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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언론 참세상의[“실현가능성 희박한 기본소득론”] 에 관련된 글.
기본소득에 대한 정통 맑스주의에 입각한 논리 정연한 반론이다. 사이사이에 소명제를 삽입하여 논점을 명쾌하게 하고 그 필연성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듯 하다.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Statement다. 그리고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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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빈곤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OECD보고나 빈곤에 관한 독일정부백서에 드러나는 이 현상을 조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독일의 예를 들어 빈곤문제에 접근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나타나는 모순과 갈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독일제도나 상황이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향에 찬물도 한번 끼얹어 볼까 한다.
아래 내용은 베를린에 있는 노숙자와 연대하는 사단법인 “mob – obdachlose machen mobil”(mob - 집 없는 사람들이 움직인다)이 발간하는 신문 “Strassenfeger”(도로 청소하는 사람) 2010년 3월 5호에 실린 “급식소 국가 – 빈곤과 자선”(Suppenküchenstaat – Armut und Mildtätigkeit)이라는 기사에서 발췌하고 역자가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상황으로 보충한 것이다.
0 빈곤층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활동이나 개입이 부정되고 배제되고 있음.
- 관련 유럽최대의 방송기업 RTL 1, 세계최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 유럽최대의 매거진 출판사 그루너+야르 등을 소유하는 세계적인 미디어업체이고 베르텔스만 재단을 통해서 독일사회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베르텔스만 그룹이
- 사회구성원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취지아래 여러 컴페인을 개시하는 가운데 그 일환으로 창설한 “사회구성원”(die Gesellschafter)이란 단체의 최근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큼.
- “사회구성원”은 최근 “빈곤”이란 주제아래 개최한 포럼에 급식소(Tafel)전문가인 스테판 셀케(Stefan Selke)를 초빙했다가 그가 제출한 논문이 너무 비판적이다라는 이유로 초대명단에서 누락시킴.
- 급식소 운영과 관련해서 셀케가 지적하는 것은 비교적 온순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빈곤문제의 접근은 자선활동이 독점하고 있는 실태임.
0 셀케는 급식소의 허상을 정확하게 파헤친 사회학 교수인데, 그가 지적하는 점은
- 1993년 시민운동차원에서 시작된 급식소(Tafel)가 지금에 와서는 확대되어 전국 주요도시에 850개 급식소를 두고, 4만 명의 자진봉사자와 그 외 수 천명의 „1 유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과 „형벌대신 일“조치에 참여하는 수형자들이 약 100만 명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방대한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는데
- 셀케는 어떤 시스템이건 최우선 목적은 시스템유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급식소를 제도적인 차원으로 확대하여 운영하는 것은 „빈곤“을 퇴척하기 보다는 대려 영구화한다고 점과 [빈곤이 사라지면 그 시스템도 사라지니까]
- 그리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단법인 „Tafel e.V.“가 „Tafel“이란 문구를 사용하는, 예를 들어 Kindertafel(어린이 급식소)이나 Tiertafel(동물급식소) 등의 단체를 상대로 하여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시민활동을 라벨화하여 자기만의 사업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임.
* 급식소(Tafel)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최근 자선사업과 관련된 비리사건이 시사하는 바가크다. 노숙자구제사업을 하는 „Treberhilfe“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 이사장이 최고급 승용차인 마제라티를 타고 다니다가 카메라에 잡혀 방송되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손님용으로“ 라고 얼머부리려 했지만 문제가 과대한 월급, 자기사람쓰기 등으로 확대되어 결국 물러나게 되는 일이 최근 베를린에서 벌어졌다.
