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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6

 

(§6) 진리가 취하는 참다운 형태는 이와 같은 학문성이라고 명제화할 때, 똑 같은 의미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진리가 현존하는 터전은 오직 개념이라고 주장할 때, 나의 이런 주장이 우쭐거리는[1] 것 외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에 확신으로 폭 넓게 퍼져 있는 생각과 그런 생각이 가져오는 결과와 정면 대립하는 것으로 고개를 든다는[2]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이 모순을 좀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이 결코 쓸데없는 짓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 설명이 지금 이 자리에선 우리의 비판대상이 일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정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시대가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펴보면[3] 이랬다 저랬다 횡행하는 사조인데, 이런 사조는 진리가 현존하는 터전이란, 아니 현존진리 자체란 <절대자에 대한 직관이다[4]>, <아니다 직접적인 지다[5]>라고 다투기 일쑤고, 한발 짝 나아가서 <진리는 종교다>, <아니다 존재 자체다>라고 윽박지르기 일쑨데, 여기서 존재라고 떠드는 것도 신이 참으로 사랑하는 참다운 존재가 아니라[6] 단지 있다는 것 그 자체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이런 생각아래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도 개념의 형식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우리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즉 절대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되고 대려 감지하고 직관해야만 하고, 절대자가 갖는 개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느낌과 직관의 주도아래 그에 상응하는 것들만 허용하는[7] 철학서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 원문 . 자기가 마치 기준(Mass) 되는 것처럼/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이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행동.

[2] 원문 . 처음에 단지 모순으로 보이지만 헤겔은 이것을 <감각과 지>에서 등장하는 지의 첫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3] 원문 ämlich>

[4] 원문

[5] 원문

[6] 원문 öttlichen Liebe>. 신 사랑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

[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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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당파성

요그님의 [이른바 대학 보이코트에 대하여] 에 관련된 글.

 

“신학으로 유명했던 파리대학”이 “봉건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카톨릭교리 연구”만 배출하지는 않았다. 피에르 아벨라르(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와 같이 근대정신의 기초가 된 “내면성”을  12세기에 이미 사유한 사람도 배출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아무튼 파리대학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랬지 않나 싶다.

 

예슬님에 대한 이런 저런 입장과 또 대학을 떠난/거부한 예슬님과 대학에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을 대조하는 것에는 객관성과 당파성 문제가 있지 않나 한다. 탈주관주의니 탈객관주의니 하는 포스트모던의 황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황무지에 아직 남아있는 객관주의 잔재들 사이사이에 고삐 풀린 주관주의가 다시 난무하지 않나 싶다.

 

익히 알다시피 맑스의 사상과 사유는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계급지배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분업과 분배와 함께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에 의존한다고 한다.

 

항구적인 국가권력하의 계급지배에서 계급입장을 명확하게 하여 행동에 방향성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당파성이 학문에서 말하는 객관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주관은 전통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현실을 쳐다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주관을 행위, 즉 실천(Praxis)으로 이해한 맑스는 주관을 강 건너 불 난 곳에 갔다 놓았다. 그래서 주관은 가만 일을 수 없고 불에 타 죽든지, 불을 끄든지 할 수밖에 없다. 주관 주체는 객관 객체" 와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변하고 객관 "객체"도 거기에 견디지 못해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예슬님과 관련된 문제는 김예슬님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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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5

