지시적인 <이것>이 [자기 모르게] 행하는 변증법이 밖으로 드러나[1],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자명한 <이것>못지않게, 쉽게 이해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지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예를 들어 <지금은 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감각적 확신이 정말 자기가 말하는 것을 담고 있는가를[2] 조사하는 데는 그리 애쓸 필요가 없고 아주 간단한 실험만 해도 충분하다. [뭔가를 항아리에 담듯이] 감각적 확신이 하는 말을[3] 써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뭔가를 이쪽 항아리에서 저쪽 항아리로 옮겨 담았다해서 그 뭔가가 달라지지 않듯이] 우리가 감각적 확신이 하는 말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고 해서, 아니면 우리가 써놓은 종이를 [항아리를 선반에 올려놓듯이] 어딘가에 보존한다고 해서 감각적 확신이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사라질 리가 없다. 어, 바라보니 이제 어느덧 정오다. 지금 이때 우리가 써놓은 감각적 확신이 담고 있는 것을 다시 바라보니, 어찌된 일인지 삐적 마른 뼈다귀만[4] 남아있다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1]원문 <die Dialektik, die es [das Diese] an ihm hat>

[2]원문 <die Wahrheit dieser sinnlichen Gewissheit>. 여기서 <Wahrheit/진리>는 내용물의 참과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즉 <proposition>의 진리값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나아가 어떻게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3]원문 <diese Wahrheit>

[4]원문 <schal/맛이 간>. 그리스어 <skeleton/해골>과 어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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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5

(§5) 그럼, [감각적 확신 자체 안에 드러나 있는] 대상을 우선 살펴보아 과연 그런지, 감각적 확신이 [이것이 나의 본질이야라고] 내놓는 [무매개적인 꼰대로서의] 본질이 실제로 감각적 확신 안에서 그렇게 [무매개적인 꼰대로]  존재하는지 알아보자. {근데 어떻게 가름하지?}[1]이것은 [감각적 확신이 대상이야말로 이런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상의 자기개념이란 [무개적인 꼰대로서의] 본질이 되는 것[2]이라고 하는데, 이런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대상의 개념이 정말 찍어 올릴[3]수 있게 감각적 확신 안에 있고 양자가 합치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목적을[4]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란 참으로 무엇일까>라고 우리가 스스로 성찰하고 숙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눈으로 대상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각적 확신의 표면에 그가 대상을 어떻게 움켜쥐고 있는가가 드러나 있는 것만을[5]살펴보는 것이다.



[1]<정신현상학> 서론 §10 ff. 참조.

[2]원문 <Wesen zu sein>. 이 표현에는 좀 당위적인 의미가 스며있다.

[3]원문 <vorhanden>

[4]원문<Ende>. 여기서는<목적>이란 의미. 쉴러의세계사강의제목<Zu welchem Ende studiert man Geschichte?>와 비교. <무슨 끝장을 보려고 역사를 공부하는가?>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5]원문 <wie ihn [Gegenstand] die sinnliche Gewissheit an ihr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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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키케로의 "국가론"

marishin님의 [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 에 관련된 글.

 

marishin님의 [핵심 비껴간 세습 비판]에 lois님이 올린 덧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서 태크를 날린다.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에 기대어 이북을 한번 살펴볼 수도 있겠다.

 

우선 lois님이 참조한 키케로의 “국가론” (De re publica, 1,39-1,41; http://www.gottwein.de/Lat/cic_rep/Cic_rep138.php 참조. 그리고 아래 내용은 이 웹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을 상당부분 참조한 것이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위에 제시된 "국가론" 부분에서 아프리카누스는 <res publica>대한 정의를 한다. 이 정의과정은 2단계로 구분된다.

 

아프리카누스는 우선<res publica>=<res populi>라는 명목 정의를 한다. 이런 정의는 사실 동의어 반복으로서 내용적으로 얻어진 것이 없다. 하지만 <res publica>의 <publica>라는 형용사를 <populus>라는 명사의 소유격으로 대치함으로써 <res publica>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좀더 명확하게 물어볼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populus>에 달려 있다. 우선 <res populi>에서 <populi>라는 소유격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인민”이 주체로 등장하여 뭔가를 다룬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인민이 소유하는 그 무엇이 되겠다. 막역한 “그 무엇”은 영역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인민”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명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국가”=”인민”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res publica>는 “인민”이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무대로서, “인민”은 그 무대에 타자로 등장하지 않고 주체로 등장하고, 이렇게 등장함으로써 <res publica>가 실재하는 모습을 스스로 규정하는, 헤겔을 따르자면, “인민”의 인륜적(sittlich) 상태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기에<populus>란 것이 무엇인지 아프리카누스는 근류와 종차를 포함하는 정의방식을 사용해서 <populus>를 설명한다.

