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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 등록일
    2005/03/27 12:23
  • 수정일
    2005/03/27 12:23
미공개 다큐멘터리로 본 인물 -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2001년, 그가 여든 다섯 생을 마감하며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말』이 다시 꺼내든 이유는 조바심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장담하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그에게서 찾는 것은 ‘위안’일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배척받았던 이상주의자의 꿈. 우리는 아직도 그 ‘길’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든 그의 목소리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꺼내 볼 것이다. 『길』. 한 비디오저널리스트가 담은 그의 마지막 1년을 축약해 지면에 옮긴다.


다큐멘터리 제작 조천현 전문기자 vjcho@hotmail.com 글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을 등진 우리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일궈온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도시,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숨어 살고 있는 도시다.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이곳을 드나들며 탈북자들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그런 활동 때문에 내적 갈등에 빠진 적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후 싹튼 남북화해 분위기 때문이었다. 탈북자 문제가 자칫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헤매던 그런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학철 선생이었다. 지난 2001년 초, 나는 조선족 문학인 출판기념회장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그 기회에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연변문학인으로부터 그를 소개받고자 했다. 그러나 연변문학인들조차 그를 만나기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얼마 후 다시 연길을 찾은 나는 혼자서 연길시 총류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 문에는 ‘볼 일 없는 사람은 이 문을 두드리지 말라(한인막고문)’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고 그에게 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숨기고 그가 하는 말을 몰래 담았다. “남북의 통일은, 이북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붕괴되지 않으면 통일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 부자를 차우세스크 부부에게로 보내버리는 것만이 유일 정확한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심 북한 정권의 붕괴가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 1938년 일본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일본 군벌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122명의 전사들이다. 그가 속한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진지 앞에 까지 침투하여 일본군정을 탐지하고 일본군 문서를 변조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대원들은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김학철, 그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었다. 1941년 12월 중국 화북성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중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군 대원 4명이 전사했다. 동료들은 그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믿고 추도식까지 했으나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를 포로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를 했다. 일제 식민지 백성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기 내내 그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제는 수감기간 내내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 해주지 않았다.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국독립에 한 다리를 바친 것이다. 그 후 50년 간 그는 오른쪽 다리 하나로 힘겹게 살아야만 했다. “‘항일투사’라는 말, 역겹다” 2개월 후, 그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망설임 끝에 그를 만나기 위해 김해공항을 찾았다. 공항에는 윤세주 열사의 가족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용군으로 함께 싸웠던 윤세주 열사 탄생 기념강연회에 후손들이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강연은 솔직하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강연 중 그는 남북의 왜곡된 독립운동사를 비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하느라고 했습니다.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우리 조선의용대가 일본을 반대해서 싸운 것은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역사가 이렇게 잘못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에 나온 지는 벌써 10여년쯤 됐는데 일부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보니까, 어떤 분들은 전선에 나가보지 않아서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분들 이예요. 중국군이 잡아 온 일본군 포로의 얼굴은 보았겠지만,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분들이 계속 독립운동가로서 행세를 하고 있더라고.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우려먹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대단히 실망 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항일 투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일투쟁을) 안하고 어떻게 (그냥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두고두고 우려먹고, 대단히 굉장하시더라고. 