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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와 중앙권력

칸나일파님의 [진보정치, 지방선거 생각 2] 에 관련된 글.

먼발치에 있고 또 한국정당의 역관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진보진영, 즉 변혁을 추구하는 진영이 지지해야 하는 정당, 혹은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 단지 칸나일파님이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지적한 몇 가지 쟁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몇 마디 해보고자 한다.
 

기초의회 선거를 통해서 기성정치의 벽을 넘어 지역을 사고하는 당선자들이 기초의회를 장악하여 생활진보 걸음 나아갈 있는 정책을 있다는 견해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이것은 독일의 경우 지자체가 태동한 바덴뷔르템베르크지역 기초의회에서 최대당인 기민당보다 무소속후보가 30.38% 42.12% 비율로 훨씬 많이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Kommunalpolitik in den deutschen Ländern, 2003, 33 참조).

그러나 이런 현상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지자체가 1808년 프로이센의 슈타인 남작(1757∼1831)의 개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중세후기부터 농민전쟁과 민주주의 혁명이 잦았던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지역에서 태동했다는 점에 있다.

지자체에 대한 이런 접근은 지자체가 [존 롤즈가 닦아 논 지평에서 자란 마이클 월처 류의]공동체주의보다는 파리 꼬뮌에 더 가까운 자치정부의 태동이었고, 이러한 자치정부가 농민전쟁에서의 패배, 민주혁명의 좌절 등으로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관련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가 도입한 기초단체주의”(Kommunalismus)라는 개념에 기대어 스위스 국경지역의 남부독일에서 기초단체(Gemeinde)가 자치정부를 설립하려고 했던 노력을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지역의 기초단체(Gemeinde)는 중세 후반기 이후 정기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모여 행정집행인(Amtstraeger)을 선출하고, 해서는 안될 일과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이런 것을 어긴 행위를 처벌하는 재판을 열었다. 이런 구성원총회가 소집되지 않는 기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四人혹은 六人, 도시지역에서는 시평의회가 기초단체의 규범집행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주의란 공동체의 실생활관련 제반 사항을 조직하는 것으로서 구성원총회는 제헌의회의 성격을 가지며, 행정과 법집행을 자치적으로 집행하면서 대내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위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규는 기초단체의 자생적인 권리에 의한 것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누리는 권리와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권리와 의무는 협동조합적인 연합에서 자율적으로 노동하는 농민 혹은 수공업자가 갖는 권리가 된다.

이런 기초단체주의는 기초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기초단체에서 발전된 규범을 전체사회에 적용하는 경향을 갖게 됨으로써 결국 공화주의로 나아가가 된다. 이런 경향은 중앙권력체제를 형성하여 인민을 신민으로 만들고 행정의 대상으로 삼는 절대군주제와 맞부딪치게 되어 농민전쟁, 민주혁명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문제는 중앙권력과의 투쟁의 문제와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참조: Heinrich R. Schmidt, Gemeinde und Sittenzucht im protestantischen Europa der Frühen Neuzeit, in: Peter Blickle (Hrsg.), Theorien kommunaler Ordnung in Europa. 구글도서검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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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2

 

이성에 관하여 언급된 이와 같은 내용은 또한 이성은 합목적인 행위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될 수도 있겠다. 자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유에 대한 어긋난 생각이 자연을 사유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나았고 이어서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을 축출했던 탓에 목적이라는 형식 자체가 불신대상이 되었다.[1] 그러나 진정 사태는 그렇지 않다.[2]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한 것을 보면 목적이란 [최종목적으로] 처음부터 작용하는 것[3],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안주하는] 부동의 것,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다른 것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주체도 이와 같다. 주체의 동력은, 추상하자면, 자아로서의 의식[4],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부정성이다. 결과가 시초와 동일한 이유는 시초가 바로 목적이기 때문이다.[5] 이 문제는 실재하는 것과 그 개념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데[6], 실재하는 것이[7] 그의 개념과 동일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바로 애당초 목적으로서 직접적인 것이 자기를[8],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순수한 실재를[9] 바로 그 목적 안에 갖기 때문이다.[10] [실현까지] 완전히 전개된 목적, 달리 표현하면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는 엉긴 것이 펼쳐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렇게 안위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11] 바로 자기다. 이러한 자기가 시초의 직접성 및 단순성과 일치하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자기란 결과로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고 바로 이렇게 복귀한 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관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동일성과 단순성[12]이다.



