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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사무당파님의 [성특법, 그 지옥의 묵시록 리스트] 에 관련된 글.
한속
2월 13일. 가슴속에서 속삭이다가
깨어난 Schibboleth. 너와 함께
Peuple
de Paris. No pasarán.
왼쪽은 새끼 양: 아바디아스,
웨스카 출신의 노인, 개들을 이끌고 온다
들판을 가로질러, 귀양지에서
하얀 구름으로 서있는
인간의 고귀함, 그가 입을 열어 떨어뜨린다
우리 손에 낱말 하나를, 우리가 필요한 낱말 하나를, 그 말은
양치기 스페인어다, 그 말 안에,
순양함 „아우로라“의 어름 빛을 타고서:
형제의 손, 흔드는 그 손
낱말처럼 뚝 떨어지느 말처럼 둥그런 눈에서
벗겨낸 눈가리개를 – 페트로폴리스,
잊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영원한 도시가 사람들의 몸을 실고 유람하는 도시가
너에게는 또다른 토스카나 [궁궐]이 되었단 말인가.
오두막에 평화를!
(파울 첼란, „Niemandsrose“에 서)
아랍혁명과 나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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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공부하자는 게 왜 문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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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와 중앙권력 |
출처: www.kunstkopie.ch/a/albrecht-duerer/duerers-mutter.html
“삶의 멍에아래 겪은 갖은 수모와 그에 대한 원한이 움푹 페인 할머니의 얼굴을 보여주는 이 그림에 얼른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러한 거부로 다가오는 첫 충동에 고삐를 채우고 우리의 눈길을 거기에 고정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아무런 타협이 없는 진실성이 자기 어머니를 그린 뒤러의 이 작품을 위대한 미술작품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그림의 아름다움은 뭔가 아름다운 것을 그려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곰브리히, 예술의 역사)
„가난, 내일에 대한 근심걱정, 분노, 냉대, 무관심, 끓어오르는 열정, 치우친 목적만을 움켜 쥔 전전긍긍, 요동, 이리저리 갈라진 산만한 정신, 외부 자연에 예속된 상태, 한마디로 어디서나 한계에 부딪히는 인생의 이런저런 우연이 온통 독특한 것으로만 얼굴에 낱낱이 각인되고 표현되어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인상은 모든 열정이 하나같이 파괴적인 폭풍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부셔버린 표현을 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인상은 삭막하고 진부한 것으로 가득 찬 내면만을 엿보이게 하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인상은 아집으로만 가득 차 보편적인 유형이 거의 다 사라진 형상만이 남아있을 정도다. 이렇게 인상이 갖는 형상의 우연한 모습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어린이가 대체적으로 가장 아름답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아직 모든 독특성을 아무런 요동 없는 씨에서와 같이 간직하고 있고 또 아직 편파적인 열정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가는 법이 없어서 삶 속에서 이리저리 갈라지는 소원과[Interesse] 그것을 달성하려는 노고의 흔적이 그 어느 하나 아직 유연한 표정에 다시 지을 수 없는 획으로 패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동성은 있지만, 거기에는 자신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더 보편적인[wesentlich] 방향과 목적을 향해서 박차를 가한 정신의 흔적이 없다.“ (헤겔, 미학강의)
그래서 쭈굴쭈굴한 시골 할머니의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
marishin님의 [보드리야르 재발견의 의미] 에 관련된 글.
관련 karl Heinz Kohl, Die Macht der Dinge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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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사무당파님의 [전국연대가 중앙일보 보다 더 우익] 에 관련된 글.
몸 파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반병신 모양으로, 쥐어 맞은 꾸부정한 모양으로[1] 가눌 수 없는 몸짓을 하는 우리는, 잡화상을 열고 인권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광수와 같은 잡화상주인이나 매춘을 단지 사회정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양선희와 같은 노련한 기회주의자와 기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몸에는, 매춘을 사유하는 우리의 실체에는 헝가리에 두고 온 두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독일 Hamm-Heessen이란 도시에서 길거리 매춘을 하다가 2009년 6월 5/6일 자정 즈음에 32세의 나이로 살해당한 헝가리 여성 Monika가 쐐기로 박혀있다. 그 뿐인가. 급진여성주의는 우리 사유의 실체에 쐐기를 박고 똑 박는다. 아니, 현실이 그리하고 있다.
