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시/고은] 일인칭은 슬프다

  • 등록일
    2014/01/12 07:27
  • 수정일
    2014/01/12 07:30

일인칭은 슬프다

고은

슬프다 깨달음은 어느새 모습이 된다
지난 세기 초
혁명 뒤 소비에트 시인들은
'우리들'이라고만 말하기로 했다
'우리들'이라고만
시인 자신을 부르기로 했다
황홀했다
그 결정은
폿설 때문에
거리에 나가지 못한 채
방 안에 서성거릴 때도 유효했다
저 혼자
'우리들.......'이라고 맹세했다
거울 저쪽에서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 화창한 날
뛰쳐나온 마야꼽스끼도
'우리들'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는 거리의 시인이었다
어디에도 '나'는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죄악이었다
'우리들'
'우리들......'
오직그것만이 주문(呪文)의 권력이 되었다

차츰 하늘의 저기업이 눌러댔다
어른꽃들 누누이 짓밟혔다
혁명은
혁명을 먹었다
모든 아이들의 공에서 바람이 빠져갔다
'우리들'도
팽팽한 대기 속에서
바람이 빠졌다

누가 대담하게[
'나는 사랑한다'라고 섰으나
아직
'우리들은 사랑한다'라고 읽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겨울 눈이 다 녹지 않았다
몸은 늘 불안하다

지난 세기 말
소비에트가 죽었다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갔다

그 이래
시인들에게 온통 '나'뿐이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하루가 저물었다
'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신도 '나'의 다른 이름이었다

오늘 환태평양
'우리'와 '나'의 유령들을 무한한 파도에 묻는다
누가 태어날 것인가
'우리'도 아닌
'나'도 아닌 누가 태어날 것인가
파도는 파도의 무덤이고 파도의 자궁이다

...고은 시집 "마치 잔치날 처럼"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