[1]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바로 목적론이라는 편견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necessario existere“), 유일하고(„unicus“), 오로지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고(ex sola suae naturae necessitate esse et agree), 모든 사물의 자유로운 원인(omnium rerum causa libera) 되고, 모든 것이 안에 있고 신에 종속되어 있으며 없이는 있을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는 사실(„quod omnia in Deo sint et ab ipso ita pendeant ut sine ipso nec esse nec concipi possint“)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목적론의 동기로 사람들이 자신이 욕망을 가지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의 모든 사물이 그들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 움직인다“(„omnes res naturales ut ipsos propter finem agere)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편견이 우상이 되어 신이 자연을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의 최종목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데 (omnium rerum causas finales intelligere easque explicare) 전전긍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종목적을 쫓는 목적론은 질문에 질문을 거듭(causarum causas rogare)하지만 최종목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지의 망명지인 신의 의지로(ad Dei voluntatem hoc est ignorantiae asylum) 도주하여 안위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자를 자연의 사물을 학문하는 자세로 인식하려고(res naturalis ut doctus intelligere) 하지 않고 자연과 신의 통역자(naturae deorumque interpretes)로 행세한다고 한다. 아무튼 사물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이것은 신의 무결성(perfectio)을 지양하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활동한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뭔가를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원문 .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달리

[3] 원문

[4] 원문 ürsichsein>

[5]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4개 원인 (causa materialis/질료인, causa formalis/형상인, causa efficiens/동력인, causa finalis/목적인)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 13장과 자연학, 2 3장 참조). 그리고 헤겔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서는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이 하나라고 했던 것에 기대어 (자연학, 27, 198a 24 이하 참조) 주체를 설명하는 것 같다.

[6] 원문 < oder>

[7] 원문

[8] 원문

[9] 원문 . 정의로서의 개념적인 실재

[1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에 기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식(eidos), 혹은 원형(paradeigma)이 사유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바로 개별적인 것의 본질(ousia)이며, 개별적인 것이 그런 [유의] 개별적인 것이 (to ti en einai)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정의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의란 헤겔의 단순한 개념이상의 것이 아닌>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첫째 요인(proton dia ti)을 사람이 사람이 되는 최종규정(eis ton logon eschatonanágetai)과 같게 하여 이것을 원인(aition) 혹은 원리(arche)라고 하고 이것은 존재하는 그 무엇의 형식, 즉 본질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같은 곳 참조).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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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근님의 &quot;성을 매개로 한 여성 또는 남성의 행위가 노동일 수 있는..&quot;에 대한 답글


현실에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둘로 구별될 수가 있겠다. 하나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침몰하는 접근이라고 하겠다.

 

맑스의 사상은 철저한 이데올로기비판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첫째와 같은 현실접근을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다.

 

성매매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어떤이는 절대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주 홀가분한 접근이기도 하다. 혁명이 가져다 주는 정체된 상에 기대어 성매매를 다루기 때문에 성매매의 현실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고 그것을 서술할 필요도 없다. 혁명이 가져다 주는 절대사회상 아래 성매매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다룰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매매 현실에 직시하고 거기에 침몰하는 접근은 짐이 많다. 경험세계에 들어가 법제 등 구체적인 사항을 요구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 요구사항이 합목적적이지 않았다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성매매 현실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결론지을 일이다라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이런 현실적인 접근은 최악의 경우 성매매를 다루는 모든 구체적인 것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추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감옥수가 감옥에서 노동을 할 때 임금을 줘야 하는가, 줘야 하면 얼마나 줘야 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아주 보잘것없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예를 들어 1998.7.1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BVerfG, 2 BvR 441/90, http://www.bverfg.de/entscheidungen/rs19980701_2bvr044190.html)이 그런 내용이다. 감옥수의 시간당 임금이 당시 1.5 마르크였는데 이것이 기본법 11(“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다.”)에 명시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판결이다.

