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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래서 [지각에서의] <이것>은 [직접적인 <이것>이 아니라 사상(=반성)규정으로서] <이것이 아닌 것>, 달리 표현하면 <이것을 거둬 치운 것>으로 정립된다. [지각의 부정은 이런 거둬치우기이기 때문에] 그 부정의 결과는 공허한 무(無)가 아니라, 규정된 무, 달리 표현하면 어떤 내용, 즉 [지시된] <이것>의 무인 것이다. 이런 관계로(=감각적인 <이것>을 거둬치운 것이기 때문에) 이 무에는 감각적인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직접적인 확신이 사념하는(=지시된) 개별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보편적인 것이 자신을 성질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거둬치우다/das Aufheben>는 우리가 부정[행위]에서 보았듯이 참으로 그 이중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표현이다. <거둬치우다>는 <거둬치워 없애버리다>라는 부정임과 동시에 <거둬치워 두다>라는 간직이다. [<이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무는 [감각적 확신의 <이것>의] 직접성을 간직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감각적인 것이다. 다만, 이 무(無)가 간직하는 직접성은 [모든 <이것>을 품는] 보편적인 직접성인 것이다. — [직접적 확신이 지시하는 <이것>이 사상규정상 모든 <이것>의 존재(= 모든 <이것>이 있다는 것)외 아무것도 아닌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감각규정이 첨가되어야 한다.] 존재가 보편적인 것에 속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존재에는 직접an ihm 매개 혹은 부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보편적인 것에는 사상규정과 함께 감각규정이 어울려 있다). 존재는 이런 관계를 그 직접성에서 바로 표현하는 가운데 일개의 구별된, 규정된 ["Das Hier ist ein Baum"과 같은] {성질}이 된다. 이와 같은 일개의 {성질}이 정립됨과 동시에 다수의 ["Das Hier ist ein Haus", "Das Hier ist ein Wald" 등] 그런 {성질}들이, 서로 부정하는(="Das Hier ist nicht ein Baum, sondern ein Haus"둥) 관계를 이루면서 정립된다. [그러나] 이 모든 {성질}들이 보편적인 것의 단순성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규정이 하나 더 추가되어야만 본래의 {성질}이 되는 이런 규정성들은 각기 자기와만 관계하고(=자기동일성만을 주장하고), 서로 무관하고, 다들 따로따로, 다른 이들로부터 구애받는 일 없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앞에서 말한 사상규정적인] 단순하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보편성에 있는데, 이 보편성은 다시 그들과 구별되고 그들에 얽매어 있지 않다. 이 보편성은 [모든 직접적 <이것>이 사상(捨象)된= <이것>의 <나무>하고의 관계에 구애하지 않고, 오로지 <이것>과 <이것>과의 관계에서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으로서 <지양된 이것>이 되는] 순수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함,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모두 함께 널려있는 매체다. 이렇게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보편성 안에 함께 있지만, 이 보편성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접촉하는 법이 없이 제각기 그 안을 채우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테두리 밖에서 따로 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보편성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함께 있지만] 서로 관계[간섭]하는 법이 없이 따로따로 논다. — 이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체를 하여간 물성 혹은 [감각적인 확신이 말하고 지시하는 <이것>에 보편성이란 가상으로 항상 따르는 사상규정상의] 순수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감각적 확신이 말하고자/지시하고자 했던 것의 부정의 결과로 나타난] <여기>와 <지금>이다. 즉,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지시하는] 다수의 <여기> 혹은 <지금>이 단순하게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런 다수의 규정성에 있다. 직접적 확신은 <이것>이 단순한 통일체일 뿐이라는 것에 대항하여, “그건 진부한 것이다. 그건 대명사 <이것>의 사용법을 부정이니 매개니 지양이니 등 알아먹기 힘든 말을 사용하면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너는 내 손가락만 보고 내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내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 왈: “그것 역시 가상에 불과하다.”] [직접적 확신의 생각과는 달리] 다수의 [감각적인] 규정성 역시 단순한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직접적 확신의 손끝에 달린 것을 살펴보자.] 여기 이 소금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여기>이면서 동시에 다층․다각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얗고 또한 찌르듯이 짜고, 또한 입방체이며, 또한 일정한 무게를 갖는 등 이렇게 계속 <또한>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다수의 {성질}들은 모두 단순한 <여기>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는데, 이때 각 {성질}은 그런 하나의 일부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온통 두루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소금이 일정 부분만 짜지 않고 온통 짜다.] 어떤 성질도 이 <여기>외 다른 <여기>를 갖지 않고, 모두가 이 <여기>안 어디에나 있고, 이 {성질}이 있는 곳에 또한 다른 {성질}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여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각 {성질}이 하나의 <여기>에 온통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 흰색이 입방체에 영향을 주거나 변형을 가하는 일이 없다. 또 흰색과 입방체가 짠맛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다. 이렇게 어떤 {성질}도 다른 {성질}에 영향을 주는 법이 없고, 저마다 [아무런 구김 없이 순진하게 자기만을 드러내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기 자신과만의 단순한 관계 속에 침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성질}을 가만히 놔두고, 관계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애가 없는 <또한>에 의해서 일뿐이다. [이렇게 쭉 살펴보니 물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또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이 <또한>이 바로 순수한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매체, 즉 {성질=감각 규정성}들을 총괄하는 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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