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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 오타맨...

나에게 4.15 총선은....

  • 등록일
    2004/08/07 15:29
  • 수정일
    2004/08/07 15:29

 선거를 하고 싶어도 찍을 사람이 없어 찍지 못하는 심정.... 진보적이니 민주노동당 또는 사회당을 찍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지만, 난 나의 소신(정치노선과 사상)을 굽히고 표를 던져줄라고 해도 찍을 사람이 없다. 다만 비례대표로 마음  두고 찍을 당은 선택하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난 그 당에 표를 비례대표 표를 던질 것이다.



다른이들은 이번 기회가 50년 판갈이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의회 입성이라는 의미를 두지만, 나와는 무관하다. 정확히 말해 내가바라보는 현실이 이번 총선이 끝나면 개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현재 이주노동자 농성, 장애인이동권,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등의 억압과 차별이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의회활동의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들의 이미지가 언론, 신문지면을 통해 쉽게 노동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것  이외엔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삶은 고단함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난 비례대표로 사회당을 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회당의 정책 또한 나와는  다른 입장을 표방하고 있어 이 또한 보류하고자 한다.(아마도 난 내일 사회당에게  비례대표 표를 던질 것이다.) 그렇다고 비판적 지지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난 유령처럼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는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이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사상과 신념을 짖밟았는지 짧은 역사경험속에서 철저히 각인하였기 때문이다. 난 사회당의 당원은 아니지만 그들의 입장 내가 하나라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몇%의 다름을 같고 비판이라는 말을 집어넣어 표를 내키지 않게 던지지는 않을 것임을 말한다. 나는 몇% 공약의 일치성 정확히 말해 그들이 말하는 비제도적 투쟁정당이라 는 입장에 동조하여 지지를 한다. 오늘 남은 하루 신중히 좀더 그들의 정책적  공약을 면면히 검토하여 그들에게 나의 표를 던지고자 한다.
 
 민주노동당의 전술로서의 의회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현재 정체가 잘  말해주고 있다 말할 수 있다. 혹자들은 그렇다고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냐며 반박하겠지만 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현장정치와 민중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1950년 미국의 메카시즘의 광풍속에서 미국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자당이 현재 민주노동당 처럼 진보정당/계급정당의  입장을 필역하며 혜성처럼 나타가 전국적으로 10표 이상의 득표를 차지하며 미국 하원의 원으로 당선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당의 역사는 10년을 끝으로  민주당에 통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노동자당이 단명하였는지 면밀히 봐야 한다. 미국 노동당은 메카시즘이라는 냉전시대에 의해 붕괴된 것도 일정정도 요인이 작용하였겠으나 그 당의 구체적으로 단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의 자만과 내부세력들의 균열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붕괴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미국 탄광노동자들의 주40시간 쟁취 투쟁 패배이후 50년만의 노동자계급의 결집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단명하고 말았다. 이는 현 미국노동자계급운동의 큰 손실이고 전직적 노동자계급운동 역량의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노동자당의 역사에서 말해주듯 기존 정당이라는 구도 속에서의 정치를 펼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민주노동당에 속한  이들이 나보다 잘 알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후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민주노동당이 이후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고민을 총선에서 표를 던지면서  해보았으면 한다.
 
지난 대선과 4.15 총선의 아쉬움....
 
두개의 진보정당에서 왜 민주노동당만을 진보정당이라는 칭호속에서 대중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우리의 실력과 사회적 성숙도가 아직도 미성숙 되었다는 반증의 증거는 아닐지....
 
지난 대선 두개의 진보정당에서 두명의 대통령 후보가 나왔다. 민주노동당에선 권영길 대표가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고, 사회당에선 김영규 후보가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두 진보정당 후보의 명암은 달랐다. 권영길 대표는 지자체 전국득표률 에 의거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의 입장에서 대선토론회에 나오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알리면서 진보정당이 추진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알릴 수 있었지만,  사회당 후보는 똑같은 대선비용을 내고도 군소정당이라는 설움을 톡톡히 치뤄야 했다.