 

진보 또는 좌파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현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이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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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겸손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은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덕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겸손이란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누가 겸손을 지적하면 좀 역겨운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좌파의 논쟁을 보면 겸손이란 덕이 끼어 들 틈이 없이 살벌하게 진행되는 경우를 접한다. 여기 진보넷의 블로거들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나도 좌파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좌파와 좌파가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선에는 실천이라는 개념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겸손을 가지고 좌파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실천하는 가운데 실재하는 좌파의 요구에 따라 글쟁이행세를 하는 것도 좌파의 실천으로 쳐 준다면 좌파에 속하려고 노력하는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와 겸손>이라는 표제가 이젠 <좌파적인 실천과 겸손>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구체화 되었다.

 

실천하는 좌파가 겸손을 멀리하는 것은 인격수양이 부족하여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그런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천하는 좌파가 갖추고 있는 덕이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겸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은 독어권에서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겸손을 이야기할 때 Demut란 개념을 연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우리말에서 겸손을 이야기하는 맥락을 보면 독어의 Bescheidenheit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되는 것 같은데, Bescheidenheit란 중세에서 법원의 판결과 지시를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통찰하고 지혜롭게 대응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현실에 만족하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Demut의 어원을 보면 주인이 시키는 일을 두말없이 이행하는 노예의 자세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의미는 기독교가 강점하여 독점으로 삼고 절대 순종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거이기도 한다.

 

목사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겸손은 네 자신을 낮춰라인데, 이것이 전제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세를 낮추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역겨운 느낌을 충동시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또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수 있는 무리가 된다는 점이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모모 장로는 사장인데, 대기업의 이사인데 교회에 와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겸손을 보인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화장실 청소로 생계를 이어가는 누구는 교회에서 화장실청소를 해도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런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겸손은 사회적 현실을 바꾸지 않고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개념이다.

 

목사들이 말하는 이런 겸손과 대조적인 겸손이 있다. 마리아와 예수가 보인 겸손이다.

 

마리아의 사건에서 그 사건 자체만을 보면 이렇다. 가부장제가 철저한 근동에서 혼인을 약속한 한 여성이 남편이 될 사람과 동침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일 사건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그 남편이 될 요셉은 임신을 받아들였다. 당시의 현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두고 중세의 참신한 신자들은 마리아의 겸손을 이야기하는데 “Niederträchtige Maria라는 표현을 쓴다. 모든 사람이 깔보고 돌로 쳐 죽일 행위를 한 비천한 마리아라는 것이다.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데까지 현실적으로 떨어진 마리아를 두고 겸손한 마리아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어떤가? 내 생각으론 예수는 겸손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20).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춰 세상에 온 것이 되면, 이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의 사건의 되어 예수사건의 본질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랬지 않나 싶다. 예수의 사건이 단지 겸손의 사건이 아니라 정말 비천한 죄인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점은 마태복음 27 54절에서 예수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는 진짜 죄인이 되어 죽은 다음 백부장이 예수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뒷받침하지 않나 한다.

 

실재하는 좌파의 실천은 이와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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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1

 

(§21) 그러나 이렇게 매개작용을 대하면 기겁하고 몸이 굳어지는 것은[1] 사실 매개와 절대적 인식의 속성이 정말 어떤 것이지 전혀 접해본 일이 없는[2]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매개란 오로지 자기동일성이 자기를 움직이는 힘일[3]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개란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으로서 <>외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수한 부정인 [자아로서의] <의식>이 행하는 힘이다[4]. 매개의 이런 운동을 순수한 추상화 차원으로 투영해서 이야기하면 이는 단순한 생성[5]이다. [주체성이 깃든] <> [보란 듯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생성 일반으로서[6], 이와 같은  매개작용은 [분열된 것을 붙들어 안고] 씨름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단순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바로 [항상] 생성되는 직접성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직접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직접성을 잘못 이해하여] 반성을 [즉 매개를] 진리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절대적인 것의 적극적인[7] [실천적인] 힘으로[8]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성을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반성이 바로 [즉 매개가] 참다운 것이 결과가 되게 하고 동시에 또한 이 결과와 그 생성과의 대립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성은 결과에서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참다운 것의 형태와 구별되지 않고 오히려 단순성으로 복귀한 [현재]완료형으로서의[9] 생성이기 때문이다. 태아는 [가능]()적으로는[10] 인격체임이 틀림없지만 아직 자기 자신을 인격체로 자각한 상태는[11] 아니다. 인격체로서의 자기 모습은[12] 오직 이성으로 연마된[13] 후에 나타난다. 이성은 이런 연마를 통해서 자기의 본래적인 모습을[14] 실현하여 그때그때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15] 이성의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6] 이와 같은 결과도 역시 단순한 직접성을 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로 나타나는 이성은 자기 안에서 자기자신을 누리는 자유인데 이런 자기자신을 자각한 자유는 자기와 대립되는 것을 한편으로 몰아내어 거기에 방치해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과 화해해 있는 상태에[17]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 라틴어 perhorrere, 혹은 perhorrescere를 독어화 한 것인데, 부들부들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물다라는 의미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2] 원문

