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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6호>우경화, 계급정치가 풀어야 할 과제

노동자계급 정치는 통진당의 출범으로 지난 98년 이후의 흐름이 한 매듭 지워졌다. 현 국면은 대단히 후퇴된 형태의 매듭이기는 하나, 이 계기는 적어도 활동가들에게 있어 노동자계급 정치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방향을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당장 배타적 지지 철회 운동은 통진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정치적 방침 문제를 넘어 무엇이 노동자계급 정치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기존의 정치지형 구분대로 하자면 같이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활동가들이 1500명 넘게 선언을 함께하고, 10만 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반발을 넘어서 대중조직과 당, 노동자 정치의 정체성, 당의 지향을 고민하는 수준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민주노동당 창립 당시를 제외하고 그 이후에 대중조직 내에서 노동자 계급 정치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높았던 적이 있는가? 이러한 흐름과 물음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어떠한 결정이 되건 간에 이후 더욱 더 증폭되게 될 것이고,(서명 운동은 대의원대회 이후에도 계속될 계획이다) 이것의 귀결이 어떻게 될 지는 지금으로써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선언, 서명운동의 여진은 계속될 것이다. 만일 10만에 근접한 서명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이쯤에서 노동자계급 정치를 고민하는 자라면 다음의 물음에 진중하게 임하고 답해야 한다. 왜 하필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귀결이 자본주의 자유주의 분파와 손잡는 우경화로 기울었는가? 노동자계급정치란 무엇인가? 노동자계급 정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경화를 우려하는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펴보자. 우경화란 무엇인가? 계급성의 탈각이다. 그렇다면 우경화의 원인 중 하나는 존재할 수도 없는 ‘국민정당’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정당은 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결사다. 노동자계급은 자신 스스로의 이해를 관철시킴과 동시에 모든 피억압 민중의 이해를 함께 해야 한다. 피억압 민중의 이해를 외면하고서는 자신의 이해조차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국민을 대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이라는 개념은 권력자가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마치 동등한 위치에 있는 양 인식하게하고, 모두의 이해가 조화롭게 조성될 수 있다는 허위를 유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 정당이 자신을 ‘국민정당’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대표하는 자본가계급과 그에 기생하는 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숨기고자 하는 사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럼에도 노동자계급정당이 이를 자신의 지향으로 놓는 순간, 정작 자신이 구현해야 할 이해를 실종시키게 된다. 정치결사의 이유를 망각한 마당에 우경화는 타락이 아니라 오히려 유력한 제도 안착 방안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류의 시각과 맞닿아 있다. 이것이 서로 상승작용하면서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을 백안시하고, 허위의 ‘국민’으로 자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귀결되어, 이것을 실현할 우경화 길을 선택하게 된다.

 

둘째로, 현실 투쟁에서의 패배나 단결투쟁의 쇠퇴는 더욱 더 쉽게 우경화를 방조한다. 쓰라린 패배의 경험이나 강고한 투쟁에 대한 아쉬움은 적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다 손쉬운 방법을 갈구하게 된다. 개별 입장에서는 당면의 요구가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문제가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본질은 쉽게 보이지 않아 보다 현실적이고, 빠른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러할 때 해결의 실마리는 당사자에게 당장의 단비와도 같다. 국회의원을 통한 해결, 시장이나 교육감을 통한 해결은 때때로 문제가 정말 풀리는 것만 같은 착시를 맛보게 한다. 한편 기존의 큰 규모의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적어도 자유주의 분파는 과거 군부 파쇼나 극우와 같이 노동조합을 자체를 붕괴시키려 하지 않고 ‘노사정위원회’ 등의 체제 내로 인입하려는 것을 보아온 터라 사실상 적당한 수준에서의 거래를 기대한다. 이러한 반복적 양태는 투쟁을 조직하기 보다는 조정과 중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해서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 회자된다. 노동대중은 자연스럽게 힘겨운 투쟁 보다는 손쉬운 방법에 익숙해진다. 때문에 역으로 현실 정치권이 풀 수 없는 문제, 자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등은 대단히 실현 불가능한 투쟁으로 간주되고, 투쟁을 위한 조직 또는 완강한 투쟁은 노동운동 내부에서부터 꺾어 버린다. 현재 계급 정치의 우경화에 있어 노동운동은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이점은 배타적 지지 철회를 요구하는 세력 역시 자성해야 할 대목이다.

 

셋째로, 기간의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유보하거나 사장시켰다. 이것은 ‘국민정당’의 강박과 현실의 제도권 진입의 욕망과 연결되는데 결국 자본주의 이념에 종속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피착취자의 욕망이 착취자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착취를 완화하거나 착취자의 파트너가  되고자 하는데, 그 정치결사체가 우경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의아스러운 것이다.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그 길을 착실히 걸어왔다.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민주노총 중심 당을 만들자고 주장하건, 노동자중심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건, 이러한 오류를 반복한다면 결과는 통진당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넷째로, 의회전술을 전략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선거에 대응하는 것과 선거자체가 자신의 정치가 되어버리는 것은 천지차이다. 선거자체가 제일의 정치가 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노동자는 선거 시기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행위의 전부로 인식한다. 선거 시기 외에 정치활동은 상정되지도 않고 정치활동은 특정시기의 활동이지, 자신의 현장 활동과 그닥 관계가 없다. 정치와 노동의 분리, 정치와 삶의 분리는 그간의 진보정당이 조장한 것이다.   

 

우경화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반자본 사회주의 지향을 명확히 하고, 그야말로 계급의 이해를 가지는 정치결사체-당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동시에 현실 투쟁에서 조정과 중재의 역할이 아니라 투쟁을 조직하고 촉발하는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양상은 당장 제도권의 접근을 불리하게 만들겠으나, 장차 노동대중의 힘으로 착취를 종식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이며, 제도선거에 있어서도 전술적 유의미성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해보자. 2012년을 휘감고 있는, 반 MB를 기반을 둔, ‘닥치고 투표’의 세몰이에 왜 노동자계급정치는 무력한가? 바로 지난 기간 투쟁을 방기하여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인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져야할 반자본 사회주의 이념을 현실에서 숨기거나, 방기하여 결국 현실에 적용하려 조차 하지 않아 노동대중은 그 정체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국민정당이라는 목표로 자신의 기반인 노동자계급조차 기만했기 때문이다. 투표이외에 정치라는 것을 노동대중에게 요구한바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러한 우를 반복할 것인가? 우경화를 비판하는 동지들! 풀어내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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