(§5) 이렇게 진리가 현존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의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진리의 학문적 체계만[1] 있을 뿐이다. 내가[2] 목표로 세우고 달려나가는 것은 철학이 바로 이런 학문의 형태에 가까워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기여하는 것이다[3]. 즉 철학이 겉옷으로 두르고 있는 <지에 대한 사랑>[4]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여 실재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5] 지로 존재하게 하는데 있다. 지가 학문이라는 내적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 내적필연성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는 오직 철학[이 해야 하는 일]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다. 반면, 각 시대의 철학들간의 관계에서는 외적필연성이 작용하는데, 이때 해당 철학자의 우연성과 동기를 사상하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면 외적필연성은 내적필연성과 똑같은 것, 즉 각 시대가 [내적 필연성으로 완성된] 철학[체계] 계기들의 현존형태에[6] 대한 표상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7] 이렇기 때문에 철학이 학문으로 뛰어 올라가려고 하는 발돋움과 욕구가 이 시대에 들어와 만연하고 또 그럴 찰나에 와있다는 점을[8]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철학을 학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시도를 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화가 우리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 목적을 틀림없이 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원문 . 시스템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우선 <순수이성비판> A832/B860 시작부분에서 칸트가 시스템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여기서 칸트는 시스템을 건축술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단지 인식작용 결과물의 집합에 불과한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 학문의 방법이고, 하나의 [정부와 같이 규범/규제적 역할을 하는] 이념아래 이리저리 갈라지는 지식의 통일(Einheit der mannigfaltigen Kenntnisse unter einer Idee)이라고 한다. 이 이념은 전체의 형식에 관한 이성개념(der Vernunftbegriff von der Form eines Ganzen)으로서 그 이성개념을 통해서 이러 저리 갈라지는 것들의 범위(der Umfang des Mannigfaltigen)각 부분이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갖는 자리(die Stelle der Teile unter einander)가 선험적으로 규정된다. 이성개념을 통해서 범위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뭔가를 추가할 수 없고(keine zufällige Hinzusetzung), 완전성에 있어서도 완전성이 애매모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규정된 한계를 갖는 양으로 나타나고, 또 이성개념을 통해서 부분이 갖는 자리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알려져 있는데 한 부분이 빠져있으면 뭔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전체는 신체가 마디마디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마디마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articulatio)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coacervatio). 그래서 전체는 내적 출산(per intussusceptionem)을 통해서 성장하지 외적 추가(per appositum)를 통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2] 이렇게 헤겔이 스스로 등장하는 것을 보기 힘든 데, 그걸 깨고 여기서 <>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끝내 이루겠다는 혈서와 같은 다짐이 엿보인다. 사실 미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었고. 이 대목을 바울 사도가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3.12)라고 한 것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겸손해 보이지만 헤겔이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스며있다.

[4] 원문 . 의 원어적 의미는 <지에 대한 사랑>이다. 지를 갈망하는 것뿐이지 지에 다다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 신을 찬양하는 대회인 플라톤의 <연석술자리>(Symposion) (말이 연석이지 나중엔 사실 난장판이 된 술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앞 찬양자들과는 달리 에로스 신이 가난의 신(Penia)과 길잡이 신(Poros)의 아들로 지의 경지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철학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한다.

[5] 원문 . 머리 아픈 개념이다. 헤르더(Herder) (Macht) Wirklichkeit und Wirksamkeit(실재적인 영향)라고 하는데, 역자는 여기에 근거하고 철학이 동시대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과의 관계에서 어떤 Wirklichkeit를 갖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6] 원문

[7] 원문 헤겔의 내적필연성을 칸트가 이야기 하는 모든 주관적 철학을 평가하는데 사용될 법한 원형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순이성비판, B866이하 참조).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철학의 학교개념(Schulbegriff)세계개념(Weltbegriff)을 구분한다. 철학의 학교개념은 인식의 논리적인 완전성만 추구하고 목적하는 반면 세계개념모든 인식을 인간이성의 본질적인 목적과 관계하여 탐구하는 학문 (die  Wissenschaft von der Beziehung aller Erkenntnis auf die wesentlichen Zwecke der menschlichen Vernunft (teleologia rationis humanae)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이성을 갖고 노는 사람이(Vernunftkünstler) 아니라 인간이성에 고삐를 채워 그가 할일 을 하게 만드는 인간이성의 입법자(Gesetzgeber der menschlichen Vernunft)라고 한다.   

[8] 원문 . 누구의 몫이라는 의미도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하고 안하고는 너에게 달려있다/너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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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사회집단과 사회정의 - 1

독일사회집단의 현주소와 사회정의를 둘러싼 논쟁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로 연방정치교육센터(Bundeszentrale fuer politische Bildung)가 2001년 발간한 독일트랜드집: 실재와 방향(Deutschlandtrendbuch; Fakten und Orientierung)에 실린 미하엘 베스터(Michael Vester)의 논문 사회집단과 사회 정의(Milieus und soziale Gerechtigkeit)를 아래와 같이 번역.정리한다.

 

1. 문제 개진

 

□ 독일연방공화국의 사회규제모델이 변동하고 있음.