[3] 원문 . 무순 말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역자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자기동일성(Sichselbstgleichheit)은 분열이 없는 자기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에서 동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자기(sich)와 뭔가 다른 것으로 분열되었다는 전제아래 자기동일성은 자기(sich)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동일성의 운동이 내적 필연성을 갖는 운동인가, 즉 매개운동이 필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정한 당위성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인가 분명하지 않다.

[4] 원문 ürsichseienden Ich, die reine Negativität>.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까닥 잘못하면 die reine Negativitätfürsichseiendes Ich에 걸지않고 <매개>에 거는 것이다. fürsichseindes Ich<> <의식>으로 번역하였다. Fürsichsein의 터전이 의식이기 때문에 그랬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현상학 서론과 연계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랬다. 이 부분에서 임석진 교수는 <순수한 부정><매개>에 걸어 매개란 순수한 부정성으로서라고 번역하는데 (임석진, 정신현상학, 2005, 57.) 이것은 지적직관이 범하는 오류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면 매개를 직관형식(Anschauungsform)의 대상인 객체형식(Objektform)으로 보기 때문에 매개를 실천(Praxis)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헤겔이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현상학의 헤겔은 그렇지 않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이점은 맑스가  <그룬트리세>에서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5] 원문

[6] 원문 überhaupt>

[7] 원문

[8] 원문

[9] 원문 ückgegangensein>

[10] 원문 . 관련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11] 원문

[12] 원문 <r sich>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이 부분을 읽으면서 탈나치화에 앞장섰던 튀빙엔 대학 수사학 교수 발터 옌스(Walter Jens)를 생각해 본다. 그도 나치 국가사회주의노동당 당원이었음이 2000년대 초반에 드러났는데 다행인지 그는 침해에 걸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치당 당원이었음을 의식의 저편에 방치해 두었다. 한번도 그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진정한 자유를 음미해 볼만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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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0

