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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7

(§7) 알없이 겨만 있는 의식이 이렇게 회의주의를 고수하고 꼼짝달싹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의식이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되고 더구나 의식이 취해야 하는 형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취한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또 그 모든 형태를 서술하는 문제는[1] 의식이 어떤 형태에도 머물러 안주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거기를 떠나 다른 형태를 취해야 하며[2], 또 이 모든 형태들 간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통해서 자연적으로[3] 해결될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임시로나마 일반적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갔겠다. 즉, 참답지 않는 의식에게 그가 비진리라고 보여주는 서술이 단지 부정적인 운동만이[4]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운동에 관하여 자연적인 의식은 아무런 다른 이해가 없고 위와 같이 오로지 부정하는 단편적인 입장만을 취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입장을 본질로 만들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는 불완전한 의식의 한 형태다. 의식은 도정에서 반드시 이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그때 가면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언급하자면 이 형태가 바로 어떤 결과에서든지 단지 순순한 무(無)만 바라볼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회의주의다. 이 회의주의는 이와 같은 무가 어떤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결과로서[5] 밑도 끝도 없이 막연하지 않고 그 어떤 특정한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새겨져 있는 무라는[6] 사실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무는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되고 이 어떤 것을 부정하는 무라고 받아들여질 때만 비로소 참다운 결과가 된다. 이렇게 무는 제한성을 갖는 어떤 것이며[7] 이와 함께 또한 어떤 내용을 갖게 된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막연한 무와 공허로 끝나기 때문에 이런 추상을 떠나 다른 데로 나아갈 수 없고, 다만 뭔가 새로운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도사리고 있다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간에 이전과 다름없는 공허한 심연에 내던져버린다. 이와 달리 결과를, 결과가 참으로 그런 것처럼, 제한된 부정으로 이해하면 결과와 동시에[8] 새로운 형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도(過渡)를 통해서 의식이 일련의 행태들을 빠짐없이 취하고 통과하는 전진이 자력으로 이루어진다.



[1] 본문 ändigket der Formen des nicht realen Bewusstseins>를 이렇게 풀어 옮겼다. 회의주의를 고수하는 의식을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사실 『정신현상학』에겐 가장 골치 아픈 일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매번 등장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가 있을 수 없다.

[2] 본문 . 여기서는 이란 동사가 갖는 <고향을 떠나다, 지금까지의 삶의 터전을 떠나다>라는 의미를 살렸다. 고향을 떠나는게 쉽지 않고 그것이 경제적이든지 다른 이유이든지 상당히 강제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에는 강제적인 요소가 스며있다.

[3] 본문

[4] 본문 ß negative Bewegung>

[5] 본문

[6] 본문 . <제한된 부정>으로 번역되겠다. 역자는 아마 데리다의 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7] 이러한 제한된 무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무한한 무>가 아니다. 이런 <아무런 제한이 없는 무한한 무>는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무한>이라는 의미와 <경험이 대상이 되지 않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고대 그리스는 apeiron이라면 아연실색한다. Horror vacui의 겁보다 한층 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정해진 것(Horizont)이 있어야 좋다고 했는지 모른다.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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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6

