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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성찰, 좌파인 우리부터 극복할 문제들


사진출처 노동과 세계

‘지침’에 익숙해지는 게 문제다
무능한 좌파, 대안 없이 투쟁만 외치는 꼴통이란 게 현장좌파의 수식어이다. 이것에 대해 좌파는 투쟁을 회피하는 사람들의 변명과 비아냥거림 정도로 여겨왔다. 
각 사업장에서 고용불안이 높아지고 자본의 탄압서슬이 퍼래 질 때 마다 조합원들은 그래도 꼴통인 ‘좌파’를 지지했다.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뒤에서 야합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대는 여전히 현장에 남아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일부 현장에서, 2009년 쌍차 파업 한복판에서 일어난 현장좌파로 일컬어졌던 민투위가 배출한 현자집행부의 부끄러운 역사도 있고, 현장 단위 모든 사업장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여전히 현장좌파를 당당하게 만들지 못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산별노조체계가 보편화되면서 지침에 익숙해 졌다. 이는 현장좌파도 마찬가지다. 현장의 역동성을 강조하면서도 지침 없이 움직이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때문에 그 결과는 언제나 ‘누구 탓’이 되어버렸다. 이걸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쌍차투쟁에서 좌파활동가들은 현장에서 연대파업서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서명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엄혹하다. 산별노조에서 승인되지 않는 파업, 그것도 개별인자들이 자의적으로 진행한다면 징계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제도를 넘어서기 위한 현장조직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 집행부가 아니라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면 민주노조 20년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왔겠는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만들고, 민주노조라는 외피를 쓴 관료성을 넘어서야만 우리가 원하는 역동하는, 투쟁하는 현장과 노동자계급이 살아날 것이다.

좌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우파(자주파)와 중앙파를 반대하는 것이 ‘현장좌파’의 정체성일리 없다. 변혁의 경로의 차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자기 정파의 정체성이다. 정파의 정체성을 온전히 현장의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우파이든, 중앙파이든...  ‘누가 싫어서’가 아니라 노선의 차이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노선 차이 속에서 전략과 전술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자의 무기인 ‘파업’을 운운하는 것이 노선의 차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정파운동의 암울한 현주소다.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계급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인 ‘파업’은 정파와 상관없이 누구나 주장되어야 할 전술이다.
파업전술을 넘어 민주노조의 역할을 확대해 가야 한다. 더 나아가 민주노조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자기 정파활동을 자유롭고 원대하게 해야 한다. 의회주의 노선을 통한 변혁전략을 얘기하든, 민족통일을 통한 해방을 말하든, 대체권력형성을 통한 혁명을 말하든 말이다. 이러한 노선적 표명 없는 정파운동은 언제나 조합주의, 패권주의, 종파주의, 끼리끼리 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건설하자고 했다. 현장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민주노동당하자고 하고 진보신당하자고 하더니 이번에는 사회주의 정당?’, ‘죽어버린 사회주의를 누가 마음이 움직이겠느냐’고 한다. ‘당 없이 현장좌파만 하면 된다’고도 한다. ‘노동조합활동에 활동가조직도 어려운데 당 활동까지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도 한다. ‘잘되면 가입하겠다’고도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최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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