진리란 [모든 것을 다 꿰어놓은] 전체다[1] .[2] 그래서[3] 전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본질이다. 절대적인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는 본질적으로 결과로서 끝에 가서야 비로서 그가 참으로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절대적인 것의 속성, 즉 자기모습을 갖춰가는 것으로[4] 존재함으로써 실재적인 것 또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담겨져 있다.[5] 절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결과로서만 온전히 인식될[6] 수 있다는 점에는 [절대자의 개념에 대한] 자체 모순이 있는 듯이 보이고 그 점을 계속 우길 수야 있겠지만 이점을 약간만 검토하면 이런 터무니 없는[7] 생각을 금방 바로 잡을 수 있다. 시초, 원칙, 절대적인 것 등 [학문을] 시작하자 마자 곧바로 내세워지는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모든 동물이라는 표현이 동물학을 대신하는 말로 통용될 수 없듯이 신,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등의 낱말이 그것이 포함하는 것은 말하고 있지 않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낱말을 단지 이와 같이 [외연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사실 직관 또는 직접적인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낱말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는 매개작용이[8] 따르는데, 낱말이 비록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달리 됨을[9] 내포하고 있으며, [이렇게 뭔가 다른 것이 되는 과정에서 낯설게 된 것은] 매개작용을 통해서 다시 자기로 회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작용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꺼린다. 그 이유는 매개를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절대적인 것 안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개를 이런 것 이상으로 이해하고 허용하면 바로 절대적 인식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원문 . 이 개념은 서양철학이 시초부터 <일체성>과 함께 문제 삼았던 개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체성> <전체성>이 동등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와 모두>라는 공식으로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공식에서 <하나> <다수>, <전체> <부분>이라는 모순이 테마가 되는데 양자를 매개하는 일이 서양철학의 맥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독어어원 사전을 보면 상한 것이 없는 온전한 것(heil/unversehrt), 빠진 것이 없는 것(vollständig), 완벽한 것(vollkommen)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2] 원문 헤겔의 이 입장을 아도르노는 전체는 비진리이다.(Das Ganze ist das Unwahre. 최소한의 도덕, 29 참조)라고 전면 거부한다. 관련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대학살의] 역사를 경험한 현재에 와서 철학이 참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은 헤겔이 철학전통과 함께 관심을 거두었던 곳에 있다. 플라톤이 하루살이와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폄하하고 헤겔이 게으른 삶이라는 딱지를 붙인 개념의 저편에 서있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이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강등한 질들이다. (Philosophie hat, nach dem geschichtlichen Stande, ihr wahres Interesse dort, wo Hegel, einig mit der Tradition, sein Desinteressement bekundet: beim Begrifflosen, Einzelnen und Besonderen; bei dem, was seit Platon als vergänglich und unerheblich abgefertigt wurde und worauf Hegel das Etikett der faulen Existenz klebte. Ihr Thema wären die von ihr als kontingent zur quantié négligeable degradierten Qualitäten.(출처, Adorno, Negative Dialektik, 1975, S. 19 f.)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도르노 사망직후 호르크하미어가 비판이론의 바탕은 좋은 것, 절대적인 것을 [이젠] 서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무엇 아래서 고통하고 그래서 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적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있다.(출처: http://www.zeit.de/1970/19/Das-Ganze-ist-das-Unwahre)라고 한 말에 기대어 이해할 수가 있겠다.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을 이렇게 설정한 연장선에서 아도르노는 철학은 개별자가(Subjekt) [억눌림 아래  어쩔 수 없이 견디다 못해 토해내는] 표현에 뱉어내는 것의 뒤를 따라간다. 주시해야 한다. 고통에 혀를 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요구가 모든 진리에 전제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개별자를 압박하는 객관성이다. 개별자가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 것이다. (Sie folgt dem Ausdrucksdrang des Subjekts. Das Bedürfnis, Leiden beredt werden zu lassen, ist Bedingung aller Wahrheit. Denn Leiden ist Objektivität, die auf dem Subjekt lastet; was es als sein Subjektivstes erfährt, sein Ausdruck, ist objektiv vermittelt. (같은 책 29)

[3] 원문

[4] 원문

[5] < zu sein>을 약간 하이데거식으로 번역했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 헤겔이 <매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두고 살펴보자.  

[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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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9

(§19) [지적직관과 관련하여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신의 역사와[1] 신적인 인식은 [자위행위와 같이] 자기 자신과 놀이판을[2] 벌이는 사랑으로[3]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랑의 유회라는 그럴싸한 생각은[4] 뭔가 위대한 것 앞에서 엄숙해지고 가슴을 부풀리는 것이지만[5] 김이 바로 빠져 푹석 주저앉고 말 것이다. 원상적으로[6] 신의 역사란 티없이 맑은 자기 동일성과 자기 통일성임에는 하자가 없다. 이런 동일성과 통일성 안에서는 신이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이[7]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원상은[8] 추상적인 보편성일 뿐이다. 이러한 보편성 안에서는 살아 역사하는 것의 본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 다듬어 나가는[9] 속성과 함께 형식의 자기운동 전반이 간과되어 있다. 형식과 본질의 동일성이 진술되는 가운데[10] 이런 명제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인식은 원상[11] 또는 본질만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고 형식은 생략할 수 있다는 것, 즉 절대적인 기본명제 또는 절대적인 직관이 그 기본명제의 전개나 직관의 발전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바로 본질에 있어서 본질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본질적이므로 본질은 한낱 본질로서, 다시 말하면 단지 직접적인 실체 또는 신의 순수한 자기직관으로서만 파악되고 표현되어선 안되고 그에 못지않게 형식으로,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12] 형식을 두로 발전시킨 완벽한 풍부함으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서 본질이 실재적인 것으로[13] 파악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1] 원문 . 역자는 여기서 <>으로 번역하지 않고 <역사(役事)>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 생명>이란 창조하는 자연>과 같이 뭔가를 창조하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대자>를 사유하는 지적직관과 함께 신을 로 사유하는 철학은 중세철학의 시초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구분론/de divisione naturae/Periphyseon>에서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00-877)는 자연을 창조되지 않고 창조하는 자연”(natura quae creat et non creatur=), „창조되었지만 창조하는 자연“(natura quae creatur et creat =창조된 모든 것의 본체/causa primodialis), „창조되었고 창조하지 않는 자연“ (natura quae creatur et non creat=시공간에 존재하는 피조물), 그리고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은 자연“(natura quae nec creat nec creatur) 4개로 구분하고, 신은 모든 범주를 뛰어넘기 때문에 [오성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묵상(contemplatio), 또는 „notitia intellectualis“(지적 앎/같은 책, 2, 20)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신을 인식하는 것과 신에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다“(„Cognoscere ergo et facere die, unum est.“같은 책, 2, 20)라고 한다.