- 또한 저렴 슈퍼마켓들은 유통기간이 거의 다 된 또는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물품을 가져가라고 제공하는데, 자선하는 것 같지만 사실 처리비용과 감세를 감안하고 또 이미지 향상을 보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
0 셀케가 비판하는 점은
- 급식소를 통한 빈곤구제사업의 효율성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속하는 독일에 빈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필히 논쟁이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고
- 이런 빈곤구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에게 어떤 피해를 남겨주는가라는 문제는 망각한 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배고픔달래기만 진행하고
- 그것도 모든 빈곤자에게 배급되지 않고 여기에다가도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적용하여 그들을 빈곤상태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고
- 그래서 급식소 운영과 배급을 담당하는 시민단체들은 사실 연방정부와 기초단체정부들의 대리인 구실을 한다는 점임. 즉 연방정부가 발급하는 „빈곤증“에 기반하여 기초단체정부가 제공하는 저렴한 공간에서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임.
* 여기서 ‚빈곤증‘이란 사민당.녹색당연정 슈뢰더정권이 진행한 아젠다2010개혁의 하르츠4번 일환으로 사회수당과(기초단체정부담당) 장기실업수당(연방정부담당)을 통합하여 신설한 JobCenter가 발급하는 증서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증이 없으면 급식소에서 급식을 받을 수 없게 규정되어 있음.
0 이런 급식소운영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 소위 „겨울내기지원 재단“ (Stiftung Winterhilfswerk, 이하 WHW)이라는 자선사업이 예가 되겠는데
- 이 재단은 여러 사회복지단체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재단이었지만 나중에 나치당이 흡수하고 결국 나치정권에 도움을 주는 재단이 됨.
- WHW는 1931년부터 모금운동을 펼치고 1936/1937년 겨울에 들어서는 900만 명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대사업을 할 수 있는 제정능력을 갖게 됨. [1936년 9월 이후 임금의 10%를 강제로 기부하게 만듬]
- 1939/40년에 들어서는 기부금이 복지사업에 투여된 정부예산을 넘어섬으로써 사회복지에 투여되는 정부예산의 짐을 현저하게 덜어줌.
- 당신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이야기하기를 WHW를 <Wir hungern weiter>(우리의 계속 배고프다) 아니면 <Waffenhilfswerk>(무기생산지원사업)의 약어로 사용함. 사회복지부문에서 건진 자금으로 당시 무슨 짓을 했는지 꼬집으면서…
0 바이에른 공영방송이 방영한 최근 내용에 따르면
- 독일에서 자진봉사로 창출되는 총 부가가치는 연 700억 유로 정도임.
우선 임석진 교수님께 큰절한다.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좋은 것을 하나 훔쳐와서 그렇다. 도둑놈한테 도둑질 잘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절을 받으면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절은 해야 할 것 같다.
음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성이 아닌가 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임석진 교수의 개정번역본을 읽으면서 정신현상학의 조성에 귀가 확 뚫리게 되었다. 거침없이 훔쳐왔다. 조성에 귀가 뚫리니 읽어 내려가는데 또한 거침이 없다.
웹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녀보니 정신현상학 번역에 대하여, 그리고 번역하는 일 자체에 대하여 이상한 생각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어처구니 없는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 한글 번역본>을 운운하면서 일본 번역본의 도움을 받아 원서를 읽어 내려가겠다는 의지다. 대단한 의지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원서를 일본 번역본을 <매체로> 하여 우리말로 <고스란히>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깔려있는 기본정서는 <직역>이다. 악보를 읽을 줄 알면 다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혹시나 하고 가서 보니 독어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그지없다. 정신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면서 <직>자가 붙은 모든 것이 어떤 호통을 받는지 귀가 뚫렸으면 한다.
이것이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두 번째 어려움인 것 같다. 처음에는 귀가 뚫리지 않아서 헤맸는데, 이제 귀가 뚫리니 헤겔의 곤장이 나를 때리는 곤장소리다. 그냥 맞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리저리 피해보지만 잘도 때린다. 어쩌면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끈적끈적하고, 우쭐거리고,덜 되고… 이런 생각들을 하나하나 들춰내는지 귀신 같다. 정신현상학에 들어가는 정문에는
(§16) 의식은 이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두루 거치면서[1]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학문으로 향하는 이 도정 자체가 이미 [학문의 형식을 취하는] 학문이며 그 내용에 푹 빠져 들어가[2] 이름 짖는다면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다[3].
