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설 §23

절대적인 것을 주체로 상상하지[1] 않으면 뭔가 아니다라는 느낌은[2] 이런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은 영원하다>, <신은 도덕적인 세계질서다>, <신은 사랑이다> 등과 같은 명제를 사용하였다. 이런 명제에서는 참된 것이 밑도 끝도 없이 주어의 자리에 주체로[3] 앉혀질 뿐이지 자기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운동으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런 유의  명제의 첫머리에는 과 같은 낱말이 자리하고 있는데 낱말은 그 자체로 보면 한낱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며 이름 이상의 것이 아니다.[4] 술어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텅 비어 있는 이름뿐인 주어를 채워서 의미를 갖게 한다. 공허한 시초가 이렇게 매듭지어져야만 비로소 실재적인 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집어치우라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술어의 자리에 오는 영원, 도덕적인 세계질서 등에 관해서만, 혹은 철학의 시초기에서 그랬듯이 순수개념, 존재, 일자(一字) 등에 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소리는 덧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고집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고집할 수 없는 이유는 과 같은 낱말이 주어의 자리에 앉혀질 때 명시되는 것이 존재, 본질, 혹은 한낱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 즉 주체적인 것이 주어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가 이렇게 주체로 설정되었다고 해서 이 주체가 참다운 주체가 된 것은 아니다[5]. 단지 주체라고 미리 내다본[6] 상태일 뿐이다. 여기서 주체는 고정된 점으로 상정되어 있고 어딘가 기대야 하는 술어를 거기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격이다. 이렇게 주어에 술어를 주렁주렁 달아주는 운동은 단지 주어가 되는 주체에 관하여 지식을 소유한 자가 하는 운동일 뿐이지 결코 점으로 상정된 주체 자체에 속하는 운동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으로 얻어지는 성과는 단지 [지식을 소유한 자의 운동에 기대고 있는] 내용만이 주체로 서술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의 운동은 주어로 상정된 주체에 속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유의 운동이 임의로 다른 성질의 운동이 될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7] 주체가 단지 고정된 일개의 점으로 설정되어 있는 한 운동은 위와 같을 성질일 수밖에 없고 주체의 외각을 맴도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절대적인 것이 주체라고 영리하게 잡아채는 예지는[8] 절대적인 것의 개념이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예지는 개념을 부동의 점으로 묵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실재는 이와 반대로 자기운동을 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rfnis>

[3] 원문 . 이라고 번역한 라틴어를  독어화 한 외래어로서 <주어>라는 의미와 <주체>라는 의미가 있다.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범주론, 형이상학을 살펴보고, 최소한 데카르트가 를 어떻게 사유했는가 살펴봐야겠지만 우선 지나가겠다.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해야 할 일을 보면서 <정신현상학>을 제대로 읽으려면 생애의 일부분을 투자해야 한다는 Ludwig Sieb의 말을 실감한다.

[4]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논리학적인 <주어-술어>의 관계를 이름-표현>이라는 개념으로 대치한다.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 누군가를 한참 까는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