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픔, 같은 상처, 같은 희망평화가 무엇이냐 2005/12/12 22:21평화, 부끄럽고 슬픈 축제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은 가장 추운 날이었다.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를 여유도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추운 날 늦은 시각에 광화문을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가 불어오는 칼바람에 묻혀버릴 것만 같아서 그냥 마음 편하게 노래만 부를 수가 없었다.
피켓을 들고 사람들이 오가는 곳으로 갔다.
조그만 사진과 함께 '돌아오라 자이툰, 미안해요 이라크' 라고 쓰여있는 피켓.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긴 내 얼굴을 보지만 내가 들고 있는 피켓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별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나는 피켓으로 얼굴을 가린다.
응원을 보내고 가는 사람도 있고, 서명은 받지 않느냐, 성금 모금은 하지 않느냐고 묻는 시민도 있다.
물론 어떤 아저씨는 '정신나간, 백해무익한 짓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며, 시비를 건다.
문득 이렇게 추운 날 길거리에 서서 나는 왜 피켓을 들고 자이툰 부대 돌아오라고, 이라크에게 미안하다고 외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이라크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임에도 매일 같이 촛불과 피켓과 기타를 들 수 있는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내가 바로 전쟁으로 죽어간 모든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선일이다.
나는 이라크다.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지율스님의 단식이 다시 몇 십일째라는 소식에 나는 천성산이고, 나는 도롱뇽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천성산이다.
나는 도롱뇽이다.
부끄럽고, 슬픈 축제를 벌이고 있는 광화문으로 평화의 촛불을 들고 사람들이 모이길 바란다.
생명의 촛불을 들고 사람들이 모여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생명이 평화고, 평화가 생명이다.
내가 새만금이고, 내가 농발게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도요새의 눈물도 나의 눈물도 그리고 바다도 모두 같은 짠맛을 내기 때문이다.
갯벌이 죽어가는 아픔이, 천성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아픔이 미군기지가 땅을 빼앗고 쫓아내려는 팽성 농민들의 아픔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전쟁과 파괴와 폭력으로 입은 상처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내가 대추리이고 내가 황새울이라고 느꼈다.
나는 전용철이다.
나는 강경대이다.
나는 박종철이고, 이한열이다.
내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자이툰 부대 돌아오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그것을 넘어서는 나의 소망을, 생명과 평화가 어우러져 함께 흘러가는 도도한 물결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함께 촛불을 들자고 용기를 내어 제안을 하고 싶다.
추위에 떨고 있는 수 많은 '나'를 위하여 뜻과 힘을 모으자고 말이다.
매일 저녁 7시가 넘으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조그만 촛불들이 켜진다.
이곳에서 함께 추위를 느끼며, 가슴 속에 조그만 희망의 모닥불을 지펴나가자.
나는 이라크다.
나는 천성산이다.
나는 새만금이다.
나는 황새울이다.
나는 김선일이고, 나는 도롱뇽이고, 나는 도요새고, 나는 솔부엉이다.
나는 전쟁으로 죽어간 모든 사람이고, 나는 개발로 사라져간 모든 생명이다.
나는 이윤이 빼앗은 목숨이고, 나는 피흘리는 모든 자매들이다.
나는 이미 수 만번 죽어갔지만, 지금 다시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체온이 많이 내려간 오늘 새삼 느꼈다.
저 차가운 바람에 나는 외로운 촛불처럼 힘없이 스러져가겠지만, 동시에 나는 미군이 빼앗지 못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
포크레인이 파괴하지 못한 질긴 뿌리를 땅속에 박고 있다.
방조제가 막지 못하는 물줄기가 되어 넘쳐 흐르고자 한다.
총알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방탄복이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생명들의 힘이다.
이것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흐르고 흘러 이 고통스런 축제를 열지 않아도 되는 그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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