(§17) 의식이 자기를 뛰어넘는 행위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4] 그 개념상 의식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완성된 체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완성된 체계가 바로 진리가 다스리는 온전한 정신 제국이다[5]. 이 제국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이렇게 의식이 행하는 모든 경험을 담은 제국이기 때문에 거기서 진리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정신제국을 다스리는 진리의 몸체에는 마디마디마다[6] [의식이 도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고비마다 의식의 몸체에 새겨지고 또 거기에 매듭지어진] 독특한 형태가[7]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진리의 몸체 마디마디에 새겨진 매듭들은[8] [의식의 구체적인 경험과정을 잘라내 버린 논리학에서 그러듯이] 추상적이고 투명한 [변증법적 운동의] 계기로[9]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식이 그것과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제국을 온전한 총체로 만드는 대목에는[10] 의식이 고비마다 취한 형태가 [반드시] 있다. 의식은 참다운 모습으로 실존할 때까지 자신에게 거듭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 도달하면 의식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에서[11] 그 옷이 자기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얻어온 낯설은 것이고 아무리 두르고 있어도 그에게는 남의 것으로만 남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진정 입어야 할 옷은 다른 것인데 하는 부끄러움, 허위의식, 기세 등 먼지 같은 모든 생각을] 털어내 버리고 [자기의 이런 찢긴 모습을 모두 품고서 아무런 허위의식이 없는]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12] 의식이 이런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서술 역시 완성되고 드디어 정신이 군림하는 본래적인 학문의 장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의식은 자기의 본질을 두르고, 그리고 이 옷은 절대지가 정말 어떤 것이지 그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 될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5)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와 같은 서술의 표면에는 언뜻 보기에 경험에 관한 통례적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1] 스며있다. 이 요소는 첫번째 대상과 그에 대한 지에서 두 번째 대상으로 넘어가고 과도에[2] 있다.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대상을 놓고 경험을 논하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과도란 첫번째 대상에 관한 지,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Ansich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필히 두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3]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위에서 서술된 경험과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4].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개념의 비진리성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첫번째 대상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이 우연히 접하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상을 접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경험에서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상의 운동에 직시하는 것과 반대로] 뭔가 아예 처음부터 불변의 완결무결한 상태로 있는 것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5] 보인다. 이와 달리 앞에서 서술된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이 전복[6]됨으로써 생성된 과거를 갖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7]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의식이 하는 일련의 경험이 학문적인 발걸음으로 추대될 수 있는데, 사태를 이렇게 고찰하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첨부하는[8] 것이지 우리가 관조하는 의식이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9] 이런 상황은[10] 사실 위에서 의식에 대한 [학문의] 이 서술과 회의주의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언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11] 그때 한말을 상기하자면 참답지 않는 지에서 매번 얻어지는 결과가 모두 공허한 무가 되어서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엇의 결과로서의 무로서 그 무엇의 무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이렇게 결과로 파악하면 그 결과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지에 스며있는 참다운 것이 보존된다. 의식의 운동에 대한 이런 사연이 여기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처음엔 대상으로 나타나던 것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지로 침강하고,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고[12] 바로 이것이 새로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또한 새로운 의식 형태가 등장하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의식에게는 이전 의식에게 본질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운동을 둘러싼 이런 궤도(軌道)가[13]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의식형태를 빠짐없이, 그리고 각자가 갖는 필연성에 따라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다[14]. 여기에 회의주의를 서술하면서 이야기 한 것과 다름 점이 딱 하나 있는데[15], 그것은 이와 같은 필연성이[16],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는 것이 의식에게는 전혀 인지되지 않고 그저 숙명적인 우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필연성은 마치 의식의 등뒤에서만[17] 벌어지는 사건인양 의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운동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 운동을 숙명적으로 이행하는,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18] 알고 있는 면이[19] 스며들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운동에는 경험의 와중에 있는 의식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만 꿰뚫어 보고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숙명적인[20] 면이 스며들어 있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21]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이며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 생성운동의 양식,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생성일 뿐이다. 생성된 것이 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그때 그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동시에 운동과 깨쳐나감으로 [22] 존재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gang>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그러면 의식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10] 원문
[11]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단지 헤겔의 주장인 것 같다. 앞 문단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최소한 명쾌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2] §13에서는
[13] 원문
[14] 문제는 누가 이끌고 가느냐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력으로 아니면 학문이, 아니면 학문과 의식이 합심하여?
