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4/01/14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4/01/14
    민주노총의 2. 25 총파업 포스터가 후졌다.
    간장 오타맨...
  2. 2014/01/14
    [시/신경림]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간장 오타맨...

민주노총의 2. 25 총파업 포스터가 후졌다.

  • 등록일
    2014/01/14 07:40
  • 수정일
    2014/01/14 07:41

민주노총의 2. 25 총파업 포스터가 후졌다.
우리내 노동 깃발을 펄럭이어야 하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의 포스터 처럼 보인다. 고뇌와 고민의 흔적이지만 노동이 언제 국민과 동떨어졌나...

보통국민론을 펼쳤던 파시스트들의 깃발처럼 느껴진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금 민주주의 문제인가?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쟁취가 아닌 노동쟁취 그리고 정치사상의 자유와 정권의 타도기치를 내밀어도 시원치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기치로 촛불과 막연한 대중성에 대한 상승의 기치를 펼치는 것 자체가 당당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미숙함이다.

노동을 위한 깃발과 기치를 내걸 민주노총이 정권의 폭거와 탄압으로 얼룩진 작년 1222사태에 대한 태도가 여전히 온순하다. 아니 무지하다. 막연한 대중성에 기인하고 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투쟁과 끊임없는 자신의 단력과 숙련의 과정이다.
현장에 대한 조직화 그리고 현실 노동에 대한 진안한 고민과 반성 그리고 현장에 대한 조직화와 이 파업에 대한 조합원들에게 대한 조직화 교육과 투쟁에 대한 명확성이 이 투쟁의 성패이다.

투쟁이 갈 수록 오리무중이지만 그 선동적 무기로서의 투쟁의 이념이 포스터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막연한 대중성에 기인한 당위로서의 선전물이 우리내 현실아니 실력이라는 것이 개탄스럽다.

노동이 투쟁하고 노동이 나서는 노동운동이 대중과 함께 노동자 인민을 이끌고 함께하는 것이지... 우리가 오리무중 대중을 지도의 관점에서 함께하자 모이지 않는다.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자가 누구인지... 투쟁과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써 숨죽여 있는 현장의 조합원과 이 땅의 대중을 이끌수 있다.

이 땅의 대중은 쥐새끼가 아니다. 힘의 역관계를 보고 투쟁에 대한 판단과 결합을 한다. 그 투쟁에 우리의 태도와 태세 그리고 투쟁승리를 위한 진정성과 투쟁에 대한 명확성이 이 땅의 대중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내 지도부와 이를 이끌고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 지도 단위는 이를 간과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투쟁은 쉽게 대중적 폭팔을 하지 않는다.

기폭제는 우리의 투쟁과 투쟁에 대한 지속하고자 하는 진정성 어린 당파성임을 망각하고 있다.

노동자 세계통일의 당파성이 사장된 작금의 시기.... 투쟁하는 노동자가 세계 통일의 당파성을 이끌고 있지만 막연한 자생적 대중성에 기인한 우리의 천박함이 포스터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내 인싱의 현실이겠지 치부하겠지만 여전히 미숙하다.

어디서 부터 우리는 투쟁하여야 하는가? 민주노조라는 그 노동조합의 민주적 노동조합, 전투적 노동조합, 자주적 노동조합 깃발은 온데간데 없다. 그 때라도 논쟁하고 현장을 조직하고 투쟁을 만들던 시기는 그래도 노동조합 선거때라도 머리띠 굳게 묶고 단결투쟁이라는 선명한 투쟁의 당당함을 보였는데.... 표면적으로 선거때는 투쟁의 의지와 결여를 볼 수 있었지만 작금의 투쟁포스터에선 어떠한 것도 볼 수 없다.

민주노총의 힘은 조합원이고 그 투쟁의 근간으로 세상을 바꾸고 투쟁을 해왔다. 그 투쟁에 대한 지지는 우리 노동자 투쟁의 힘이 이 땅의 대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이땅의 노동을 노동운동을 이끌어 가야 함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선전선동도 투쟁의 무기이다.
그 투쟁이 조직을 조직화를 반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련의 민주노총 투쟁 포스터 후져지고 있는 것에 대한 회고이다.

선전선동이 투쟁의 반을 먹고 드러가는 현실에 우리는 계속해 대중에 구애하고 있고, 민주주의라는 추상 대의주의에 기대어 서는 모습이 불편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신경림]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 등록일
    2014/01/14 07:35
  • 수정일
    2014/01/14 14:35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신경림

새벽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길고 오랜 비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백날 백밤 온 세상을 뒤덮는
진눈깨비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 속에서 태어난다
비바람을 야윈 어깨로 막는
안간힘 속에서 태어나고
진눈깨비 맨가슴으로 받는
흐느낌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먼저 산길에 와서
굴 속에 잠든 다람쥐를 간지르고
풀잎을 덮고 누운
풀벌레들과 장난질치지만
새벽은 다시 산동네에도 와서
가진 것 날선 도끼밖에 없는
늙고 병든 나무꾼을 깨우고

들일에 지쳐 마룻바닥에 쓰러진
에미 없는 그의 딸을 어루만지짖만
새벽은 이제 장거리에 와서
장사 채비에 신바람이 난
주모의 치맛자라에서 춤을 추고
해장국집에 모여 떠들어대는
장꾼들과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굳은 다짐 속에서만 밝는다
비바람 진눈깨비 다시 못 오리라
힘껏 낀 어깨동무 속에서만 밝는다
다람쥐도 풀벌레도 산짐승도
늙고 병든 나무꾼도 장꾼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깨동무를 하고
크고 높이 외치는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중에서....

p.s 새벽 아우성이 소리소문 없이 이 땅 이 겨울 공장앞 길거리 농성장에서 외치고 있다. 지금 현장에서 투쟁의 장에서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을 준비하고 동지들과 함께하는 크고 높이 외치는 아우성 투쟁의 구호성에서 새벽을 신새벽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어둠의 시대에.... 노동의 횃불을 새벽의 아우성을 일으키며 불러 외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