(§6) 자연적인 의식은 단지 지의 껍데기[1]일 뿐이지 실제적인 지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2] 입증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인 의식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3] 자기 자신 그대로가 오히려 실제적인 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에게 이와 같은 도정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개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기상실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의식은 이 도정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라는 논증의 힘을[4]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회의에 빠지는 길로[5] 볼 수 있겠는데,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사실 절망에 빠지는 길이다[6]. 그 이유는,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는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란 보통 진리하고 여겼던 것을 이러 저리 한번 흔들어 본 다음 <어 진짜네>하고 회의를 걷어버리고 다시 착실하게 원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되돌아가 사태를 처음과 다름없이 다루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란 현상뿐인 지가 사실[7] 실현되지 않은 껍데기[8]뿐인 것을 가장 알찬[9] 것으로 여겼던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진리가 아니다라고 뼈저리게[10]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회의의 본질까지 파고드는 회의주의는[11] 진리와 학문을 놓고 분주하게 떠드는 자가 진리와 학문의 무기로 마련했다고 자부하는 회의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회의주의는 학문하는데 있어서 권위에 눌려 타인의 사상에 항복하지 않고, 대려 모든 것을 스스로 따져보고 자신이 확신하는 것만 따른다는,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스스로 재현.창출하고 오직 자기가 직접 주도하는 행위만을 진실된 것으로 여긴다는 결단과 같다. 그리고 이런 회의주의는 이런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충분히 가다듬어 진리와 학문에 적합한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주의는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는데 의식의 도상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의식은 그 형태 하나하나를 두루 거치면서 학문으로 자기 자신을 다듬어 나아가는데, 이런 모든 형태를 모아 논 것이 의식이 교양을 쌓아가는[12] 상세한 역사다. 그런데 의식은 위와 같은 결단만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학문하기에 알맞게 다듬는 일을 단번에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식이 들어서는 도정은 이와 같이 한자리에 한가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자기착각에[13] 반하여 길에 올라 실질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자신의 확신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권위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권위에 눌린 판단을 자신의 확신에 따른 판단으로 교체했다고 해서 꼭 판단의 내용이 달라지거나 오류가 있던 자리에 진리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타인의 권위에 눌려서 사념과 편견의 체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든 아니면 스스로 확신하여 그렇든 양자간의 차이에는, 자신의 확신에 기초해 있는 편이 좀 우쭐거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이와 반대로 현상뿐인 의식 전반에 회의의 화살을 돌리는 회의주의는[14] - 의식 스스로가 그렇든 아니면 타인이 그렇든지 - 자연적인 것이라고 내세워지는 관념, 사상, 사념에 대한 절망감을 일으켜서 정신이 비로소 진리가 무엇인지 진위를 가름하는데 도전하게[15] 한다. 사태가 이러한데 의식은 앞서 언급한 결단만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따지려 든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념, 사상, 사념으로 가득 차 있고 또 거기에 얽매여 있는 의식은 사실 그가 하려고 하는 일, 즉 진위여부를 따질 능력이 없다.



[1] 본문 . 여기서 <개념>보다는 <이름>, <>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알맞겠다. 예를 들어 Begriff Havelland.> <나는 Havelland라는 것에 대해서 그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도로 번역되겠다.

[2] 본문

[3] 본문

[4] 본문 . <진리>가 갖는 주장하고 논증하는 힘에 초점을 맞춰 옮겼다.

[5] 본문 . 보통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도 번역해서 진보넷에 올릴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6] 본문 . 우리는 을 보통 <절망>, 즉 희망을 그만두다, 끊는다라는 의미로 번역하는데 사실 의 의미가 완전히 옮겨진 것은 아니다. 14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라틴어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기대고 있는 개념은(Bezugspunkt) 에서와 같인 <희망/speratio>이 아니라 이고, 에서와 같이 뭔가 긍정적인 것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부정적인 것이 더없이 첨예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헤겔을 거쳐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면 존재 전체를 사로잡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Zweifel der Persönlichkeit)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1, 1028). 자연적인 의식의 도정이 반듯한 길인지 아니면 미로와 같은 인생의 어지러운 길(Des Lebens labyrinthisch irren Lauf; 파우스트, 헌사)인지 모르겠다.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길을 달리하는 대목인 것 같다. 

[7] 본문 .

[8] 본문 .

[9] 본물 .

[10] 본문

[11] 본문

[12] 본문

[13] 본문

[14] 본문

[15] 본문 . 역자의 귀엔 에서 동사 이 갖는 의미가 더 들려서 <재치 있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과 같이 뭘 정면으로 하게 하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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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2