이런 쐐기를 안고서 우리는 마광수와 양선희 따위의 무리와 맞서고 있다. 승무춤을 추면서. 동작 하나하나가 아프다.
우리는 마광수와 같은 춤을 추지 않는다. 홀가분한 몸으로 물구나무선 체 걸음마 연습하는 따위의 춤을 추지 않는다. 부부강간에서는 자유법치주의 원칙을 고수하다가 성매매 특별법에서는 머리를 땅에 쥐어박고 <봐라> 하고 자랑하면서 인권을 운운하고 매춘여성을 배려하는 척하는 천박한 물구나무서기 춤을 추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싸움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진보진영의 특산물로 생각했던 법정신과 법의미가 왜 마광수가 차지하는 것이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악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수구꼴통들이나 취하는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는가.
갑갑해서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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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와 같이 판가름에 용이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젠 잡화상에서나 볼 수 있는 동전으로 쉽게 사고팔기하는 것이 되었는데[1] 이런 것이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지금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자세는 철학 저술의 숭고한 내면이[2] 목적과 결론이 아니면 어디에서 더 밝혀질 수 있으며, 또 동시대가 같은 영역에서 산출한 것과의 차이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목적과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그들은 자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인식의 출발점 그 이상의 것으로, 즉 현실을 안고 거기에 몰두하여 싸우는 실재적인 인식으로[3] 간주된다면 이것은 사실 진정해야 할 일은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착안한 잔꾀라고 해야만 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겉으론[4] 마치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열정과[5] 사태 자체와 씨름 하는 척하는 노력은 [6] 보란 듯이 내놓지만 막상 그런 열정과 노력은 멀리하고 실지로 면해보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철학이 안고 해야 하는 일은[7] 그가 붙들어 안은 사태의 목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전개과정을[8] 통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다룸으로서 완성되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참다운[9]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즉 뭔가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한[10]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이고, 경향이란 것은 현실에 발 돋음 하지 않는 한낱 요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결론이란 경향이 떠나버린 요동 없는 시체일 뿐이다. — 차이를[11]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체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데[12] 차이는 사태의 외피일[13] 뿐이다. 차이는 사태가 끝난 곳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면 차이가 아닌 것이 사태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체계의 목적과 결론, 차이와 판정을 빌미로[14] 한 이와 같은 노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쩜 굉장히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행위는 사태를 붙들고 고심하기 보다는 사태는 아예[15] 뒤로 제쳐 놓거나 그 위에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는 사태 안에 머물면서[16] 사태에 푹 빠져 들어가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계속해서[17] 남의 것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 것보다 좀 나은 다른 무언가가[18] 있으면 움켜쥐려고 팔을 뻗기 일쑤다[19]. 그래서 이러 지는 사태와 함께 하고 거기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가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일 뿐이다. 아무튼[20], 내용이 충실하고 건실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평가와 파악을 통일하는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 본문에 등장하는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Bemühen um die Sache].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immer>. 여기엔 <항상>이라는 의미보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아무튼>으로 본문의 삽입구와 연결했다.
바람소리님의 [제 7의 인간, 존버거의 시선을 느끼다] 에 관련된 글.
고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생각나는 것은 Larry Sultan이 "사진작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가짐은 tenderness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2)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철학작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결과와[1]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가운데 이렇다라고 확신하는 것도[2] 철학 외적인 관심을 끌고 들어와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어둡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천박한 생각에 젖어있는데[3], 이와 같은 대립이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를 내려 견고해지면 철학에 대한 기대는 이원논리로 전락하여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지고 기존 철학체계에 관한 설명에서도 찬이냐 반이야 둘 중에 한쪽만을 보려는 자세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를 단지 모순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한 철학 체계간의 차이를 결코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으로써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이것을 보고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꽃봉오리가 꽃에 의해서 반증되었다고[4]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5] 열매는 꽃을 식물의 거짓된 존재로[6] 선언하고 스스로 꽃이 차지하던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나열된 형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간에는 결코 어떠한 타협과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공존하지 못하고 완전한 상호배척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을 속성으로 하는 식물은 위의 형태들 간의 상호배척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을 다 유기적인 통일로 이끌어 내어 거기서 한자리[7] 하게 만든다. 이런 통일 안에서는 각 형태들이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모든 형태가 똑 같이 누리는 필연성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삶이 완성되고 전체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이[8] 된다. 그러나 어떤 철학체계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체계를 제시하는 철학자 자신이 모순을 위에서 이야기된 것과 같이 이해하지 않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가 하면 뭔가를 좀 안다고 하면서 그런 철학작품을 읽는 사람조차[9] 천박하게 사유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10] 그들 역시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순을 자신의 편협성에 구속시켜 이해하지 절대 모순을 자기의 편협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으로] 보존할 줄 모르고, 결국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외형에서[11]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계기가[12]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혁사무당파님의 [마광수가 더 왼쪽이다] 에 관련된 글.
