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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아이들


도톰한 테 안경을 낀 아이, 얇은 테 안경을 낀 아이, 짐짓 먼 곳을 쳐다보는 아이, 땅을 쳐다보는 아이, 여드름 자국이 성긴 아이, 얼굴이 말개서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아이, 저 놈은 고생밥 좀 먹었겠구나 싶은 아이, 호리호리한 아이, 작고 통통한 아이, 좀 시간이 지나자 심심해졌나 발을 톡톡거리는 아이, 누구 한 번 때려보지 못 했을 것 같은 고것 참 순둥이 같이 생겨먹은 아이, 굳은 건지 원래 표정이 그런 건지 오리무중인 아이, 서로 조곤거리는 아마도 고참 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같이 촛불을 들려주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머지않아 촛불을 들 일이 생길 것 같은, 우리의 한 때이었고 우리의 일부이기도 한


저 아이들을 제복을 입혀, 방패를 들려, 촛불이 새 나갈 새라 캄캄한 절벽이 되어라 떠미는 자들의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가?


2009.5.25 대한통운 앞 작은 촛불문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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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을 울은 덕에

  

                                                                          2년을 울은 덕에

 

사람을 잘 따라 발밑의 그늘 같기만 했다  발발이였는데 이름을 다롱이라고 했다  눈이 초롱하고 영특해서 붙여주었다 한다  세상을 나와 두어 달 만에 상경한 어린 것을 어머니가 두어 평 남짓한 마당에 묶어 놓았는데 혼자서 매일 밤을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이 제 옆을 지날 때면 목줄이 끊어져라 뛰어올랐다  수컷을 들여다 놓아도 새끼는 통 들이지 못하던 것이 2년을 울고서는 처가댁으로 옮겨가서 포도밭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울음이 뚝 그친 것이다  그리도 장하고 대견했을까 포도밭이 제 몫인 것을 확인하느라 뒹굴고 등을 비벼댔다  무슨 조환지 해마다 새끼를 들이고선 제 새끼가 시들시들 앓다 죽자 마당에 떨어진 살구꽃처럼 납작 엎드리기도 했다  8년을 목줄 없이 나이를 먹어 갔다  이빨이 숭숭 빠지고 꼭 사람마냥 눈꼽을 달기 시작하더니 처가 할머니 생전처럼 마당 한 쪽을 없는 듯 차지하고 있더니 늦가을 일주일을 통 보이지 않았단다  하루는 장인어른이 포도밭에 나가 그 녀석을 보셨는데 땅을 파고 낙엽을 깔고 그 속에 제 몸을 쏙 뉘여 잠이 들었다고 한다  개는 죽을 때면 저의 뉠 자리를 만든다고 하셨다  2년을 울은 덕에 다롱이는 죽어서도 포도밭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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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제도 그러나 직관.느낌.상상 그리고 박종태

 

법과 제도 그러나 직관.느낌.상상 그리고 박종태



하나.  법과 제도 그러나 직관.느낌.상상


내가 하는 일 중 하나가 노동법을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 일이 너무 싫을 때가 있다.  사람의 인성이 성장을 하는 데는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직관·느낌·상상 이런 것이 큰 몫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논리는 그 다음의 문제다.  논리는 직관이나 느낌이나 상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혹은 잘못 된 직관을 나중에 수정하는데 그 역할이 있는 것이지 결코 직관·느낌·상상 이런 것을 대신하거나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법과 제도는 사람의 직관·느낌·상상이 작동하기도 전에 이미 답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오로지 그 법과 제도가 수용할 논리를 내놓을 것을 강제한다.  내가 싫은 것이 바로 이 것이다.  사람의 직관과 느낌과 상상을 주눅 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법과 제도에 의해서 지금 수많은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계약직 노동자들은 적법하게 계약 해지되고,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적법하게 노동조합 조합원임을 부정당하거나 또 계약 해지되고, 파견노동자들은 사용사업주로부터 적법하게 직접 고용되지 못하고 그 밖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용역, 도급, 위탁이라 해서 또 적법하게 법의 적용조차 받지 못한다.  모두가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직관과 느낌과 상상이 작동하기도 전에.


