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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토토 복권 광고를 보면서 드는 잡생각

  • 등록일
    2004/09/05 23:20
  • 수정일
    2004/09/05 23:20

야구 토토 복권 광고를 보면 왕년 야구 스타와 하일성 KBS 야구 해설위원이 나온다.

야구 토토 복권 광고에 내가 그토록 열렬히 환호하며 응원하던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 공격의 핵 김봉연이 나온다. 참 많이도 늙었구나는 생각이 든다.(나도 삼십대 중반이니까 그들도 늙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였기에... 실업야구단에서 짠벼가 굵었던 그들의 나이가 불혹의 나이가 된 것도 이상할리가 없지 않겠냐... 그러나 시간을 고정해 놓고 그들을 봐온 나인지라 그들이 늙은음 나에게 또다른 것이였다.)

 

그들의 야구를 보면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보낸 나로서는 그들의 야구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해태 타이거즈는 초기 요즘 유행하는 책 삼미슈퍼스타즈 다음으로 뒷 등수를 차지하는 팀이였지만 전라도님의 자랑이요 희망이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군상상고 출신의 선수와 광주일고, 광주상고, 진흥고 등 전라도 야구 명문고를 나온 이들이 주축이 된 해태 타이거즈.... 유년시절 나의 우상이요. 희망이였던 것 같다.



야구 토토 복권 선전을 보면 하일성 해설위원,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투수, 김봉연 해태 타이거즈 타자, 박철순 OB 베어스 투수 등이 서있다. 참 많이 늙었고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박철순 투수는 OB 베어스가 82년 프로야구 출범후 초기 우승하는데 큰 공을 세운 투수로 그 기억의 장면이 아직도 떠오른게 만든다. 최동원 투수는 롯데 자이언츠 최강속구 투수로 투구 폼이 좀 이상하였지만 한 시대 투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않았다.

 

82년 프로야구 원년으로 돌아가보자. 초기 서울 연고의 MBC 청룡(현 LG 트윈스), 경기, 인천을 연고 지인 삼미슈퍼스타즈(청구로 바뀌었다-태평양 돌핀스로 바뀌었다-현 현대 유니콘스로 바뀜.), 충청 대전 연고의 OB 베어즈(현 두산 베어즈), 대구 경북 연고의 삼성 라이온즈, 경남 부산 연고의 롯데 자이언츠, 전라도 연고의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가 초기 프로야구 팀이였다. 지금은 빙글레 이글즈(한화 이글즈)와 전북에 연고를 둔 쌍방울 야구단을 인수하여 총 8개 팀이 프로야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총 6개 팀이 야구를 하였다.

 

고교야구가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던 그 당시 고교야구의 맹위에 힘입어 프로야구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이는 곧 고교야구 경기의 관중 수가 줄어드는 현상을 낳았고, 야구경기는 모두 프로야구로 스포트라이트가 빛췄다.

 

주말 어김없이 텔레비젼 앞에 시선은 고정시키고 야구를 보았다. 우리집은 텔레비젼이 없어 마을회관에 동네 녀석들과 모여서 어르신들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를 어김없이 보았다. 해태 타이거즈 경기가 있는 날은 이장님이 동네 방송을 통해 마을주민을 소집하여... 함께 보던 기억이 난다. 참 좋았던 경기이다. 내가 살았던 전라도는 씨족사회이기 때문에 그 동네 부락은 한 성씨가 전부이다. 이 동네에 촌수를 따지면 1촌부터 16촌까지 집단구락을 이루고 사는 동네라 마음또한 어찌나 똑깥은지... 음원의 함성은 우리동네를 들썩이게 하였다. 이 응원이 비단 우리 마을만이겠느냐 전 전라도 읍내는 해태 타이거즈 경기에 울고 웃었다 할 정도로 야구는 큰 호응을 얻었다. 야구경기의 승패에 따란 학교를 간후 아이들과의 대화의 내용이 밝기고 하도 어둡기도 하였다. 국민학교때 제일 인기있는 스포츠가 야구와 짬뽕이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 짬뽕을 해본지도 꽤 오래 되었다. 중학교때 까지는 했는데... 지금 아이들은 짬뽕이라는 놀이를 알까... 야구와 같지만... 짬뽕 공(야구공 크기의 고무공)을 주먹으로쳐서 날리는 경기는 참 재미났다. 야구 장비가 없었던 우리에게 이 짬뽕 경기는 야구를 익히는 주요한 도구였다. 야구공도 없어서 테니스공에 신문지 글러브 널판지 빼트를 이용하여 야구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끄때로 돌아가 보고 싶다.

