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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의 글 "독일 통일 교훈 올바로 이해한 드레스덴 연설"에 대한 비판 - 3

독어에 “falscher Zungenschlag”이란 표현이 있다. 말을 하려면 혓바닥(Zunge)을 굴려야 하는데, 의도와 어긋나는 상황을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할 때 혓바닥이 의도와 달리 어만(falsch) 곳을 때려(Schlag/schlagen)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걸 두고 사용하는 말이다.

 

염돈재의 글에 이런 ‘falscher Zungenschlag’이 있다. 정신분석 대상이다.

 

“우리가 독일 통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는 셋째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셋째, 우리는 서독이 동독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전된 금품 연평균 20억달러 가운데 77.1%는 서독 주민과 교회가 동독 친척과 교회에 보낸 물품이며,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지불한 금품은 15.7%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돈은 우편·철도·도로 사용료 및 정치범 석방 대금 등 동독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일 뿐 무상 지원은 한 푼도 없었다.”

 

“서독”이 경제지원을 했다는데 그 주체가 애매모호하다. 브란트와 슈미트 사민당 총리들이? 아니면 기민당 콜 총리가? 앞에서 “사민당이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다면” 하는데 과거 사민당이 집권할 때 그랬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민당의 정책을 계승하지 않은 콜 총리가 경제지원을 그만 두었다는 말인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 먹을 수가 없다.

 

대동독 경제지원 실상은 이렇다.

 

우선 내독 교역을 보자.

 

출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Peter Gey, Die Wirtschaftsbeziehung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1949-19 (1949-1989 서독과 동독간 경제관계, http://library.fes.de/pdf-files/bueros/seoul/02837.pdf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지속적인 상승을 보이고 있다. 이어진 선은 동독으로 수출, 점선은 동독에서 수입, 마지막 선은 거래액 - ou)

 

내독 교역관계는 1982년 콜 총리 정권이 등장한 후에도 지속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단절이 없다.


염돈재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전된 금품 연평균 20억달러 가운데 77.1%는 서독 주민과 교회가 동독 친척과 교회에 보낸 물품이며,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지불한 금품은 15.7%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어디서 얻어온 수치인지 알 수 없다.


쿤레(G. W. Kuhnle)의 1993년 박사논문 “Die Bedeutung und Vorteile der deutsch-deutschen
Wirtschaftsbeziehungen für die DDR. Eine Analyse unter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paraökonomischer Aspekte”(독.독 경제관계의 의미와 이점. 경제외적 관점을 특별 반영한 분석)에 근거하여 페터 가이가 젝공한 앞 자료에 의하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전된 금품은 연평균 40억 마르크를 웃돈다. 이중 약 50% 20억 마르크는 서독 정부의 각종 정책 – 스윙, 동독통과 고속도로 사용료 등 – 에 의해서 동독 정부에 이전된 금품이다. 그리고 서독 주민이 동독에 보낸 물품을 마르크로 환산하면 추정하면 연 약 10억 마르크가  된다. 이 외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시의 강제교환금, 비자수수료, 동독 통과고속도로에서의 구매 등 12억 마르크 상당의 금품이 동독에 이전되었다. 합산하면 40억 마르크(당시의 환율로 약 20억 달러)를 웃도는 수준이다. (참조: 같은 곳, 15쪽)

 

그리고 “ (…) 이 돈은 우편·철도·도로 사용료 및 정치범 석방 대금 등 동독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일 뿐 무상 지원은 한 푼도 없었다”고 하는데 누가 언제 무상 지원하자고 했었나?

 

그리고 호네커의 동독 주민의 물질적 생활수준을 높인다는 정책이 동독이 대외 자본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채무불능이 되었을 때 도와 준 사람이 누구였던가? 1983년 ‘공산주의 혐오주의자’ 바이에른주 총리 슈트라우스를 앞세워 콜 총리가 호네커에게 10억 마르크를 건내 주지 않았던가? 이게 동독 호네커 체제를 연장했다는 비판이 있다 (참조: 바이에른 공영방송 BR, http://www.br.de/nachrichten/strauss-kredit-ddr100.html) 우파 일간 디 벨트(Die Welt)는 이 거래를 두고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지 못했던 원수지간이 거의 최고의 친구관계가 된 경위”(“Wie aus Todfeinden ziemlich beste Freunde wurden”)라고 꼬집는다.

 


Scghon der Fototermin war eine Sensation: Am 24. Juli 1983 trafen sich Bayerns Ministerpräsident Franz Josef Strau0ß und der DDR-Staats- und Parteichef Erich Honecker im Gästehaus Hubertusstock am Werbellinsee

(출처: 디 벨트, http://www.welt.de/geschichte/article118317130/Wie-aus-Todfeinden-ziemlich-beste-Freunde-wurden.html)

 

물론, 내독경계선 지대에 설치된 자동발사장치 철거 등 반대급부가 있었다. 여기에 기민당, 사민당 다른 점이 없었다.


학자로 탈바꿈한 염돈재 학장님이 이젠 그만 빌어먹고 학자에 걸 맞는 자세를 취했으면 좋겠다. 토종적인 주둥이에서 나오는대로 말하겠다는 루터의 권위를 빌려 말하자면 좆까 그걸 생긴대로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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