 

근류로는<hominum coetus>를 제시한다. [coetus는 coitus, 즉 성교와 어원이 같다. 어쩌면 여기에 <populus>를 “성교”를 바탕으로 하여 끈끈하게 이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의 원천이 있을 수도 있겠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가 <populus>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족”과 “인민”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족”하면 왠지 고리타분한 느낌이다.] 여기서 <coetus>가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곳에 모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다음 종차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iuris consensus>, 즉 일정한 법에 대한 합의를 이룬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utilitatis communio>, 이익공동체를 이루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populus>를 정의한 다음 <populus>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본다.지형적으로 알맞은 곳에 어울려 살다가 언제가 그 거주지역을 “울타리”로 구별하여 (oppidus/[영어 town/시의 어원은 독어 Zaun/울타리와 같다]) “고을”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더불어 로마의 “국가”개념은 이렇게 “고을”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원초적 구별을 바탕으로 하여 “도시”라는 거주영토는 자연.지형적인 요소보다는 공동체 삶의 영역, 예컨대 종교활동, 문화활동, 정치활동 등을 담는 공간으로 분절된다.

 

아프리카누스는 이렇게 [개념적으로 그리고 시공간적으로 분절되어] 구성된 (“constitutio”) <populus>를 <civitas>라고 호명한다. 문제가 있지만 <civitas>를 ”시민사회”라고 번역해 본다. [이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말하는 공민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res populi/인민의 것/공간, 공화국, 국가>에는 항상 <consilium>이 우두머리로 있어야(“regere”/조정하다; 지배하다; 지배자, 즉 왕이 되다) 한다고 한다. 여기서 <consilium>은 독어 <Rat>, 즉 평의회, 위원회와 같은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독어로 시청을 <Rathaus>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consilium>이 항상 “시민사회”가 생성된 이유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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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4

(§4) 이와 같이 꼰대를 세우고 있는 축과 거기에 들러리 서 있는 것, 즉 직접성과 매개성 간의 차이는[1] [등장하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만이 구별하는, 즉 우리만이 [억지로] 만든 차이가 아니라 감각적 확신에 [바짝 다가가] 그 자체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앞 단락에서 규정한 형식을 적용하지 않고 감각적 확신이 그 자체에서 스스로 그 차이를 보여주는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 확신을 들어다 보자.] 그럼 그 내부의 한편은 <있다>는 것 외 아무런 주름이 없는 직접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꼰대로[2] 설정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은 감각적인 확신 내부에서 <자력으로>[3]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비꼰대적이고[4] 매개된 것, 즉 대상을 알기는 하지만 대상의 존재에 완전히 달려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지>로서의 자아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지와 달리 대상은 [항상] 존재하고, 이런 <있음>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참다운 것과 꼰대로, 지가 알든 말든 이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대상은 지가 모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법이 없고, 반면 지는 대상이 사라지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원문 <diesen Unterschied des Wesens und des Beispiels, der Unmittelbarkeit und der Vermittlung>. 여기서 <Wesen>과 <Beispiel>을 형이상학이 주조한 <본질>과 <부수적인 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헤겔 전후의 형이상학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1 전통 형이상학의 개념을 사용하면 사태를 두루뭉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래서 <Wesen>을 <꼰대를 세우고 있는 축>, <Beispiel>을 <들러리>로 번역하였다. 맑스의 <자본론> 첫 부분을 읽으면서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기대어 이해하고 들어가는 오류도 볼 수 있다.

[2]원문<Wesen/본질>

[3]원문 <an sich>

[4]원문 <unwesentlich/비본질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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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의 자본론만이 유일한 예외라고 생각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3

(§3) [감각적 확신은 이렇게 순수한 존재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이 <순수한 존재>에 온통 기대고 있고[1], 또 <순수한 존재> 이상의 것을[2]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헤겔]가 <순수한 존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만 드러나는 것이[3]있다]. 즉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 사실] 다른 것들이 다양하게 들러리하고[4]있다는 점이다. [이점을 감각적 확신이 실지로 하는 행위에서[5]살펴보자.] 이런 [수행적인] 감각적 확신은 [물론] [아무런 구별이 없는][6]순수한 직접성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감각적 확신은 동시에 순수한 직접성이 직접 <들러리>로[7]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8]이때 순수한 직접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그래서 순수한 직접성안에 나타나는 차이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성이 어떻게 들러리를 서든지, [아무런 주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서 감각적 확신이 등장하는 그 순간[9]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지시적인 것>[10], 즉 <이사람>으로서의 <자아>와 <이것으로서의 대상>으로 주름지어지는 주요차이로 발견하다. <우리>가 이 차이를 성찰해 보면 전자, 후자 그 어느 것도 감각적 확신 안에서 <직접적>이지만 않고, 어디까지나 동시에 <매개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자아가 확신하는 것은 타자, 즉 대상이 되는 사물을 <통해서> 그렇고, 사물이 확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타자인 자아를 <통해서> 그렇다.



