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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수영]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등록일
    2004/09/10 20:15
  • 수정일
    2004/09/10 20:15

비가 그친 후 어느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 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억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은 흰 단추가 달려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꼐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

---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아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김수영 전집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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