그들만의 정치리그에 민주노동당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성과이나, 사회당의 좌절 정확히 말해 군소정당이라는 꼬리표가 얼마나 무섭고, 정치신인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엔 얼마나 이 사회가 체제내화 되어있는지 우린 지난 대선을 통해  선명히 알 수 있었다. 혹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작년 대선 표가 진성당원과 진보정당의 열망에 의해 일구어낸 자산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의 노력과 열정 + 언론 토론이라는 미디어 정치가 결합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해 그들만의 리그(자본가 세상)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결합한 성과라고 본다. 민주노동당의 환호와 사회당의 씁쓸한 표... 이게 2002년 대선의 두개의 진보정당의 명함이다.
 
 그리고 총선.... 대선과 달라진것이 없는 두개의 진보정당의 모습.... 민주노동당은 국회입성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몇명의 국회의원이 입성하느냐 원내단체 구성이 되냐하는 환호가 연일 나오고 있지만, 사회당의 모습은 이와 대조적이다. 강화된 선관위 개정법에 의해 전국득표율 3% 이상 나오지 못한다면 정당이 없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위기를 치닫고 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활동하는 사회당 당원들이 있겠지만, 이 모습은 진보정당의 절반의 승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 좀처럼 지울 수 없다.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 두개의 진보정당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명 좌파운동을 지향한다는 이들에게 있어 정책과 운동적 지향성은 내 개인적 판단컨데 분명 사회당이다. 그러나 왜 사회당이 민주노동당 처럼 진보정당으로 대중성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이 요인은 크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들이 운동세력에 있어 하나의 정파를 자칭하는 운동세력이었다는 것이  이유일 수 있으며, 둘째는 그들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의회정치에 대해서 분명히  단오한 입장을 필역하고 있다는 것에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비제도적  투쟁정당노선-추상적이지만 의회주의를 반하는 투쟁노선-과 반조선노동당이라는  선명성에 서 그들의 계급적/사상적 입장이 대중과 친화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민주노동당 마산지역 후보로 나온 주대환씨가 이전 "진보정치의 노선"이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그의 입장은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이 사민주의세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세력,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한 그룹,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당이다. 일명 통일전선을 통해 일구어낸 하나의 거대한 세력들이 겹집해 만들 당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통일전선이라는 것은 일정시기가 끝나면 그 세력들간의 균열은 필연이기 때문에 균열의 조짐은 곧 당의 진로에 있어 중차대한 저해요소로 작용할 위험이 농후하다. 이러한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이 전술적 차원에서 구현한 정치행위였다면 전략적 측면에 있어 강령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 호기이다.  이와 다르게 사회당은 여러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명히 들어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 비해 그들의 활동이 크게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치세력화에서 민주노동당에 크게 뒷쳐지고 있으며, 이번 총선이 사회당 깃발이 마지막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음이 큰 아쉬움이다.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큰 차이성이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할 중요한  진보정당 임에 우리 정치사에 두 당이 존립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4.15 총선에서의 서민은 과연 누구일까?
다른415 글에서 민주노동당이 말하는 서민에 대해 통쾌하게 말한 글을 읽었다. 서민 다름아닌 노동자 민중들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모호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민중이라는 개념은 인민의 또다른 표현으로 대중적으로 만들어낸 민주화의 용어라 난 사고하고 있다. 그런 개념이 있음에도 우린 민주노동당에서 말하는 서민이라는 용어에서 역사적 후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자 지금은 탈도 많고 말도 많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그들은 공돌이공순이(근로자)라는 이름대신 노동자라는 이름을 새롭게 정권으로 부터 뺏어냈다. 그리고 6.25 전쟁이후 없어졌던  5월 1일 세계노동절(mayday) 또한 90년대 초반부터 동토의 땅에서 깃발을  나부끼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리고 대다수 인민들을 민중이라는 범주로 우리는 지칭할 소외계층의 이름 또한 발굴하였다. 투쟁속에서 다 일구어낸 역사적 산물들이다. 그러나 자랑스런 노동자 민중의 이름은 언제부터인가? 서민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것도  진보정당이라고 자칭하는 곳에서 말이다. 표와 민심을 얻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투쟁의 역사의 부정이다라고 나 개인적으로 사고한다.
 