[1]원문 <Wesen/본질>. 여기서 <Wesen>은 <감각적 확신>이 존재하는 터전을 의미하는 것 같다.

[2]원문 <Wahrheit/진리>. 여기서 <Wahrheit>는 참과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나는 더 이상의 것을 담지 않는다>라는 허위와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진리>인 것 같다.

[3]원문 <an dem reinen Sein>

[4]원문 <beiherspielen>. 헤겔이 여기서 <Beispiel>을 <부수적인 것>,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symbebekos=accidens>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매개/Vermittlung>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5]원문 <wirklich>. 여기서 감각적 확신이 하는 행위는 자기수행적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wirklich/실재하는>를 <자기수행적>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 <diese>

[7]원문 <ein Beispiel derselben>. <Beispiel>을 <사례>,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순수한 존재>에서 <이사람>, <이것> 둘 중 하나가 들러리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한 번역이다. 이 문단에서 헤겔이 토론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댄 본질과 <symbebekos/beiherspielen>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

[8]이에 대한 대답은 헤겔과 직접지의 <대화>에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9]원문 <sogleich>. 직접성과 매개가 동시에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맨처음부터 매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10]원문 <di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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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수정

(§2) <감각적 확신>은 그가 갖는 구체적 내용 때문에 등장하는 순간[1]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그 풍부함이 무한한 인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 풍부함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서고 또 넘어서려고> 해도, 아니면 그 충만한 내용에서 한 조각을 떼내어 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들어간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 확신은 또한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에서 아직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대상을 고스란히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감각적 확신은 이런 것인데,] 감각적 확신은 실지로 자신이야말로 더없이 추상적이고 가장 가난한 진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2] 나선다.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알고 있다고 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뿐이다: 그것이 <있다>. 감각적 확신이 내놓는 진리는 다만 사물의 <존재>일[3] 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 안에 나타나는 의식을 살펴보면 그 역시 단지 순수한 <자아>[4]로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확신 안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존재양식이 대등하게 되어 결국, 대상은 집어 찍어 들어올려 보여주는 것[5] 이상이 아닌] 순수한 <이것>이[6]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사물화 되어] 단지 [찍어 지적하는] 순수한 <이사람>이[7]되다는 말이다.[8]이런 <이사람>뿐인 자아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통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 안에서 다양한 사유운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펼쳐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으로서의] 자아가 확신하는 <사물>이[9]구별된 성질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10],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물과 다방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위와 같은 양면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자아, 대상 할 것 없이 둘 다 다면·다층적인 매개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면·다층적으로 관념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갖는 자아도 아니고, 다면·다층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11]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사물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있다>라는 것이 감각적인 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존재>,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주름이[12]없는 직접성이 감각적인 지가 내놓는 <진리>란 것의 다다. 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대상에 대한 확신으로서, 이때 대상과의 관계는 [덜 떨어진][13] 직접적인 순수한 관계다. 결론적으로[14]의식은 <나>라는 자아다.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이사람>일 뿐이다. 이런 <개별자>가 순수한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개별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

[2]원문 <sich ausgeben>

[3]원문 <Sein der Sache>

[4]원문 <reines Ich>

[5]아도르노의 <Abhub>

[6]원문 <reines Dieses>, 시오랑의 “객체의 이념까지 멀리하는 점까지 나아간 순수한 [상태]”가 연상되기도 한다. (전 글 “encore” 참조)

[7]원문 <reiner Dieser>

[8]데카르트의 <성찰>과 함께 훗셀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 이념/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특히 제2장 <현상학적 근본고찰/Die phänomenologische Fundamentalbetrachtung>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원문에는 <Ich>가 두 갈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우림체를 사용한다. 역자는 기우림체를 <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몇 번 언급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성찰은 <Cogito res cogitans cogitatum/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대상을 생각한다.>요약될 수 있겠다. <res cogitans>가 바로 사물화된 의식이다. <Cogito>는 통각(Apperzeption)으로서의 의식이 되겠다.  

[9]원문 <Sache/사물>. 여기선 그냥 대상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물도 자아와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기우림체가 사용된다.