인간스럽지 못 한 이 법과 제도 속에서 우리가 내놓을 논리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피눈물을 쏟거나 죽거나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 빼고는.  그런데 이놈의 법과 제도는 그 저항을 또 법과 제도의 이름을 앞세워 불법으로 내몰고 감옥으로 내몬다.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 완고한 법과 제도가 사람이 노동 속에서 일군 뜨거운 직관과 느낌과 상상을 이기지 못 했다.  나라님의 법으로 효수되었던 전봉준은 하다못해 박정희도 기념비를 세우는 장군이 되었다.  테러범이고 범법자이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었다.  총을 탈취하였던 광주의 “폭도”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유공자가 되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사형되고 투옥되었던 수많은 민중과 학생들이 역시 민주화운동의 유공자가 되었다.  모두가 당시의 법과 제도를 가지고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들이다.


둘.  그리고 박종태


그러니 우리는 한 시대를 앞서 헌신하였던 선배들 덕에 적어도 이 정도의 직관과 느낌과 상상은 가지게 되었다.  지금 시대를 헌신하였던 많은 열사들이 나중에는 "열사"이자 동시에 "유공자"의 칭호를 갖게 되리라는.


박종태 열사여!

당신이야말로 이 인간스럽지 않은 탐욕의 시절을 끝내는 데에 목숨을 헌납한 "유공자"입니다.  그것이 법과 제도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로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직관과 느낌과 상상입니다.  누구도 막지 못 해서 눈앞에 다가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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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은 이놈들을 어찌 함부로 밟고 갈 수 있으랴

 

아직은 좀 이르지만 봄이 한창을 지날 때면 온 밤을 개구리들의 울음이 몸을 섞는다.  산란기다.  그러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이 논에서 저 논으로 아스팔트길을 가로질러 팔짝 팔짝 건너간다.  끊어지지 않는 행렬이 팔짝거린다.  시골 지방도로에서는 해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내 사는 곳이 시골이어서 매일 아침 출근길에도 또 퇴근길에도 그 길을 지나갔다.  가장 난감할 때가 비오는 날 많은 개구리들이 제 짝을 찾아서 아스팔트 도로를 총 총 총 넘어갈 때다.  저네들도 하나 뿐인 생명인데 함부로 뭉개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조심한다고 살피면서 차를 몰지만 아마도 꽤 많은 애꿎은 목숨들이 아스팔트 길 위에 부려졌을 것이다.


출퇴근길이 나에게는 직장과 집을 오가는 말하자면 “소통”의 과정이다.  나에게는 일상의 "소통"인데 개구리들에겐 생명을 다치게 하는 "단절"인 것을 그 때 알았다.  우리에겐 소통인 것이 더 약한 이들이 틀림없을 다른 누군가에겐 단절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개구리들이 저의 생명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얼마 전에 여성 노동자가 상담을 왔다.  제법 큰 회사 내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인데 회사 가동률이 떨어지자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우선 내보내고 거기에 정규직들을 전환배치한다는 것이었다.  그 얼마 전엔 정규직인 공무원 한 명의 자리를 보전해 줄 요량으로 운전 일을 하는 계약직 노동자를 계약기간도 안 되어 해고한 경우도 있었다.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 중에는 아직도 "인원을 감축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계약직, 일용직, 협력업체 소속 직원을 먼저 정리한다."는 규정이 제법 살아 있다.  설령 이런 규정이 없더라도 인원을 감축할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정리하고 노조는 그 것을 못 본 채 하는 것이 거의 정해진 수순이다.  어려운 말로 정규직 노동조합과 회사 사이의 "묵시적 합의"요, 좀 더 고상한 표현을 빌자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혹은 남모를 협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규직 노동조합과 회사가 벌이는 소통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단절이요, 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소통", 좋은 말이다.  요즘 부쩍 많이들 쓰는 말이다.  그러나 불편하더라도 들여다 볼 것이 있다.  나와 우리에겐 소통인 것이 더 여린 생명이고 더 약자임이 틀림없을 수많은 풀과, 꽃과 나무와 개구리와 도롱뇽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와 장애인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소통은 모든 생명과 약자를 보듬어 안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편하고도 근본에 대한 질문을 개구리들이 나에게 해 주었다.  나보다 나은 이놈들을 어찌 함부로 진달래 밟듯 즈려밟고 갈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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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탱크를 치워주세요, 당신의 손주를 생각한다면