우리 선배열사들과 선진노동자들이 일구어낸 역사를 우리 스스로 지켜내지는 못할지 언정 우리 스스로 폄하하는 오류는 벌여서는 결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두고 다른 이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한다고들 한다. 그렇다 난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을 한다. 그리고 비판이 비난으로 일색한다고 한다. 그러며 대안이 무어냐고 말한다. 대안은 나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전적으로 바란다. 그러나 난 나의 비록 소수이겠지만 나의 정치적 신념과 사고를 지키는 범주내에서 민주노동당과 다름 아니 차이가 아닌 사상적 다르기에 그들의 행동에 있어 동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회중의 한계.... 책에서본 내용에 있어 막연한 교조적 비판이라 일색할 수 있다. 그렇다 난 의회라는 공간에 있어 역사적 경험이나 다른 무엇보다 의회가 정치투쟁의 장이 될 수 있다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의회투쟁을 역사적으로 이 동토의 땅에서 경험해 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나의 신념(선배 술한잔에 조직이 선택되고, 과선택으로 좌파를 지향하는 운동에 속하게 되었지만.... 의회주의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혁명은 투쟁없이 쟁취되지 않는다는  선동적 문구에 난 나의 온힘과 신념을 매달고 있다.)에 난 목숨은 걸지는 못하지만 내 의지를 걸었다. 그래서 난 민주노동당이 맞이하는 선거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하기에 사회당의 해체라는 사실(표가 개표되어봐야 알겠지만...)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4.15 총선 후 운동지형....
시민사회보다 거대해진 민주노동당을 통한 대국회투쟁이 주요한 운동권  운동전술로 부각이 기정사실화 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상되는 전술은 오래가지 않아 운동사회내 노동자 민중의 동력을 크게 훼손시킬 것이다. 대중투쟁을 통해  성숙하고 대중투쟁을 통해 단련된 노동자들이 서서히 없어질 것이며, 국회라는 한정공간에 매몰된 대국회투쟁이라는 전술이 우리스스로의 자양분을 초토화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난 오늘 다시 생각해 본다. 혁명적 실천없이 혁명적 이론이 없듯이 대중투쟁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것을....
 
두개의 진보정당의 아쉬움과 총선후 새롭게 다가올 우리의 정세가 어떠한 운명에 처해질 것인지... 자뭇 기대가 된다. 그러나 현재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 장애인이동권보장,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과연 달라질까?
의구심이 든다....
 
총선을 맞이하기 하루전 다양한 잡생각이나서 이 게시판에 끌적여 보았습니다. 주인장 양해바랍니다.
 
부디...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라는 두개의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가 되는 다른415총선이라는 투쟁공간이 되기를 바라며....횡설수설을 마칠까합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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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

  • 등록일
    2004/08/07 15:17
  • 수정일
    2004/08/07 15:17
 탄핵정국과 촛불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진보진영이라 통칭되는 단위에서 여러가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중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나온 논평이다. 현안 문제인 이라크 파병, 테러방지법, 집시법, 국보법 등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고, 야당에 대한 탄핵반대라는 목소리가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매스컴에서 나오는 탄핵반대 여론에 대한 방송을 보면서 과거와 다른 체계로의 전환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통 보수(수구)세력의 색깔공세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촛불을 든 민중들의 모습이 과히 감탈할만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그건 정치의 주체로서의 촛불시위가 아닌 정치세력에 대한 이중적 잣대(보수대개혁)가 지배하고 있다는 모습이다.
 
민중들의 주체역량은 과거에 비해 가히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비해 정치적 참여공간은 과거와 별반 달라진 현상이 없다는 점에서 현  탄핵정국의 민중항쟁은 예견된 패배(정치조직화 되지 못한 자생적 굴종의 한계)로  치닫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각성된 민중의 힘이 개혁으로 치장된 열우당에 의해서 붕괴되지 않을까?(그들의 본색이 정녕 개혁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지 의심의  눈초 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열우당은 철저히 총선승리를 통한 제1당으로의 도약에만 눈이먼 가짜 개혁세력임이 우린 지난 16대 국회에서 확인하지 할 수 있었다.)
 
