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겅퀴, 조제 보베, 자립의 삶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12/13 02:16
조제 보베를 만났다.
프랑스의 농민이며, 유명한 반세계화 운동가인 그와 이틀을 꼬박 함께 보내며 목이 쉬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른 프랑스 활동가들과, 그리고 브라질에서 오키나와에서 온 활동가들과 함께 팽성에 왔다.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팽성 농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그는 프랑스에서 이곳까지 멀리도 날아왔다.
 
프랑스의 라르작(Larzac)에서 농지를 강제로 빼앗아 군기지로 만들려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라르작 농민들이 10년간 싸우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그는 우리와 나누었다.
척박한 땅 라르작에서는 인간이 먹을 작물을 기를 수가 없단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양을 기르고 양이 먹을 사료작물을 재배한다고 했다.
라르작의 농민들은 1971년부터 1981년까지 10년간 프랑스 군대에 맞서 똘똘 뭉쳤다.
생명을 키워내는 토지를 죽음을 퍼뜨리는 군기지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라르작의 상징은 엉겅퀴란다.
 
나는 그가 가져온 라르작의 깃발 중앙에 걸려있던 꽃무늬 모양을 보았다.
그 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그는 자신도 그 꽃의 영어 이름은 모르겠다면서 프랑스 어로는 '샤르동'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 꽃은 가시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손으로 움켜 쥘 수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척박한 라르작의 토양에서 자라는 그 꽃을 사람들이 손으로 쥘 수가 없듯이, 라르작의 토지를 프랑스 군대는 쥐락펴락 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나온 꽃이름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말들을 받아 적고 통역을 하느라 이내 그 꽃에 대해 잊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그 꽃이 궁금해졌고, 프랑스 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의 미묘한 발음 '샤르동'을 기억해냈다.
어렴풋이 chardon 이라고 쓰지 않을까 추측해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의 첫번째 추측은 정확했다.
라르작과 샤르동으로 검색해보니 내가 예상했던 결과들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검색결과들이 모두 프랑스 어로 되어 있어서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어 - 영어 사전을 찾아서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엉겅퀴!
그래 엉겅퀴라면 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토대를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싸워 승리를 일궈낸 라르작 농민들의 근성을 나타내기에 충분할 것 같다.
 
나는 엉겅퀴에서 자립의 정신을 읽는다.
나를 지금 이 길로 이끌어온 것은 바로 이 '자립'이다.
내가 국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법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군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경찰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정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대기업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자립에 기반해 살아가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구 전역에서 자립의 삶은 파괴되고 있다.
자립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먹거리의 자립이다.
이것을 나는 한 때는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실현시켜야 할 가치로서 DIY(Do IT Yourself)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를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라고 부른다.
요즘엔 이것을 식량주권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모두가 같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자립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법 없이도 살아갈만한 사람들, 정부가 있든 없든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씨뿌리고 김을 매며 살아온 사람들, 군대와 경찰이 없어도, 대기업, 초국적기업이 없던 시절에도 평화롭게 살아왔던 우리의 삶이 완전히 뿌리채 뽑히고 있는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이런 현상이 라다크에서도 벌어져왔음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피자매연대 활동을 통해 나는 이런 현상이 이미 한국에서도 1970년대 이후 벌어져왔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피자매연대 활동을 하면서 내가 놀라웠던 것은 대부분의 30대 또는 20대 그리고 그 이하 나이의 여성들이 일회용 생리대말고는 다른 종류의 생리대가 있다는 사실을, 다른 종류의 생리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월경컵과 해면과 피자매 달거리대를 들고 보여주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았다.
물론 이제는 대안월경용품이 어느 정도 확산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는다.
면생리대에 대해서는 많이들 들어본 것이다.
한국에 일회용 생리대가 들어와 생리대라는 물건에 대해 자본의 시장을 개척한 것이 1970년대다.
그 전에는 다들 아시겠지만 천생리대를 사용했다.
지금 우리 피자매들은 여기서 배운 지혜를 토대로 다른 많은 여성들의 아이디어와 제안을 받아들여 날개통합형 달거리대를 만들고, 날개분리형을 만들고, 끈달이형을 만들어내고, 샘방지선이 달린 달거리대를 만들어 실험을 하고, 간단교체형을 만들어냈다.
호지가 라다크에서 오래된 미래를 보았다면 피자매들은 천생리대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 오래된 미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자립의 삶이다.
국가와 자본에 종속되어 갈갈이 찢겨진 경쟁과 죽음의 나날이 아니라, 상호부조를 통해 유지되는 풀뿌리 민중의 독립적인 삶이다.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농약을 마실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을 견뎌내며, 목숨을 걸고 WTO의 지배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한국의, 그리고 전 세계 농민의 외침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먹을 것, 내가 생산해서 내가 먹겠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것, 내가 만들어서 내가 쓰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국적 곡물대기업들이 유전자 조작을 해대고, 비행기로 농약을 마구 살포해 기계로 찍듯 찍어낸, 키워낸 것이 아닌, 오로지 이윤만을 거둬낼 목적으로 제조해낸, 도살을 목적으로 엄청난 호르몬과 약을 주사하고 만들어낸, 과일과 고기와 유제품과 농작물을 우리는 거부할 수밖에 없다.
내가 키운 소를 내가 잡아먹고 싶다는 것이고, 내가 재배한 쌀을 내가 먹고 싶다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모든 유럽인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농작물이 생산되고 있다고 조제 보베는 역설했다.
그런데 왜 유럽이 농산물 시장 개방을 해야 하느냐고.
초국적 곡물대기업의 입장이 아니라면 유럽의 곡물 시장을 개방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각국 정부는 법과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들 대자본과 하나가 된다.
이들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서 서브시스턴스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두들겨패고, 억누른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위해 만들어낸 상품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곳까지 이들은 침투해들어간다.
자본가들은 생산을 계속 확대해서 이윤을 늘려야 살아남을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십년이 지나면 이제 사람들은 그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심하게 중독되어, 그 상품이 없는 삶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바로 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들 일회용 생리대가 없이 수만년간 살아오지 않았나.
그런데 바로 그 삼십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레 우리의 인식체계는 이렇게 완전히 변해버린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레 일회용 제품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게 된 삶이 우리 앞에 주어지게 된 것일까?
 