[10]원문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또 머리 아픈 <an ihr selbst>라는 표현이다.

[11]원문 <:>

[12]원문 <einfach/단순한>. 역자는 들뢰즈의 <le pli/주름>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13]덜 떨어진 갓난애기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 회의적인 노인네의 의식인가?

[14]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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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encore

§2를 한번 더 살펴보자.

 

<정신현상학>이란 드라마를 보러 오는 우리 구경꾼은 <직접지unmittelbares Wissen>가 1막 1장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고있다.

 

역자는 이 <직접지>를 주객의 구별이 없는 <꿈 같은 상태>로 이해했다.

 

근데 §2로 넘어가면서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원문을 살펴보자.

 

„Der konkrete Inhalt der sinnlichen Gewißheit läßt sie unmittelbar als die reichste Erkenntnis, ja als eine Erkenntnis von unendlichem Reichtum erscheinen, [...]. Sie erscheint außerdem als die wahrhafteste [...].”

 

역자는 §2를 처음에 이렇게 이해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직접지>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어린아이가 자랑 삼아 내놓는 것이 따져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근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덜 익은 생각으로 번역을 한 것 같다. 질문은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본다.

 

1.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에서 §2로 넘어가면서 아무런 구별이 없었던 <직접지>에 구별이 생긴다. <구체적 내용konkreter Inhalt>과 <감각적 확신 sinnliche Gewissheit>이 그것이다. 왜 이런 구별이 생기는가? <등장erscheinen>하기 때문에? 뭔가 석연치 않다.

 

2.

<erscheinen>하면 <무엇이> <누구에게> 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극장이라는 기본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했었는데 역자는 처음에 이 점을 간과했다.

 

<무엇>의 문제는 §1에서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뭔가 석연치 않다. §2의 주인공은 <감각적 확신>이 아닌가? <직접지>가 왜 <감각적 확신>으로 둔갑했는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더 헷갈리게 만든다. <직접지>가 철학=헤겔=구경꾼에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감각적 확신>이 뭘 모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인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감각적 확신>에게도 자신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는가?

 

원문을 살펴보자.

 

„Diese Gewißheit aber gibt in der Tat sich selbst als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Wahrheit aus.“

 

역자는 처음에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을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헤겔=우리가 이런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원문은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기대여 완전히 거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직접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고 보는 것은 철학=헤겔=우리고, 자신은 추상적이고 텅 비어있다고 신분증을 제시하면서(sich ausgeben) 말하는 쪽은 대려 <감각적 확신>이 된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등장하는 주인공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만사를 다 본 노인네다. 이 노인네에 한겨울 담요를 뒤집어쓰고 벽난로 앞에서 „cogito“하는 데카르트가 겹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에밀 시오랑(E. Cioran)이[1] 겹친다.

 

직접적이기는커녕 엄청난 반성을 한 지가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1]“Il existe une connaissance qui enlève poids et portée à ce qu'on fait: pour elle, tout est privé de fondement, sauf elle-même. Pure au point d'abhorrer jusqu'à l'idée d'objet, elle traduit ce savoir extrême selon lequel commettre ou ne pas commettre un acte c'est tout un et qui s'accompagne d'une satisfaction extrême elle aussi : celle de pouvoir répéter, en chaque rencontre, qu'aucun geste qu'on exécute ne vaut qu'on y adhère, que rien n'est rehaussé par quelque trace de substance, que la « réalité » est du ressort de l'insensé. Une telle connaissance mériterait d'être appelée posthume : elle s'opère comme si le connaissant était vivant et non vivant, être et souvenir d'être. « C'est déjà du passé », dit-il de tout ce qu'il accomplit, dans l'instant même de l'acte, qui de la sorte est à jamais destitué deprésent.” (출처: De l'inconvénient d'être né. 태어나 있다는 것의 모순[l'inconvénient/불편을 모순으로 번역했다], 3번째 단장;www.scribd.com/.../Cioran-De-l-inconvenient-d-etre-ne-Syllogismes-de-l-amertume-textes-integraux, 강조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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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공장

공장에 왔는데 일하기가 너무 싫다. 지겹다. 배아픈 척 하면서 십장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눌러앉아 브레히트의 시 한편을 읽는다.

 

Entdeckung an einer jungen Frau

 

Des Morgens nüchterner Abschied von einer Frau

Kühl zwischen Tür und Angel, kühl besehen.

Da sah ich: eine Strähne in ihrem Haar war grau.

Ich konnt mich nicht entschließen mehr zu gehen.