[2] 원문 . <놀이/Spiel>개념은 쉴러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일련의 편지>에서 쉴러는 인간의 욕구(Trieb)를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소재충동“(Stofftrieb)과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형식충동“(Formtrieb)으로 구분하고 이 둘을 매개하는 것으로 놀이충동“(Spieltrieb)을 제시한다. 소재충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내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형식충동은 시간이 지양(사상)되어 아무런 변화가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충동이 합해져서 움직이는 충동을 당분간 놀이충동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물론, 앞으로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놀이충동은 시간의 흐름을 시간의 흐름 안에서 지양하는 쪽으로, 생성을 [변함이 없는] 절대존재, 그리고 변화를 정체성과 연합하는 쪽으로 방향이 맞춰져 있다.“(Schiller, Ueber die aesthetische Erziehung der Menschen in einer Reihe von Briefen). 그러나 이런 놀이충동은 사이비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텅 빈 주관적인 행위이고 현실을 변혁하는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낀 쉴러는 <놀이충동>을 주관이 스스로 만들어 갖고 노는 을 대상으로 하는 미적세계로 제한하고 삶을 편하게 하는 것, 좋은 것, 그리고 온전한 것“(das Angenehme, das Gute und das Vollkommene)을 대하는 태도로는 진지한 대결“(Ernst)을 요구한다. 결국, 쉴러는 세계에서 이룩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실재하는 현실세계로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초기 낭만주의, 특히 노발리스는 <놀이>를 우주전체에서 작동하고 그것의 구조를 결정짓는 원칙으로 간주한다. „신과 자연이 놀고 있지 않는가? 놀이이론, 성스러운 놀이, 순수한 놀이론 비속한 그리고 고귀한 놀이론. 응용 놀이론.““(„Spielt Gott und die Natur nicht auch? Theorie [de]s Spielens, Heilige Spiele, reine Spiellehre – gemeine – und hoehere. Angewandte Spiellehre.“ 노발리스, 보편초안/das allgemeine Brouillon) (참조: Joerg Neuenfeld, Alles ist Spiel, 2005. 위 쉴러와 노발리스에 관한 인용은 이 책 42(쉴러) 50(노발리스)을 따름 (구글 도서검색 가능).

[3] 원문 . 독어에서 사랑> 성적인 의미도 있다. 예컨대 하면 <성관계를 갖다>라는 의미다. 여기서 지적직관이 신을 향한 지적사랑과 비교되어 이야기 되는데 스피노자는 이와 관련 윤리학 5부 명제 36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사랑이 바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이다. 이것은 신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원의 관점아래 바라본 인간정신의 본질을 통해서 신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 한해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사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신의 사랑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Mentis amor intellectualis erga Deum est ipse Dei amor quo Deus se ipsum amat, non quatenus infinitus est sed quatenus per essentiam humanae mentis sub specie aeternitatis consideratam explicari potest, hoc est mentis erga Deum amor intellectualis pars est infiniti amoris quo Deus se ipsum amat.“)

[4] 원문 이념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ür sich>

[10] 아리스토텔레스/셸링

[11] 원문

[12] 원문 설명하는 <그리고>

[13]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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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8

 

