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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겸손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은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덕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겸손이란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누가 겸손을 지적하면 좀 역겨운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좌파의 논쟁을 보면 겸손이란 덕이 끼어 들 틈이 없이 살벌하게 진행되는 경우를 접한다. 여기 진보넷의 블로거들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나도 좌파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좌파와 좌파가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선에는 실천이라는 개념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겸손을 가지고 좌파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실천하는 가운데 실재하는 좌파의 요구에 따라 글쟁이행세를 하는 것도 좌파의 실천으로 쳐 준다면 좌파에 속하려고 노력하는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와 겸손>이라는 표제가 이젠 <좌파적인 실천과 겸손>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구체화 되었다.

 

실천하는 좌파가 겸손을 멀리하는 것은 인격수양이 부족하여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그런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천하는 좌파가 갖추고 있는 덕이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겸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은 독어권에서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겸손을 이야기할 때 Demut란 개념을 연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우리말에서 겸손을 이야기하는 맥락을 보면 독어의 Bescheidenheit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되는 것 같은데, Bescheidenheit란 중세에서 법원의 판결과 지시를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통찰하고 지혜롭게 대응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현실에 만족하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Demut의 어원을 보면 주인이 시키는 일을 두말없이 이행하는 노예의 자세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의미는 기독교가 강점하여 독점으로 삼고 절대 순종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거이기도 한다.

 

목사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겸손은 네 자신을 낮춰라인데, 이것이 전제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세를 낮추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역겨운 느낌을 충동시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또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수 있는 무리가 된다는 점이 역겨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모모 장로는 사장인데, 대기업의 이사인데 교회에 와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겸손을 보인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화장실 청소로 생계를 이어가는 누구는 교회에서 화장실청소를 해도 겸손이란 덕을 둘러쓸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런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겸손은 사회적 현실을 바꾸지 않고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개념이다.

 

목사들이 말하는 이런 겸손과 대조적인 겸손이 있다. 마리아와 예수가 보인 겸손이다.

 

마리아의 사건에서 그 사건 자체만을 보면 이렇다. 가부장제가 철저한 근동에서 혼인을 약속한 한 여성이 남편이 될 사람과 동침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일 사건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그 남편이 될 요셉은 임신을 받아들였다. 당시의 현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두고 중세의 참신한 신자들은 마리아의 겸손을 이야기하는데 “Niederträchtige Maria라는 표현을 쓴다. 모든 사람이 깔보고 돌로 쳐 죽일 행위를 한 비천한 마리아라는 것이다.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데까지 현실적으로 떨어진 마리아를 두고 겸손한 마리아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어떤가? 내 생각으론 예수는 겸손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20).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춰 세상에 온 것이 되면, 이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의 사건의 되어 예수사건의 본질을 간과하기 때문에 그랬지 않나 싶다. 예수의 사건이 단지 겸손의 사건이 아니라 정말 비천한 죄인이 되는 사건이었다는 점은 마태복음 27 54절에서 예수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는 진짜 죄인이 되어 죽은 다음 백부장이 예수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뒷받침하지 않나 한다.

 

실재하는 좌파의 실천은 이와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이야기되는 겸손을 멀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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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1

 

(§21) 그러나 이렇게 매개작용을 대하면 기겁하고 몸이 굳어지는 것은[1] 사실 매개와 절대적 인식의 속성이 정말 어떤 것이지 전혀 접해본 일이 없는[2]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매개란 오로지 자기동일성이 자기를 움직이는 힘일[3]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개란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으로서 <>외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수한 부정인 [자아로서의] <의식>이 행하는 힘이다[4]. 매개의 이런 운동을 순수한 추상화 차원으로 투영해서 이야기하면 이는 단순한 생성[5]이다. [주체성이 깃든] <> [보란 듯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생성 일반으로서[6], 이와 같은  매개작용은 [분열된 것을 붙들어 안고] 씨름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단순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바로 [항상] 생성되는 직접성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직접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직접성을 잘못 이해하여] 반성을 [즉 매개를] 진리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절대적인 것의 적극적인[7] [실천적인] 힘으로[8]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성을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반성이 바로 [즉 매개가] 참다운 것이 결과가 되게 하고 동시에 또한 이 결과와 그 생성과의 대립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성은 결과에서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참다운 것의 형태와 구별되지 않고 오히려 단순성으로 복귀한 [현재]완료형으로서의[9] 생성이기 때문이다. 태아는 [가능]()적으로는[10] 인격체임이 틀림없지만 아직 자기 자신을 인격체로 자각한 상태는[11] 아니다. 인격체로서의 자기 모습은[12] 오직 이성으로 연마된[13] 후에 나타난다. 이성은 이런 연마를 통해서 자기의 본래적인 모습을[14] 실현하여 그때그때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15] 이성의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6] 이와 같은 결과도 역시 단순한 직접성을 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로 나타나는 이성은 자기 안에서 자기자신을 누리는 자유인데 이런 자기자신을 자각한 자유는 자기와 대립되는 것을 한편으로 몰아내어 거기에 방치해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과 화해해 있는 상태에[17]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 라틴어 perhorrere, 혹은 perhorrescere를 독어화 한 것인데, 부들부들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물다라는 의미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2] 원문

[3] 원문 . 무순 말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역자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자기동일성(Sichselbstgleichheit)은 분열이 없는 자기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에서 동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자기(sich)와 뭔가 다른 것으로 분열되었다는 전제아래 자기동일성은 자기(sich)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동일성의 운동이 내적 필연성을 갖는 운동인가, 즉 매개운동이 필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정한 당위성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인가 분명하지 않다.

[4] 원문 ürsichseienden Ich, die reine Negativität>.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까닥 잘못하면 die reine Negativitätfürsichseiendes Ich에 걸지않고 <매개>에 거는 것이다. fürsichseindes Ich<> <의식>으로 번역하였다. Fürsichsein의 터전이 의식이기 때문에 그랬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현상학 서론과 연계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랬다. 이 부분에서 임석진 교수는 <순수한 부정><매개>에 걸어 매개란 순수한 부정성으로서라고 번역하는데 (임석진, 정신현상학, 2005, 57.) 이것은 지적직관이 범하는 오류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면 매개를 직관형식(Anschauungsform)의 대상인 객체형식(Objektform)으로 보기 때문에 매개를 실천(Praxis)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헤겔이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현상학의 헤겔은 그렇지 않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이점은 맑스가  <그룬트리세>에서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5] 원문

[6] 원문 überhaupt>

[7] 원문

[8] 원문

[9] 원문 ückgegangensein>

[10] 원문 . 관련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11] 원문

[12] 원문 <r sich>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이 부분을 읽으면서 탈나치화에 앞장섰던 튀빙엔 대학 수사학 교수 발터 옌스(Walter Jens)를 생각해 본다. 그도 나치 국가사회주의노동당 당원이었음이 2000년대 초반에 드러났는데 다행인지 그는 침해에 걸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치당 당원이었음을 의식의 저편에 방치해 두었다. 한번도 그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진정한 자유를 음미해 볼만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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