제발 탱크를 치워주세요, 당신의 손주를 생각한다면



내 집은 충남 천안입니다.  직장은 청주에 있긴 하지만요.  천안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들 느끼는 일이겠지만 참 갈 곳이 적습니다.  산으로 치자면 광덕산, 성거산, 태학산, 태조산 정도이고요, 물가로 치자면 광덕산 계곡, 북면 개울가 정도이지요.  이렇게 몸을 쉴 만한 곳이 드문 땅에 그래도 가족들이 오순도순 쉴만한 곳, 직장 동료들이 흠뻑 땀에 젖어 뛰어 놀만한 곳이 있지요.  태조산 공원이예요.

 

 

비록 산자락을 깎아 만들어 아쉽기는 하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잊을만하지요.  지금은 천안 사람들이 공을 차면서 땀 한 번 흘리고 싶을 때, 그늘에 앉아 편하게 쉬고 싶을 때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지요.  아마도 천안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곳이 여기 아닐까 싶어요.

거기 넓디넓은 잔디밭이 있어요.  잔디가 막 새순을 틔울 때 빼고는 들어가 놀 수 있지요.  베드민턴 치는 아이, 공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 무작정 뛰는 아이, 그 잔디밭은 아이들이 넘어져도 상처 하나 없이 다 받아주는, 말하자면 아이들의 천국이예요.  작년 6월인가 아들 현이를 데리고 모처럼 태조산을 갔지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져졌어요.  정말 쫙 펼쳐졌지요.  탱크와 대포와 전투기들이 도열해 있는 거예요.

 

  

 

 

1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탱크와 대포들은 하나 같이 포신을 태조산 놀이공원 중심부를 향하고 있어요.  내 아들 현이를 향해 있고 현이 또래 아이들을 행해 있어요.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하나하나마다 친절하게도 안내판을 세워놓았지요.

 

 

 

 

무슨 심사로 천안 시청의 나으리들께서 거기다 저런 것들을 갖다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람 할 짓이 아니지요.  가족들이 오순도순 도시락을 까먹고, 아이들이 까르륵대며 뛰어노는 공원과 살상무기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릴 수 없는 사이 아닌가요?

 

 

 


아이들의 가슴에 전쟁과 살상과 무기를 찬양하는 피폐함만 가득 들여앉히려는 의도 없이는 저런 황당한 일을 감히 꿈꿀 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할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제발 저 탱크들을 치워주세요.  천안 시청 나으리들, 전쟁나면 당신들이 사랑하는 손주들의 생명도 저 탱크 앞에서 다칠 수 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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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글쎄,

내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남긴 긴 곡선의 끝자락 같이 가물가물한 시절.  오래된 화상 자국 마냥 아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때때로 아릿한 고등학교 문예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어린 시절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짓눌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어린 아들 현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과 아이의 미래가 겹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찾아간 서클(당시는 동아리를 서클이라 했다)이 문예반이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너의 소원이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면 시인, 소설가, 작가 이런 그럴듯한 말은 알지 못하여 그저 “문학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의 학교 특활(특별활동)은 문예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끝 촌구석에서 말단 공무원 녹을 잡수시는 와중에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식들을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에 실려 서울로 올려 보내신 아버지의 그 “청운의 꿈”을 와르르 무너뜨린 곳이 바로 문예반이었다.


