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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렇게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먼저 진리와 지에 대한 추상적인 규정이, 추상적이지만, [자연적인] 의식자체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상기해보면 위의 모순의 실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고 또한 그 모순을 째내는 일에서도 그 모순만을 도려내는 정확성이 주어질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1], 의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뭔가를 구별함과 동시에 그것과 관계한다. 이 관계는 뭔가가 의식에 대하여[2] 존재한다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런 의식 행위가 다다르는 한계[3], 달리 표현하면 [뭔가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단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뭔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지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를 이야기 할 때 그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과는 따로 그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을[4] 구별한다. 이렇게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에서도 지와 관계하는 측면이 있겠는데, 이 측면도 [의식의 행위에서와 같이] 지로부터 구별되어서 자체대로 존재하는 것과 지간의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명시되어[5] 있다. 이처럼 그 자체로 있는 것의 언저리에[6] 진리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와 같은 규정이 실지로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대와 올라와 운동하는 지가 우리의 대상이므로 지를 서술하는 것은 일단 그의 규정을 [아무런 양념을 치지 않고][7]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틀림이 없어야 하는 것은[8] 기술한 바와 같이 [지를 눈여겨보는] 우리에 의해서 파악된 지에 대한 규정이 지에 의해서 스스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규정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1] 원문 <nämlich>. §2에서 지적되었던 내용, 즉 의식은 의식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여 절대자는 의식 저편에 있는다는 것.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문득, 학문은 도둑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 <문득>이지 사실 그렇지 않다. 잡다한 생각을 글로 옮기려다 보면 그런 잡다한 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난제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말이 <문득>이라는 낱말이다.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라이선스 선택에서
Karl Krauss가 그랬던가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지적인 것은 <남의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Eigentum)이 아니라 <누구 것이든 하여간 내가 소유>(Besitz)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간행되었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내가 도둑질해서 쌓아놓은 <지의 창고>에 들어가 뭐 쓸만한 것이 없나 하고 들여다보니 쓸만한 것이 별로 없다. 마치, 미술박물관에서 들어가서 진품은 가만히 나두고 그림아래 붙어있는 딱지만 열심히 모아 논 것 같다. 진품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그래서 학문의 박물관에 잠입하여 도둑질을 다시 해야 하는 판이다. 짜증난다. 왜 그런 멍청한 좀도둑이 되어서 진품은 그대로 나두고 그런 쓸데없는 것만 잔뜩 모아놓았는지.
그러다 보니 학문의 전통은, 학문의 대행진은 큰도둑들의 대행진으로 보인다. 좀도둑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큰도둑들은 도둑질하는 기술을 닦고 또 닦아서 진품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학문 박물관의 경비가 심해졌고 또 전시품을 이리저리 나눠나 도둑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짜증만 내지 말고 어디에나 거침없이 들어가는 큰도둑이 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도둑질해온 진품에 딱지를 붙이는 일은, 즉 출처를 밝히는 일은, 도둑놈이지만 신사적인 차원에서 해야겠지만.
(§9) 지가 이렇게 앞으로 끌려 나아가는 양식과 그 필연성에 관하여 예비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할말을 다한 마당에, 서술의 전개방법에 관해서도 미리 몇 가지 사항을 상기시키는 것이 쓸모 있을 것 같다.
학문이 지와 다투는 일은 보류하고 무대에 등장해서 운동하는 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취지아래 이루어지는 이 서술은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지에 대한 학문이 취하는 일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때 학문이 취하는 태도는 인식의 실재성을 조사하고 그의 진위를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뭔가를 전제하고 이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척도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서술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위를 가르는 조사는 척도로 삼은 잣대를 조사 대상에 갖다 대어 재보는 것으로서 조사 대상과 잣대가 서로 맞아떨어지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척도라는 것은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1] 여겨지기 때문에 학문이 척도가 된다면 학문이 또한 그런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되겠다. 그러나 학문이 갓 등장하는 이 마당에선 학문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아무것도 본질이나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가 없다. 사태가 이렇게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을 기준으로 택할 수가 없다면 허실을 가르는 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럴듯한 질문이다.