자본의 지배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완전하게 관철되어버린 것이다.
삼십년간 천천히 그러나 매일같이 텔레비전을 통해, 학교를 통해, 군대를 통해, 회사를 통해, 신문을 통해, 모든 영역에서 기업들은 민중들이 갖고 있던 뿌리를 잘라왔다.
뿌리가 잘린 우리는 그리 멀지 않았던 옛날 자립과 상호부조로 살아왔던 기억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저주받을 변화를 우리는 근대화라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찬양하기에 바빴다.
산업사회가 되어 공장의 굴뚝이 늘어나고, 농민들은 정든 토지를 떠나 대도시 변두리로 모여들어 노동자가 되고, 빈민이 되는 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며 박수를 쳤다.
자동차가 늘어나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된 한계상황을 애써 무시하며 자본가들은, 그리고 이들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이 국가는 선진국 진입과 국민소득 얼마 달성을 부르짖었다.

이들이 만든 체제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키워내기 위해 가진자들은 군대를 이용했고, 학교를 이용했고, 매체를 이용했다.
먼저 복종해 다수가 된 자들은 남아있던 소수자들을 이 시장지배의 영역으로 강제로 끌어들였다.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소수자들을 이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고문하고, 폭행하고, 내쫓거나 배제시켰다. 
 
그러나 그 춥고 배고픈 변방에서, 과거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자립적 삶을 기억하던 소수의 사람들은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오래된 미래의 편린을 전수했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들이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들이다.
농민들이 그들이다.
어민들이 그들이다.
자립의 삶을 이어온 풀뿌리 주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폭력적인 근대화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소중한 삶의 가치를 지켜온 사람들이다.
엉겅퀴처럼, 민들레처럼 살아온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서 미래의 삶을 뽑아내온 이 사람들이야말로 끝끝내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이다.
 
프랑스 라르작에서 그들은 엉겅퀴처럼 싸워 마침내 손바닥에 가시가 박힌 프랑스 군대는 그곳을 떠났다.
라르작의 주민들이 시작한 싸움에 프랑스 전국에서 사람들이 연대를 했고, 결국 유럽 전역에서 지지자들이 라르작으로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택에서도 농민과 주민들은 그렇게 싸워야 한다고 조제 보베는 말했다.
이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택은 단지 미군기지 확장을 막는 싸움만이 아닌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싸움, 평화로운 자립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싸움이다.
땅에 살던 사람들이 토지를 잃는 것은 뿌리가 뽑혀 결국 자본의 노예가 되어 도시 주변을 떠도는 빈민이 된다는 것을 팽성 주민들은 알고 있다.
수천년간 삶의 터전이 되어온 갯벌을 메우지 말라며 절규하는 새만금 지역의 어민들 역시 이런 점을 알고 있다.
 
자립의 삶의 토대가 파괴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남는 것은 복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비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갖은 차별과 탄압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더욱더 숨통을 조여올 것이고, 빠져나갈 틈은 더욱 비좁아질 것이다.
 
엉겅퀴가 되어 자립의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
내가 먹을 것, 내가 필요한 것 내가 생산해내겠다는 운동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벌여내야 한다.
피자매연대는 '우리의 월경, 우리가 관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여성 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국가와 자본의 관리(실은 종속의 강요)를 거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평택 농민들은 '이 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켜낸다'고 결의를 불태우며 군사적 세계화를 획책하고 있는 미국군대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 농민들이 WTO의 해체를 요구하며 일어서고 있다.
 
이윤의 세계화라는 폭력적 기치를 내건 초국적 자본에 반대하는 엉겅퀴의 함성이 지구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 함성을 막기 위해 국가는 오늘도 총과 몽둥이를 주며 군대와 경찰을 훈련시키고, 법전을 주며 법관을 양성시킨다.
 
모두가 엉겅퀴가 되면 국가는 저절로 그 기능을 중지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엉겅퀴가 되어 자립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윤을 내지 못해 확대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대기업은 소멸할 것이다.
모두가 가난하지만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인간들은 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래 전에 그래왔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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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3 02:16 2005/12/13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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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티나무 2007/10/26 13:07 Modify/Delete Reply

    조약골님~ 글 올린 날짜가 이상해요.^^ 글이 너무 좋아서 다운 받아 친구에게 메일로 보냈습니다.

  2. 적린 2007/10/29 13:29 Modify/Delete Reply

    나도 날짜보고 깜딱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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