(§2) 오늘날에 와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걱정이 이런저런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아는 체 하고 무게를 잡는 일 없이[1] 바로 철학이 해야 하는 일에 착수하고[2] 실질적으로 인식하는[3] 학문을 불신으로 대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사태가 진정 이렇다면 이건 눈뜨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로서 이젠 역으로 이런 불신을 불신으로 대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맞섬과 동시에 이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지[4]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이런 근심걱정은 뭔가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이런저런 변형을 내놓고 그것에 기반하여 이리저리 몸을 사리는 궁리들을 짜내고 어떤 바라짐하지 않는 결과에 귀착하게 되는지 보여주기 일상인데, 그런 식의 전제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먼저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이 근심걱정이 전제하는 것을 말하자면 인식을 도구나 매체로 보는 생각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인식과 우리 자신은 별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어처구니 없는[5] 것은 절대자는 이편에 서 있고 인식은 따로[6] 저편에 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인식이 절대자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이 실재적인 것을 담은[7] 것이라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자의 외곽을 맴도는 인식은 당연히 진리밖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것이라고 전제하는 짓이다. 인식에 대하여 근심걱정하는 자들이 전제하는 것을 겨우 이런 가정으로서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류를 두려워 한다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오지만 알고 보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이다.



[1] 원어 . 어떤 일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일을 방해하는 사람을 독일에서는 폄하하여 äger>라고 부른다. 특히 사회개혁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의 직업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를 놓고 이렇게 부른다. 정신현상학 때문에 쉘링과 헤겔이 절교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신현상학이 쉘링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역자는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헤겔의 말투(Tonlage)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2] 원어 . 이것은 §1 와 똑 같은 내용이다. §1의 역자주 2번 참조.

[3] §1의 역자주 4번 참조

[4] 원어 . §1의 역자주 11번 참조. 헤겔은 여기서 이런 구제책을 마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약속하는데(Versprechen), 정말 약속을 지켜 그런 구제책을 제시하는지는(einlösen) 두고 볼 일이다. 정신현상학이 바로 이 구제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헤겔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정신현상학도 역시 그가 비판하는 잡다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내다보는 것 같은데(vorgreifen) 한번 믿고 따라가 보자.

[5] 원어 <vorzüglich>. <으뜸가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상당히 빈정대는 투로 사용되고 있다.

[6] 원어 ür sich>

[7] 원어 . (사실을 담은/실재를 담은)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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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5

(§5) 그러나 이 서술은 단지 무대에 올라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몸부림하는 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의 모양, 즉 학문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완성된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서술은 참다운 지를 향해 몸부림치는[1] 자연적인 의식이 거쳐가야 하는 길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또는 혼이 거쳐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은 이 도정에서 그 본성이 미리 예비한 일련의 형태를 하나하나 취하고 두루 거치면서 [2],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경험함으로써 본래적인[3] 자신을 알게 되고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된다.



[1] 본문 . 아리스토텔레스의 oregesthai (형이상학, 980a 21), ephiesthai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의 <무엇을 향해 뻗어 나가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2] 플라톤의 국가 10권 마지막 부분 에르 신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에르는 아르메니오스의 아들로서 어떤 전투에서 전사한다. 전사 후 10일째 되는 날 다른 전사자들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는데 에르는 그렇지 않게 온전하게 집에 안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화장하려고 나무장작위에 갖다 올려놓았더니 다시 살아나고 저승에서 경험한 것을 보고한다. 이 보고내용이 플란톤의 에르 신화다. 주요 내용은 혼이 죽은 후 지옥과 천당에 간다는 것과, 너무 악해서 영원히 타타로스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혼은 다시 이승으로 온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혼이 다시 이승으로 오는 과정인데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차레대로 삶의 기본모형(bion paradeigmata, 국가 617d)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있고 없는 문제는 떠나서 운명은 이렇게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다. 쉴러의 발렌슈타인에서 피콜로미니가 발렌슈타인에게 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하늘이 아니라 <네 가슴속에 네 운명의 별이 있다>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플라톤도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자업자득이라는 면을 강조하는데 <다이몬이 너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너희 삶을 주관하는 신인] 다이몬을 선택한다.>(국가, 617e). 결국 선택한 삶을 선택한 다이몬의 주관아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선택이 다 끝나면 혼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레테 강물을 마시고 새 몸으로 이승에 다시 오게 된다.    