 

0 이 변동을 서술하기 위해서 먼저

-          사회구조모델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고

-          그 변동이 사회집단과 정치진영의 영역에 새롭게 나타나는 역동력에서 어떻게 표면화되는가 살펴볼 예정임.

 

0 사회집단 영역에서의 관계를 서술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          다원적 사회공간이라는 패러다임을 근간으로 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상을 적용하여

-          진행되고 있는 사회세력간의 역관계의 모순과 역동성을 서술하고

-          독일 사회모델의 미래발전 형태를 공간적으로 기술할 예정임.

 

사회모델의 갈등구도와 정치진영에서 나타난 현상에 대한 진단

 

0 지배집단과 전체사회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          그 관계가 대대적으로(nachhaltig) 변하여

-          주요사회제도와 함께 주도이념(Leitbild) 및 세계관(Weltbild)의 결속력이 저하되고 사회결속이 느슨해 졌다는 진단이 만연

 

0 이런 진단관련 다양한 원인분석이 제시되고 있는데

-          전통적인 계급집단이 무수한 개인으로 세분화되어 스스로 삶의 스타일과 집단을 창조하는 경향이라는 개별화 이론,

-          <정치에 대한 역정>이 마치 알 수 없는 전염병과 같이 퍼져서 공동체 정신을 분해하여 적극적인 사회참여 및 활동을 저해한다는 견해

-          물질적인 욕망에서 확대된 사회적 정치적 관심으로 가치변동이 이루어졌다는 주장과 함께 증대한 불만은 시민의 정치에 대한 요구가 증대한 것에 따르는 현상이라는 해석

-          사회적 불균형이 새로 부각되고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사회보장시스템의 탈규제화 경항이 불만을 불러일으킨 것이라는 분석 등임.

 

0 원인관련 미하일 베스터는 위에서 언급된 주장들이 전제하는 요소들을 종합해서

-          상황이 통일적, 일선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아니라, 위의 요소들이 서로 모순과 갈등을 구도를 빗으면서 상호 작용하고

-          이런 상호작용은 일정한 구조를 갖추고 진행되며 사회집단에 따라 분절되어 현상화 되며

-          따라서 주요 심성전통은 흔적 없이 사라지기 보다는 소속 집단에 아직 살아있는데 중대차 한 것은 그 전통이 가지를 쳐서 새로고 현대적인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

 

0 특히 이런 진단은 신세대 집단에 내려지는데

-          신세대집단은 이기주의적인 개별화된 인간으로 세분화되었다기보다는 대려 잘 작동되는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자기생활환경에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경항이고

-          신세대에 대한 지배적인 가치관 등이 결속력 상실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데 특히 제도화된 상부 정치제도의 내용과 스타일에 관심이 없고

-          그리고 그들이 적용하는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정의모델(자유주의/보수주의/연대에 입각한 정의모델/보호주의에 입각한 정의모델)이지만 이론가나 정치가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인텔리겐치아나 이데올로기적 형식을 취하지 않고 실천적/경험적으로 적용되는 실정임.

 

0 정치엘리트집단이 해당 전통잠재지지세력을 더 이상 항구적으로 동원하야 결속시키지 못하는 상황인데

 

-          정치엘리트가 신세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념과 경험에서 떨어져 있고

-          결과 신뢰가 불안정하고, 신뢰한다고 해도 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실태.

-          그래서 위와 같은 진단은 전통집단의 해체위기가 아니라

-          사회집단의 정치의사의 재현/대표/대변이 맞은 위기임.

 

0 정치엘리트와 소속전통집단 간의 갈등은 평화가 깨뜨려진 가족상황과 비교해야 그 정황이 파악되는데

 

-          이렇게 해서 보면 사회집단 쪽의 잘못으로 현대인의 세분화, 개별화, 비소속화 등을 거론하거나

-          정치엘리트 쪽의 잘못으로 무책임성, 또는 자기주머니 채우기 심성 등 도덕적으로 문제시화하는 것을 지양하고

-          가족관계에서와 같은 정치적 관계의 문제로 정립할 수 있음.

 

0 80년대에 들어와 독일연방공화국 사회모델의 변동이 강제되고 있다는 점은 경제 및 사회제도 구조를 심층적으로 뒤틀리게 하는 긴장 안에서 지속되고 있는데

-          소위 <정치에 대한 역정>은 개혁에 대한 기대의 무산화에서 기인하고

-          그 비중은 1980년 전체대비 10%에서 1989년 60%로 상승하고 지금까지 유지되는 실태임.