그래서 저는 항일투사라는 말만 들으면 막 역겹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밀양서 이거 하신다고 하실 때도, ‘항일투사’라는 말은 빼주십시오 그랬습니다.” 다음 날, 그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밀양을 떠났다.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 동안 짜여진 계획은 팔순 노인에게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부축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다. 혼자서 걷고 혼자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철저했다. 나는 그와 그의 아들을 마포에 있는 나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포나루는 그의 기억 저 편에 살아 있었다. 1946년 10월, 30세가 되던 해 이 마포나루에서 공산당원 신분으로 조직의 부름을 받아 북으로 갔던 곳이었다. “여기서 배를 탔어. 여기서 배를 타고 어딜 갔냐면, 지금 오두산 전망대 있잖아. 그 앞으로 해서 임진강이 합류되는 데로 해서 쭉 내려가 가지고는 옹진반도로 건너가는데. 해병대들이 검문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두부장수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폭격에 다리를 잃었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불편하니까 누이동생하고 조카가 마중 나왔다.’ 이렇게 거짓말을 했지. 그게 통하더라고.” “여기 나루터를 통해서 떠나시고 나서 한국에는 한번도 못 오신 거죠?” “못 왔지. 내가 떠날 때 우리 외삼촌한테 말했거든. 내가 3년 후에 돌아온다. 돌아오면 싹 사회주의 나라로 만든다. 이렇게 큰소리 치고 갔거든. 그런데 43년 후에 돌아왔다고 내가, 일흔이 넘어서 아이구. 그래 돌아왔어.” “나는 내 백골을 봤어” 한국에 혼지 10일째 되던 날 그가 몹시 피곤해하자 주위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 검사결과,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데에다 무리한 일정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에 나 있는 종기를 고약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의사는 종합검진을 받자며 입원을 권유했다. 그는 병원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관계되는 기사를 꼼꼼히 챙겨 읽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하루는 이 놈이(일본간수) 쫓아오더니, ‘야, 네 다리 보겠냐’ 그러는 거야. 자른 다리를 무연고자 묘지에 묻어버렸거든. 그래서 ‘내 다리 어떻게 됐냐’ 그랬지. 그랬더니 ‘야, 말마라, 얕게 묻었던 모양이야’ 하는 거야. 개구멍으로 개들이 들어와서 썩은 다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 놈이 마당 쓰는 참대 비로 막 때려 쫓았대. 그리고는 이걸 다시 깊게 묻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한번 보겠냐’ 그런 거야. 그래서 내가 ‘가져와라’ 그랬지. 이 놈이 (내 다리를) 새끼줄에 매어 들고 와서 보여주는데. 완전히 백골이 됐어. 그런데 발가락하고 무릎 관절까지 다 붙어있더라고. 그런데 백골은 백골인데 빗물이 들어가 썩어 거뭇거뭇해. 그걸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야. 그걸 도로 묻었는데, 나는 내 다리, 내 백골 봤어”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도 행복한 때가 있었다. 북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외금강휴양소로 좌천되었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소설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대 시절의 항일운동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이 책 후기에서 남북통일은 김일성 부자를 붕괴시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고 썼다. 이 내용을 보고 한국 내 진보세력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보수 세력들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아랑곳 않으면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왔다. “이북이 자꾸 무슨 수해를 만났다 한재를 만났다 하지만, 체제 자체가 일을 안 하게 돼 있어 그런 거예요. 일을 해도 자기가 갖지 못하거든. 수재나, 천재, 가뭄은 조그만 영향을 끼친 거지. 중요한 것은 체제 문제였어요. 안된다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얼마나 굶어죽었냐면 3천만 명이 굶어죽었어요. 3백만이 아니야. 똑똑히 동그라미 하나 더 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도 아침부터 밤까지 ‘지상낙원이다’ 이러거든. 공산당에 제일 중앙, 높은 사람들까지 말이야. 이것들이 어디 사람이야. 백성이 굶어죽는데, 아침부터 위대하다고 만세 부르면 뭐하냐 이거야. 그래서 반발을 했지. 그래서 『이십세기 신화』란 소설을 쓴 거야.” 『이십세기 신화』는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했다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 당국으로부터 이러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 당했다.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때 『이십세기 신화』의 원고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10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4년간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십세기 신화』는 탈고한지 31년 9개월 만인 1996년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아직도 이 책은 중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다. “사회주의 세상은 반드시 온다” 그의 건강상태는 예상 밖으로 나빠져 있었다. 그는 예기치 않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그의 병실을 찾았다. 아들 김해양씨는 아버지의 기사가 실린 주간지를 읽고 있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기사였다. 독방과 인연이 많은 김학철 선생. 그는 병실이 마치 형무소의 감방과 같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퇴원하여 중국 연길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퇴원을 앞두고 그는 아무이상이 없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운동까지 했다. 그의 의지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이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자유를 찾아가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적 삶이 아니었을까. 병실을 나온 그는 오랜만에 나에게 인터뷰를 자청했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결코 사회주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김학철 선생. 