나의 입학년도가 82년이고 기수가 41기니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클이다.  이름도 매우 오만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00문예반이라 부르겠다.  또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필력이 높기로 알아주는 서클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세습되어 온 말도 안 되는 전통이니, 또 어린 것들의 치기 이런 것이 얼마나 우세스러웠을까.  우리 기수는 처음 8명~10명 정도가 서클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4명만 남았지만.  서클 입회 절차가 다 끝나고 첫 소집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근처 뒷골목 짱깨집(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을 모시고 신고식을 치렀다.  짜장이 들어오고 소주가 들어오고 선배들은 고약스럽게 갖은 폼을 잡고 담배들을 꼬나물었다.  그리고 1학년부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니라 악다구니를 내야 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선배들은 틈만 나면 짱깨를 갔다.  1,2학년끼리 혹은 3학년을 모시고 가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1,2학년끼리 갈 경우에는 절대 2학년 선배들이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  단골 짱깨에는 1학년들이 맡긴 시계나 돈 될 만한 품목들이 쌓여갔다.  나는 맡길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문예반은 매일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선배들보다 일찍 서클실에 와 청소를 하고 정자세를 한 채 앉아서 선배들을 기다려야 한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저녁 8시까지 정자세를 한 채로 선배들의 훈계를 듣고 써온 글을 평 받아야 한다.  1학년이 앉은 곳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창문 너머에는 “창밖의 여자”를 대신하여 벽돌 건물의 붉은 벽이 노려보고 있다.  그 붉은 벽이 어둠을 콱 깨물어 칠흑이 번질 시간이면 그 어린 가슴 속에도 서글픔이랄까 비애랄까 이런 감정이 울컥 번지는 것이다.


문예반에서는 1학년들은 매일 글을 한 편씩 써가야 한다.  우리는 시와 수필 중 하나를 자신의 장르로 선택해야 했고 나는 시를 선택했다.  매일 시와 수필을 써오라는 지시가 참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 때가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무인천하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거부할 권리와 배짱이 우리에겐 없었다.  조건도 까다롭다.  맞춤법, 띄어쓰기 틀리지 말 것, ‘그리움’, ‘슬픔’ 같은 추상명사는 절대 쓰지 말 것 따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빳다(좋은 용어는 아닌데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맞아야 한다.  그 환경에서 매일 주옥같은 시가 나온다면 나는 천재시인 랭보의 반열에 서야 하겠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천재성을 주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 전까지 시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 한다.


문예반이 선생들 사이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전교1등을 했던 아이도 몇 달 안에 꼴찌의 반열로 내려앉힐 수 있는 기적을 행하고 학교 대걸레를 남아나지 못하게 하는 빳다 덕택이었다.  문예반에 입회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얼마를 못 버티고 탈퇴를 햐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탈퇴 빳다는 50대라고 엄포를 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어머니가 바카스 1박스를 사들고 와서 탈퇴를 시켜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탈퇴를 하려는 놈과 그걸 붙잡아 본보기로 응징을 하려는 놈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퇴하려는 후배들은 선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등교시간을 넘겨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 결석까지도 감행한다.  한 보름 동안의 눈물겨운 숨바꼭질에 성공한 일부는 그 대가로 성적 최상위 클라스에 저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붙잡혀온 일부 친구는 가엾게도 50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스무 대는 치도곤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후드득 떨어지니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너 문예반 하는 것 안다.  그거 탈퇴하면 안 되겠냐, 문예반이 빳다가 세고 공부도 하기 힘든 곳인데 잘 생각해봐라 이런 보약 같은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라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들끓는 청소년기에 나는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었고 문예반 외에는 달리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전부나 다름없는 문예반으로부터 나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억압받았다.  몇 번 고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문예반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문예반 빳다는 유명하다.  빳다를 맞을 때보다 그 전의 분위기가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배들은 한 번씩 수업 끝나고 저녁 때 대걸레 자루를 모아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교실을 돌면서 대걸레에서 걸레를 떼어내고 자루만 모아온다.  그렇게 모아온 것이 한 번에 20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창밖의 붉은 벽이 어둠을 어금니 물듯 쿡 물어버릴 때,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가 선배 하나가 마침내 입을 뗀다.  “끌어”  우리는 긴 탁자를 뒤집어 또 하나의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서클실 한 쪽으로 끌어 붙인다.  탁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그르륵 끌리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학교들은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하였다.  수업을 빼먹어서 좋은 날이다.  그런데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많은 중요한 상을 우리 문예반이 휩쓸어왔다.  내 동기들도 다들 몇 차례씩 장원도 타고 그랬는데 유독 나만 상을 타지 못했다.  난들 왜 상을 타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한계를 금방 깨닫고 2학년 중반부터 백일장에 가도 더 이상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다 3학년 봄철에 대학 백일장에 참가할 때다.  1학년 후배 하나가 제출 시각 15분 전까지도 시를 전혀 쓰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대로 적어라 하고 한 10분간 불러주었는데 그게 덜컥 차하(3등상)에 입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상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탔지만...


