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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4)-이어서

사물의 자기동일성엔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되는] 지속적인 존재가 전제된다.

 

바로 이 문제를 흄이 <인성론> 1권, 4부 2장 'Of skepticism with regard to senses'에서 다룬다.


흄은 [지각]외부존재의 진실성은  이성적으로(by reason) 증명할 수 없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인데도, 우리는 그걸 안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건 인간 본성상 선택의 여지가 없고(“Nature has not left this to his [회의주의자의] choice.”) 모든 추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That is a point, which we must take for granted in all our reasonings.”)이라고 한다. 그래서 외부존재로서의 ‘사물’('body')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단지 어떤 원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body')의 존재를 믿게 하는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흄은 이어서 [외부]사물의 존재를 [지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와 [지각이 중단되어도 지속하는] 지속적인 존재라는 측면으로 나눠 다루면서, 외부존재에 대한 믿음이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추적한다. 감각(senses), 이성(reason), 그리고 상상력(imagination)이 그 영역들이다.


흄은 외부존재는 오류와 환영 같은 것에 의해서("by a kind of fallacy and illusion") 오로지 믿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절대 감각과 이성의 영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감각은 자기를 기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선 감각은 사물의 지속성이란 관념(notion)이 발생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논리적으로] 없다. 왜냐하면, [감각에서] 대상이 사라졌는데 대상이 계속 있다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으로서 감각이 중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각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에서 가능한 사념은 단지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이 인상들(impressions)을  [외부존재를] ‘재현하는 상’으로 아니면 외부존재 자체로 제시해야한다 ("and in order to that, [senses] must present their impressions either as images and representations, or as these very distinct and external existences.") 

 

근데 감각은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은 인상들을 “일개의 단순한 지각”(“a single perception",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eine einfache Wahrnehmung', 즉 아무런 접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 둘로 갈라짐이 없는 일개의 지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은 ”이중존재“(”double existence")를 생산할 수 없다. 뭔가 다른 것, 즉 이성 혹은 상상력의 개입으로 이중존재라는 환영이 발생하고 그 이중존재 간의 관계가 “흡사”(“resemblance”)니 “야기”(“causation”)니 하는 기만이 행해질 수 있다.

 

인상을 재현으로 보는 배경에는 가상(Schein)이 자리하고 있다. 가상은 의식의 소여(所與)태에서 뭔가가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고 가정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근데, 감각에서는 현상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They [인상들] must necessarily in every particular  appear what they are, and be what they appear.") 가상의 배경을 이루는 현상과 존재의 분리는 감각영역 밖에서 혹은 감각이 아닌 다른 것이 감각영역에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 감각과 다른 뭔가는 감각의 내용들을 감각의 영역에서 현존재의 영역인 존재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결국, 착각의 문제는 영역의 문제다.

 

상품은 시장생산을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배 하에서 이중성격을 지니는 상품이 되듯이 사물의 이중성(정확히 말하면 Einheit-Eins-Eigenschaft로 짜여 진 삼중성) 역시 어떤 영역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 물어야 할 것 같다. 누구/무엇의 지배아래 누가/무엇이 감각의 영역 이쪽저쪽에 등장하여 뭘 사고파는지 궁금하다. 착각, 기만, 불량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게 뭐지?

 

흄은 인상의 이중성은 상상력이 감각의 영역을 지배할 때 그렇고 이성(reason)이 지배하면 현상과 존재의 분리가 발생한다고 하는 것 같다.

 

칸트도 감각에 대한 견해에서 흄을 따르는 것 같다.

 

칸트는 우선 현상과 가상을 구별하고, 가상의 위상은 진리와 같은 것으로서 대상과 오성 간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감각(Sinne=senses)은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오성은 형식적 진리를 산출하는 법칙을 준수하기 때문에 절대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다. 근데 감각과 오성 외에 다른 인식원천이 없기 때문에 오류는 단지 감성(Sinnlichkeit)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알 수 없게(unbemerkt) 오성을 침범(Einfluss=영향)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A294).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감각과 오성은 함수적인 관계에서와 같이 직접 관계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데, 감성이 그러지 않고 오성행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벌어지고 , 그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포인트는 흄과 같이 이와 같은 오류는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단지 칸트는 이런 오류를 심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선험적 가상(transzendentaler Schein)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한다.

 

선험적 가상은, 내재적 원칙과 초월적 원칙 중에서, 내재적 원칙을 남용하면서 그 남용을 초월적 원칙에 따른 순수오성의 확장이라고 뻐기는데 있다고 칸트는 설명한다(A296).

 

이런 뻐김은 선험적 비판을 통해서 단지 허구라는 것이 폭로되어도 고개를 수그리지 않는다. 주관적인 인식능력이 이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건 주관적인 인식능력일 뿐인 근본규칙(Grundregel)과 그 사용에 관한 격률(Maxime)이 객관적인 원칙(Grundsätze)의 탈을 쓰고 오성의 편에 서서, 우리가 우리의 개념들을 어떻게든 연결해야 하는 주관적 필연성을 개관적인 필연성으로, 즉 물자체의 규정으로 돌리는데 있다.  그래서 이런 착각("llusion")은 전혀 회피할 수 없다(A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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