[1] 본문
(§8) 지에게는 필연적으로 그 도정에서 이정표와 같이 달려있는 일련의 형태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 끌려나아감이[1]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도 이미 요지부동하게 정해져 있다. 이런 목표가 되는 지점은 지가 자신을 딛고 뛰어넘어[2]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지점, 달리 표현하면 지가 자기자신을 완전히 발견하는 지점, 즉 개념이 대상과 같아지고 대상이 개념과 같아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 목표를 향한 끌려나아감은 막을 수가 없고,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의 그 어떤 단계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자연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는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울타리에 그저 붙들려 존재하는 존재양식에서 한치도 떨어져 나올 수 없고 단지 타자에 의해서 그런 존재양식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이렇게 타자에게 붙들려 밖으로 질질 끌려가면 찢겨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의식이란 스스로 자신을 이런 울타리 밖으로 붙들어 내는 것으로서[3], 의식하는 순간 붙들려 있는 상태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리고 붙들려 있는 상태가 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의식에게는 의식 안에 있는 개별적인 것과[4] 동시에 의식의 뒤면이[5], 비록 의식의 이런 관계를 공간화하여 의식뒷면을 개별적인 것과 같은 옹졸한 것 옆에 나란히 자리잡게 할지언정, 하여간 의식뒷면의 것이 설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이와 같은 옹졸한 만족감을 망치는 폭력을[6]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한다. 이와 같은 자신을 향한 폭력을 어렴풋이 느끼는 의식은 불안에 쌓인 나머지 의식뒷면에 있는 진리로 향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는 옹졸한 만족을 건져내보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불안에 빠진 의식은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데로 살아가는 나태함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아니면 모든 것을 긍정하고 만물이 그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단언하는 감상주의라는 성을 쌓고 거기서 은신해도 편안을 찾을 수가 없다. 사상 앞에 무사상은 자취를 감추고, 쉬지 않고 운동하는[7] 사상이 나태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리고 바로 나름대로밖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보는 이성이 감상주의적 긍정에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의식 뒷면에 있는 진리를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의식은 자기가 진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생각으로 은폐하여 자신과 남을 속일 수도 있겠다. 즉 진리에 대한 불 같은 열의 때문에 바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고, 아예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열의에 차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이건 타인의 사상이건 하여간 어떤 사상보다 더 앞서가는 사상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허영심으로 가득찬 이 진리 외 다른 진리를 발견하기란 결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허영심은 온갖 진리를 모두 다 물리치고 의기양양하게 아성으로 입성하는데 도가 텄다[8]. 이렇게 온갖 사상을 항상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9] 일체의 내용 대신 무미건조한 나만을[10] 찾는 지성에[11] 흐뭇해 하는데 이런 만족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허영심은 보편적인 것은 멀리하고 오직 홀로 우쭐해[12] 하기 때문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 sich>
[3] 본문
[4] 이것은 Bewusstsein von etwas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7) 알없이 겨만 있는 의식이 이렇게 회의주의를 고수하고 꼼짝달싹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의식이 여러 형태를 취하게 되고 더구나 의식이 취해야 하는 형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취한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또 그 모든 형태를 서술하는 문제는[1] 의식이 어떤 형태에도 머물러 안주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거기를 떠나 다른 형태를 취해야 하며[2], 또 이 모든 형태들 간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통해서 자연적으로[3] 해결될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임시로나마 일반적인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갔겠다. 즉, 참답지 않는 의식에게 그가 비진리라고 보여주는 서술이 단지 부정적인 운동만이[4]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운동에 관하여 자연적인 의식은 아무런 다른 이해가 없고 위와 같이 오로지 부정하는 단편적인 입장만을 취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입장을 본질로 만들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는 불완전한 의식의 한 형태다. 의식은 도정에서 반드시 이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그때 가면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언급하자면 이 형태가 바로 어떤 결과에서든지 단지 순순한 무(無)만 바라볼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회의주의다. 이 회의주의는 이와 같은 무가 어떤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결과로서[5] 밑도 끝도 없이 막연하지 않고 그 어떤 특정한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새겨져 있는 무라는[6] 사실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무는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되고 이 어떤 것을 부정하는 무라고 받아들여질 때만 비로소 참다운 결과가 된다. 이렇게 무는 제한성을 갖는 어떤 것이며[7] 이와 함께 또한 어떤 내용을 갖게 된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막연한 무와 공허로 끝나기 때문에 이런 추상을 떠나 다른 데로 나아갈 수 없고, 다만 뭔가 새로운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도사리고 있다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간에 이전과 다름없는 공허한 심연에 내던져버린다. 이와 달리 결과를, 결과가 참으로 그런 것처럼, 제한된 부정으로 이해하면 결과와 동시에[8] 새로운 형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도(過渡)를 통해서 의식이 일련의 행태들을 빠짐없이 취하고 통과하는 전진이 자력으로 이루어진다.
