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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24
    페터 한트케의 시 "Lied Vom Kindsein" 번역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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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7/23
    페터 한트케의 시 "Lied Vom Kindsein" 번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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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7/21
    자동차 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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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4/17
    커피필터 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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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4/14
    비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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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4/13
    예수 믿고 천당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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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4/13
    201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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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4/12
    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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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4/12
    당은 백화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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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4/11
    메스꺼운 조선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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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시 "Lied Vom Kindsein" 번역 주해

1. 제목

“Lied Vom Kindsein”을 “어린이존재에 대한 노래”라고 번역했는데 별로 맘에 안 든다. 매끈하지 않고 시 제목으로도 안 어울린다. 인터넷에 이 시의 번역이 검색되는데, 제목을 “유년기의 노래”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맘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Kindsein”은 흐르른 시간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절대 다른 것”(성 아우구스티누스), 즉 영원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시간이 이런 영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의식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면 “Kindsein”은 유년기라기보다는 아무런 분리가 없는 원천적인 즉자적인 상태가 아닌가 한다. 실존 유년기는 지나간 현존양식으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들려 올려져 (zeitenthoben) 지금(gegenwärtig) [의식에] präsent한  “Kindsein”이 테마가 아닌가 한다.  이런 상태가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ontogenetisch) 보통 유년기로 제한되어 있지만 말이다.

2. 첫째 연

 Als das Kind Kind war,
 ging es mit hängenden Armen,
 wollte der Bach sei ein Fluß,
 der Fluß sei ein Strom,
 und diese Pfütze das Meer.

- “als das Kind Kind war”
언뜻 보기에 시간접속사 “als”가 앞에서 이야기된 것과 모순을 이룬다. 그러나 정관사와 함께 사용된 "Kind"와 관사 없이 사용된 “Kind"를 분석해 보면 제목의 설명에서 이야기된 것이 더욱 뒷받침된다.
[독어] 텍스트에서 사람이나 사물이 처음 언급될 때 정관사, 부정관사 모두 사용된다. 그러나 “Es war einmal ein Mädchen ..."에서와 같이 주로 부정관사가 사용되는데 이때 부정관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독자로 하여금 대체 어떤 사람 혹은 사물인지 기대하게 만든다. 반면 정관사는 "Der Mensch hat unveräusserliche Rechte ...”에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정의된 개념이 언급될 때 혹은 독자에게 뭘 가리키는지 분명할 때 처음 언급될지라도 사용된다.

정관사와 함께 사용된 “das Kind”는 역자와 함께 독자에게 뭘 가리키는지 분명한 경우에 속하는 것 같다. 역자는 t시인은 여기서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가 잊지 않고 내면에 간직하는 “어린이”를 참조하고 있다. 그래서 문법적으로는 제3자의 관점에서 “Kindsein”이 주제화되지만 내용적으로는 “어린이”에 대한 직관적이고 밀접한 앎(intime Kenntnisse)이 전제되어 있다. 정관사와 부정관사를 통한 이런 언어놀이(Sprachspiel)를 관사가 없는 우리말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분명 좋은 번역이 있을 텐데 "das Kind"를 앞의 내용을 참작해서 우선 “내 안에 있는 아이”로 번역해 보았다.

관사 없이 사용된 두 번째 “Kind”는 “온통 아이”로 번역해 보았다. 우선 “Kind”를 관사 없이 사용한 것이 역자의 언어감각엔 좀 낯설다. “Ich war [noch] ein Kind, als ich ...”해야지 “Ich war Kind, als ...” 하면 뭔가 아닌 느낌이다. 둘 다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이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Ich war [noch] ein Kind ...”에는 “Kindsein”으로부터 벗어나와 자신의 유년기를 대상화하는, 자신을 유년이라는 집합의 한 요소로 보는 대자적인 반성의 계기가 있는 것 같다. 반면 관사 없이 “Ich war Kind”하면 “Kindsein”으로 되돌아가 다시 즉자적인 “Kindsein”이 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억지인가? 암튼, 이런 이유로 관사 없이 사용된 “Kind”를 “Kindsein”과 같은 선상에 놓고 그 즉자적인 의미를 “온통”으로 옮겨 보았다.

