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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6

 

(§16) 사태가 이런데 형식주의는 이렇게 구멍 하나로 내는 소리와[1] 추상적인 보편성이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단언하기를 그런 단음과 추상적 보편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입장을 취한 다음 거기다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자신을 매어 놓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경우][2] [의심의 여지가 없는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뭔가에 대한 사상을[3] 반박하려면 그 뭔가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공허한 가능성만으로 충분했다.[4] 그리고 이와 같은 가능성 자체, 즉 일반사상이[5] 그대로 실재적인[6] 인식이 갖는 모든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 받았는데, 우리가 이제 와서 접하는 것은 이런 방법을 이념에[7] 적용하여 위와 같은 비실재성의[8] 형식을 취한 보편 이념에 온갖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별되고 규정된 것들을 해체해 버리고, 아니 그보다는 구별과 규정을 공허한 심연에 내던지는 행위가 그대로, 다시 말해서 그런 행위를[9] 더 발전시켜 전개된 구별과 규정 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부여 받지 않은 행위가 절대적인 것을 바라보는 양식으로[10] 통용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절대자의 입장에 서서 현존자의[11] 존재양식을 바라보는 행위가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현존자가 어떤 것이라는 술어부로 규정되지만, A=A라는 형식의 절대자의 양상 속에서는 이와 같은 [술어적인] 규정은 있을 수 없고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똑 같은 것이[12] 된다. 이런 절대자 안에서는 모는 것 다 똑같다는 단조로운 지를[13] 구별가운데 충만을 획득한, 아니 충족을 모색하고 요구하는 인식에 대치시키는 행위는 절대자를 칠흑 같은 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속담에서나 볼 수 있는 <한밤중에는 소들이 다 시커멓다>라는 천박한 삼척동자의 텅 빈 인식과도 같은 것이다. — 형식주의는 최근의 철학이 그렇듯이 규탄하고 <물러가라> 외친다고 해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시대의 철학 한가운데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이 형식주의는 비록 그의 불충분함이 알려지고 느껴지더라도 절대적인 실재에[14] 대한 인식이 자신의 속성을 완벽하고 명료하게 알아보기 이전에는 학문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학문을 전개하는 것이 당면과제이긴 하지만] 학문에 대한 보편적인 관점을 그 관점을 속속들이 전개하는 시도에 앞서 미리 다루는 것이 후자의 이해를 손쉽게 하는 면이 있다는 차원에서 먼저 그런 보편적인 관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는 것이 유용하겠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철학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몇 가지 습관적인 형식을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다.



[1] 원문 <Eintönigkeit>

[2] 원문 .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은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3] 원문

[4] 데카르트의 제2성찰에서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7 주석4 참조.

[5] 원문

[6] 원문

[7] 원문 . 헤겔이 데가르트와는 달리 동시대 철학을 비판하는 근거는 사상(Gedanke)과 이념(Idee)의 차이에 있는 것 같다. 이 차이에 대한 헤겔의 설명이 없다. 이 차이가 앞으로 어떻게 설명되나 일단 기다려 보자.

[8] 원문

[9] 이념을

[10] 원문 . 여기서 절대자를 알아보는, <사변적인> 것이라고 하고 지나가겠다.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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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베헤모쓰. 그리고 신

낭만주의적 국가론은 국가를 신체와 가족에 비교한다. 이 국가론에 따르면 국가는 확장된 가족공동체이며 이런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어떠한 규정의 제약도 받지 않는 의지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재현이 바로 수령으로서의 대통령이다.

 

이런 대통령은 신과 같은 예단의 능력이 있고 (“대통령은 국가안보 비상사태의 원인을 예단해야 할 고유한 책무”. 정호승/특별기고) 또 잘못하더라고 잘못을 따질 수 없는 수령이다. (“원인 제공은 이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 정호승/특별기고)

 

수령은 민족을 악에게 구출하지 못해도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 수령이 유익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령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Franz Neumann, 베헤모쓰, 국가사회주의[나치] 구조와 실제)

 

 

정호승도 이런 국가론을 따르고 있다. “입대 4개월 만에 희생된, 시신조차 찾지 못한 천안함의 막내 정태준 일병 영정은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정태준 일병은 그냥 해군 일병이 아니라 막내. 정호승은 일가족의 막내가 죽었는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는가라고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락되고 어떤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법치사회이전의 가족관에 사로잡혀 있다.