[15] 원문
[16] 원문
[17] §8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14) 이런 운동을 놓고 우리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 의식이 자기 안에서 운동하는 가운데[2], 지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는 운동 안에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운동이[3], 이런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그 대상이 다시 참다운 대상이 되는 정황에 한해서[4], [우리가]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뜻하는 것의 핵심이다. 의식이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렇게 이해되는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에서 [§13] 언급한 의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5] 한 면을[6]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면을 아래와 같이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렇게 조명해 보면 [의식이 하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이 취하는 입장이 훤해지지 않을까 한다.[7] 조명해 보자.[8] 의식은 뭔가를 안다. 이렇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지에 대해서 불변하는 그 무엇이 다가 아니다[9]. 이 무엇은 또한 의식에 대한 불변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의식이 의미하는] 참다운 것이란 원래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였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10] 진리가 엇갈리는 것이 된다.[11] 우리가 보기에 이제 의식은 두개의 대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래적인 의미로서의] 맨 처음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대한 그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후자는 회의주의가 서슴없이 말하듯이[12]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13] 보인다. 뭔가를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14]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를 자기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때 불변하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의 행위만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렇지 않다. 회의주의가 관념적으로 그러듯이 이때 첫번째 대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15] 변화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이 대상은 더 이상 홀로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된다.[16]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귀착된다. 즉,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참다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살펴보면[17] 참다운 것이 본질이 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이제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이 바로 첫번째 대상의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바 첫번째 대상을 딛고 올라서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지의 운동과 대상의 운동을 통합해서 의식의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inheit der Einheit und Differenz”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4]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에서는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13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an sich> 가 단지
[5] 원문
[6] 원문
[7] 이 문장은 헤겔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였는데,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8] <정신현상학>의 담론적 성격을 살렸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런 담론적 성격 외 독어의 특성이 애로사항이 된다고 역자가 지적한 적이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정신현상학>에 무수히 쓰이는 문장기호다.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damit tritt die Zweitdeutigkeit dieses Wahren ein.>
[12] 원문 <zunächst>. 여기서 줄곧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회의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보았다.
[13] 원문
[14] 원문
[15] 의식에게
[16] 원문
[17] 원문
(§13) 의식을 가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1] 개념과 대상, 척도와 잣대질의 대상이 모두 의식 내에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2] 양자를 비교하는 본격적인[3] 조사 또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4]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가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란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5] 것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이렇게 참다운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 즉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자가 다 의식의 행위이기[6] 때문에 의식이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진리와 지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과의 일치여부 역시 의식의 행위 안에서 의식에게 벌어지는[7] 사건이 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고 또 그런 사건만으로 제한한다면[8] 대상은[9]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서 단지 의식이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 밖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추궁이 그럴 듯 하다[10]. 왜냐하면, 의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을 마치 꿰뚫어 보듯이 하여 그 뒷면에 의식행위와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아는 대상에는 이렇게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을 무엇에 갖다 대보는 식으로,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을 [즉자적인] 대상에[11] 갖다 대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지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의식에게는 [막연하지만] 뭔가가 [의식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다른 뭔가는 지,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의 존재라는 구별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주어진 구별에 기반하여 비교조사가 진행된다. 