 

0 정치의사의 재현/대표/대변의 위기는 20세기 초반에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위기와 유사한 면이 있는데

-          당시, 대대적인 현대화의 약진으로 생산력과 삶의 스타일에 큰 변화가 있었고

-          1929년 장기경제공항으로 이어짐.

-          이런 역동력은 당시 시행되던 국가적/초국가적 결속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규범과 규제가 흔들리게 하고

-          결국 지배적인 정치 및 사회이념 엘리트와 그들의 구상이 사회집단으로부터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 상황으로 치닫음.

-          결과 선거를 통해서 혹은 무력을 동원하여 당시 최첨단 공업국으로 발전한 거의 모든 서방국가에서 전과 다른 사회규제제도 구상을 지향하는 신규 엘리트가 정권을 장악하게 됨.

-          이 신규모델은 장기간의 내적갈등과 2차 대전이라는 갈등을 거쳐서 새로운, 사회 전반적으로 지지를 받는 복지국가 모델로 관철되고 서구사회에서 보수주의적, 자유주의적, 사민주의적 변형으로 적용됨.

 

0 바로 이 복지국가 규제모델이 지금 흔들리고 있음.

-          그와 함께 이 모델의 제도/권위구조/주도이념이 경제와 사회 영역에서 수술대 위에 올라와 있으며

-          전통엘리트집단과 신규엘리트집단이 각자의 사회모델을 제시하면서 헤게모니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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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총선후 독일 정당체제 변동

2009년 총선후 독일정당체제 변동과 관련하여

 

베를린 자유대학 오스카 니더마이어 (Oskar Niedermayer) 교수가 투찡(Tutzing)에 있는 정치교육 아카데미 (Akademie für politische Bildung)에서 강연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 정리해 본다. 이와 관련 역자가 意圖하는 것도 있다. 사노련, //위 논쟁과 관련 멀리 있고, 또 오랫동안 그런 토론에 참여하지 않아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독일 정당의 변동과 그 아래 사회구성원의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주의 정당창당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정치정당에 대한 자료로 시작해 본다. .

 

오스카 니더마이어:  2009년 총선후 독일정당체제 변동

(출처: web.apb-tutzing.de/apb/cms/uploads/media/vortrag_niedermayer.pdf)

 

2009년 총선을 계기로 해서 전후에 형성된 독일 정당체제가 이전과 전혀 다른 유형으로 현상화 됨. 전후 독일 정당체제는 양대 정당이 지배적인 체제였는데 2009년 총선이후 다원화된 체제로 이전함.

 

정당체제는 정당간 상호관계를 통해서, 즉 여러 정당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 관계하는 성질로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음

 

0 이런 성질은 크게 내용적, 구조적 성질로 구별되고 선거차원에서는 투표경향으로, 의회차원에서는 의석확보로 현상화 됨.

 

0 구조적 성질을 규정하는 잣대로는 의회에 진출한 정당의 수(Format)와 세분화 정도(Fragmentierung)가 사용되는데,

 

-          2大 정당 구도일 경우 양대정당의 집중정도(전체대비 양대정당의 득표비율)와 비대칭(양대정당간 득표차이)으로 구체화 됨.

 

0 내용적인 면에서는 양극화 (사상 및 당정책), 기본/핵심 갈등구도, 이 갈등구도에서의 입장배치, 분절(특정정당과의 연정배제) 등이 잣대로 사용됨.

 

구조적 성질을 결합하여 정당체제를 구별하면 일당 지배적 구적, 2대 정당 지배적 구조, 다원적 구조, 첨예하게 세분화된 구조 등으로 구별됨.

 

0 2대 정당의 지배적 구조를 규정하는 지표로는 양대정당의 전체대비 최소득표율, 상호비대칭 정도, 3大 정당과의 득표차이 등이 사용됨.

 

-          구체적으로 양대정당의 최소한 2/3 의석 확보, 양대정당의 각 최소한 1/4 의석 확보, 양대정당의 소수정당이 3대 정당보다 2배 이상 의석 확보 등이 이루어지면 2대 정당이 지배적인 정당체제를 이야기 할 수 있음.