 

정호승은 이런 무법적인 복수와 보복을 부처님이 요구한다고 한다. 독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독화살은 막내정태준 일병의 등에 비수를 밖은 민주주의자와 노동운동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국가의 한 부분이 사라지고 옷가지나 머리카락, 손발톱만남은 것에 신도 분노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 졌다고 한다. 이런 신을 가엽게 여기는 우리정호승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구약성경 이사야 42 14절과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숨이 차서 헐떡이는,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부르짖겠다.” “깎아 만든 우상을 믿는 자여, 부어 만든 우상을 보고 우리의 신들이십니다하고 말하는 자들은, 크게 수치를 당하고 물러갈 것이다.“

 

베헤모쓰를 쳐부수는 신이 나타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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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Dolchstosslegende>. 그리고 나치.

정호승 :

“봄 비가 내린다. 연사흘 줄곧 내리는 이 비는 통곡의 봄비다.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채 서해에 수장된 천안함 장병 46명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다. […]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그 동안 남한이 북한에 보낸 ‘화해의 햇빛’은 지금 ‘기습공격의 그늘’이 되어 우리 아들들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정호승, donga.com 특별기고. 강조 ou_topia)

 

나치하 제국자료청:

“[독일제국 군대가] 저항의 최후수단을 다 동원하지 못하고 1918년 11월 11일 적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휴전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선에서 사기가 떨어진 전투력이 아니었다. 전투에 나선 군대의 등에 단도를 찍는 국내의 혁명이었다.” (나치하 제국자료청이 1942/1943년 발간한 “1914-1918년 세계대전”의 마지막 부분)

 

아돌프 히틀러:

우리는 외부로 향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휴전을 강요한] 11월 범죄자들이 등뒤에 있는 한, 독일 시그프리드의 등에 다시 창이 꽂힌다는 사실을. (아돌프 히틀러, 1923.1.27 „민족의 파수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가장 크게 쓰여진 도구는 다. 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독일군이 비겁하게 뒤에서 등에 단도를 찍는 기습공격을 당하여 패하게 되었다는 힌덴부르크가 1918년 11월 18일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의 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퍼뜨린 거짓말이다. 사실은 독일제국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힌덴부르크와 그의 참모실장 루덴도르프가 1918년 8월 14일 빌헬름 2세에게 연합군의 우세를 인정하고 패전을 피할 수 없다고 휴전을 권한 것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고 책임을 정치로 돌리려는 술책이었다. 힌덴부르크가 패전의 원인으로 드는 것은 구체적으로 1917년 제국의회의 평화결의와 1918년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즉,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운동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적의 영토에 깊숙이 들어가 있고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군의 등을 치고 계획적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드렸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은 극우와 나치가 악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입에 거품을 무는 증오에 찬 선동에 사용되었다. (참고, 독일역사박물관 웹사이트 www.dhm.de/lemo/html/weimar/innenpolitik/dolchstoss). 

 

 

정호승의 특별기고가 목적하는 바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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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운동

간장 오타맨...님의 [한국이주운동 과정과 이주운동 현황 및 활동과제] 에 관련된 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주노동자운동의 확대경으로 지적해 주신 문제점들을 참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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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진보와 지적활동. 그리고 소박성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천안함 침몰에 대한 특별기고를 읽으면서 파시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호승의 파쇼발언은 엉뚱한 사고가 아니라 그의 시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이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호승의 시 한편으로 그의 세계관을 촘촘히 엮어내어 그것을 그의 파쇼발언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어쩌면 억지로 보일 수도 있겠다. 

논자 자신도 현단계에서는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즉 정호승의 시를 사유하고, 사유된 사상을 만인이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이념으로 다듬어 논 수준에 와 있지 않다. 그래서 이하의 글은 정호승과 그의 시를 사유하는 과정에서의 중간보고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말문을 열어본다.

우선 정호승의 시인으로서의 성실성을 살펴보자.  <작가세계> 2009년 가을호에서 '나는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오마이뉴스에서 인용)이라는 데서 정호승은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럼 소크라테스가 한 행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자세란 어떤 것이지 한번 살펴보자.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순수한 학문도 아니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지식도 아니다. 여기까지는 정호승도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부분, 즉 자기자신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것은 멀리하고 있다. 소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지적활동을 하기 싫어서 그런지, 아니면 정호승의 소박이 바로 지적활동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것은 반드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logon dounai kai dexasthai/플라톤, 국가 제7권, 531e) 자기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호승의 특별기고는 그가 소크라테스 정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시인이고 소크라테스적인 정신의 저편에 서있는 시인임을 보여준다.