왜 부르주아 정치권이라 할 수 있는 국회를 응징과 국회의원의 대의민주주의를 종지부 찍을 국회의원 소환제 추진의 목소리를 촛불시위에서는 주장하지 못하는가?


촛불시위를 통해 국회의 주인이 누군인지를 명확히 하고, 국민 스스로가 정치주인으로서 확보된 권리 즉, 참정권을 넘어 국회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회 통제권의 확보라는 말은 곧 국민의 정치참여 공간의 확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대의민주주의 종말을 의미하며, 국회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다.
 
대통령 탄핵소추권과 국회의원 소환권 쟁취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의  근간의 뿌리를 확보할 수 있는 부르주아 혁명의 최고의 형태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에서 우린 1905년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출범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접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근간인 1905년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세력은 등장하였으나 이들은 곧 노동자 민중들의 정치투쟁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번 선거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전략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한국자본은 IMF체제를 겪으면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초국적 자본주의(제국주의 금융자본의 대두)시대로 접어들었다. 기간의 한국경제의  골간이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통한 계획경제였다면 지금은 사유화(민영화)를 통한 초국적금융자본의 시장에 대두를 통한 제국주의 침탈 경제로 전환되고 있다. 여기서  민중들의 삶은 파탄이 날 것은 필연(현 신용카드, 금융부실, 해외매각, 외국인 증권투자 상한제안폭 확대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들어나고 있다. 현  비정규노동자들의 양산, 노동시장의 고용불안도 이와 초국적자본의 침탈 현상과  일맥상통 함을 알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공기업 사유화(민영화)를 통한 해외자본유치가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 서먹은 금융자본의 해외매각이 단적인 예이다. 철저 히 민중의 삶은 파탄지경에 이를 것이다.)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한나라당, 민주당이 탄핵표결에서 압도적 표차(198명 참가 195명 찬성, 반대 2)차 이에만 관심을 갖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민주주의 수호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탄핵정국은 국민의 참정권 강화를 내걸고 대의민주주의 낡은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국민적 합의=대의민주주의(국회의원 찬성수)라는 등식을 끊어내야 한다. 국회의원이 직분을 하지 못하면 언제든 국민이 소환할 수 있는 참된 정치를 위한 재편을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민주주의가 수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노동자민중의 정체세력화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시기엔 우린 또다른 담론을 형성하여 제시하여야 한다.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장.... 이건 진보세력들이 또다른 주제로 설정할 과제이다.
 
보수대 개혁이 아닌 보수대 진보.... 보수대 변혁.... 보수가 아닌 사회 진보라는 담론이 이 땅 어디에서나 울려펴지며, 삶의 일부분이 되는 그날의 밑거름을  위한 촛불 시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소외받고 있는 이들의 문제에 좀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평등, 평화, 통일, 사회변혁이 오는 그날을 위해 좀더 심호흡하며 현재  탄핵 정국을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자!!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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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 한움쿰...

  • 등록일
    2004/08/07 15:09
  • 수정일
    2004/08/07 15:09

10월의 마지막날을 사무실이 인접한 버드나룻길(영등포 로터리부터 당산중학교까지나 있는 도로)에서 분노를 삭히며 보냈다. 간만에 도로를 점거하고 짱돌을  던지며 공권력에 항거해 보았지만, 투쟁을 준비하지 않고 맞이한 집회에서 무기력한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난 아침 7시까지 술독에 빠져 나의 무기력함만을 책망해 보았다. 이도 몸만 축날뿐 나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때문에 그토록 갈증이 나는지.... 가슴과 목이 타들어가는 조급함에 난 초조하게 10월 마지막과 11월 첫날 아침을 맞이하였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있는 날이라 10월 31일 오전 9시 30분에 출근을 하여  인터넷생중계 장비를 챙기고 서대문로터리에 위치한 드림시네마(옛 화양극장)에 도착하여 인터넷생중계를 오전 5시까지 진행하였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회의장면.... 학생운동을 하였던 과거와 바뀌지 않는 회 체제내의 모순을 흠뻑 느끼면서.... 과연 그들이 노동운동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가는 반문이 들게할 정도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회의는 정세와 무관케 돌아가고 있었다.
 