 

독일 정당체제는 위와 같은 2대 정당 체제였는데 80년대를 거기고 90년 통일을 통해서 현재 다원적이고 세분화되어 가고 있는 상태임.  

 

0 정당체제의 양극화 현상이 사회경제학적 차원(경제와 국가역할)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첨예화되고 있는데

 

-          사회복지국가관련 자유시장주의와 사회정의실현, 사회문화적 차원(사회공동체구성원의 삶형태)에서 자유주의/관용주의와 권위주의간 갈등이 문제화 됨.

 

0 이 양극화 현상은 1998년 이후 사회복지국가관련 사민당 입장의 변동으로 불거짐.

 

-          쉬뢰더 前총리의 아젠다 2010 개혁에 반발하는 사민당 지지세력(주로 노조간부) 일부가 사민당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을 창당하고 동독 지역정당으로 발전한 동독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계정당 민주사회주의당(PDS)과 합당하여 좌익당(die Linke)를 창당함으로써 전국차원에서 사민당과 경쟁하는 정당 및 그 지지세력이 형성됨.

 

-          아젠다 2010 진행과정에서 사민당, 기민/기사연합에서 사회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세력과 자유경제주의를 지지하는 세력간 갈등이 불거지고, 소속정당에 실망한 지지세력은 더 이상 소속 정당에 투표하지 않거나 다른 정당에 표를 던지게 되어 좌익당과 자민당이 득표하고 득세하게 됨.

 

-          결과 사회경제적 갈등구도에는 양극을 대변하는 2개 정당이 전국적인 기반을 갖추고 형성된 상태임.

 

0 기민당도 이 과정에서 정책수정을 하게 되는데

 

-          사회복지국가와 관련 2005년 총선전략으로 자유시장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라이프치히 정당대회 결의) 2005년 총선에서 코피 터지고 신자유주의 아젠다 철회

-          자유/관대주의와 권위주의간 갈등구도에서 권위주의적인 입장을 조심스럽게 수정하여 자유/관대주의 극쪽으로 이동. 예컨대 전통적인 가족이상 수정, 다문화를 타부화하는 자세 교정, 비전통적인 삶의 스타일 인정,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메르켈 총리의 교황비판)

 

0 사회문화적 갈등구도에서는 녹색당이 독점적으로 이득을 보는 상황

 

-          양대정당의 관대/자유주의 세력은 소속정당에 실망하면 녹색당을 지지하는 쪽으로 가지만

-          양대정당의 가치보수주의 세력은 실망할 경우 갈 수 있는 대안정당이 없는 상황이어서 기민/기사연합에 잔류하는 경향.

 

* 극우가 연방차원에서 대안정당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독지역의 주, 기초단체차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없는 상황임. 극우세력이 주의회에 진출하고 특히 기초단체정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을 보면 극우문제는 그리 쉽게 지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님. 독일 헌보청의 극우관련 보고에 따르면 극우가 고실업율, 인구공동화 현상 등으로 열악해지는 사회 및 생활환경에 처한 동독지역에서 이웃 돕기 등 실생활에 유익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일부지역에서는 지배적인 토대를 마련하기까지 이름 [역자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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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고골의 &quot;코&quot;. 소시민 허위의식를 다룬 괴기화

마리화나님의 [성당에서의 코발로프의 절망] 에 관련된 글.

 

니콜라이 고골의 (1836)는 허위의식이 만연한 소시민의 출세욕과 과시욕이 어떤 정신분열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괴기화다. 이야기내용은 간단하다. 코발로프라는 사람이 자기 코를 상실하고 다시 찾는다는 이야기다.

 

* 코발로프라는 이름에 스며있는 기본의미는 대장장이(코발)이고, 그리고 추가적으로 <여자꽁무니를 쫓는 자>, <여자 앞에서 과시하는 자>, <약삭빠른 자>란 의미로 쓰인다.

 

우리나라 공무원으로 따지자면 4-5급 정도 되는 공무원이고, 회사서열로 따지자면 차장정도 되는 코발로프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위엄을 더하기 위해서 자칭 소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자기 얼굴에 코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코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괴기적인 것들을 경험한다.

 

이런 괴기적인 장면들에서 핵심이 되는 장면은 군대계급으로 따지자면 준장이 되어있는 자기 코와 만나는 장면이다. 살펴보자.