<경향>과의 인터뷰나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정호승은 ‘알기 쉬운 말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소박한 백합꽃과 같은 인상을 주는 시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박성에는 거짓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소박성은 아마 앙겔루스 실레지우스의 장미일 것이다.

“장미는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꽃을 피워도 다른 이유없이 꽃을 피운다. 장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누군가가 자기를 보나 걱정하지 않는다.”(Die Rose ist ohne Warum./Sie blühet, weil sie blühet./Sie achtet nicht ihrer selbst,/fragt nicht, ob man sie siehet.)

그러나 정호승의 소박성은 이런 소박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하는 소박성이다. 아니 이런 소박성을 알아보는 “나”가 시의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소박하지 않고 추상적인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간 낭만주의적 운동의 산물이다. 마치 베르테르가 동생들에게 빵 썰어주는 로테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세상은 멀리하고 자신에 도취되는 행위의 산물이다.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이 이런 것일까?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은 구체적인 결핍과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다. 모든 해방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만 가능한 소박성이다. 이것을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한다.

 

행복한 사건

 

아이가 달려온다.

엄마, 앞치마 묶어줘!

앞치마가 묶여진다.

 

Glücklicher Vorgang

 

Das Kind kommt gelaufen

Mutter, binde mir die Schürze!

Die Schürze wird gebun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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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도 시인인가? 윌프레드 오웬이 무덤에서 나오겠다.

우연히 정호승이란 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시를 읽게 되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유다. 노란 조끼에 파란 망토를 둘러쓰고 제법 폼을 잡는다. 이런 것이 시로 통용되고, 이런 사람이 시인으로 통용되는 무리들의 의식상태는 어떤 현실에 발을 맞추고 있는지 궁금하다. 18세기로 돌아갔으면 한다.

 

몸을 상하게 하는 노력 없이 영혼을 어루만져줄 수 있고, 절망 없이 아름다움을 손아귀에 쥐고, 초롱불 밑에서 밤을 지새우며 눈이 빨개질 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인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잘못 읽었어도 한참 잘못 읽었다.

 

낭만주의 터전에서 시라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의 그늘 밑에서 고요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꼴이 가관이다.

 

천안함 수병을 보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작태가 꼭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눈물의 강으로 만들어 동전 몇 푼 벌고 눈물 밀러라는 별명으로 낙인 찍힌 요한 마르틴 밀러가 생각난다. 가서 동무해라.

 

그리고 윌프레드 오웬이 받아주면 그의 수강생으로 들어가 시가 뭔지 배워라. 제발. 그리고 수국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좋은가라는 쾌쾌 묵은 거짓말은 내 몸을 관통하는 총알을 느끼고 다시 하지 말아라.

 

그리고 죽은 영혼 제발 가만히 나둬라. 제발 그들을 조용히 자게 나둬라. 촛불도 켜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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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 달래기

우컁컁님의 [북한이 어뢰를 쐈으면 안되는건가?] 에 관련된 글.

NK를 생각하는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로마제국의 시인  호라치우스의 편지 한편 (서신 1편, 18번째 서신)을 NK와 진보에 접목하여 번역해 본다.

 

"[북한과 관련하여] 어떤 사상을 권하기 전에 그 사상으로 인해서 발생한 잘못에 얼굴 빨개지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꼼꼼히 살펴보아라. 우리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고 그런 오류를 범함으로써 [진보적인] 생각에 적합하지 않는 짓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권하는 사상이 자신의 잘못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잘못 봤다고 하고 그를 옹호하고 감싸지 말라.

 

그러나 네가 권하는 사상을 속속들이 알게 된 이상, 그 사상을 악한 마음을 품고서 야근야근 씹는 자가 있으면 그 사상을 단호하게 감싸라. 이때 너는 그것이 너에게 다가오는 위험이라고 감지해야 한다. 너와 맞대고 있는  이웃의 집이 불타면 너와 네 것이 상하게 된다.  그런 무관심은 보통 불을 더욱더 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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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5

 