치열하였던 노동운동의 기풍은 부피가 더하면서 회 체계의 틀에 갖혀 있음에  안타까움을 느꼇고, 내 현장이 아니기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 대의원들의 모습에 서글픔을 느꼇고, 열사의 죽음에 복받쳐 오는 분노를 대의원대회 장소에서 내내 들었다. 나의 분노가 이러한데 현장에서 현장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현장활동가  심정은 어떠했으랴.... 상상만 해본다. 근로복지공단 광주지부장이었던 이용석  열사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참관석에 있던 중소영세사업장 노조위원장의 제안 묵념을 하고 대의원대회를 진행하자라는 말에 왜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묵묵 부답이었을까?

추모를 하고 나면 대의원대회 안건이 부결될까봐 아니다. 그들에겐 열사투쟁보다는 단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가늠할까하는 노조 관료주의의 찌든 병폐가 작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이는 현 민주노총 대의원 배석의 문제로 확연히 들어난다. 민주노총의 경우 대의원대회에 참석하는 파견대의원의 경우 조합원 200-300명당  1명의 파견대의원 선임권을 주기에 대공장노조의 경우 다른 노조보다 민주노총 대의원 수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현 민주노총의 각 업종별 산별노조 건설에 있어 이전 소산별과 대산별 건설에 있어서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소산별을 중안시 하였다면  아마도 노조에 있어서 동일한 대의원 수를 배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지 못하고 대산별로의 전환을 통해 대공장 노조의 횡포-일부노조-가 비일비재하게 지역판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우린 주지 할 필요가 있다. 학생운동의 경우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전체학생대회(아니면 전체학생대표자대회인가?)로 전환하고  대의원대회를 폐지하였다.)
 
추모를하고 대의원대회를 진행하면 뭐 대의원대회 위상에 존폐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민주노총의 회 중시 풍토는 열사정국의 정세를 반영하지 못하였다. 회 운영 묘를 살리지 못한 의장의 모습이 애처럽기 그지 없었다. 왜 꼭 회의를 마치고 묵념을 하여야 하는가? 결의를 못하더라도 준비된 노조를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는가? 선엄적 노동운동의 한계에 나의 무기력함에 더욱더하고 대의원대회를 진행하자라는 말에.... 왜 민주노총 대의원은 침묵하였는가? 아쉽다. 동지애는 노래의 구호로 대치될 수 없으며, 그 어떤 상징으로도 평가될 할 수 없건만 행동을 요구하는 동지들의 구호에 언쟁이 오고가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다.


자명히 실천해야할 이 마당에 현장상황만을 되내이는 현장간부의 모습이라니..... 참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현장활동가가 아니라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라는 나름의 위안은 해보지만 속이 타들어가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열사들의 죽음에 우린 무엇으로 화답을 해야 하는가?
막연하게 나마 이러한 생각만을 하게 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나 답은 자명하다. 이 땅에서 그토록 치떨며 외쳤던 열사들의 구호 "비정규직 철폐", 손배가압류 폐지, 노동탄압 중단, 노동자 총파업투쟁으로  노동해방 세상을 열어제끼자라는 열사들의 외마디와 절규..... 전태일 열사가 청계피복 어린 여공들의 노동탄압에 분노로 항거하였던 시간이 벌써 30년이 지난 시점인 지금...


이 땅의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의 분노와 같은 함성을 온몸으로 내지르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아무것도 변한게 없는 노동자의 현실이기에....
 