 

코발로프는 자기 코를 찾아 헤매다가 자기 코가 준장이 되어 마차를 타고 우아한 귀부인들을 방문하러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시내를 돌아다니는 준장이 된 자기 코를 뒤쫓다가 마침내 카산 대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기 코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 카산 대성당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데, 나폴레옹 침입을 물리친 미하일 쿠투조프 야전사령관이 이 대성당에서 기도하고 출전했단다. 그리고 그는 그가 기도했다는 자리에 묻혀있다.

 

코발로프는 빌빌 꼬면서 준장이 되어있는 자기 코에 다가가서 자기 것이라고 하지만 준장이 되어 있는 코발로프의 코는 딱 잘라 아니라고 한다. 자기는 자기란다.

 

코발로프는 이 순간 멍하게 되지만 주변에 우아한 귀부인들을 있는 것을 보고 으쓱거리기 시작한다. , 준장이 되어 있는 자기 코의 위엄이 마치 자기 것이나 되는 양. 그리고 자기 얼굴에 코가 없는 것을 의식하고 돌아보지만 준장이 된 자기 코가 이미 그 자리를 떠난 것을 알아차린다.

 

이 장면이 핵심이다.  바로 이순간 코발로프가 절망에 빠진다. 자기 코가 <나는 나다>했을때 절망에 빠진 것이 아니다. 자기가 기대어 과시하고 으쓱거니는 것이 사라졌을때 절망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코발로프와 같은 소시민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몸에 걸치는 군복과 같은 것이고 그런 군복에 따라붙는 사회적 위엄/권력이다. 출세욕과 과시욕의 외화다.

 

진보의 <자기> 사유가 이런 것에 근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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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님 마음으로 피리불지 말자

마리화나님의 [김예슬의 뉴타입 정신과 소심함] 에 관련된 글.

햄릿은 자기 마음을 피리쯤으로 생각했던 친구들을 죽음으로 보냈다. 자칭 친구라는 자들이 온갖 궤변을 동원하여 햄릿을 주물러 보려고 했다. 햄릿은 문득 피리를 하나 꺼내놓고 불어보라고 한다.

 

햄릿                   : 이 피리를 불어보게.

길던스턴             : 전 불지 못합니다.

햄릿                   : 부탁이네.

길던스턴             : 정말로 전 불 줄 모릅니다.

햄릿                   : 간청하네.

길던스턴             : 저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왕자님.[1]

 

예슬님의 마음을 가지고 피리를 불려고 한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나 있는 구멍을 다 알고 있단 말인가? 그 몸을 주무르고 그 마음의 구멍을 열고 닫아서 무슨 소리를 내는데 이상야릇하기가 그지 없다.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돌아버릴 것 같이 돌아가는데 따라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음씨 착한 우리 어머님들이 하던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 어머님들은 금강 연변에서 무를 다듬으셨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의식은 필연 <자기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또 <자기>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우울증의 근거다. 예슬님은 이 우울증에 걸리는 굴레에서 벗어나왔다. 그는 무엇엔가 잡힌바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잡힌바 된 그것을 진실로 취하기 위해서 힘차가 나아갈 것이다.

 

피리불지 말자. 소심쟁이 뱀 나올까 두렵다.

 

둥둥둥 북을 치자.  



[1] 이경식 해설·번역, <햄릿>,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1998). pp. 232~233. 인용은 <스테레오>님의 블로그에서 (http://stereotype.tistory.com/1#footnote_link_1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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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

(§4) 일어나서 먹고 자고 이러기를 반복하는 삶의[1] 모습은 마치 동식물이 자기속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묶여 사는[2] 그런 모습과 같은데[3] 이런 자연[시간]의 흐름 속에 가둬진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4] [한 개인이] 교양을 쌓아나가는 첫 디딤은[5]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과 관점을 사용하는 능력을[6] 훈련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7]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무튼 [보편적 원칙과 관점이 드리우는 빛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사상의 수준으로 [8], 즉 대상에 대한 사유행위의 결과로서 사유행위 안에 내재하는 사상의 수준으로 뛰어 올라가야 하고 이에 못지않게 근거를 제시하여 그런 보편적 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을 뒷받침하거나 논박하고, 구체적이고 넘쳐 나는 대상의 내용을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9] , 그리고 이렇게 사유된 것들을 따로따로 잘 정리함으로써 대상에 통달하여 진지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양의 초기 단계는[10]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성장하는 소년이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교양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회생활에[11]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 이런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인은 사태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과 판단능력에 개념이 갖는 진지한 운동이 일어나 [12] 사태의 심층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 추가된다면, 이런 것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사는, 마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상담화에 잘 어울리는 지식과 판단능력이 될 것이다.[13]