이런 비교에서 양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의식은 지를 변경하여 대상에 부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의 변화는 사실 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이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 동시에 대상도 다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의식은 자기가 이전에 das Ansich라고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사실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 [한때] 불변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었다고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이 된다.[12]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자기의 지를 가름해보고 지가 여기에 일치하지 않게 되면 대상 그 자체도 의식의 이런 운동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사의 잣대도, 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한 것이 그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란 단지 지의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를 조사하는 잣대의 조사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역자주 107 참조. 강조된
[3] 원문
[4] 원문 <überhoben>.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우리가 학문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지의 대상과 진리로 구분되지 않고]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2) 지야 <네 잣대와 내 잣대는 틀리다>라고 하고, 아니 법리와 같이 눈부신 논증을 가지고 위와 같은 분절과 그 전제를 논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1]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의 본질은 우리가 이런 분절논리에 걸리지 않게 한다.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2]. 그렇기 때문에 이 조사는 의식이 자기자신을 자기와 비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진리와 지간의 구별은 의식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식 내부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있음으로써 어떤 형식이든지 의식 그 자체가 지로 향하는 규정성을[3] 지니게 되며, 동시에 이 타자가 의식에 대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으로[4] 의식에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은 진리로 뻗어가는 방향성이[5] 있다. 그래서 의식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 중에서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또 그렇게 드러난 것에서[6] 우리는 의식이 스스로 내세운 척도를 얻고 이 척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를 재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본질 또는 참다운 것을 존재자 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진위를 가르는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단지 개념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7] 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 또는 불변하는 즉작적인 것을 개념이라 하고 타자에 대해서 있는 대상을 말 그대로[8], 달리 표현하면 의식에 대해서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로서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때 진위를 가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역시 단지 대상이 그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양쪽이 다 똑같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양대 요소가[9], 이것을 개념과 대상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대타존재니[10] 즉자존재니[11] 하는 것들로 표현하든, 하여간 양대 요소 모두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지 그 자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척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언뜻 떠오르는 착안이나 생각을 조사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 내야만[12] 비로소 우리는 사태 그 자체의 운동을 허심탄회한 [13] 마음가짐으로 관찰하는 경지에 들어서서 사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an sich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1) 우리가[1] 이와 같이 준비하고 난 다음[2] 지의 진리를 조사하는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또 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즉자적으로[3] 있는 것이 무엇인지[4] 조사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또 우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5] 즉, 이 조사에서는 [우리가 잣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진리로서의] 즉자적인 것이 우리의 대상, 즉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6]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즉자는 [지에 대한 즉자가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있는 지의 모습이다[7]. 우리가 지의 본질이라고[8] 주장하는 것이 지의 진리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 본질에 관한 우리의 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9] 이러면 본질 또는 척도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되므로 이 잣대와 비교되고 또 이 비교에 의해 진위여부가 결정되는 대상으로서의 지는 그런 잣대를 꼭 인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1] 누가 조사를 진행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적 의식을 비판하는 우리인가 아니면 자연적 의식이 스스로 조사를 진행하는가의 문제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fuer uns
[7] 원문
[8] 원문