법을 만드는데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를 사상하고 만들면 마광수 같은 사람의 마구잡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광수의 비판을 확대경으로 하여 여성계의 성법규화를 [먼 곳에서 추론해 보면] 그것도 역시 마구잡이 법규화가 아닌가 한다. 이 문제는 특히 마광수가 성희롱 문제를 다루는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성희롱의 문제는 임노동관계와 같이 사회구성원의 종속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마광수와 같은 „예리한“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성희롱문제를 따지면서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부부강간도 마찬가지다. 강간이란 무엇인가. 성을 수단으로 하여 상대에게 무력을 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력이란 피해자를 깔아뭉개는, 피해자의 의지를 꺾는, 그리고 남에게 자기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다. 여기에 추가해서 상대를 욕보이고 굴욕을 느끼게 하는 행위다. 그래서 강간범은 성행위를 통한 만족보다 이런 무력행사, 굴욕적인 지배에서 더 큰 쾌감을 느낀다. 이런 쾌감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다. 지배관계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강간에서는 단지 이런 무력행사와 굴욕적인 지배를 통해서 얻는 쾌감이 성을 매개로 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여자와 남자간의 문제가 아니다.
강간은 성을 매개로 하는 폭행으로서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피해자의 자긍심을 파괴하고 피해자의 자아에 깊은 상처를 남겨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심한 경우 피해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자기 몸 위에 휘발유를 끼얹고 가도시위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부강간죄에서 우선적으로 성에 초점을 맞추면 마광수 같은 동전 세는 사람들에게 뜯기게 된다.
물론 여성이 주로 성을 매개로 한 무력행위의 피해자다. 중요한 것은 남성을 통한 무력행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Finkelhor와 Yllo에 따르면 부부관계에서 행해지는 강제의 유형은 4가지로 구분된다: 사회적 강제, 즉 결혼을 함으로써 남편의 성요구에 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경제적 종속이나 또는 이혼을 하면 당해야 하는 수모, 남편의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협박 (특히 피해자가 겪은 과거 경험을 눈앞에 내놓으면서), 그리고 실재적인 물리적인 강제 등이다. 여성이 경험하는 강제가 사회적 종속관계에 있는 사람이 경험해야 하는 것과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자본에 몸을 팔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놈팽이“로 낙인 찍히고, 실업이면 살 일이 까깝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총이 무섭고, „너 옷 벗을래, 왜 까불어“하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회적으로 주종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경험과 같은 경험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종속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렇게 여성들이 그런 억압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지 그것과 너무나 유사할까.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바탕에서 공순이 언니들이 있다. 그냥 언니가 아니고 공순이 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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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쟁이들은 글을 쓸 때 몸에 베인 버릇처럼[1] 먼저 자기가 의도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글을 쓰게 된 동기와 더불어 그 글이 동일한 대상을 다룬 전시대나 동시대의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을 설명이라고 따로 이름 지어 서설의 말머리에 내놓기 일쑤인데, 그 따위 행위를 철학 하는 데까지 와서 한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행위로 보는 걸로 마무리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밀하게 철학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붙들고 그 안에 푹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 때[2], 위와 같은 행위는 진정[3] 철학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아니 그 목적에 반하는 행위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행위에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진부하고 천박한] 생각이 아주 우아한 생각으로[4]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천박한 생각이 서설이란 곳에서 등장하여 철학 서술에 알맞다는 내용과 방식을 철학 밖의 관점에서[5] 내놓고 진리에 대하여 우왕좌왕하는 주장과 단언들을 엮어 짜 맞추기 식으로 시대의 경향과 각자의 입장, 즉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과 결론들을 나열하곤[6] 하는데 그 따위 식이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 통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몸에 베어 굳어진 생각만이 이런 천박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몫 하는 것은 다른 학문에서보다 유난히 철학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확 사로잡는 광채와 같은 확증인데[7], 무슨 말인가 하면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이란 터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목적이나 최종 결과만 손에 쥐고 있으면 쓸데없는 껍데기는 다 제거하고[8] 나아가 사물의 완전무결한 본질만이 고스란히[9] 표현되고, 그에 반해 사물을 전개하는 과정은 여기에 비춰 따져보면[10] 있으나 마나 [11]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철학 외 다른 학문은 이와 대조적이다. 해부학의 경우 관념적인 정의로만[12], 예컨대 <해부학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어서 얻어낸 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만으로 사태 자체, 즉 해부학의 내용을 완전정복 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해부학의 내용을 실지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정말[13] 해부해 봐야 한다는 것에 딴말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이와 같이 잡다한 지식을 단지 한곳에 모은 것이지 학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취합물의 경우에도 목적 등과 같은 일반성을 운운하는데, 이때 이런 논의는 보통 눈에 보이는 이 신경, 저 신경, 이 근육, 저 근육 등을 내용 자체로 삼아 그저 나열하는[14] 몰개념적인 방식과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데, 해부학의 이런 기술방식을 도입하여 철학을 이러쿵저러쿵하는 식으로 짜맞추고 또 그 목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사태를 전개하는 것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한 자기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자기가 말하는 목적이 해부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이 되어 스스로 자기가 사용하는 방식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고만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역자주 4 참조