[1] 본문
[2] 본문
[3] 본문
[4] 본문
[5] 본문
[6] 본문
[7] 이러한 제한된 무는
[8] 본문
(§6) 자연적인 의식은 단지 지의 껍데기[1]일 뿐이지 실제적인 지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럽게[2] 입증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인 의식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3] 자기 자신 그대로가 오히려 실제적인 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에게 이와 같은 도정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개념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기상실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의식은 이 도정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진리라는 논증의 힘을[4]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회의에 빠지는 길로[5] 볼 수 있겠는데,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사실 절망에 빠지는 길이다[6]. 그 이유는,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는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란 보통 진리하고 여겼던 것을 이러 저리 한번 흔들어 본 다음 <어 진짜네>하고 회의를 걷어버리고 다시 착실하게 원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되돌아가 사태를 처음과 다름없이 다루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의식의 도정에서 일어나는 회의란 현상뿐인 지가 사실[7] 실현되지 않은 껍데기[8]뿐인 것을 가장 알찬[9] 것으로 여겼던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진리가 아니다라고 뼈저리게[10]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회의의 본질까지 파고드는 회의주의는[11] 진리와 학문을 놓고 분주하게 떠드는 자가 진리와 학문의 무기로 마련했다고 자부하는 회의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회의주의는 학문하는데 있어서 권위에 눌려 타인의 사상에 항복하지 않고, 대려 모든 것을 스스로 따져보고 자신이 확신하는 것만 따른다는,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스스로 재현.창출하고 오직 자기가 직접 주도하는 행위만을 진실된 것으로 여긴다는 결단과 같다. 그리고 이런 회의주의는 이런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충분히 가다듬어 진리와 학문에 적합한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주의는 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는데 의식의 도상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의식은 그 형태 하나하나를 두루 거치면서 학문으로 자기 자신을 다듬어 나아가는데, 이런 모든 형태를 모아 논 것이 의식이 교양을 쌓아가는[12] 상세한 역사다. 그런데 의식은 위와 같은 결단만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학문하기에 알맞게 다듬는 일을 단번에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식이 들어서는 도정은 이와 같이 한자리에 한가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자기착각에[13] 반하여 길에 올라 실질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자신의 확신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권위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권위에 눌린 판단을 자신의 확신에 따른 판단으로 교체했다고 해서 꼭 판단의 내용이 달라지거나 오류가 있던 자리에 진리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타인의 권위에 눌려서 사념과 편견의 체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든 아니면 스스로 확신하여 그렇든 양자간의 차이에는, 자신의 확신에 기초해 있는 편이 좀 우쭐거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이와 반대로 현상뿐인 의식 전반에 회의의 화살을 돌리는 회의주의는[14] - 의식 스스로가 그렇든 아니면 타인이 그렇든지 - 자연적인 것이라고 내세워지는 관념, 사상, 사념에 대한 절망감을 일으켜서 정신이 비로소 진리가 무엇인지 진위를 가름하는데 도전하게[15] 한다. 사태가 이러한데 의식은 앞서 언급한 결단만을 가지고 진위여부를 따지려 든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념, 사상, 사념으로 가득 차 있고 또 거기에 얽매여 있는 의식은 사실 그가 하려고 하는 일, 즉 진위여부를 따질 능력이 없다.