 

이렇듯 야구는 전라도민의 한과 울분을 프로야구를 통하여  달래곤 하였다. 프로야구는 한을 풀기 위한 주요한 도구였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나는 잘 몰랐지만... 서울에 와서 형과 누나의 대화에서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알것은 대학에 들어와서 이니... 그 전라도민의 분노 특히 광주민과 그 피해 당사자들의 울분을 어떠 했으리... 정권이 만들어 놓은 스포츠지만 이를 통해 그들의 저력을 발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 또한 그렇지 않겠느냐... 한과 설움의 결정체였던 것이다.(이와 함께 서울에 올라오니까 프로스펙스니 나이키니 하는 신발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난 스팩스라는 신발을 주로 시장에서 누나가 사주어서 신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으로는 해태 타이거즈는 82년도 83년도에 5위를 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삼미슈퍼스타즈는 영원한 꼴등팀이었으니까... 그래서 해태 타이거즈 경기와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를 보면서 그들에 대한 무언의 응원을 하게 된다. 꼴지들의 반락을 꿈꿔보기도 하였다. 그리 승률이 좋지 않아서...

 

그러던 차에 86년(85년 삼성이 전반기 우승 후반기 우승을 하여 85년 이전 전반기 후반기 우승팀이 격돌하여 프로야구 우승팀을 겨누던 터였는데... 삼성이 전반기/후반기 우승으로 85년도 삼성이 통합우승을 하게 되었었다. 이에 KBO는 경기 룰을 개정하게 된다. 86년 플레이오프제가 도입되어 2,3위간 5차전을 거친 뒤 7차전의 한국시리즈를 하게 되었됨.) 꼴지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삼미슈퍼스타즈(청보로 바뀜... 내 알토랑 같은 돈이라 지껄이는 이순자가 만든 라면 회사임. 전두환 정권의 퇴임과 함게 없어짐. 80년대 중반에 라면을 즐겨먹었다면 청보라면 먹어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함 생각해 보시기를... )가 청보그룹에 매각 되어 청보야구단이 85년도에 바통을 이어받아 해태와 1위 2위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희열을 어찌 설명하랴... 늘 꼴지를 하던 팀의 반란이 아닌가....

청보에는 재일동포 출신 장명부 투수의 활약상은 눈부실 정도로 뛰어났다. 해태 또한 김준환, 차영화, 김성환, 김봉연 등 타력을 바탕으로한 군상상고 출신선수와 선동렬이라는 대어 투수가 해태를 지탱하였다. 아직도 그 경기가 생생하다. 청보 장명부의 놀라울 정도의 투구와 해태 선동렬.. 김정수의 들이 분발하여 내리 해태가 4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감격의 순간.... 프로야구의 전성시기였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고등학교때까지는 프로야구를 보았는데... 대학 들어오면서 스포츠와 벽을 쌓았으니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야구는 지금의 축구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전폭적 지지를 받는 스포츠였다. 야구에 웃고 울고 하였던 시대 격동의 80년대 이다. 운동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80년대 그 격동의 시기... 프로야구의 전성기와 함께 운동도 전성기,... 90년 들어서면서 프로야구는 점차 그 인지도가 떨어지고,... 지금 축구에 위치를 내어주고 있다. 프로농구에게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어쩌라 이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잠시 프로야구 복권을 보면서 그 당시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참 국민학교때 축구도 많이 했지만 야구와 짬봉을 더욱 많이 하였던 기억이 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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