[1] 원문

[2] 원문 . <덜 떨어진 놈>이란 문구에서 <덜 떨어진>이 갖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3] 서론 §8 내용을 여기에 삼입함

[4] 원문 우선 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양자를 시간의 진행에 따라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앞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역자는 우선 <교양> <무의식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의 본래 의미가 <붙들어 쥐어 어떤 일에 착수하다>라는 점에서 은 교양은 어떤 기회를 포착하여 시작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다. 덧붙이자면, 왜 우리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살다가 죽는 그런 반복에서 헤어나와 교양을 쌓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에게는 이미 그런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즉 교양을 쌓아갈 수 있는 학교, 선생 등 교육제도가 있고, 학교를 보내지 않으면 처벌을 주는 법규 등 제도(Institution)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이 갖는 의미에서 유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식물상태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사회적인 인간으로 볼 때 이미 그런 교양 안에서, 즉 제도 안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겠다. 이것이 <문화>를 인간의 제2 <자연>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5] 원문. 개념은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교양>이전의 상태에서 <교양>이 시작되는 상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직관은 아마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역자의 경우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날 이후의 일부터, 그것도 학교정문을 딱 들어서고 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에만 자아의식이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전에 일어났던 일,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자아가 섞인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 일들은 단지 꿈속에서나 종종 나타나는데 햇빛, 따스함, 소리 등 아주 원초적인 감각의 대상으로만 되살아 날 뿐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학교정문, 그리고 운동장으로 가는 길 양쪽에 일렬로 심겨진 키 높은 포플라나무 등이 주는 위엄이 산과 들에서 그저 뛰놀기만 한 어린이의 뇌와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겨 둔 모양이다. 과 그 시작을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선 이렇게 직관에 기대어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6] 원문 ätze und Gesichtspunkte>. 여기서 소유격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카테고리와 같은 것을 먼저 습득하는 것이라고 수가 있겠다.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사람 누구야> <이건 무엇이야> <이건 무슨 색이야> 등 카테고리를 습득하는 연습을 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이 사과는 둥글다>라는 사상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발전한다. 그래서 여기서 Kenntnisse <지식>보다 <습득>으로 번역해야겠다. 대장장이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날이 쉽게 문드러지지 않는 낫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지식은 에 가깝다. <몸에 베인 기술/능력>이라고 하자. 임석진 교수는 이것을 <지식 획득> <훈련>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신현상학 1, 38) 

[7] 원문 .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지목했다. 

[8] 원문 . 사실 무슨 말인지 어렵다. 살펴보자. 로서의 <사상>은 오성행위를 이야기하는데 데가르트는 <사상>을 사유행위 일반으로 확장한다 (cogitatio interdum pro actione ... sumitur/사유는 어쩔 때는  사유행위 대신 쓰여진다). <사상>은 또한 , 즉 영미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으로서 사유의 내재적 결과를 의미하고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은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 안에 내재하는 와 같은 것이 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3, 53쪽 참조.) 아무튼 여기서 사용되는 소유격을 동시에 주격적 소유격과 [사상에 내재하는 사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사태에 대한 사상] 이해해야만 하겠다.

[9] 원문 . 무슨 말인지 또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다. Tugenthat (etwas von etwas)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이데거 식으로 etwas als etwas, 즉 존재론적인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로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을 가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 보다 정확해지면 위에서 지껄인 것들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겠다.

[10] 원문 . 교양은 한번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11] 원문 üllten Lebens>. <철이 들어 ... 사회생활로>로 옮겨 보았다.

[12] 원문 . 또 소유격이 문제다. <개념>이 갖는 <진지>인지 아니면  <개념>에 대한 <진지>, <개념>을 획득하려는 <진지>인지 뭐가 뭔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뭔가 <개념>이 갖는 <진지>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럼 <개념>이 갖는 <진지>란 뭐란 말인가. 우선 주관적인 오성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시작하고, 뭔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운동이 진짜 그러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진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이 문제를 또 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3] 헤겔은 이런 지식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번역문에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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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보다 붉은 도시가 더 좋다

hongsili님의 [전술과 실용에 대한 질문 [경계도시2]] 에 관련된 글.