[9] 지를 관조하는 우리의 지나 자연적인 인식의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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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벤트로트를 일개 복지국가론자로, 복지국가가 계급투쟁이 아닌 자본주의의 자기반성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시니, 선생님께서 기본소득을 자본주의 내 개혁전략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아벤트로트를 독일헌법이 어느정도까지 사회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보여준 사람으로, 복지국가의 형성을 역사기록에서 은폐된 계급투쟁과 소련의 위협 하에서만 가능했던 것으로, 기본소득을 자본주의의 원리에 反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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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벤트로트를 복지국가론자로 평해서는 절대 안되죠. 저는 누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말을 하는데 주목하지 않고, 그 말이 어떤 지평에서 행해지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물론 기본소득쟁취를 통해서 새로운 반자본주의 지평이 열리게 되겠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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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계급투쟁의 성과지만 그것을 일대일로 볼 수는 없죠.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려면 히틀러 나치 정권을 통한 철저한, 비참한, 남김없이 사라진 계급투쟁을 이야기하고 그 길을 통과한 계급투쟁을 이야기 해야죠. 막연한 계급투쟁, 즉 역사의 모든 현실을 담지 않는 계급투쟁을 운운하는 것은 저는 낭만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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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련의 위협하 복지국가가 가능했다는 것은 제가 언급한 Christoph Butterwegge가 말하는 것이고, 그에 앞서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가 tv 인터뷰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는 내용입니다. 은폐된 사실이 아니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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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론과 실천이라는 면에서 저는 지도를 그려 도출구를 모색하려고 하지 "성"을 싸아올려 다투려고 글쓰는 이짓하지 않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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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대포 한 방이면 무너져요. 아직도 안 무너지는 이론은 총알이 약해서 그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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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맑스, 프로이트 암만 비판해봤자 그 이론이 안 무너지는건 비판자들이 그보다 더 대단하지 않다는거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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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라 직유다. 어느 길이 안전하고 어디에 적의 복병이 숨어 있기에 알맞고 우리가 우리 병력을 배치하기에 알맞고 어디서 정면대결하기가 알맞고 이런 것들을 알아보기 쉽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진보진영은 우리편의 원전을 읽고 성을 쌓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제의 전략도 연구해야 한다. 재정러시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절대 우세에 맞서 엇갈리는 전선을 갖춘 탁월한 전력과 전술도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서양장기가 아니다. 구테어 비교하자면 바둑과 같은 것이다. 적인 포진한 철벽같은 포진에 낙하산을 띄우는 전술과 전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질 들룆의 <천개 고원>도 완전히 소화해야 한다. 맑스가 그랬니 누가 그랬니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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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이나 레비나스를 읽지 않고 어떻게 들뢰즈를 읽는단말인가요. 천의 고원에는 천개가 넘는 새로운 용어가 나온다는데 그 용어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않고 어떻게 천의 고원을 읽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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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이 많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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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들뢰즈나 버틀러를 읽지 않아서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뢰즈 읽은 사람들이 '여성되기'라는 용어를 쓰더군요. 그가 여성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여성으로 대우한단 말인가요. 이명박이 보는 청와대와 청소부가 보는 청와대는 다른 겁니다. 어떻게 여성으로 보고 느낄 수 있나요. 전 이런 용어들이 너무나 이상해요. 타자가 되는게 그렇게 쉬운건가요. 전 여성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이주노동자 상담소에서 2년 가까이 일했지만 저는 절대로 이주노동자가 될 수 없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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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쓰는 singularity라는 용어를 한국에서 어떻게 번역하고 있나요. 이게 호킹이 말한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와 블랙홀의 중심에 있는, 물리량이 무한대가 되는 지점을 가리키는 특이점에서 가져온거잖아요. 헤겔이 말한 개별성을 이 용어로 대치한거 아닌가요. 그런데 우주의 특이점과 인간의 특이점이 같나요. 이런거 끼워맞추기 아닌가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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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전쟁기계 이 용어도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말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클라스트르가 말한 원시사회는 남자들이 모두 전사고 적에게 잡히면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은 애낳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구요. 이 전쟁기계가 어떻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교보문고에서 들뢰즈 책 읽다가 쓰러지는줄 알았어요. 이렇게 두꺼운 책 읽느니 차라리 쉬운 책 열권 읽을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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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 비방이 이어지는데 헤겔이 정신현상학 쓴 건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정신의 운동을 보여준거잖아요. 맑스는 공장노동자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자본주의 분석했잖아요. 그런데 들뢰즈 이 사람은 뭘 갖고 책 쓴거에요. 결국 자기보다 잘난 인간들하고 대결해서 이론 하나 만든거잖아요. 비방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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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또 누굴 비판해요.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사람하고 대결하고 있잖아요. 자기가 그보다 더 잘난 인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근데 그 여자가 뭐가 잘났어요. 수행성 이론이 뭔가요. 여자가 남자역할 하는건가요. 