문예반 활동의 절정은 1학기 때 00지라는 문예지를 한 차례 내는 것도 있지만 뭐니 해도 2학기 때 00문학회라고 이름을 달았던 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국화가 활짝 피는 가을철에 문학회가 열리는데 각자 준비한 시와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이다.  이 짧은 한 때를 위해서 한 달 동안을 초죽음의 수준으로 연습을 한다.  작품집에 실릴 시와 수필을 쓰고 낭독 연습을 보통 밤 10시~11시까지 한다.  한 밤 내내 발성연습을 시킨다고 소리를 꽥 꽥 지르게 한다.  모두들 더 예민해져 빳다도 심해진다.  문학회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어린 가슴이 설레지 않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떤 때는 여학생으로부터 종이학을 선물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여학생이 내 시낭송을 듣고서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로 이어진 적이 없다.


이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예외 없이 졸업한 선배들을 합쳐 수십 명의 인원이 짱깨를 향한다.  1학년 때는 몰랐으나 2, 3학년 때는 왜 이리 슬픔과 허무함이 복받쳐 오르는가.  나는 술에 만취가 되어 엉엉 울고, 토하고, 또 울었다.  모두들 그랬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일어나서 문예반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정자세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래가사를 마치 유언을 써내려가듯 비장하고 또 비장하게 읊조리는 것인데 그 가사가 이렇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이도 변하시기 잘하시는 여자의 마음 보아라 믿지 못할 여자의 마음 /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와서 믿었지 살자고 믿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남자의 마음 // 우리 집에 부모님 나를 낳고 길러서 문예반 가서 요 모양 요 꼴 되라고 나를 낳고 길렀나 보아라 믿지 못할 자식의 마음 / 기를래서 길렀나 낳으니까 길렀지 기르고 싶어 길렀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부모의 마음”


1학년 때 그토록 싫어했고 닮고 싶지 않았던 선배들을 나 또한 닮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매 맞는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듯이 서글프지만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짱깨에서 후배들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술잔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슬프게도 나도 빳다를 휘두를 때가 있었다.


졸업을 하고 한 동안 후배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다시는 나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어리지만 성적에 목매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을 기특한 후배들이 문예반으로 인하여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후배들을 찾았지만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내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고 89년인가 전교조가 설립되고 학교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가 퍼지고 얼마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노래가 또 온 세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 땐가 우연히 동기들로부터 문예반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학년 재학생들이 전원 탈퇴하였단다.  그 후로 문예반은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은 일탈을 하고 싶어 들끓었던 내 청소년의 한 시절이 의지하였던 피난처요, 또 어린 열정을 쏟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절에 목말랐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고 억압하였던 곳이다.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배웠으나 가슴과 몸으로 쓰는 시를 배우지 못하고 단지 시 쓰는 기술만을 익혔을 뿐이다.  나와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시와 수필의 형식을 빌려 상을 타기 좋게끔 꾸미도록 통제받았다.  그 덕에 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하였던 문예반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군사정권이 퇴락하듯 전교조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점점 쇠락하여 해체되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억압받고 갇혔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에돌아가야 했다.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문예반은 기억에서 흐려져 갔다.  그 문예반과 당대의 서클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시학원이 성적 성적 오로지 성적을 위해 들어찼다.  나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현이 더 크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때는 자위하듯이 아빠의 학창시절이 그래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은 있었다고, 뜨거운 눈물 한 번 받아줄 곳이 그나마 있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아들 현에게 그런 돼먹지 않은 얘기는 해주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문예반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나 그 때의 억압이 자유와 감성과 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나 힘겨웠으므로.  나중에는 그 억압을 은연중에 즐기는 나를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내 아들 현에게만큼은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의 시절에 걸맞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마음껏 누리라고.  그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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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주도하는 경찰노조, 파업을 협박하는 판사노조...

