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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와 중앙권력

칸나일파님의 [진보정치, 지방선거 생각 2] 에 관련된 글.

먼발치에 있고 또 한국정당의 역관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진보진영, 즉 변혁을 추구하는 진영이 지지해야 하는 정당, 혹은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 단지 칸나일파님이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지적한 몇 가지 쟁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몇 마디 해보고자 한다.
 

기초의회 선거를 통해서 기성정치의 벽을 넘어 지역을 사고하는 당선자들이 기초의회를 장악하여 생활진보 걸음 나아갈 있는 정책을 있다는 견해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이것은 독일의 경우 지자체가 태동한 바덴뷔르템베르크지역 기초의회에서 최대당인 기민당보다 무소속후보가 30.38% 42.12% 비율로 훨씬 많이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Kommunalpolitik in den deutschen Ländern, 2003, 33 참조).

그러나 이런 현상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지자체가 1808년 프로이센의 슈타인 남작(1757∼1831)의 개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중세후기부터 농민전쟁과 민주주의 혁명이 잦았던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지역에서 태동했다는 점에 있다.

지자체에 대한 이런 접근은 지자체가 [존 롤즈가 닦아 논 지평에서 자란 마이클 월처 류의]공동체주의보다는 파리 꼬뮌에 더 가까운 자치정부의 태동이었고, 이러한 자치정부가 농민전쟁에서의 패배, 민주혁명의 좌절 등으로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관련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가 도입한 기초단체주의”(Kommunalismus)라는 개념에 기대어 스위스 국경지역의 남부독일에서 기초단체(Gemeinde)가 자치정부를 설립하려고 했던 노력을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지역의 기초단체(Gemeinde)는 중세 후반기 이후 정기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모여 행정집행인(Amtstraeger)을 선출하고, 해서는 안될 일과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이런 것을 어긴 행위를 처벌하는 재판을 열었다. 이런 구성원총회가 소집되지 않는 기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四人혹은 六人, 도시지역에서는 시평의회가 기초단체의 규범집행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주의란 공동체의 실생활관련 제반 사항을 조직하는 것으로서 구성원총회는 제헌의회의 성격을 가지며, 행정과 법집행을 자치적으로 집행하면서 대내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위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규는 기초단체의 자생적인 권리에 의한 것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누리는 권리와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권리와 의무는 협동조합적인 연합에서 자율적으로 노동하는 농민 혹은 수공업자가 갖는 권리가 된다.

이런 기초단체주의는 기초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기초단체에서 발전된 규범을 전체사회에 적용하는 경향을 갖게 됨으로써 결국 공화주의로 나아가가 된다. 이런 경향은 중앙권력체제를 형성하여 인민을 신민으로 만들고 행정의 대상으로 삼는 절대군주제와 맞부딪치게 되어 농민전쟁, 민주혁명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문제는 중앙권력과의 투쟁의 문제와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참조: Heinrich R. Schmidt, Gemeinde und Sittenzucht im protestantischen Europa der Frühen Neuzeit, in: Peter Blickle (Hrsg.), Theorien kommunaler Ordnung in Europa. 구글도서검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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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2

 

이성에 관하여 언급된 이와 같은 내용은 또한 이성은 합목적인 행위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될 수도 있겠다. 자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유에 대한 어긋난 생각이 자연을 사유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나았고 이어서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을 축출했던 탓에 목적이라는 형식 자체가 불신대상이 되었다.[1] 그러나 진정 사태는 그렇지 않다.[2]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한 것을 보면 목적이란 [최종목적으로] 처음부터 작용하는 것[3],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안주하는] 부동의 것,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다른 것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주체도 이와 같다. 주체의 동력은, 추상하자면, 자아로서의 의식[4],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부정성이다. 결과가 시초와 동일한 이유는 시초가 바로 목적이기 때문이다.[5] 이 문제는 실재하는 것과 그 개념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데[6], 실재하는 것이[7] 그의 개념과 동일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바로 애당초 목적으로서 직접적인 것이 자기를[8],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순수한 실재를[9] 바로 그 목적 안에 갖기 때문이다.[10] [실현까지] 완전히 전개된 목적, 달리 표현하면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는 엉긴 것이 펼쳐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렇게 안위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11] 바로 자기다. 이러한 자기가 시초의 직접성 및 단순성과 일치하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자기란 결과로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고 바로 이렇게 복귀한 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관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동일성과 단순성[12]이다.



[1]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바로 목적론이라는 편견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necessario existere“), 유일하고(„unicus“), 오로지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고(ex sola suae naturae necessitate esse et agree), 모든 사물의 자유로운 원인(omnium rerum causa libera) 되고, 모든 것이 안에 있고 신에 종속되어 있으며 없이는 있을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는 사실(„quod omnia in Deo sint et ab ipso ita pendeant ut sine ipso nec esse nec concipi possint“)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목적론의 동기로 사람들이 자신이 욕망을 가지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의 모든 사물이 그들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 움직인다“(„omnes res naturales ut ipsos propter finem agere)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편견이 우상이 되어 신이 자연을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의 최종목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데 (omnium rerum causas finales intelligere easque explicare) 전전긍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종목적을 쫓는 목적론은 질문에 질문을 거듭(causarum causas rogare)하지만 최종목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지의 망명지인 신의 의지로(ad Dei voluntatem hoc est ignorantiae asylum) 도주하여 안위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자를 자연의 사물을 학문하는 자세로 인식하려고(res naturalis ut doctus intelligere) 하지 않고 자연과 신의 통역자(naturae deorumque interpretes)로 행세한다고 한다. 아무튼 사물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이것은 신의 무결성(perfectio)을 지양하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활동한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뭔가를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원문 .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달리

[3] 원문

[4] 원문 ürsichsein>

[5]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4개 원인 (causa materialis/질료인, causa formalis/형상인, causa efficiens/동력인, causa finalis/목적인)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 13장과 자연학, 2 3장 참조). 그리고 헤겔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서는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이 하나라고 했던 것에 기대어 (자연학, 27, 198a 24 이하 참조) 주체를 설명하는 것 같다.

[6] 원문 < oder>

[7] 원문

[8] 원문

[9] 원문 . 정의로서의 개념적인 실재

[1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에 기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식(eidos), 혹은 원형(paradeigma)이 사유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바로 개별적인 것의 본질(ousia)이며, 개별적인 것이 그런 [유의] 개별적인 것이 (to ti en einai)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정의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의란 헤겔의 단순한 개념이상의 것이 아닌>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첫째 요인(proton dia ti)을 사람이 사람이 되는 최종규정(eis ton logon eschatonanágetai)과 같게 하여 이것을 원인(aition) 혹은 원리(arche)라고 하고 이것은 존재하는 그 무엇의 형식, 즉 본질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같은 곳 참조).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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