(§18)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1] 참으로 주체가 되는 존재, 달리 표현하면 참으로 실재적인[2] 존재가 되는 것은 생동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실체가 생동한다는 것은, [그리고 실체가 이렇게 생동함으로써 참으로 주체가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립하는[3] 운동,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타자가 되는 가운데 이런 자신을 자기의 본래 모습과[4] [다시] 매개하는[5] 운동을 하는 실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체로서의 실체는 [이렇게] 순수하고 단순한 [자기] 부정성으로[6] 존재하고[7]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일한 것이 둘로 쪼개지는[8] [양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단일한 것이 이렇게 둘로 쪼개지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9] 양자로 쪼개지는 프로세스는 아무런 관계 없이 서로 외면하고[10] 이런 식으로 그저 차이와 대립을 빗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런 대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화된 프로세스다[11]. 애당초의 통일, 달리 표현하면 직접적인 통일이 아니라, 위와 같이 자신을 회복하는 동일성, 달리 표현하면 [자기와 타자로 쪼개진 가운데] 타자의 반성이 곧 자기의 반성이 되는 이러한 동일성이 진리가 된다. 진리란 이런 것으로서 [실체가 주체가 되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마치 원과 같은 것으로서, 원이 그 끝과 시초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것과 비교할 수가 있다. 원의 시점은 한낱 한 점에 불과한 것으로서 원이 되려면 그 끝을 목적으로 전제하고 바로 그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자신을 전개해 그려나가고 목적에[12] 종착할 때라야 비로소 실재하는[13] 것이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 은 독일관념론과 독일낭만주의가 사용한 핵심적인 개념인데, 헤겔은 여기서 이 개념을 더 설명하지 않는다. 어떻게 사용하는가 기다려 보자.

[4] 원문

[5] 원문 . 설명이 필요한 개념인데, 우선 <매개>라고 하고 헤겔이 나중에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6] 원문 tät>

[7] 원문 . 여기서 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다.

[8] 원문

[9] 정신현상학에 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앞에 보통 콤마가 온다. 드물게 세미콜론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그렇다. 콤마대신 세밀콜론을 쓴 이유는 실체가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부정>을 통한 이중화라는 첫 단계가 일단 끝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나 싶다. 실체가 주체가 되려면 이 일차적인 부정을 넘어서야 하는데, 이것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어디서 오는지/어떻게 발동하는지 헤겔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일차적인 단순한 부정은 제킬이 하이드를 자기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기와 자기의 부정된 모습인 타자와의 관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저 차이와, 그리고 이런 차이로서의 대립을 빗는 관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실체가 두개의 실체가 되었을 뿐 주체로서 갖춰야 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로 나아가지 못한 상태에 머물어 있다. 실체가 이 상태를 뛰어넘어 주체가 되려면 타자를 자신의 외화로 알아봐야 하는데, 이런 <반성>의 운동을 실체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 헤겔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헤겔의 주장은 물론 [본디 주체인] 실체가 스스로 하는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때리는 매가 없어도 될까? 주인이 때리는 매를 맞지 않고도 진정한 주체가 될 수가 있을까? 이 질문은 <정신현상학>이 없는 <논리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되는데, 역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하는 의식을 사상한 논리학이 어떻게 그 경험과 그 경험의 논리를 전개하겠다고 하는지 궁금하다. 이것은 단지 헤겔 철학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놓고 당파성을 견지하면서 <정신현상학>을 특정한 경향에서 뺏어오기 위해서 싸우는 문제다.

[10] 원문 ültig>

[11] 원문 부정과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화

[12] 원문 .

[13]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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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새 세상은 내 마음 안에 생동하고 있는가?


몇 달 전 일이다. 소시민 자영업 형태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라 부가가치세 신고 관계로 세무소에 들일 일이 있었다.

 

자리에 새로운 세무직원이 앉아있다. 보기에 50세를 넘어선 여성이다. 굉장히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볼펜을 잡고 있는 손이 약간 떨리는 듯 하다.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런데 동문서답이다. 내가 말하는 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계속한다. 언성이 높아진다. 세무직원의 불안은 더해가고 손을 더 떤다. 결국 나는 불친절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가 났다. 나는 속으로 ,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자리에 앉혀났담.” 이렇게 생각하고 내 행동은 아마 이런 생각에 어울리게 거칠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세무소에서 편지가 왔다. 몇 월 몇 일까지 이런저런 문제를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상담하던 그 세무직원이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보고한 모양이었다. 화가 더 치밀었다. 그 직원이 반쯤 죽여놓겠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글은 마력이 있다. 내 모습을 보여주는, 내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마력이 있다. 그 직원을 깔아뭉개는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내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은 어느 누군가가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도르노가 위로는 굽실거리고 밑으로는 짓밟는 소시민의 행동을 가장 약한 대상을 덮쳐 찢어 죽이는 맹수와 비교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세무직원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직업재교육을 받고 세무소로 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너무 잘못했다. 소시민의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편지를 고쳐 잘못과 용서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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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7

