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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8/07
    기록으로 보는 출근투쟁 69일(7)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8/08/07
    [500자 단상] 투쟁 106일째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8/08/07
    출근투쟁 8월말까지 유보...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8/08/07
    영화감상 - 이것이 민주주의(2)
    손을 내밀어 우리

기록으로 보는 출근투쟁 69일

*출근투쟁 참석현황(4/25-8/6)

 

            -5/19-6/20: KAIST 정문 앞 1인 시위 포함.

-6월 13일 퇴근투쟁 30여명은 포함하지 않음.

차수

날짜

참석인원

차수

날짜

참석인원

1일차

4.25(금)

8

36일차

6.20(금)

32

2일차

4.28(월)

8

37일차

6.23(월)

37

3일차

4.29(화)

17

38일차

6.24(화)

32

4일차

4.30(수)

13

39일차

6.25(수)

41

5일차

5. 2(금)

11

40일차

6.26(목)

40

6일차

5. 6(화)

8

41일차

6.27(금)

23

7일차

5. 7(수)

12

42일차

6.30(월)

34

8일차

5. 8(목)

11

43일차

7. 1(화)

40

9일차

5. 9(금)

10

44일차

7. 2(수)

38

10일차

5.13(화)

10

45일차

7. 3(목)

27

11일차

5.14(수)

15

46일차

7. 4(금)

29

12일차

5.15(목)

16

47일차

7. 7(월)

30

13일차

5.16(금)

18

48일차

7. 8(화)

34

14일차

5.19(월)

17

49일차

7. 9(수)

37

15일차

5.20(화)

30

50일차

7.10(목)

32

16일차

5.22(목)

29

51일차

7.11(금)

22

17일차

5.23(금)

21

52일차

7.14(월)

23

18일차

5.26(월)

36

53일차

7.15(화)

34

19일차

5.27(화)

350

54일차

7.16(수)

27

20일차

5.28(수)

167

55일차

7.17(목)

27

21일차

5.29(목)

28

56일차

7.18(금)

18

22일차

5.30(금)

41

57일차

7.21(월)

21

23일차

6. 2(월)

64

58일차

7.22(화)

31

24일차

6. 3(화)

152

59일차

7.23(수)

26

25일차

6. 4(수)

72

60일차

7.24(목)

21

26일차

6. 5(목)

72

61일차

7.25(금)

23

27일차

6. 9(월)

132

62일차

7.28(월)

19

28일차

6.10(화)

163

63일차

7.29(화)

26

29일차

6.11(수)

132

64일차

7.30(수)

23

30일차

6.12(목)

121

65일차

7.31(목)

24

31일차

6.13(금)

29

66일차

8. 1(금)

28

32일차

6.16(월)

34

67일차

8. 4(월)

12

33일차

6.17(화)

32

68일차

8. 5(화)

28

34일차

6.18(수)

26

69일차

8. 6(수)

24

35일차

6.19(목)

42

연인원

2,907명

 

4월 25일부터 시작하여, 정부중앙청사 앞 상경집회가 있던 5월 21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빠짐없이 진행되었던 출근투쟁을 오늘(8/7)부터 8월말까지는 유보하기로 하였습니다. 연구단지에서 유래가 없이 길고 끈질기게 진행된 이번 출근투쟁에 관한 기록을 중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1. 69일 동안 연인원 2,907명, 하루 평균 42.1명이 출근투쟁에 참가했습니다. 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던 5월 27-28일과 연구소 비대위가 부서별로 요일을 정하여 집중했던 6월 9-12일을 제외하더라도 하루 평균 29.3명이 꾸준히 참가하였습니다.

2. 처음엔 노동조합 간부들과 연대 조직을 중심으로 10명 안팎으로 진행되던 것이 5월 19일부터는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연구소 차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5월 23일 교과부의 통합방침이 확인되고 5월 27일 연구소가 통합 거부입장을 명확히 하고 나서는 일반 직원들까지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힘을 보탰습니다.

3. 연구소 비대위가 적극적으로 조직했던 6월 9일부터 12일까지는 연일 120-160명의 직원들이 출근투쟁에 나와서 통합 반대의 의지를 연구단지 전역으로 떨쳤습니다. 논란 끝에 1주일 만에 끝나서 아쉽긴 했습니다.