 

파업을 주도하는 경찰노조, 파업을 협박하는 판사노조, 파업에 앞장서는 대학총장


내일 LG생활건강노동조합 간부 수련회에 강의가 있어서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주제는 “우리 사회와 나를 들여다보는 노동인권이야기”로 잡았다.  목차를 죽 잡아가는데 그 중에 한 꼭지가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해온 것들이 정말 상식이라 부를만한 것인지 한 번 뒤집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의사와 버스기사의 월급이 5배가 차이 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월급이 비슷하면 안 되는 것인지 뭐 이런 내용이다.


그러다가 경찰이 노동조합을 만들면 안 되는지, 판사가 노동조합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취합하느라고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웬걸... 프랑스에서는 경찰노조가 파업을 주도하고, 판사노조는 정부에 대고 파업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대학 총장은 아예 파업대열의 제일 앞에서 행진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래 글은 한겨레21의 2001년 12월05일자(제387호) 기사 내용이다.

「지난 11월22일 파리의 레퓌블릭광장에서 오페라광장까지, 프랑스 전국에서 몰려든 경찰들이 까맣게 거리를 메웠다. “이제 샐러드는 지긋지긋하다. 닭(프랑스어로 경찰을 칭하는 은어)들에게 곡식을 달라”, “못으로도 목숨 잃는 경찰”, “시간당 5.25프랑 버는 세일경찰” 등의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들고 그날 모인 경찰들은 3만 여명을 헤아렸는데, 바로 전날의 2만 여명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지난 한 달 간 파리에서만 6번째며, 지방 곳곳에서 경찰들이 거리로 나선 참이었다. 한 달 동안 총 경찰의 1/3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수치이다. ...... 프랑스 경찰들의 시위가 이렇듯 우렁차게 연이어 메아리치는 주요 요인들을 짚어보면 첫째, 경찰들의 노조가입률이 총 70%로, 타공무원에 비해 월등히 높은 노조활동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 둘째, 사회안전과 관련해 경찰의 업무가 나날이 위험성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세 번째 요인으로 업무조건의 개선을 위해 내년 정부예산안과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고려한 전략을 들 수 있다. ......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들의 90% 이상이 경찰들의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까지 호응하는 경찰들의 분노를 그냥 방치할 수 없게 된 내무부는 11월26일부터 총 13개로 대표되는 경찰노조들과 새로운 합의에 들어갔으며, 11월29일 밤 합의를 보는 데 성공했다.」


또 아래 글은 2007년 11월 13일자 연합뉴스 기사 내용이다.


