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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희성] 나도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 등록일
    2010/02/26 14:48
  • 수정일
    2010/02/26 14:48

자유인님의 [단식3일차 ] 에 관련된 글.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이진명시인의 시를 읽으며

                                                    정 희 성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년)

*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고백처럼 이렇게 말하게 될 때의 심정은 어떨까요. 시대에 대해 또는 세상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고 불온하게 대들곤 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정신도 몸도 많이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 시속에서 말하는 이는 자신이 모래알처럼 외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의 편견과 질책과 비난 그런 것들과 맞서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망가지기도 했을 테고, 타협하거나 비겁하게 뒷걸음질 치다가 망가지기도 했을 겁니다. 모든 새 것이 서서히 망가져 온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힘 때문에 망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아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깁니다. 내 속에는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내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서 더 외로운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살아오면서 많이 망가진 것도 사실이겠지만 이 정도라면 좀 망가졌다 해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 정희성은 1945년에 태어나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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