(§15)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하는] 후자는 내용을 별일 아닌 아주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때그때 내용을 대뜸 크게 확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때마다 이미 알려져 있고 또 정돈되어 있는 소재를 한 보따리 자기 지반으로 싸들고와서 죽 펼쳐놓고 그 중에서 나름대로 완성된 지 형태를 갖춘 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특수하고 진기한 것만 자기들의 격에 어울린다는 식으로[1] 취급한다. 이런 격식의 이면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까지 다스릴 줄 아는데 그까짓 이미 완성된 지 형태를 소유하는 것쯤이야 문제가 되겠느냐라는 우쭐거림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절대이념에게 승복하게 만듦으로써 그 이념이 모든 것에서 인식되고 완전히 전개된 학문으로 번성한 것같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전개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동일한 이념이 스스로[2] 자기 자신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이념을 다양한 소재에 외부로부터 갖다 대는 것으로서 동일한 이념이 자기형태를 갖추지 못하고[3] 그저 반복하는 운동일 뿐이다. 이와 같은 반복은 전개와 차이의 외관만 갖춘 것으로서 금방 권태로 이어진다. 이 이념은 뚝 떼어놓고 보면[4] 틀림없이[5] 참다운 이념인데, 전개라고[6] 내놓고 하는 짓을[7] 보면 고작 위와 같이 동일한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서 시작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거기에 쳐 박혀 있을 뿐이다. 다 알고있다고 [자긍하는] 주체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8] 부동의 동일한 형식을 앞에 늘어져있는 것들[9] 사이로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뭔가 괜찮은 것이 있으면] 그것의 주의를 그 부동의 형식으로 둘러싸[10] 소재가 외부로부터 부동의 요소 속으로 그대로 들어가게 하는데[11], 이와 같은 것은 내용에 대한 독단적인 착상과 같이 볼품없는 것이다. 학문의 내용이란 자신의 터전에서 움터 나오는 풍요로움과 그 속에서 스스로 차이를 두어 갖가지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렇게 산보의 여유를 즐기고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하는 자들의] 행위는 단조로운 형식주의로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차이란 단지 소재[12]상의 차이일 뿐이고, 그나마도 소재가 이미 다듬어져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알아차릴 뿐이다.



[1] 원문 . <거만을 떨다>라는 의미가 섞여있다.

[2] 원문 . 자기 자신과 차이를 두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in der tat

[8]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9] 원문

[10] 원문 . 개를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개가 먹거리를 발견하면 그러듯이

[11] 개가 죽은 쥐새끼를 꿀꺽 삼키듯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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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대안

마돈나님의 [급진은 점진이다] 에 관련된 글.

좋을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참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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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4

(§14) 이제 겨우 시작하는 학문으로서의 학문은 어쩔 수 없이[1] 아직 [내용적으로] 빠져서는 안될 세부적인 면까지 모두 갖춘 상태가 아닐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을 수가 없는데, 바로 이점이 [비학문적인 의식이] 질책하는 것이다. 이 질책이 등장하는 학문의 본질에 일격을 가한다고 하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정당한 질책이 되려면 앞서 언급한 형태의 연마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은 인정/수용하지 않으면서 다만 등장하는 학문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모순에[2] 빠져있는 비학문적인 의식의 꽉 막혀있는 상태를 풀어내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매듭을 풀기위해서 학문으로 연마해 나가야 하는 의식은[3] 이리저리 갈라져 서로 다투고 있지만 다들 아직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갈라져 있는 비학문적인 의식의 오늘날의 현상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자면] 한편은 소재의 풍부함과 이해가능성을 고집하는 반면, 다른 편은 둘 다 업신여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해가능성을 업신여기면서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한다. 현재 전자는 침묵하고 있는 상태다. 그의 침묵이 순전히 진리의 힘에 의해서 그렇든 아니면 상대방의 격렬성이 여기에 한몫 하여 그렇든 아무튼 그가 사태의 근원 앞에서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낀 나머지 굴복하고 침묵하게 되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재의 풍부함과 이해가능성을 고집하는] 전자의 침묵이 위에서 이야기한 학문의 요구와 관련해서 만족을 느낀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정당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가 침묵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후자가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승리의 반쪽은 [일정한 진리에 기반한][4] 후자의 것이고 다른 반쪽은 [골 때리는 것을 뭔가 엄청나게 참다운 것을제시하여] 기대를 격양 시키고 또 격양된 기대가 가라앉지 않게 기대한 것을 갖다 주겠다고 약속은 계속하지만 약속 이행은 하지 않는 데서 보통 빚어지는 [오늘날의] 권태와 무관심에 항복한 것이다.



[1] 원문 

[2] 원문 . 이 대립은 학문과 학문으로 향하는 의식간의 대립이 아니라, 학문이 덜 된, 갈팡질팡하는 의식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대립이다.

[3] 원문

[4] 헤겔도 직접성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주장하는, 예를 들어 피히테의 Intelletuelle Anschauung(지적직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서론 §8 역자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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