[3] an s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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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학살추모공원으로 간 이유

헤겔 묘소에서 유럽유태인추모공원으로 향하게 된 이유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마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였다라고만 한 것이 무성의하고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런 느낌은 괴테와 쉴러의 도시 바이마르에 가도 마찬가지다. 바이마르에 가면 반드시 바로 그 옆에 있는 작센하우센 유태인 수용소에 들린다. 그래야 마음이 균형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60년대 70년대에 68세대의 영향아래 독일에서 성인으로 접어든 사람이면 (Sozialisation) 어는 정도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nach Ausschwitz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화비평은 문화와 야만간의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와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다. 그리고 이런 야만성은 오늘날에 와서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인식의 목청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다. (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참 힘든 문구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에 지역이름이 따르면 보통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에서와 같이 지역이나 도시이름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 도시가 상징하는 것을 취하려 가는 그런 방향성을 말하고  이런 경우 는 거의 항상 긍정적인 면을 향해나가는 방향성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Novalis가 했던 말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항상 본향으로./ 는 그냥 <집으로>라는 뜻이다.)을 이해할 수 있다.

 

nach Ausschwitz. 그러면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이 말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적인 행위다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아도르노는 정말 아우슈비츠에 갔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혼이 유태인과 함께 흔적이 없이 재로 날라간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긍정이 사라진 변증법을 이야기했다. 혼이 죽어버렸는데 더 이상 무슨 긍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다면 아우슈비츠를 통과한 혼일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어린애한데 물어보듯 <헤겔하고 아도르노하고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오면 <아도르노가 더 좋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괴테보다는 파울 체란이 물론 더 좋고. 항상 내편이었던 누나 같은 의 데리다가 가장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헤겔이 옳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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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4

(§4) 절대적인 것에서 분리된 인식, 그리고 인식에서 분리된 절대적인 것이라는 관념의 연장선에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손에 쥐기 위한 도구라거나 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가려내는 매체라는 등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식의 입에 베인 말을 하는 학자를 상대해 주는 대신에, 아니 사태가 이렇다는 전제아래 학문의 무능력을 운운하면서 학문의 노고를 부정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학문의 노고에서는 해방시키지만 진지하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이는 듯한 외관은 걸치고 그에 따르는 존경은 마다하지 않는[1] 학자가 끊임없이 내놓는 이런 저런 구실을 받아주는 대신에, 정말 그런 따위에 답하는 일 때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쓰는 대신에 그와 같은 관념은 우발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고 정면으로 논박하고, 나아가서 이런 관념과 함께 절대자, 인식이라는 낱말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주체 등외 무수히 많은 낱말을 그 의미가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제하면서 사용하는 학자를 존경하기 보다는 그 행위를 기만으로까지 평가해 볼만 하다.[2]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낱말들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고 또 보통사람이면 누구나[3] 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작업, 즉 그와 같은 개념을 제시하는 일을 어떻게 든 면해보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학문을 가로막는 관념과 입에 베인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등장하는 학문 앞에 곧바로 수그러지는 지의 텅 빈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 등장하는 학문 역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등장했다고 해서 학문이 벌써 진리 안에서 속속들이 전개해 놓은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문이 다른 지와 나란히 등장하는데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학문이 자기만이 완성된 학문의 정통현상이[4] 된다고 하든 아니면 그 다른 참답지 않는 지를 돈독하여 학문의 발현이라고[5]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학문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챙기는 행동에서[6]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해방은 오로지 학문이 그런 겉치레와[7] 대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학문은 어떤 지를 대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참답지 않고 비속한 견해라고 깔아뭉개고,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른 인식이고 또 그런 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언만을 일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속한 지일지라고 그 안에 그보다 더 나은 뭔가를 향해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 점을 지를 논박하는 근거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단언만 한다면 학문도 역시 자신의 존재가 논증의 힘이라고 내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참답지 않는 지 역시 자신의 존재를 내세워 학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는가? 메마른 바탕에서 밑도 끝도 없이 단언만 일삼는다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 해서는 더더욱 안될 일은 참답지 않는 인식일지라고 그 안에 보다 나은 지를 향한 꿈틀거림이 있고 이것이 바로 자기자신을[8]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속한 지를 추켜세우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존재를 진위여부의 증인으로 내세우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문이 참답지 않는 지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 즉 학문 존재의 그릇된 양식과 학문의 완성된 모습[9]보다는 학문의 현상을 논박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이 지를 보는 시각은 일단 제쳐놓고 우선 지가 무대에 올라와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대로 서술하는 일에 도전함이 마땅하겠다.