혹자들은 대안없는 총파업투쟁을 어떻게 전개하냐라는 반문들을 하며, 무조건적 과격한 행동을 삼가하고 실리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현 노동정세를 돌파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실리는 노동자들에게 또다른 죽음을 종용하는 타협의 수단일 뿐이다. 무조건적 총파업.... 언제 노동자들이 계획을 갖고 투쟁을 전개한 적이 있는가? 자본의 칼날에 항거하기 위해 구속 수배, 백골단 폭력을 감수해 가며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이 투쟁이 점차 대오가 많아지면서 투쟁전술이 나온것이지.... 과격한  행동을 목적으로 삼고 투쟁을 한 적이 없다. 이들의 투쟁은 생존이라는 굴레의 생과 사의 갈림에서 필연적으로 선택한 방어수단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들을 폭력,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자본의 의도가 더 불손하고 불온하지 않는가? 대화는 언제나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만 사측이 마지못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으면, 자본은 한번의 칼날로 노동자들의 수족을 모두 잘라 버린다.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위원장의 자살과 분신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정당한 파업투쟁이 불법으로 매도되고, 파업투쟁을 한번하면 구속 또는 해고자 신세로 전락하는 노동자들의 현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공포였으리라.....
 
난 10월의 마지막을 길거리에서 돌맹이 한움쿰을 깨뜨리고 던지며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지부장의 죽음에 분노하며, 공권력에 항거해 보았다.  그러나 나의 힘은 미약하였다. 또한 몸도 예전같이 않아 돌 몇번 던지면 팔이 아파할 정도의 통증이 났다. 나의 한계이다. 나의 현실이고..... 이렇게 열사를 보내면 안되는데 하는 관념은 존재하나 나의 몸은 그렇지 못하였다.

공권력의 장난에 놀아난 그날의 집회.... 이 치욕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만해 본다.
 
내 힘을 낼 수 있는 동안 돌맹이 한움쿰 양손에 쥐고 공권력 하수인의 면상에 퍼부어 낼 결의를 다짐해 본다. 열사 정국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이기에...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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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열사들.....

  • 등록일
    2004/08/07 14:58
  • 수정일
    2004/08/07 14:58
연이은 자살보도가 언론을 통해 타전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노동현장에서 굴욕의 노동을 강요받던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정국 또한 올들어 간간히 들려온다.
 
태풍 매미때에도 골리앗에서 한진 사측과의 성실교섭을 요구하며 투쟁의지를 굽힘없이 전개해온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위원장은 태풍의 강인함보다는 자본의 악랄함에 투쟁의 의지를 굽히고 노동열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오늘자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1970년 전태일열사의 외침이 아직도 이  땅 천만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있는데.... 무엇때문에 노동열사가 되어야 하는가? 투쟁이 힘겹다 못해서 그런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선택 그 안엔 노동자 하나하나에 대한 진심어린 신심이 있었기에 그러한게 아닌가 추론해 본다.


올초 배달호 열사의 분신.... 현장에와도 재미가 없다라는 짧은 말과 유서 글  현재 노동현장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 노동상황을 우린 무엇으로 돌파하고자 노력하지만 견고히 버틴 자본과 정권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IMF 경제위기 후 찾아온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노동현장에서 근무한 노동자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죽음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불어닥친 구조조정을 앞세운 정리해고 정국은 많은 노동자들을 정든 일터에서는 물론 이승의 삶을 접게 하였다. 많은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우린 노동열사정국에 무엇을 하였는가?
노동열사의 죽음은 열사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1천만 노동자들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엔 우린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91년 한진중공업 위원장이었던 고 박창수열사 정국과 지금과는 다르다. 1천만 노동자들의 아니었지만, 선진노동자들의 분노어린 절규 그리고 안양시내를 관통하는 박창수 열사 사수투쟁이 굴과 12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배달호 열사 그리고 오늘 소식을 접한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힘을 결집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도 그럴 것이  지금시대를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정리해고라는  무기를 든 자본은 언제든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고, 정권은 법제도라는 명분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죽음을 종용하고 있다.

열사들의 절박함이란 다름아니다. 노동자가 자본과 정권에 대항하지 않으면  지난 날 선배들이 쌓아온 노동운동의 힘이 퇴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산화해가면서 노동운동의 횃불로 승화한다. 노동자들을 사랑하기에 아픔을 머금고 황천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더이상 있어서는 안되는 그 길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이 사라지는 현실이지만 지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의  방법을 선택한다. 열사정국이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열사정국을 우린 노동자들의 총자본과 정권의 대항투쟁으로 만들어 내고 있지 못하다. 과연 무엇때문인가? 과거에 비해 노동운동이 개별화 파편화 그리고 조합주의 시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노동운동의 총단결 총투쟁이라는 단결투쟁의 원칙이 개별노조의 조합주의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 이다. 이를 극복하고 현 노동열사정국을 전체노동운동 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

열사여 고이 잠드소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다고 나는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노동열사... 그리고 무수한 열사들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살아갈 날이라는먼 미래에 대한 삶의 희망이 있을까? 반문해 본다.