[6] 원어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정신현상학 서설도 서론과 같이 매일 1 문단씩 읽어 내려갈 생각이다. 동시에 서론에서 의문점으로 남았던 것들을 꾸준히 살펴볼 예정이다.
서론과 서설의 관계, 정신현상학 전체의 구조 등에 관한 예비적이지만 결론적인 생각들은 지양하고 정신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 즉 서론에 대한 이해에 기대어 서설을 읽어 내려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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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춤을 출 줄 아는 유럽인이 있다. 바로 파울 첼란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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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강에 투신 자살한 유대계독일인 초현실주의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무인의 장미>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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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무슨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인가. 1962년 2월 13일 비밀군사조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지하철 역 Charonne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파리 민중을 장사를 치르는 날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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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요. 오두막에 평화를.. 이 줌인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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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saran. 프랑코 파쇼에 대항하여 싸우는 공화국군과 국제 여단의 구호다. "그들은 우리 저지선을 넘지 못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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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폴리스. 혁명의 페트로그라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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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uple de paris. 파리 민중.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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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디아스는 파울 첼란이 노르망디에 도망가 있을 때 실지로 알게 된 스페인에서 도망온 사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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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로라. 러시아 혁명의 불을 당긴 순양함.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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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혁명위에 궁궐 만들어 지랄하는 사람에게 뷔히너의 저주를 실음. 오두막에 평화를, 궁궐에 전쟁을!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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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데리다 읽기가 힘들다. 게오르 뷔휘너같이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날짜(Datum/Date) 하나하나에 새겨진 비참한 현실을 다 들고 나오라고 하기 때문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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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뷔히너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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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민중사를 단 하나도 빼놓지 말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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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ibboleth. 쉬볼렛, 지볼렛. 넘어설 수 없는 생과사의 선이 그어져 있다. 매춘을 이야기 할때 우리가 내는 소리는 저들의 소리가 아니다. 거칠고 비참한 현실로 마치 술대로 내려찍는 거문고에서 나는 소리와 같다. 저들은 낼려고 해도 낼 수 없는 소리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매끈한 바이올린 소리를 우리는 낼려고 해도 낼 수 없다. 저들은 우리의 소리만 들어도 우리를 금방 알아본다. 우리도 역시 그들을 그들의 소리만 들어보아도 알아본다. No pasaran!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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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운동의 주체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no pasaran..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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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으로 녹아들지 않는 경험을 시가 이야기한다면, Schibboleth은 모든 시의 핵심이 된다. 그런데 요새 학문은 독일 소시지 만드는 기계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쉬볼렛 개념이 있단다.뭘 갈기갈기 갈아서 쉬볼렛개념이라는 소시지를 만들었는지....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