[1] 원어 . <외관>과 <존경>으로 옮겼다.

[2] Ansehen (외관, 존경)과 als Betrug angesehen werden (기만으로 간주하다)의 Wortspiel에 초점을 맞췄다.

[3] 원어

[4] 원어 . 정관사를 <정통현상>으로 옮겼다.

[5] 원어 . <발현>이라 하여 동사적 의미를 부각시켰다.

[6] 원어

[7] 원어

[8] 학문을

[9] 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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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외국인 소수집단과 행형 1

통독 이후 외국인에 대한 태도가 좀 달라진 것 같다. 뭐가 달라졌는가라고 물어오면 이것이다라고 꼭 찝어 말할 수는 없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수년 동안, 아니 수십년 동안 독일인과 무수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무수한 말을 나누면서 생긴 누적된 육감이란 것이다. 내 자신이 경험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기도 좀 뭐하다. 자찬하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런 느낌을 받는가 내 자신이 쩨쩨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의 대외국인 정책도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싹 쓸어 잡아 이야기할 수도 없다.

 

독일 연방 정치교육센터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의 간행물 APuZ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정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보고정도로 번역되겠다) 2010 7 (2010.2.15)를 읽고 나서 이런 느낌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에 실린 한 논문을 아래와 같이 요약.정리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독일에서의 소수집단과 행형실태 (Minoritäten im Strafvollzug)>라는 제목의 논문인데, 1989-2009년간 Adelsheim청소년수용소 소장을 지낸 법학박사 Joachim Walter가 쓴 글이다. 그는 현재 “Neue Kriminalpolitik”(신형사정책)이라는 간행물의 공동발행인으로 일하고 있다.

 

* 행형은 형집행(Strafvollstreckung)보다는 좁은 의미로 자유형과 자유박탈을 수반하는 보안처분 선고를 포함해서 수용시설(감옥)에 수용될 때부터 석방될 때까지의 집행기간을 말함 (정승환, 형벌집행에 대한 법관의 통제와 형집행법원의 필요성 (www.kcla.net/download.red?fid=518)

 

 

 

1. 유럽과 독일에서의 외국인 소수집단 수감실태

 

0 유럽의 감옥에는 전체인구대비 외국인비율을 놓고 볼 때 외국인 소수집단이 수감되는 비율이 지나치게 높음.

 

- 이런 소수집단은 법적 사회적 지위가 불안한데 프랑스에서는 알제리인, 독일에서는 터키인들과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독일계 러시아인, 이태리에는 집시와 아프리카인, 스위스에서는 발칸반도 출생인 등이 이런 소수집단에 속함.

 

0 아래 통계는 독일의 수감인구에 외국인이 현저하게 과잉대표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

 

연도

독일인
(
단위: 1000)

외국인

(단위: 1000)

전체 수감인구 대비

외국인 수감자 비율 (%)

전체인구대비

외국인 비율 (%)

2002

48709

13885

22.2

8.6

2003

./.

./.

./.

8.9

2004

48387

13840

21.7

8.1

2005

49653

12576

21.8

8.9

2006

50486

14026

21.7

8.2

2007

50465

14235

22.0

8.2

(출처: 독일연방통계청, Fachserie 10, Reihe 4.1 (수감자) Fachserie 1, Reihe 2 (인구)

 

- 전체 수감인구 대비 외국인 수감자비율은 전체인구대비 외국인 비율보다 약 2.5배 정도 높고

 

- 독일국적을 취득한 외국인, 이주배경을 갖는 내국인 (이민 2), 그리고 특히 러시아에서 귀환한 독일계 러시아인은 보통 바로 독일시민권을 받기 때문에 외국인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실태를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임.