그는 사회주의자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진정한 사회주의는 꼭 실현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처한 빈부의 격차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옆 병실에 모녀가 와서 돈이 없다며 퇴원을 했어. 비참하잖아요. 한쪽에서는 호화판으로 살고. 결국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 될 수가 없지. (지금까지는) 시행착오야. 시행착오를 해서 개인숭배를 하고 그러니 그게(사회주의가) 되겠어.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경험을 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투쟁을 해나가야지 뭐.”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온다고 믿습니까?” “꼭 그렇게 되는걸 뭐. 아침에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발전 법칙에 따라 꼭 된다고. 누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안하겠다고 해서 안되는 것도 아니야. 자연의 이치야.” 다음 날, 김학철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중산복으로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모든 것들을 챙기게 했다. 그가 남긴 행적들에 대한 책임 같은 것 때문일까. 그의 꼼꼼한 성격이 단적으로 느껴졌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바다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마지막 여행이라도 되는 듯 그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말없이 중국 연길의 집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지 10여일 후, 나는 동해안을 여행하던 중 중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학철 선생이 위독하다는 아들 김해양씨의 전화였다. 멀쩡하던 그가 위독하다니 나는 불안했다. 그 다음날 나는 연길에 도착했다.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가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나는 초조하고 마음이 바빴다. 그의 이층집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는 자신이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걱정해줄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그는 나를 맞이하기 위하여 목욕을 하고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곡기를 끊은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이 승복하고 가는 게 제일 원칙이라고. 가족에게 조금도 피해를 끼치지 말고. 나는 내 장례식에 딱 열두 명, 가장 친한 사람만 모았어. 부고도 안내. 지난 5월까지 집필하고 서울 가서 석달 입원하고 (이제 곧)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외다리 하나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은 과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을까.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쓰던 책이며 물건들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평소 가장 존경한다는 노신의 문학 전집, 남북을 통틀어 이만한 작가를 찾기 어렵다는 홍명희의 『임꺽정』, 열 번씩이나 통독했다는 우리말 사전. 그는 유언처럼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본래 모습으로 깨끗이 되돌아가야 한다면서 먼저 관장을 하고, 옛 의용군 시절에 입었던 중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삭발도 했다. 그는 그렇게 원하던 대로 누구보다 고결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작가 조정래 선생은 “김학철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작갚라고 회고한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하는 존재다. 작가가 외롭거나 괴롭다고 해서 정권과 야합한다면 그건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인류 문화사가들은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작가가 바로 김학철 선생이다. 그 역시 북한이나 중국 정권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 대목을 모르면 ‘김학철’을 영원히 모르는 것이다.” 임종 후,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집에는 종이 박스에 담겨진 그의 유골이 도착했다. 그런데 유골이 담긴 박스 위에는 ‘홍성걸’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성걸. 그의 본명이었다. ‘김학철’이라는 이름은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활동하기위한 가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행여 고향의 옛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유골 함에 본명을 써 넣었다. 그의 유골은 고향을 찾아 두만강을 따라 원산 앞바다로 떠내려갔다. 한 송이 꽃잎 같은 인생. 그가 좋아하던 꽃잎들도 해 저무는 두만강의 노을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온다고 그는 말했다. 그 사회주의는 과연 그의 희망처럼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인간의 참다운 삶의 길이란 무엇일까. 김학철,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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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건 쓰나미가 아니라 가난"

  • 등록일
    2005/03/27 12:08
  • 수정일
    2005/03/27 12:08
김성환의 History Today - 남아시아 해일 재난에 대한 좌파의 시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김성환 본지 편집위원 작년 12월 16일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해일은 사망자만 15만 명에 이르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언론은 천편일률적으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자연재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스리랑카의 트로추기주의적 좌파정당인 사회평등당 총서기 위제 디아스의 지난 2월 4일 시드니에서 있었던 연설을 통해 좌파는 이 재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어보자. <본문 > 오늘(2월 4일)은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지 57년째를 맞은 국경일입니다. 정부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농민과 군대의 행진 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비록 쓰나미 재난 때문에 그 열기가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남습니다. 빈농, 어부, 청년 실업자 등 스리랑카의 노동자 대중이 그런 기념식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요. 재난의 주범은 가난