베를린은 1998.3 행정구역개편이후 현재 12개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중 Temphof-Schöneberg행정구역으로 합병된  Schöneberg이란 지역이 있는데, 여기에 붉은 섬“(Rote Insel)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관광거리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옛 가스공장의 가스를 저장했던 가스미터(Gasometer)만 딸랑 서있다. 주로 노동자가 거주하고 또 그랬던 지역이라 볼만한 건물도 없다. 그런데 나는 기분이 들쑥날쑥하면 그냥 이 지역을 한번 돌아본다. 철로로 에워 싸인 삼각지라 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면 붉은이라는 수식어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1878, 당시 사민당(SPD)은 사회주의자법(Sozialistengesetz, 사회주의운동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1878.10.19제정된 법)에 의해서 불법화된 상태였는데, 황제 빌헬름 1세가 두 차례 테러 후유증을 치료하려고 휴양지에 갔다가 몇 달 후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민은 북독연맹 흑백적기를 흔들면서 황제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붉은 섬지역에서 살던 맥주도매상 베커(Bäcker)라는 사람은 붉은 기를 창문에 꽂아 놓았다. 이것이 죄가 되어 그는 국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이것이 이 지역이 붉은 섬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기젤라 벤젤(Gisela Wenzel)베를린 역사[찾기]사업“(Berliner Geschichtswerkstatt) 1987년 발간한 붉은 섬 베를린-쇠네베르크. 도시역사를 조명하는 이야기 조각들“(Die Rote Insel Berlin-Schöneberg. Bruchstücke zu einer Stadtgeschichte)이란 책에서 말한다.

이 지역은 원래 노동자, 기층민중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사민당, 공산당, 독립사민당을 대폭 지지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던 철로를 지키는 연대가 또한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극우 독일민족당을 지지하는 군 소속 장교가족과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지역이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지역이 나치가 득세하고 독일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SA(나치 돌격대)가 함부로 이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들어오더라도 중무장을 하고 떼거지로만 신속하게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다. 또 율리우스 레버는 이 지역에 연탄상인으로 잠복해서 반나치운동을 하기도 했다.(1944.7.20 히틀러암살계획과 연계되어 있던 레버는 1944.7.5 체포되어 동년 10 20일 사형선고를 받고 1945.1.5 베를린 플뢰첸제 교도소에서 사형된다.)

 

경계도시보다 붉은 도시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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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왈 공자왈 하지 말자

오늘 정신현상학 서론 §1에 올라온 덧글을 보면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 두 가지가 떠 올라서 이렇게 몇자 적어본다. 하나는 해부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헤겔이 학자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후자부터 보자면 헤겔은 학자행세를 하는 사람을 호되게 질책한다. 가끔 민망할 정도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을 반쯤 죽였다라고 생각하면 흐뭇해 하고, 마치 사냥꾼이 짐승의 외피를 벗겨 보란듯 하듯이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의 천박하고 진부한 생각이 그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의식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정신현상학 서설 3문단에서 4문단으로 넘어가는 데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헤겔의 비판은 상대를 죽이는 비판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뿔, 외피 등 노획물을 벽에 걸어놓는 성주도 아니고, 그런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소시민도 아니다. 헤겔은 그 정도가 아니다. 헤겔이 하는 비판을 소박한 차원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차라리 구제하는 비판(rettende Kritik)에 가깝다. 헤겔은 외피에 만족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분히 않아서 상대를 해부해 낱낱이 살펴보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 헤겔은 데카르트의 자세를 철저하게 이어받은 사람이다. 다음 이야기는 Alfred Schmidt강의에서 주어 들은 이야기다. 하도 오래 되어서 세부적인 내용은 제시할 수 없는데, 대충 이런 이야기다. 하루는 데카르트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데카르트의 집에 가면 책이 억수로 많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책 한 권이 없었단다. 의아해서 데카르크에게 책이 없냐고 물었더니 책을 읽고 들어오는 중이라고 대답했단다. 나가서 데카르트는 해부하고 있는 짐승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자기 책이라고 했단다.

 

맹자왈 공자왈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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