난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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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제브가 그랬다든가, 프랑스에서 68 학생들에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뭐 이 정도했다고 해요... 고대 그리스어 배워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읽으라고... 코제브가 뭔가 제대로 보았다면 우린 어쩜 한문 배워서 공자 원전 읽는것이 더 좋을수도 있겠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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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다 학자들이신가봐~~~ 너무 멋있으셔~~~ 다들 어느 대학의 교수님들이신가~~~ 그러면서 노동자 운운 하시는 거 보면 우하하~~~ 우리 노가다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좀 해주셔~~~ 아니면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시던지~~~ 아~~~ 아름다워라 지식이 가득든 머리가 휘황한 빛을 발하네~~~ 들뢰즈 말고 좀 더 최신의 학자들은 없나요~~~ 아아아아~~~ 공장노동자 한 번 해보셈~~~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은 아시나~~~ 아아아아~~~ 한글 책 권해줘서 미안해~~~ 머리로 온갖 좋은 생각 만들어낸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이라네~~~ 아아아아아~~~ 똑똑하셔서 정말 부러워~~~~ 논쟁논쟁논쟁~~~ 누가누가 더 똑똑한가 자랑자랑자랑~~~ 미안해 나 무식해~~~ 아아아아~~~ 우리는 그저 똘똘이스머프의 발상을 실험해 보는 데 동원되는 노동자창녀농부들이라네~~~ 미안해~~~~ 이렇게 야비해서~~~ 사상 좋지~~~ 논리 좋지~~~ 인권 위해 익명게시판 너무 좋아~~~ 니들이 논쟁하느라 애쓰는 동안 우리는 실험대상이 되네~~~ 아아아아~~~ 졸라 논쟁 열심히 하셈. 똑똑하시니까 조만간 노벨상 받을거야~~~~ 말빨싸움해서 이기면 기분 좋아~~~~ 아이 좋아~~~~ 똑똑해서 너무너무 좋아~~~ 아들 낳고 딸 낳고 서울대 보내려고 대안학교 보내라~~~ 아아아아아~~~ 설겆이 하면 남녀평등 되는거지~~~ 아이 남녀평등 참 쉽다~~~ 미안해, 우리는 맞춤법도 모르고 진보논객도 아닌 듣보잡이셔서~~~ 진중권이 그랬지 영어는 필요한 놈만 배우면 된다고~~~ 아, 나는 농사꾼이어서 영어 배울 필요 없는 인간인가봐~~~ 태어날때부터 미래에 영어 필요한 사람 따로 있으니까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되는거지~~~ 아~~~ 나는 농사꾼이어서 영원히 미국 여행 못갈 놈이니까 영어 배울 필요 없지~~ 아름다운 진보논객님들 만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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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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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나 지으시지 여긴 어인 일로 오셨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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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묻겠는데 공장노동자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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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온갖 좋은 생각 만들어낸 사람은 누굴 말씀하시는건가요. 분명히 누구라고 말씀하셔야 수긍을 하든가 말던가 하겠네요. 왜 농사꾼님은 말로만 좋은 얘기하시죠. 어차피 여긴 말만 하는데 아닌가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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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님에게 무식하다고 하지 않았는데 무슨 피해망상이신지. 아프면 신음하지 말고 병원가세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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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왜 제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죠. 노동자들은 논쟁하면 안되나요. 왜 자기 맘대로 사람을 판단하시죠. 그것 역시 허세아닌가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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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름다워요. 님은 얼마나 추한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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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논쟁하느라 애쓰면 당신들은 실험대상이 되나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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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논쟁하면 누가 더 똑똑한지 자랑하는거라고 생각하시면 그 어떤 논쟁도 안되겠네요. 그렇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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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야비함을 미안해하실 필요야. 없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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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제가 쓴 글보고 어느 대학 교수님인가보다고 놀라시는가 보니 정말로 교수님에 대해서 아는게 없으신 분이군요. 불쌍해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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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자유를 참지 못하는건 가학증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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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증 환자는 피학증 환자에게 매우 의존적이니 다른 분 찾아보세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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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뢰즈나 버틀러를 알아서 비판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들뢰즈나 버틀러가 소비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한건데 님은 좀 지나치시네요. 그 정도 비판도 못받아들이는 좁은 마인드의 소유자가 아니신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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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님같은 태도때문에 대중을 즐겁게 하는 레토릭(수사학)이 유행인거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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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진중권이 그랬어여. 그러면 외국어를 공부해야 모국어를 알 수 있다는 괴테의 말은 어떤가요. 영어중심이 문제지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실용적 필요에 의한 것만은 아니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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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이 문제죠. 