 

Stumm nahm ich ihre Brust, und als sie fragte,

Warum ich Nachtgast nach Verlauf der Nacht

Nicht gehen wolle, denn so war’s gedacht,

Sah ich unumwunden an und sagte:

 

Ist’s nur noch eine Nacht, will ich doch bleiben

Doch nütze deine Zeit; das ist das Schlimme,

Daß du so zwischen Tür und Angel stehst.

 

Und laß uns die Gespräche rascher treiben,

Denn wir vergaßen ganz, daß du vergehst.

Und es verschlug Begierde mir die Stimme.

 

내키는 대로 번역해 본다.

 

 

젊은 여자의 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

 

볼일 다 본 이른 아침, 여자는 썰렁하게 문을 열고 나도 썰렁하게 문턱을 밟으면서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나눈다. 잘 가 잘 있어. 그 순간 여자의 머리 한 가닥이 허옇게 새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다.

 

말없이 여자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여자가 질문 한다. “이제 밤이 지났으니 한밤의 손님인 그 쪽은 원래 정했던 것처럼 가야하지 않나? 왜 안 가? 뭘 더 원해?” 여자의 눈에 내 눈을 담고 말한다.

“안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더 있으려고 해도 하룻밤 이상 더 머무를 수 없어. 이 하룻밤만 더 있고 싶다. 근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내일 밤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런 것 기대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놓치지 않는 네가 왜 그렇게 문턱에 서서 그런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이런 앞일에 대한 대화는 얼른 끝내자. 너도 그러고 나도 그러고 우리 둘 다 한 순간 네가 바쁜 사람인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네가 더 쇠약해지지 전에.” 그 순간 그녀를 온통 먹고싶은 욕망이 나의 목소리를 덮고 목구멍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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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헤겔읽기, 그리고 페이크 오르가즘

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아니, 엉뚱한 데로 미끄러졌는지 제대로 미끄러졌는지 알 수 없게 헷갈린다. 이놈의 헤겔.

 

부럽다. 책 한 권을 마구 던지고 받고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 줄을 못 넘기고 시달리고 있는데.

 

글도 혼이 있고 몸이 있는가 보다. 글의 혼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면서 뭔가 소통이 된다고 흐뭇해 하는데 가다 보니 그게 아니다. 혼이 아니라 페이크 오르가즘이었다.

 

글 읽는 즐거움이 <남근>의 쾌감이었다. 앎의 주인이 되는 글읽기가 어쩌면 이렇게 주인이 자신의 지배아래 놓인 대상이 느끼는 쾌감의 주인까지 되는 <남근>의 쾌감과 같은 것일까.

 

페이크 오르가즘, 이성의 간지?

 

글의 몸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근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추스려서 공장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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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과 여성

뒷북 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 하려고 뒷북 치는지 모르겠다. 돌아와 상한 것을 추스르라고 치는 북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글 쓰고 있는가? 궁금해서 끄적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푸우님을 부르고 그에게 다가가는, 아니 다가가보고 싶어하는(ansprechen) 글이다.

 

“남성이 여성의 말하기를 억압하는 기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정말 부적절했나. http://blog.jinbo.net/kimpoo88/14)

 

푸우님, 저는 푸우님과 좀 다른 생각입니다. 저는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말하기/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착착 쌓아 올려 <남근>처럼 우뚝 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그와 반대로> 등의 접속사를 접촉제로 사용하여 탑을 쌓아가지 않고 오직 <그리고>라는 접속사에만 기대어 <늘어놓는> 것일 뿐입니다.

 

소통과 연대라는 진보넷 공간이 이렇게 <늘어놓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하나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축적하는 연구기관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성>과<여성>을 재현하고, <탑>을 세운 <남근>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공간에 등장하는 블로거들이 <순수한Sexuality>로 등장합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순수한Sexuality>라고 표현했습니다. 푸우님이 “나는 남성이다”라고 자신을 노출시켰지만 저는 푸우님을 <남성>으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성>으로 상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루만지고 싶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감정이 전혀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감정은 <laron>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진보넷 공간에서 저의 원초적인 구별은 <남성>과 <여성>이 아닙니다. 위와 같은 <Ζärtlichkeit>를 주고 받을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을 <순수한Sexuality>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진보넷 공간을 이렇게

성 구별이 지양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글쓰기/말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해방을 지향하는 <학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쓰기/말하기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생각입니다. 디오티마의 <Semen>, 디오티마의 씨로 임신하고 그 기호를 펄럭이는 소크라테스라는 패러다임을 갖는, 족보를 세우는 학문에서 벗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화두이지만 언제 익을지 모르게 항상 덜 익은 상태로 <남성 족보>에서 헤어나와 글쓰기/말하기 하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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