스리랑카 총인구의 5%에 달하는 1천 2백만 명이 지금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45만 명은 지난 20년 동안 부르주아 정부들이 잇달아 벌인 내전 때문에 떠돌이 신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이번 쓰나미로 인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쓰나미로 성인 남녀와 어린이 약 4만 명이 죽었고 4천 명이 실종됐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죽은 사람들이 약 6만 5천 명입니다. 쓰나미는 결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피해의 주범은 이 지역 반(半)식민지 국가들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가난입니다. 프라풀 비드와이는 <프론트라인 > 최근호에 쓴 글에서 “재앙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 일본에서는 1회의 자연재해로 평균 63명이 죽지만 페루에서는 그보다 46배나 많은 2천 9백 명이 죽는다. 1985년 허리케인 엘레나가 미국을 덮쳤을 때 단 5명 만이 죽었다. 그러나 1991년 사이클론이 방글라데시를 강타했을 땐 무려 50만 명이 죽었다. 한번 지진으로 1만 명 이상이 죽는 일은 제3세계에서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로 스리랑카에 대해서 언급할 것인데 이는 내가 그곳에 대해 잘 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곳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여타 후진국들에 만연해 있는 일반적인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국가들 국민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가난은 인재(人災)입니다. 그 가난의 뿌리는 신이나 자연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은 이들 나라들에게 유용한 광물자원과 쾌적한 기후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민의 대다수를 비참한 가난에 빠져 있게 한 것은 바로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가옥과 인명 피해를 당한 이들은 주로 바닷가에 살고 있던 빈민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부이거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집은 오두막이라고나 할 정도로 허술해서 쓰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규모의 홍수나 태풍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쓰나미가 지나간 뒤 찍은 일부 사진에서 때때로 광활한 판자더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집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자본가의 집은 견뎌낼 수 있을 만한 쓰나미였다는 말입니다. 어부들은 작업 때문에 바닷가에서 살지만,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땅 한 뙈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바닷가에 삽니다. 해안철도는 주변에는 많은 철도용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는 것이지요. 지금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요. 그들에게는 은행 통장도 없고 사회보장 혜택도 없습니다. 집이 없어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불법 점거자’로 취급받아 보상에서도 제외됩니다. 서민 생명 경시하는 지배층 이들은 사전에 어떠한 경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쓰나미가 스리랑카 동부 해안을 강타한 직후 방송에서 한마디 보도만 했었더라도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해일이 서남 및 남부 해안에 도달하기까지는 30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15분 동안만 내륙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면 모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보는 없었습니다. 정부 측의 이러한 치명적 실수를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많은 합리화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12월 26일이 공휴일이라 관공서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정부나 엘리트층이 서민들의 생명에 대해 총체적으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야만적인 내전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훨씬 값싸게 취급받아 왔습니다. 정부가 서민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구호활동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정부당국과 군은 재앙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피해 주민들을 도운 인접 지역 주민들이 아니었더라면 수천 명이 더 죽었을 겁니다. 서민들의 이러한 자발적 구호활동은 지배 부르주아 정당들이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들을 갈라놓기 위해 수십년 동안 만들어 내고, 재생산하고, 활용해먹은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주인장들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토착 부르주아지들은 대중들의 사회적, 민주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들은 반동적인 싱할라 쇼비니즘의 분리 통치 전략에 의존해야만 했지요, 1948-49년에 타밀어를 하는 플랜데이션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이 인도에서 온 이주자라는 이유로 공민권을 박탈하면서 시작된 차별정책은 1956년에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토착 타밀족에게서도 공민권을 박탈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983년 내전이 시작되자 쇼비니즘에 대한 호소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합리적인 지역분리 정책은 이번 쓰나미 이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조할 때 아무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싱할라인인지, 타밀인인지, 무슬림인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온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장소가 불교 사원이든, 기독교 교회이든, 무슬림 모스크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편에 선 노동대중 구호 활동 가운데서도 계급관계가 전면에 드러났습니다. 