 

(§17) 내가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다면, 진리를 단지 실체로만 아니라 실체에 못지않게 주체가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표현해야만 비로서 지금까지 이야기된 다툼을 해소하는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1] 물론, 이러한 나의 시각은 체계의 서술을 통해서만 자기 정당성을 부여 받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실체성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실체성이란 보편적인 것인데, 이런 보편성은 달리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지의 직접성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동시에 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있는 존재를 또한 내포한다는 점이다. 일정한 시대에 들어와 신을 유일한 실체로[2] 파악하는 생각이 질서 정연하게[3] 표명되었는데 이 생각은 당대의 분노를 야기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론 그와 같은 실체 안에서는 자기의식이[4] 단지 소멸될 뿐 유지되지 안는다는 [생존]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사유를 사유로서 사수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는 단지 보편성에 멈추는 것으로서 결국 위와 똑같은 단순함,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구별이 없는 부동의 실체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로 [사유의 이런 면을 보완하여], 실체의 존재를 사유와 결합하고 직접성, 달리 표현하면 직관이[5] 곧 사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런 지적직관이[6] 과연 나태한 단순함으로 다시 떨어지고 실재 그 자체를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서술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중차대한 일이 아직 남아있다.



[1] 원문 alles darauf an, das Wahre nicht als Substanz, sondern eben so sehr als Subjekt aufzufassen und auszudrücken.>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주장되는 것은 아주 간단히 이야기해서 실체=주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체를 아리토텔레스의 본질>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면, 본질이 바로 주체(Subjekt)가 된다는 것인데, 뭔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 같다. 실체=주체하는 것은 문장에서의 주어(Subjekt)와 존재하는 본질, 즉 우유(偶有)적인 것(accidens)의 바탕(Hypokeimenon)이 되는 것을 짬뽕한 것이 아닌가? 헤겔 당시의 실체에 관한 논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이 문장을 이해할 것 같다. 데카르트부터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는 실체를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존재의 근거를 자기 안에 (causa sui) 둔다는 이야기다. 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스피노자도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존재의 근거를 갖든지 아니면 다른 것에 존재의 근거를 둔다(Omnia quae sunt, vel in se, vel in alio sunt. 스피노자, 윤리학 1, 공리 1). 자기 안에 존재의 근거를 갖는 것 실체가 될 수 있고, 이런 실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것이 전제되거나 어떤 매개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참고: 스피노자, 윤리학 1부 정의 3. Per substantiam intelligo id quod in se est et per se concipitur hoc est id cujus conceptus non indiget conceptu alterius rei a quo formari debeat.). 이렇게 존재의 근거를 자기 안에 두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질과 함께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참고: 스피노자, 윤리학 1, 정의 1. Per causam sui intelligo id cujus essentia involvit existentiam sive id cujus natura non potest concipi nisi existens.). 그래서 스피노자는 실체를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아무런 규정이 없는 그 무엇으로서, 규정 짖는 모든 부정을 (omnis determination est negatio.) 앞서가는 신이라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절대적인 무제한성 대신에 실체를 신이 창조한 우주의 기본요소로서의 단순실체, 혹은 단자라고 한다 (les Monades ou substances simples. 라이프니츠, 인간오성에 관한 새로운 에세이/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서설 참조). 이 단자는 개별적으로 규정된 통일성이며, 능동적인 자기행동성을 (Car je soutiens que naturellement une substance ne saurait être sans action. 같은 책, 서설 참조) 갖는 것으로서 존속하는 개별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같은 책, 2, 27장 참조)라고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헤겔이 뭐라고 하나 보자.

[2] 역자주 1) 참조

[3] 원문 . 기하논리학적으로 정연한 스피노자의 윤리학.

[4] 원문

[5] 원문

[6] 원문 . 데카르트에서 출발해서 스피노자를 둘러보고 칸트의 거점을 통과하고 야코비, 피히테, 쉘링을 넘어서 <실체>를 몇 문장으로 정리하는 헤겔을 여기서 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염두에 두고 우선 넘어가자. 그리고 뭐라고 하는지 계속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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