4. 6월 13일부터 8월 6일까지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투쟁을 전개한 기간입니다. 날씨는 점차 더워지고 휴가기간으로 접어든 이후에도 20명 이하로 떨어진 날은 단 3일(7/18, 7/28, 8/4)에 불과할 정도로 조합원들과 일부 직원들이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5. 휴가기간이고 불볕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출근투쟁 참가인원이 급격히 감소하지 않은 상태, 즉 투쟁을 이어갈 힘을 보존하면서 휴식을 맞게 된 것은 앞으로도 필요한 경우에 투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투쟁의 전망을 밝게 하는 것이고, 열성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더없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6. 평가모임은 따로 갖고 종합 보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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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자 단상] 투쟁 106일째

“출근투쟁 잠시 휴식이라는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이 소식이 기쁨이 될 그 날까지 홧팅!” 8월말까지 출근투쟁을 유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 문제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쟁을 쉬어간다는 것은 결코 흔쾌한 문제가 아닙니다. 회의에서 어렵사리 결정은 했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만들 때까지 저마다 일하는 자리에서 홧팅해야겠죠! 아자아자~.~” 하고 답을 보내면서도 마음이 활짝 개이지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오늘 출근길에 KAIST 앞을 지나면서 왠지 썰렁하고 야릇한 생각이 들더라는 조합원의 말에서 느끼는 마음도 그랬습니다.
암튼, 날마다 출근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아침에 1시간쯤의 여유가 생겼다고 하면, 바쁜 시간 쪼개서 애써 나온 동지들을 서운하게 만드는 말일까요?^^;; 출근투쟁을 하던 그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틈틈이 우리 연구원의 장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좋은 결론이 있으면 즉시 노동조합으로 알려주시구요! (2008. 8. 7)
......출근투쟁이 잠정 유보되면서 투쟁속보에 출근투쟁 풍경란이  비게 생겼다.
궁리 끝에 [500자 단상]이라는 것을 연재하기로 했다. 뭘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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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투쟁 8월말까지 유보...

노동조합은 어제(8/5) 생공투 정례회의를 갖고 KAIST 앞 출근투쟁을 8월말까지 잠정 유보하는 등 8월 투쟁계획을 심의, 결정하였습니다.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공투 결정사항

1. 노동조합은 KAIST 서남표 총장에게 공문을 보내어, 통합을 배제하는 두 기관의 발전적인 협력방안을 논의할 것을 주문하고, 이러한 입장을 우리 노동조합과의 면담이나 공문을 통해서 8월 27일까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2. 서남표 총장이 8월 27일까지 아무런 회신이 없거나 통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9월 1일부터 출근투쟁을 재개한다.

3. 교과부는 강제통합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서 밝히고 있는데, 생명연-KAIST 통합에 대한 방침이 있는지 공문과 면담 요구를 통해서 확인하도록 한다. 교과부의 전향적인 입장이 확인될 때까지는 교과부 앞 1인 시위는 지속한다.

4. 그 밖에 연구원측이 요청하고 있는 연구원 내외부에 설치된 유인물 등 통합반대 운동의 잠정 중단의 건은 노동조합이 이미 요청한 보충교섭을 통해서 연구원측과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에 판단하도록 한다.

5. 생공투 속보는 계속 발행한다. 다만, 그동안 조합원들이 식당 출입구에서 대대적으로 배포하는 방식을 8월에는 한시적으로 변경하여, 노동조합 전임자들을 중심으로 식당 안에서 조용하게 진행하도록 한다.

이번 결정의 배경과 의미

노동조합의 이러한 결정은 외형적으로는 8월 5일자로 접수된 연구원측의 협조요청 공문에 대한 토론의 결과로 나온 것이지만, 기실은 통합논란이 소강국면을 지속하는 가운데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나게 될 9월 이후를 대비하여 투쟁의 전열을 가다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투쟁을 완전히 끝내는 것은 섣부르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판단입니다. 노동조합은 8월 하순까지 그동안의 투쟁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한편, 새 원장 취임과 출연(연)에 대한 구조조정 등 앞으로 변화하는 내외부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력을 유지하고 보강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제 날짜 생공투 속보 66호에서 일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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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 이것이 민주주의

민망하게, 팔자에 없이 영화평을 기고했네요. 미디어충청 꺼 그대로 옮겨요...

2008년 한국의 촛불에 바치는 헌사

[영화] 다큐멘터리 “이것이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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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7 02시08분 이성우

99년 시애틀과 08년 서울


1999년 11월 30일 아침, 시애틀에서 열리기로 한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서 5만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시위대는 시애틀의 회의장(Convention & Trade Center)을 둘러싸고 각국의 장관들의 입장을 막았다.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각국 대표자들을 둘러싸고 시위대가 외친다. “누구의 거리인가?” “바로 우리의 거리이다!” “Our street!”를 연호하며 시위대는 손과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 춤을 추고 노래한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현장에서 벌어지고 사람들은 마치 축제에 참여한 듯이 활력이 넘친다. 2008년 5월부터 시작한 한국의 촛불집회를 미리 보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미국 주정부도 발끈한다. 시애틀 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병력을 요청했다. WTO에 관한 어떤 깃발과 복장과 시위가 금지되는 25블럭에 걸친 “시위금지구역”을 설정했다. 시내에는 통행금지령이 떨어졌고,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서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무차별 발사했다. 연좌하고 있는 시위대를 한명씩 떼어내어 양 손목을 케이블 타이(전선 따위를 묶어서 고정하는 장치로 절단하기 전에는 풀리지 않음)로 묶어 짐승처럼 사지를 들고 연행했다.