주도권을 쥐고 활동한 것은 인구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잘 조직된 노동대중이었습니다. 특히 병원 노동자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최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숱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언론매체는 그들은 환자에 대한 적으로 묘사했었지요. 노동대중이 쓰나미 피해자들 구호활동에 즉각 자발적으로 참여하자 지배계급은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건 마치 서민들이 금지된 영토를 침범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정부는 신속하게 모든 구호활동을 군의 지휘 아래로 이전시켰습니다. 그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언론을 동원해 대중들이 일으킨 몇몇 유아 성 추행 및 강간 사건을 확대 과장 보도하도록 했습니다. 피해자 및 자원봉사자들 모두로부터의 공적인 분노에 직면한 정부는 한발짝 물러나 군은 난민캠프의 안전만 담당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은 1월 6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스리랑카의 총 25개 행정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 적용되는 일련의 가혹한 비상조치법을 공포했습니다. 그것들은 의회는 물론 각료회의의 토론도 거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인권위원회가 시민은 자신이 적용받게 될 법률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그 법률들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긴급조치법은 공공질서와 기초 공공 서비스를 유지한다는 미명 아래 군과 경찰에 과도한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한 소관 부서장 및 지역 군사령관들은 구호활동을 위해 건물, 토지, 자동차를 징발할 권한을 갖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쓰나미 관련 구호활동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 관련 일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든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조치로서 민주적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인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군의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행동들을 상기할 때 이번 조치법들로 인해 대중들이 심각한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재난을 독재의 기회로’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남부지방 함반토타에서 가진 군중연설에서 선거는 5년 뒤로 연기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민주적 권리에 대한 이러한 공격에 대해 야당들 가운데 좌파든 우파든 어느 곳도, 심지어 노조 지도부도 항의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항의의 부재는 ‘쓰나미 충격’의 결과가 아닙니다. 또한 인도주의적 활동이 중단 없이 진행되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돼 대다수 국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빈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해줄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40% 이상이 하루 1달러 수입으로 최저생계비 이하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유무역지대 노동자들은 월 45달러의 임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구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적 권리와 대의정치는 지배계급에게 점점 더 불필요한 부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그들에게 오랜전부터 하나의 아젠다였습니다. 2003년 11월, 쿠마라퉁가는 국민연합전선 정부로부터 3명의 장관직을 강탈하는 사실상의 헌정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3개월 뒤 그녀는 독단적으로 정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노동계급을 대변한다고 하는 어느 정당도 이러한 조치들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안정된 정부’라는 것은 다른 말로 타밀 소수민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정부를 말합니다. 한때 스리랑카 최대의 노동계급 정당이었던 랑카 사마 사마자는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함께 대통령 측에 가담하여 반민주 조치들을 지원했습니다. 민주적 권리들을 짓밟은 지배 엘리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부시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의해 더욱 고무되었습니다. 쓰나미 이후 미국은 1만 3천 명의 군사요원과 21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75대의 수송기를 인도양에 배치했습니다. 스리랑카는 부시 정부의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전략 구상에서 핵심적인 지역입니다. 예일대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뉴욕타임즈에 이렇게 썼습니다. 쓰나미 재난은 “부시에게는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과 그 실패,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에서 벗어날 하나의 기회이다. 이곳은 미국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모범적 지역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미군을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자들로 홍보했음에도 지난 수십년 동안 제국주의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해온 이 지역의 노동계급과 빈민들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베트남이라는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최근 미군이 이라크에서 벌인 야만적 행동들이 이들에게 미 제국주의 및 제국주의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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