「佛 정부-노조 대립 부문별 현안, 프랑스 노동단체가 13일 저녁부터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기로 해 일대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정부와 노동단체는 그러나 '개혁강행', '파업강행'을 외치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기세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 현재 노동단체가 반발하고 있는 정부의 개혁안을 부문별로 정리해 본다. ◆공기업 특별연금 제도 ......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런 공기업의 특별연금 시스템은 민간 부문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고 재정적자를 심화시키고 있어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정부의 특별연금개혁 시도를 1995년과 2003년에 파업을 통해 무산시킨 바 있다. ◆공무원 감축=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무원 사회의 일대 쇄신을 위해 공무원 감축을 골자로 하는 공직사회 개혁방안을 발표해 공무원 노조의 반발을 사고 있다. ...... ◆법원 감축= 정부는 예산 절감을 위해 법원 정비계획을 마련, 지방법원의 통폐합과 폐쇄를 추진하고 있다. 판사와 사법공무원, 변호인 등은 이런 정부의 법원 축소방침에 반발해 29일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기타현안= 경찰들도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20일 파업을 예고하고 있고, 지난달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5일간 한시파업을 벌인 에어프랑스 노조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다시 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나라는 허구한 날 파업을 하느냐는 생각을 하며 또 검색을 하는데 프랑스 대학교는 2009년 4월 현재 두 달 이상을 파업을 하고 있단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대학개혁법안이라고 해서 법을 개정하려고 한다는데 대학교수, 연구원들 특히 인문학과 사회학 계열의 학자들이 대학 고유의 학문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적극 파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파업 시위 대열 맨 앞에서  ‘소르본’으로 알려져 있는 파리 4대학 총장과 8대학(이 나라는 대학교 이름이 없고 일련번호를 매기고 있다) 총장이 시위 맨 앞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이 파업에 국민들의 지지가 커서 정부에서도 양보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자, 여기까지 내용을 되짚어보자.  파업을 하고 있거나 하겠다는 이들은 경찰, 판사, 공무원, 대학교수(심지어 총장까지)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모두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다.  파업을 하겠다는 목적도 법안 반대,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 반대 이런 내용이다.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이쯤에서 무엇이 생각나시는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경찰과 신성한 사법부의 권위를 받들어야 할 판사와 학문의 전당을 수호해야할 교수들이 불법노조를 만들어서 가당찮게도 국민의 생명과 사법부의 권위와 학문의 전당을 담보로 불법파업을 일으켜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렸으니 국민 앞에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다.  죄목만 해도 불법노조 조직과 관련한 죄, 불법파업과 관련한 죄, 공무원들의 집단행동 금지와 관련한 죄, 공무집행방해죄,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들 중 주동자는 국가변란죄도 적용되어야 할 듯싶다.  저 나라의 감옥과 거리는 범죄자들과 해직자들로 차고 넘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감옥과 거리가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는 아직껏 통 무소식이다.  OECD 국가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같은 OECD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전면파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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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다.  술이 덜 깰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 누구에게나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면서 나에겐 있었나.  열무가 제 꽃을 피워 나비에게 쉴 곳을 내어주듯...  그래서 나는 문태준 시인의 시 ‘극빈’을 찾는다.  술이 덜 깰 때 한 번 씩...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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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바위의 추억

 

                                                    할매바위의 추억



내 취미가 암벽등반이라고 하면 믿어주지 않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 그렇다.  대둔산, 속리산, 설악산의 바위 능선을 따라 오르며 바라보는 풍광은 걷는 산행 도중에 바라보는 풍광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 맛이란 가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근데 바위가 있다고 해서 아무데나 겁 없이 오르는 것은 생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서울 북한산에서 아줌마부대들이 장비도 없이 남들 따라 쉬운 암릉길을 오르다 불귀의 객이 되신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간현암 등반 모습

 

바위를 하려면 반드시 개척을 해야 한다.  바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중간 중간에 큰 추락을 하지 않게 자일을 걸 수 있도록 볼트를 박는다.  바위에다 볼트를 박는 일은 바위를 하는 사람들도 그것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위를 오르는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되 자연 훼손을 최소한도로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곳만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종의 조화이고, 타협인 셈이다.


바위를 개척하는 일은 사명감 내지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개척된 바윗길을 오르는 사람은 절대 그 바윗길을 함부로 손을 보지 않는 것을 예의로 여긴다.  녹슨 볼트를 교체하는 것도 개척한 팀들의 몫이거나 정 다른 이들이 교체를 하고 싶으면 반드시 개척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체를 한다.  볼트 간의 길이가 길다고 그 사이에다 맘대로 볼트를 더 박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바위를 개척한 순간 그 바위는 개인이 함부로 손 볼 수 있는 사유재가 아니고 모두가 함께 그 자체대로 보존하는 공유재가 된다.  다만, 그 관리 책임의 선순위가 개척한 팀의 몫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산에 있는 긴 코스를 빼고 짧은 루트 중에 가장 대중적인 암장은 단연 원주에 있는 간현암과 고창 선운산 근처에 있는 할매바위라는 곳이다.  길에서 가깝고 다양한 루트가 있고, 제법 큰 천도 흐르고 있어 풍광도 좋다.  거의 사계절 내내 간현암과 할매바위는 바위를 즐기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나도 몇 번씩 가 보았다.  간현암과 할매바위는 바위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요 바위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중의 할매바위를 이제는 갈 수 없다.  아주 황당무계한 사건 하나 때문에 할매바위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니까 2006년인가 2007년 초인가 전국의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산악회와 암벽동호회 사이트 게시판에 사상 초유의 광고가 하나 올라왔다.  김00라는 이름으로 자기도 암벽등반가다, 자기가 5년간 할매바위의 개발전권을 땅 소유주로부터 사들였다, 앞으로 거기를 개발을 해서 클라이밍체험장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암벽 1인당 5,000원, 야영장은 텐트 1동당 10,000원의 사용료를 받겠다고 하였다.  그 김00는 자신을 칭하기를 “할매바위 매니저 김00”라고 꼭 써 놓았다.