 

0 외국인 수감자가 이렇게 과잉대표된 이유를 외국인이 독일인들보다 더 자주 범법행위를 하고, 또 그 중에 강력범들이 더 많아서 그렇다고 가정할 수 있겠지만. 이런 가정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반박을 받음.

 

- 독일의 경우 1980년대에는 외국인 수감자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는데, 1990년대 들어와서는 지금과 같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변화함.

 

- 구서독에 한해서 집계된 통계에 따르면 1990-1999년간 독일인 일반 수감자와 보안처분 수감자는 8.9% 증가한 반면 비독일인 수감자는 161.7% 증가함

 

- 그러나 외국인 수감자 증가와 경찰이 접수한 범법행위신고는 무관한 것으로 집계됨.

.

- 1990-1998년간 범법혐의를 받고 신고된 외국인수는 2% 감소되었지만 유죄판결은 22% 증가하고, 수감비율은 심지어 73.6% 증가함.

 

- 역으로 동기간 범법혐의를 받고 신고된 독일인 수는 13.8% 증가하였지만, 유죄판결은 단지 9.8% 증가하는데 그쳤고, 수감비율은 대려 0.2% 감소됨.

 

- 그리고 강력범들은 통례적으로 전과범들인데 1990/91, 1997/199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와 니더작센주에서 실시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범죄자보다 독일인 범죄자 중에 전과범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남.

 

- 이렇게 외국인이 범법행위 신고대상이 되는 추이는 약간 감소되는 추이고 또 전과범 비율이 더 낮은데도 불구하고, 더 자주 유죄선고를 받았고 처벌도 더 무거웠다는 결과임. 다시 말해서 외국인이 범죄화 대상이 되는 위험이 높고 또 더 엄격한 처벌대상이 된다는 것임.

 

0 Pfeiffer 등의 조사에 따르면

 

- 외국인 수형자에게 조건부 자유형 선고가 허용되지 않고 꼭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위험이 독일인보다 2배 높고

 

- 수감자 100명에게 선고된 수감기간은 외국인이 독일인보다 1.5배 높음

 

0 이렇듯 수감자수의 증가 혹은 감소는 대체적으로 범법행위의 증가 또는 감소와 무관하고 어디까지나 법적, 법집행기관적, 그리고 여타 사회적 변화와 연계되어 있음.

 

- 다국에서 실시한 조사를 비교해 보아도 범법행위신고 비율과 수감자 비율간에 아무런 연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남.

 

- 집계된 데이터에서 우선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법원이 어떤 그룹을 상대로 하여 얼마나 자주 가장 강력한 처벌인 자유형을 선고하는 경향임.

 

- 유럽과 독일에서의 소수민족의 수감현실은 20세기 前伴에 미국 시카고의 형법학자들이 조사한 결과와 유사한데

 

- 그 내용은 가장 최근에 이민해온 이민그룹이 통제기관으로부터 항상 가장 골치 아픈 문제로 간주되고 그전에 문제그룹이 되었던 이민그룹의 뒤를 이어 주요 수형자가 된다는 것임.

 

- Mueller-Dietz에 따르면 이와 같은 결과는 처벌의 관대화(Liberalisierung) 및 차별화 그리고 다양한 전략으로 세분화된 범법행위통제가 내국인에게만 적용되는데 그치고, 대부분의 이민그룹, 특히 가난한 자국을 떠난 경제난민에게는 자유형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고 해석될 수 있음.

 

2. 소수민족이 과잉 수감되는 이유

 

0 소수민족이 과잉 수감되는 이유로는

 

- 경우에 따라 처벌대상이 되는 다른 행동 및 생활환경

 

- 다른 법적 지위

 

- 그리고 사회와 대중매체의 보도를 포함한 사회통제기관으로부터 실지로 달리 처우되는 현실 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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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 학살 추모 공원으로 2

묘지에서 나와 유럽 유태인 학살 추모 공원으로 항했다. 거기를 들러봐야 뭔가 마음의 균형이 잡힐 것 같아서 그랬다. 무슨 균형이라고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하기 뭐하다. 그냥 그렇다고 하고 내버려 두자.