[1] 본문
[2] 본문
[3] 본문
[4] 본문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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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본문
[9] 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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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본문
[14] 본문
[15] 본문
(§2) 오늘날에 와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걱정이 이런저런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아는 체 하고 무게를 잡는 일 없이[1] 바로 철학이 해야 하는 일에 착수하고[2] 실질적으로 인식하는[3] 학문을 불신으로 대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사태가 진정 이렇다면 이건 눈뜨고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일로서 이젠 역으로 이런 불신을 불신으로 대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맞섬과 동시에 이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지[4]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이런 근심걱정은 뭔가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그것의 이런저런 변형을 내놓고 그것에 기반하여 이리저리 몸을 사리는 궁리들을 짜내고 어떤 바라짐하지 않는 결과에 귀착하게 되는지 보여주기 일상인데, 그런 식의 전제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먼저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이 근심걱정이 전제하는 것을 말하자면 인식을 도구나 매체로 보는 생각이며 또한 이와 같은 인식과 우리 자신은 별다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어처구니 없는[5] 것은 절대자는 이편에 서 있고 인식은 따로[6] 저편에 서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인식이 절대자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이 실재적인 것을 담은[7] 것이라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자의 외곽을 맴도는 인식은 당연히 진리밖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것이라고 전제하는 짓이다. 인식에 대하여 근심걱정하는 자들이 전제하는 것을 겨우 이런 가정으로서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류를 두려워 한다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오지만 알고 보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이다.
[1] 원어
[2] 원어
[3] §1의 역자주 4번 참조
[4] 원어
[5] 원어 <vorzüglich>. <으뜸가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상당히 빈정대는 투로 사용되고 있다.
[6] 원어
[7] 원어
(§5) 그러나 이 서술은 단지 무대에 올라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몸부림하는 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의 모양, 즉 학문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완성된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서술은 참다운 지를 향해 몸부림치는[1] 자연적인 의식이 거쳐가야 하는 길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또는 혼이 거쳐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은 이 도정에서 그 본성이 미리 예비한 일련의 형태를 하나하나 취하고 두루 거치면서 [2],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경험함으로써 본래적인[3] 자신을 알게 되고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된다.
[1] 본문
[2] 플라톤의 『국가 』제10권 마지막 부분 에르 신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에르는 아르메니오스의 아들로서 어떤 전투에서 전사한다. 전사 후 10일째 되는 날 다른 전사자들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는데 에르는 그렇지 않게 온전하게 집에 안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화장하려고 나무장작위에 갖다 올려놓았더니 다시 살아나고 저승에서 경험한 것을 보고한다. 이 보고내용이 플란톤의 에르 신화다. 주요 내용은 혼이 죽은 후 지옥과 천당에 간다는 것과, 너무 악해서 영원히 타타로스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혼은 다시 이승으로 온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혼이 다시 이승으로 오는 과정인데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차레대로 삶의 기본모형(bion paradeigmata, 국가 617d)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있고 없는 문제는 떠나서 운명은 이렇게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다. 쉴러의 『발렌슈타인』에서 피콜로미니가 발렌슈타인에게
[3] an sich
헤겔 묘소에서 유럽유태인추모공원으로 향하게 된 이유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마음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였다라고만 한 것이 무성의하고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래와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런 느낌은 괴테와 쉴러의 도시 바이마르에 가도 마찬가지다. 바이마르에 가면 반드시 바로 그 옆에 있는 작센하우센 유태인 수용소에 들린다. 그래야 마음이 균형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60년대 70년대에 68세대의 영향아래 독일에서 성인으로 접어든 사람이면 (Sozialisation) 어는 정도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nach Ausschwitz”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화비평은 문화와 야만간의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와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다. 그리고 이런 야만성은 오늘날에 와서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높이는 인식의 목청에도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다.” („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참 힘든 문구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nach Ausschwitz“. 그러면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이 말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적인 행위다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아도르노는 정말 아우슈비츠에 갔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혼이 유태인과 함께 흔적이 없이 재로 날라간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긍정이 사라진 변증법을 이야기했다. 혼이 죽어버렸는데 더 이상 무슨 긍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다면 아우슈비츠를 통과한 혼일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어린애한데 물어보듯 <헤겔하고 아도르노하고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오면 <아도르노가 더 좋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괴테보다는 파울 체란이 물론 더 좋고. 항상 내편이었던 누나 같은