짧지만 세상에 대한 인식을 하고 살아오면서 많은 열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또한 허락치 않는 세상이다. 노동해방 세상이 금새 올줄 알았지만, 노동해방은 우리에게 먼 미래 그리고 언젠가 올 희망의 세상인지 의구심 또한 든다. 열사들이 무수히 배출되고 있는 지금의 정국에 우린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투쟁보다는 타협을  선호하고 있는 지금 노동운동의 조건에서 과연 열사가 고이 잠들수 있을까?

우리는 투쟁으로 화답을 해주어야 한다. 명백한 투쟁에 우린 그동안 무기력함  나약함을 단번에 날려 노동해방 깃발을 나뿌끼며 수세적 투쟁에 공세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집회는 짧게 투쟁은 길게라는 선명한 투쟁과제를 선정하여,  타협으로 잃어버린 용기와 노동해방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우린 투쟁으로 열사의 마지막을 노동해방 횃불로 승화시켜야 한다.
 
타협과 회유에서 벗어나 투쟁의 현장으로....
그동안의 노동운동의 타협 그리고 무수한 투쟁 철회를 위한 회유로 점철되어져 왔다. 투쟁해서 패배를 한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게 나의 속내이다. 그러나  기존 노동운동의 패배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용기 있는 투쟁은 커녕 파업투쟁 고양시기 투쟁을 정리하여 선진노동자들로부터 빈축을 샀으며,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심각히 훼손하였다. 혹자들은 노동자 투쟁에 있어 과격투쟁이 대안이 아니며 구시대적 산물이라는 비판하지만 노동자들의 절박함을 방패와 곤봉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과 정권임을 알아야 한다. 평화를 보장하지 않기에 시위가 과격화된 것이지.... 시위가 과격하기에 공권력이 과격한 행동은 한다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지켜내지 않으면 누구도 노동자들을 지켜줄 수 없기에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나서는 것이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기존 국민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노동자 투쟁의 대중적 확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린 되살펴 봐야 한다. 이는 노동운동의 대중성에 얼마나 심각한 훼손을 하였는지를.... 노동운동 이건 노동자가 대다수인 이 땅에서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노동자라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타협과 기회를 넘어선 현장강화로 열사 정국투쟁의 횃불을 들어야 할 때이다.
 
 P.S 저를 비롯한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모든이가 눈물 흘린 자격이 있는지  반문해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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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

  • 등록일
    2004/08/07 14:50
  • 수정일
    2004/08/07 14:50
모든 인터넷 언론이 이라크 파병과 민주당 분당 논쟁으로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은 진보와 수구보수의 대립으로 쟁점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는 사안이가에 촉각을 세우며, 파병반대운동에 대한 국민적 운동에 대한 촛불을 당기기 시작하였다.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보수진영의 균열....


명분없는 전쟁, 더러운 전쟁으로 명명되었던 이라크 전쟁이 부시의 종전선언 후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라는 언론보도가 일제히 보도되었다. 그러나  종전 선언이 지난 지금 이 보도는 미국 정부의 언론 플레이에 지나지 않음이  이라크 언론보도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벌어지는 자살테러로 인한 미국의 사상자가 종전때 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초기 승리를 확신하던 미국내 여론이  계속되는 미군 사상자 발생으로 전쟁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지고 있다. 황급해진  부시는 급기야 한국, 인도, 파키스탄, 폴란드, 터어키 등 미국의 혈맹국가 들에게 전투병력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부시의 다급함을 엿볼 수 있다.


초기 이라크 파병에 호전적이었던 노무현 정부가 올초와 다르게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 국민적 여론을 감안하여 판단하겠다라 청와대 입장을 발표가 있었다.


