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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9호>참신한 인물은 제도정치의 기사회생 꼼수

 

참신한 인물은 제도정치의 기사회생 꼼수

 

구태의 원인은 인물이 아니라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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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라는 참신한(?)인물의 등장이 허약한 대의제를 흔들어 놓은 것 같은 착시현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새 인물은 기존 정치제도를 강화하는 기제일 뿐이다.
 
참신하다고? 오히려 익숙하다
 
오세훈 전 시장이 사퇴할 쯤 민주당은 새 서울시장은 자신들의 것인 양 의기양양했다. 한나라당은 무상급식 투표율을 근거로 해볼 만하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을 쯤, 난데없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원장의 출마를 고민하자 서울시장 보궐 선거의 판도 뿐 아니라 대선 판도 역시 뒤흔들려 버렸다. 결국 안철수 원장은 박원순을 밀어주며 보궐선거 무대에서 빠졌으나, 이로 인해 자신의 의지가 어떠하든 대선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과거 ‘북풍’보다 더 강력하다는 말을 낳을 정도로 강력한 ‘안풍’을 두고, 제도 언론은 기존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대중의 당연한 선택으로 파악하고, 기존정당의 혁신을 주문하면서 정당정치의 근간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넌지시 ‘안풍’을 경계한다. 한편에서는 이참에 제3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기존정치를 혁신해야 한다고 한다. ‘안풍’으로 인해 진보대통합-민주대연합의 조직적 흐름은 인물 중심의 재편에 대당조차 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안철수라는 참신한(?)인물의 등장이 허약한 대의제를 흔들어 놓은 것 같은 착시현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같은 풍경은 한국 정치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강화되는 대의제 속에서 대중은 자신들의 염원을 대변하지 않는 기존 정당을 불신하고, 나아가 천박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기득 정치인에 혀를 내두르며,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할 시점에 새 인물은 혜성과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새 인물은 결국 기존 정치 질서에 안착하고, ‘새 인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헌 인물’이 된다. 그러는 동안 정치권은 불신의 눈초리를 잠시 벗어 날 수 있고, 마치 새로운 판을 짜는 듯 행세하지만 결국 최종 버튼을 누르는 기득권층은 안락하고 안정적인 자신의 성을 지켜나간다. 이러한 구태는 시기에 따라 ‘젊은 피 수혈론’, ‘세대교체론’ 등으로 포장되어 제도정치를 기사회생시킨다. 사퇴한 오세훈은 과거 기존 정치인과 다른 환경운동을 하던 패기 넘치는 젊은 변호사였고, 정동영은 국민에게 사랑받는 아나운서였으며, 김문수와 이재오는 헌신적인 노동운동가였으며, 심지어 이명박은 정치싸움만 하는 직업정치인이 아니라 건실한 전문경영인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너무도 익숙해서 오히려 잊어버리는 참신한 인물에 대한 열광은 정작 현실 정치구조에 면죄부를 부여하여 결국에는 정치 혐오를 재생산하는 주요한 작동원리다. 정치혐오에 따른 냉소와 무관심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당장 정치인에게는 난처하지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기득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오히려 나쁠 것 없는 반작용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혐오가 무관심이 아니라 분노로 표출되어 구조자체를 뒤엎으려 하기 전에 새 인물의 투입으로 분노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대부분 참신한 인물은 진정제의 역할을 툭툭히 해낸다.
 
대리만족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대의제가 고착된 제도정치에서 정당정치는 직업적인 정치인을 양산한다. 시체 말로 먹고살기 바쁜 대다수의 인민들이 일일이 법제도를 만들고, 참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인민의 참견을 기득권자들은 반기지 않는다. 때문에 인민들은 구조적으로 무대에선 연예인을 바라보듯 직업정치인을 바라보고, 정기적으로 있는 선거에서 뽑힌 자를 매개로 자신의 삶을 의탁하게 된다. 뽐는 자는 뽑힌 자를 통해 좌지우지되고,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는 구조, 대리행위와 만족의 구조는 정당의 정치철학과 이념에 앞서 인물에 집중시키는 강력한 기제다. 사실 정치인을 선택하는데 있어 추첨제는 가장 이상적이다. 추첨제를 통해 누구나 정치인이 될 수 있기에 누구나 주어진 힘을 남용할 수 없다. 누구나 될 수 있기에 언제든 잘못하면 쉽사리 끌어 내릴 수 있다. 누구나 언제든 정치가가 될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하고, 정치가는 특권의 자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현재의 구조는 인민이 직접적으로 정치를 수행할 기반이 없다. 과도한 노동시간과 상대적 궁핍은 일상을 정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럴 만한 훈련을 할 제도 역시 보장도 되어있지 못하다. 더욱 더 중요한 장애요인은 스스로의 노동에서 조차 소외되고, 자본가로부터 통제되는 상태, 즉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자율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추첨을 통한 정치인이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참신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달콤한 독을 마시는 것이다
 
현재 필요한 노동자계급 정치는 노동으로 부터의 소외를 지양하고, 노동을 스스로 규율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그러한 행위를 조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원리를 기초로 하는 현재의 정당구조와 정치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 참신한 인물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오히려 독이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정치를 하려기보다는 누구를 뽑는 것으로 집중하고, 그 수준에서 정치행위를 만족하거나 정지하기 때문이다. 선거 무용론 아니라, 오히려 그 선거를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적극적인 하나의 전술로 본다면, 노동자계급은 인물의 명망과 개인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과 지향에 집중하고 그것에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000이 그럴지 몰랐어”, “000이 변절했어”라는 푸념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명망의 정치가 아닌 계급 정치의 단초를 만들어 낼 것이다.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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