시위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방식에 흥분한 시위대는 12월 1일에 다시 엄청난 기세로 시애틀 시내로 쏟아져 나왔고,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맨홀에서도 차안에서도 나왔고 50명이 100명으로, 150명이 300명으로 금세 불어났다. 경찰은 변함없이 강경하게 대응했다. 버스를 세워서 시위대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끌어내렸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추적해서 3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했다. 12월 1일 밤에 시애틀 경찰은 업무방해, 경찰 폭행 등의 죄목으로 630명을 체포했다. 한 철강노동자가 얘기한다. “어제 5만여명이 거리에 있었지만 겨우 몇 명만이 유리를 깼을 뿐이다. 그런데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대를 잡아가서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 역시 한국의 경찰을 판박이라도 한 듯하다.
12월 2일에 시위대는 체포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행동에 나선다. 감옥 안에서 체포된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연대의식이 형성되는 사이에, 감옥 밖에서는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항의농성을 벌여서 변호사 접견을 성사시키고, 이윽고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시킨다. 12월 3일에 제3차 WTO 각료회의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폐회되었고, 신자유주의의 심장부에서 통행금지와 시위금지구역과 최루가스와 총탄을 뚫고 역사적인 시애틀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촛불은 반신자유주의 투쟁

그 2년 후에 도하에서 열렸던 제4차 각료회의,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각료회의(한국의 농민 이경영 열사가 할복했던 회의),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린 제6차 각료회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민중운동진영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표류했다. 이렇듯 WTO 체제에서 다자간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기는커녕 도리어 미국이 고립되는 현상까지 빚어지자, 미국은 다자간 협상보다는 양자협상을 통해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것은 곧 2006년 벽두부터 한미FTA 체결을 요구하며 한국을 압박하였고, 결국 2008년 4월 굴욕적인 한미 쇠고기협상으로 이어졌으니, 지금의 촛불집회는 1999년 미국의 시애틀 투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애틀 투쟁은 5대양 6대주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과 연대하면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전 지구적 민중운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72분짜리 다큐멘타리 영화 <이것이 민주주의>(원제: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는 시애틀 투쟁 당시 100여명의 미디어활동가들이 수집해 온 생생한 화면들로 구성되어, 시애틀 투쟁에서 맛본 감동과 가능성과 한계를 잘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등장하는 많은 장면, 이를테면 시위대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적인 퍼포먼스, 자유로운 연설,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인터뷰 등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촛불집회를 연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감동을 받는다. 함께 영화를 봤던 동지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들이다. 경찰의 폭력 침탈과 시위대의 비폭력 대응과 (말로만 투쟁하는 노동조합 상층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연대투쟁은 2008년의 한국에서도 흡사하게 나타난다.
시애틀 투쟁으로부터 9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의 촛불집회는 시애틀 투쟁을 압도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촛불민주주의라고 하고 일각에서는 네트워크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어떻게 규정하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민중은 다양성, 자발성, 창조성에 있어서 기존의 운동세력을 능가하고 있고,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체제가 양산하는 반민중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법과 제도에 전면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촛불집회가 없었더라면 <이것이 민주주의!>가 주는 첫 감동은 훨씬 컸을 것이다. 1999년에 시애틀에 모였던 5만의 시위대가 서울시청 광장에 지금 다시 모인다면 수십만의 함성에 파묻혀서 흔적 없이 녹아버리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이것이 민주주의!>


한 가지 부러운 것은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에는 나오지 않지만, 강경진압을 지시했던 시애틀 경찰서장은 해임되었고, 시애틀 시장은 다음해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리고 경찰의 강경진압을 놓고 법정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위금지구역 바깥에서 체포된 157명에게 불법 체포를 이유로 정부가 25만불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2007년에 와서는 시위 금지 구역 ‘안(內)’의 공원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연좌 농성을 벌이다가 체포된 175명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나 확실한 증거 없는 불법 체포였다는 이유로, 100만불을 배상하고 체포 기록도 삭제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의 판단은 경찰의 진압 자체가 미국 수정 헌법 4조의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촛불집회를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한국이라면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자못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이고 볼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욕심을 부리자면, 이 땅의 동지들이 아마도 곧 만들게 될 “2008년 촛불민주주의”에 관한 영화가 <이것이 민주주의!>를 뛰어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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