 

 

멀리 연방하원이 보인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미대사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누워서 Andacht?

 

 

 

.....

 

 

옆 Tiergarten에는 봄이 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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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 학살 추모 공원으로 1

최근에 풀 프레임 카메라 한대를 장만했다. 사진을 다시 찍고 싶어서다. 렌즈는 왜 그리도 비싼지 바디밖에 구하지 못했다. 렌즈 중고 시장에서 구닥다리 렌즈 몇 개를 구입해서 오늘 들고 나갔다.

 

헤겔이 누어있는 공동묘지 Dorotheenstädtischer-friedrichswerderscher Friedhof를 찾아갔다. 베를린시 중구에 있는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근방에 와서 주차장을 찾아 헤메는데 길 이름이 Tieckstrasse, Schlegelstrasse 등이다. 그러면 Novalisstrasse도 있겠지하고 돌아보니 기대했던 데로 Novalisstrasse도 나온다. Eichendorffstrasse도 나오고....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이다.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브레히트와 헬레나 바이겔이 양지바른 구석에 나란히 누워있다.

 

아담한 공동묘지다.

 

 

하이너 뮐러의 묘소가 참 인상적이다.

 

다른 묘지 풍경

 

 

이름이 깨져있다. Fritz 누구?

 

피히테부부와 헤겔부부가 나란히 누워있다.

 

 

묘지에서 나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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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3

(§3) 인식에 대한 근심걱정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절대적인 것만이 진리이고, 오로지 진리만이 절대적이라는 명제에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인식에는 별다른 종류가 있다고 꼬집고 위의 결과를 거부할 수도 있겠다. 즉, 어떤 인식은 학문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진리일 수가 있고, 또 다른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파악할 능력은 없지만 다른 식의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왕좌왕하고 종잡을 수 없게 떠벌리는 일은 꼬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1] 실상이 바로 파악되어 절대적인 진리와 그 밖의 다른 진리라는 애매모호한[2] 구별에 몸을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절대적인 것, 인식 등과 같은 낱말의 의미는 사실 숙고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국면에 놓여 있는데, 이미 어떤 특정한 제멋대로의 의미로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 원어 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2] 원어 üb>. 뭔가에 걸려 낱말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파우스트 1』의 헌사에 똑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데(Ihr naht euch wieder, schwankende Gestalten, die früh sich einst dem trüben Blick gezeigt.) 괴테의 색채론을 언급하면서 독일 낭만주의가 üb>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Hans Arens 주해를 언젠가 읽어 적이 있어서 그런 같다 (Hans Arens, Kommentar zu Goethes Faust I, Heidelberg 1982). 여기서 걸리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정신현상학당시 논쟁의 지형이 어떠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정신현상학을 읽다 보면 담화적인 구조(dialogische Struktur)가 눈에 뜨이는데, 이때 특히 발화수반적인 기능을 하는 불변화사(Partikel)를 번역하는데 당시의 논쟁지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번역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부딪히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애로사항은 정신현상학뿐만 아닌 것 같다. Helbig/Buscha 독어가 다른 언어에 비교해서 이런 Dialogpartikel(Harald Weinrich, Textgrammatik der deutschen Sprache, 4. Auflage, Hildesheim 2007,  835쪽) 아주 많다고 (partikelreich) 지적하고 있다 (Helbig/Buscha, Deutsche Grammatik, ein Handbuch für den Ausländerunterricht, 15. durchgesehene Auflage, Gütersloh 1993, 477쪽). 아무튼, 정신현상학의 담화적인 구조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지형에 통달한 길잡이가 필요할 것 같다. §1의 첫 문장을 번역하면서 <꼭 필요한 도구>라는 옮긴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것을 정신현상학 당시 논쟁지형과 관계하여 살펴보면 헤겔도 역시 인식을 진리를 알아내는데 유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않았던 무리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의 전선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라는 bon mot (독일 화가 Martin Kippenberger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틀릴 수도 있다.)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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