이라크 전투병 파병이 신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베트남전이 한국사회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남아 있다는데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 또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어 한국의 젊은 청춘들이 냉전체계에 의해 이유 없이 죽어갔으며,  미군이 뿌리 고엽제로 인한 피해, 베트남민 학살 등 해결되지 않고 있기에 끝나지 않는 전쟁....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상을 직접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곧 기간 보수진영이 추구하던 무조건적 친미에 있어서의 균열을  나타내고 있다. 월남파병 전우들의 고엽제 피해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6.25참전을 하여 자유진영을 수호하였다는 냉전시대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보수진영내  인식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인가?에서 실린 기사에서 6.25참전을 해준 빚은 월남전 한국군 파병으로 다 갚았다는 말에서 보이듯 보수진영내에서도 이라크 전투병력 파병은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지 조중동과 일부 꼴 보수진영 외에는 전투병력 파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함부로 말하 지 않는 것은 전투병력 사상자에 대한 책임에 있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래서 한나랑 당 또한 노무현 대통령 발언에 귀추를 주목하는  이유가 아닐까?
 
국익론을 내세운 파병 찬성의 움직임.

국익을 위해서 국민 개인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은 과연 박탈되어야 하는가? 국익론은 정치권의 파병 찬성을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우리가 왜 파병하여야 하는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IAEA에서 발표하듯이 확인 되었듯 미국의 일방주의가 한 국가의 독립권을 박탈하였다는 것이다. 미국내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힘을 얻고 있다 볼 수 있으며,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또한 본국에 돌아오면 제대를 하겠다는 말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보더라도 미군에서 초기 이라크 파병과 새롭게 전개되는 이라크 전쟁의 움직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국익론에 의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쟁의 방패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수호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전지구적 평화를 위해 매진하여야 할 군인들이 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하게 된다면 국익을 떠나 크나큰 역사적 오류를 또한번 초래시킬 것이다.

전쟁은 살기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처참한 살육의 장이기에.... 국익론을  앞세워 말을 하는 국회의원과 아들부터 전투병으로 파병하라.... 전쟁의 참상이 무엇인지나 알고 지껄여라... 제발....
 
전쟁은 곧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

미국의 산업적 특성상 전쟁을 일으켜 더많은 부를 축척하는 산업체제라 하겠다. 군산복합체로 알려진 미국내 군수업체들이 부시 정부와 손잡고 이라크 전쟁이라는 인류의 크나큰 재앙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종전선언 이후에도 종전이 되지 않고 있으며,  전쟁을 통한 낡은 재래식 무기들의 수효를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미국의 실업률과 사상자 속출은 초기와 반대 국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의 전장을 오락실 게임 또는 영화처럼 안방극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로서는 전쟁이 영화의 한장면인 것 처럼 느껴지고 있다. 정확히 말해 나의 일이 아니기에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죽은 시체를 보면서도 난 전쟁의 위험에 무담담해야 했다. 우리가 전쟁으로 인해 무수한 사상자와  무수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처한 조건이 아니기에  무덤덤히 전장의 장면을 영화의 극적 상황에 대조하면서 전장의 상황을  관전하였다.


이게 요즘 말하는 매스미디어의 힘일까.....


일류가 죽어가고 인류가 망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난 무감각할 수 밖에 없다.  무감각을 넘어 그들이 만들어 놓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난 관람자로 전락한다. 이 전쟁이 나의 일로 되기 전까지는.....
 
전투병 파병은 명분과 실리 그리고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되서는 안된다.

전쟁은 승리아니면 죽음이다. 그렇다고 승리를 한다손 치더라도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킬수 밖에 없다. 이런 전장에 왜 우리가 파병을 해야 하는가? 국익... 우끼는 소리하네.... 한반도 전쟁 억제.... 꼴깝떠는 소리하고 있네....   이라크 다음은 우리 한반도라는 것만 우린 잃어버리지 말자..... 미국의 오만과 독선이 일으킨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 한명도 보낼 수 없다.


 더이상 전쟁이라는 먹구름에 우리가 빚겨나가기를 빌며....
 
 전쟁없는 세상을 꿈꾸며....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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