(§4) 절대적인 것에서 분리된 인식, 그리고 인식에서 분리된 절대적인 것이라는 관념의 연장선에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손에 쥐기 위한 도구라거나 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가려내는 매체라는 등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식의 입에 베인 말을 하는 학자를 상대해 주는 대신에, 아니 사태가 이렇다는 전제아래 학문의 무능력을 운운하면서 학문의 노고를 부정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학문의 노고에서는 해방시키지만 진지하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이는 듯한 외관은 걸치고 그에 따르는 존경은 마다하지 않는[1] 학자가 끊임없이 내놓는 이런 저런 구실을 받아주는 대신에, 정말 그런 따위에 답하는 일 때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쓰는 대신에 그와 같은 관념은 우발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고 정면으로 논박하고, 나아가서 이런 관념과 함께 절대자, 인식이라는 낱말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주체 등외 무수히 많은 낱말을 그 의미가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제하면서 사용하는 학자를 존경하기 보다는 그 행위를 기만으로까지 평가해 볼만 하다.[2]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낱말들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고 또 보통사람이면 누구나[3] 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작업, 즉 그와 같은 개념을 제시하는 일을 어떻게 든 면해보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학문을 가로막는 관념과 입에 베인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등장하는 학문 앞에 곧바로 수그러지는 지의 텅 빈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 등장하는 학문 역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등장했다고 해서 학문이 벌써 진리 안에서 속속들이 전개해 놓은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문이 다른 지와 나란히 등장하는데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학문이 자기만이 완성된 학문의 정통현상이[4] 된다고 하든 아니면 그 다른 참답지 않는 지를 돈독하여 학문의 발현이라고[5]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학문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챙기는 행동에서[6]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해방은 오로지 학문이 그런 겉치레와[7] 대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학문은 어떤 지를 대할 때 그것은 사물에 대한 참답지 않고 비속한 견해라고 깔아뭉개고,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른 인식이고 또 그런 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언만을 일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속한 지일지라고 그 안에 그보다 더 나은 뭔가를 향해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 점을 지를 논박하는 근거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단언만 한다면 학문도 역시 자신의 존재가 논증의 힘이라고 내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참답지 않는 지 역시 자신의 존재를 내세워 학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는가? 메마른 바탕에서 밑도 끝도 없이 단언만 일삼는다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 해서는 더더욱 안될 일은 참답지 않는 인식일지라고 그 안에 보다 나은 지를 향한 꿈틀거림이 있고 이것이 바로 자기자신을[8]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속한 지를 추켜세우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존재를 진위여부의 증인으로 내세우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문이 참답지 않는 지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 즉 학문 존재의 그릇된 양식과 학문의 완성된 모습[9]보다는 학문의 현상을 논박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이 지를 보는 시각은 일단 제쳐놓고 우선 지가 무대에 올라와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대로 서술하는 일에 도전함이 마땅하겠다.
[1] 원어
[2] Ansehen (외관, 존경)과 als Betrug angesehen werden (기만으로 간주하다)의 Wortspiel에 초점을 맞췄다.
[3] 원어
[4] 원어
[5] 원어
[6] 원어
[7] 원어
[8] 학문을
[9] 원어
댓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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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양심적인 분이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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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글쟁이들이, 즉 글을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에토스입니다. 공장에서는 정확성이 나노미터에 육박했습니다. 몇년전에 TV에서 벤츠공장에서 엔진 만드는 것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나노분자로 코팅한 실린더를 검증하는 것은 노동자의 손이 었습니다. 두 노동자가 코팅 검증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손가락으로 한번 쓱 만지고 지나가면 금방 인지한데요. 제대로 되었는지 그렇지 않는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구요. 그래서 글쟁이들은 두리뭉실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한 반성이지 양심이 아닙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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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라이선스 4 를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동의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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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셋하시는 분들은 종이 딱 들어보면 이거 무슨 종이인지 다 아세요. 예전에 공장가니까 어떤 여성노동자가 기계에서 종이 막 나오는데 백개째 나오면 딱 집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기절했더니 여기 표시있어 그러더라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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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다 써야할지 난감했는데 여기가 횡설수설하는 곳이니 안성맞춤이네요. ^0^ 상품과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관계를 맺죠. 일본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라로 유명하죠. 에도가와 란포. 그런데 90년대에 대대적인 붐을 일으켰던 이 장르가 2000년대 들어와서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갖춘 스토리들에 밀려났어요.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배용준이 나오는 드라마가 히트를 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죠. 상처받은 사람들. 그런데 발군의 히트를 친 추리소설가가 있죠. 용의자 X의 헌신. 보통 추리소설은 엽기적이거나 이상심리의 소유자들이 범인인데 이 소설은 조건없는 사랑, 헌신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다루고 있죠. 이것은 징후적인 현상입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