광고가 올라간 사이트마다 난리가 났다.  그 당시 게시판의 뜨거움은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사업 혹은 의료민영화에 대한 반응과 맞먹을 정도다.  돈 내고 바위를 타본 적이 없는, 그리고 바윗길의 개척과 보존을 위해선 시간과 노력과 개인 돈을 쏟아 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등반가들은 이 해괴한 광고에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할매바위 매니저 김00”가 또 사이트에다 글을 올리기를 볼트를 박아놓은 사람들은 언제까지 그 볼트를 자진 수거해주시기 바라고 만약 수거를 하지 않을 경우 본인이 개발권자로서 임의로 철거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좀 과장하자면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내재된 개척자에 대한 예의랄까 아니면 등반가의 영혼에다 볼트가 아니라 대못을 박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등반가가 아니라 ‘장사꾼인 작자’임이 틀림없었다.


각 산악회 사이트는 차마 입으로는 담을 수 없는 욕설이 줄을 이었다.  비즈니스 한 번 해보려다 완전히 인간 말종으로 생매장될 판이다.  견디다 못해 “할매바위 매니저 김00”씨가 산악인들과 토론을 하겠다면서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로 나오라고 게시를 했는데 이런 생뚱맞은 제안이  어디 먹힐 법한 제안인가?  또 게시판이 난리가 났다.  “이걸 그대로 방치하면 전국 바윗길에 유료화 바람이 불 것이다”, “할매바위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절대 개인의 돈벌이로 이용되서는 안된다”라는 제법 사회과학적 혜안을 담은 글도 있고, “야 이 ×××야 차라리 할매바위 앞에 깡통을 갖다 놔라 적선해줄께”라는 노골적인 꾸지람도 올려놓았다.


2007년 상반기를 이 문제로 온통 들끓더니 결국은 그 김00씨가 볼트를 직접 뽑아버리고 “공사중, 등반불가”라는 프랭카드를 크게 붙여놓았다.  그리고 2년이 되도록 할매바위는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김00씨가 아직까지 할매바위를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 여론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한 번 비즈니스를 시도해볼 요량일 수도 있다.  그 때는 좀 더 세련된 논리를 들이밀지도 모른다.  할매바위 운영의 선진화를 위해선 민간부문이 운영을 하여야 한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때 게시판은 “쥐새끼같은 놈”이라고 도배질이 될지 모른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애초부터 공공의 소유인 것이 자연스러웠다.  암벽등반가에게 바위가 공공의 소유인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하물며 교육이니, 의료니, 물이니, 전기니, 교통이니, 방송이니 하는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것들이 오로지 민간의 돈벌이로 전락될 경우 가져올 참담함을 말해서 더 무엇하랴?


그런데도 민영화를 찬성하는 논리는 왜 이리 사람들을 쉽게 현혹시키고, 그것을 부추기는 세력들의 힘은 또 왜 이리 큰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한다 한들 부자들의 돈벌이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공공을 위해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위 하나를 보고도 알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가끔 조·중·동의 세치 혓바닥에 머리가 갸우뚱해지는 이들은 면벽을 하듯 바위를 지긋이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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