대학 학자와 대결해서 이기면 네가 더 낳은 학자고, 농민 노동자가 대학 학자와 대결해서 이기면 농민 노동자가 더 좋은 학자죠. 대결해야죠. 그냥 그러고 있으면 좀 심심하잔아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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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이 잘 안되면 악이라도 써야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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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되면 무당 불러다가 문등이 새끼들 되져버리라고 굿이라도 한판 벌어야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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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푸하하님같이 돌아다니면서 야유로 채찍질을 할 수도 있고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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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경우는 스케일이 너무 커서 야유라기보다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정신승리.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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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자 할일이 있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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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에서 철저한 자유주의자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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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또 무슨 소리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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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사 이노무시키때문에 오늘 책 한 권 못보고 내 스케줄 다 망쳤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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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로는 "내비둬"고 좀 유식한체 하려면 laissez faire laissez aller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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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성격하고 내 지랄병하고 같니.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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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항우울제는 있는데 항다혈질제는 없는거야. 있기만 하다면 글리벡보다 더 비싸도 복용해야겠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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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세요. 오래 살아야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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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뭔가는 해야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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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하고.... 푸하하님이 어떤 분이시든지간에 그분의 말투가 어떻든간에 푸하하님이 하신 말씀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멸시당하고 천대받고 사람대우 못받고, 그리고 펜 돌려 밥먹고 사는 사람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이것은 받아야 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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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님의 지나가면서 지적한 문제에 너무 성의없게 답한 것 같아서 이렇게 몇자 쓴자. 사용하겠다고 각서한 사유방식이 나의 아성에서 나를 몰아낸다. 하여,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사유가 쉬기않게 하는 두가지를 언급하겠다. 1) 기본소득관련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창조된 가치에 대한 과세와 연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wertschöpfungsabgabe"라는 개념아래 제안되는 것이다. 쉽게는 그냥 "Maschinensteuer"(기계세)라고 하는데, 정통 맑스주의 입장에 서서 이 문제를 화끈하게 전개해 내야 할 것같다. 이렇게 해야 기본소득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공세, 즉 열등처우의 공세를 맞설 수 있다. 신자유주의 순정파 독일 자민당 당수가 늘 타고 다니는 말이다. 일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다 소득이 더 높아야 한다고... [지나가는 말이지만 실지로 계산해보니까 절대 그렇지 않고 자료를 제시하니까 ..뭐라고 운운하기는 하던데] 중요한 것은 이 이데올로기 공세에 중산층 개념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열악한 임금이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지만 일자리만 갖고 있으면 자기가 중산층에 속한다는 허위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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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님이 내리밖은 쇄기의 아픔으로 얻은 결과가 있다. 진보라고 자칭하면서 인터넷공간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하면서 누구를 위해서 어쩌궁저쩌궁하는 꼴이 매우 꼴보기 싫었던가 보다. 사실 그렇고. 그럼 난 왜 이 꼴보기 싫은 짓을 하고 있는가. 이건 이 인터넷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운동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인테넷차원에서야 각자가 알아서 자기를 살펴봐야 겠지만 운동현장이라는 차원에서는 면밀히 따져봐야, 즉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참과 거짓의 문제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이것은 진보운동의 품성론과 연계되어 있다. 현재 난 이것이 있어야 된다는 막연한 생각수준이다. 푸하하님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진보운동의 동력의 하나로 '소외층'의 분노와 증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분노와 증오는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노출되던 기독교 신자가 성령을 받아들이듯 매우 중요한 것으로 진보는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는지 그것은 일단 제쳐놓고. 이 소외층의 분노와 증오와 단절되어 있으면 진보운동은 현실을 움직이고 바꾸는 실질적인 힘(materielle Gewalt)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