- "mit hängenden Armen"

인터넷에 검색된 “팔을 휘저으며”란 한글 번역은 “with its arms swinging”이란 영어번역을 참조한 것 같다. 그러나 이 표현은 원문의 의미와 좀 다른 것 같다. “mit hängenden Schultern”하면 패자의 “축 처진 어깨”를 의미한다. “팔을 휘저으며”에는 뭔가 힘이 들어가고 의식적으로 몸을 컨트롤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와 달리 원문 "mit hängenden Armen"은 팔이 혼자 놀듯 덜렁덜렁한다는 의미다. 아직 사회적으로, 군사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어린이 특유의, 몸가짐을 배우기 이전의 몸동작을 의미하는 것 같다.

- “wollte”

“욕망의 세계에서 살았다”로 옮겼다. “Kindsein”에 속하는 행동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고스란히 취하려는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의 행동과 유사해서 그랬다. 제3자 관점에서 서술되는 문장에서 뜬금없이 “diese Pfütze”가 등장하는데 이건 문법적으로 완전히 틀리다. 감각적 확신의 무매개성으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시를 읽는 중 빌 워터슨의 캘빈과 홉스가 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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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시 "Lied Vom Kindsein" 번역시도

좌파적인 베를린 관광을 구상하다가 오늘 페테 한트케(Peter Handke)의 시 “Das Lied vom Kindsein”을 번역하게 되었다. 좌파적인 베를린 관광의  첫 대상으로 “Siegessäule”를 골랐는데 이것이 한국에서는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 “Der Himmel über Berlin”(“베를린 천사의 시”)가 오버렙되어 “천사의 탑”으로도 불리는 것 같다.

그래서 “군국주의 상징으로서 독일에서 가장 쓸데없는 시대착오적인 기념물”(기민당 전사무총장 하이너 가이쓸러)로써 제거해야 할 대상인 전승기념탑이 천사의 탑으로 둔갑한 배경을 조명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근데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Der Himmel über Berlin”이 정신현상학을 거꾸로 읽는 것 같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가 정신현상학의 “감각적적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번역 첫 시도는 다음과 같다.




어린이존재에 대한 노래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는] 팔을 덜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웅덩이를 보면 물고를 틀어 물이 흐르게 하고] 

그 도랑물이 강이 되고

그 강이 대하가 되고

바로 그 웅덩이가 바다가 되는 [욕망의 세계에서 살았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온통] 아이라는 걸  몰랐다.

아이에겐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것이었고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하나였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그 어느 것에도 굳어진 생각이 없었고,

몸에 베인 행동이 없었다.

종종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뜬금없이 뛰기도 했고

  머리엔 가마가 [그대로 보였고]

사진 찍을 때 표정관리를 하지 않았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하기 전[야]였다.

  왜 나는 나지? 왜 네가 아니지?

왜 나는 여기에 있지? 왜 저기에 있지 않지?

언제 시간이 시작했지? 어디에 공간의 끝이 있지?

태양아래 산다는 것이 단지 꿈일 뿐이 아닐까?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이

   단지 [다른] 세계 앞에 [놓여있는] 세계의 가상일뿐이 아닐까?

악의 존재와 정말로 악에 속한 사람들의\

존재가 사실일까?

어떻게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내가 이렇게 되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렇게 존재하는 내가 언젠가 더 이상 이렇게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가능하지?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시금치가, 완두콩이, 우유쌀죽이,

그리고 데친 콜리플라워가 밥상에 올라오면 억지로 먹었다.

근데 아직 이런 모든 걸 먹는다. 챙겨서 먹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언젠가 낯선 침대에서 깨어났다.

이젠 반복해서 그런다.  

[그땐]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이젠 운이 좋아야만 그렇다.

그땐 천국을 분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젠 잘해봐야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그 땐 無를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無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내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신바람이 나게 놀았다.

이젠, 그때와 같이 하는 일에 푹  빠지는 경우는, 겨우

하는  일이 밥벌이일 경우다.


[내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양식은 사과와 빵으로 충분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딸기가 아이가 벌린 손에 딸기만의 [독특한] 촉감으로 떨어졌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싱싱한 호도를 먹으면 혀가 떨떠름해졌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아이는 어떤 산에 오르더라도 그 다음으로 높은 산을 동경했고

어떤 도시에 가더라도 더 큰 도시를 동경했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 팔을 뻗어 버찌를 딸 때의 [짜릿한] 흥분은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수줍어했다

아직도 수줍어한다. 

첫눈을 기다렸다

아직도 그렇게 첫눈을 기다린다.
 
[내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막대기를 하나를 창 삼아 선악과나무에 던졌다 

그 창이, 꽂인 그 자리에, 지금도 파르르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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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썬팅

독일 여행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종종 독일에서는 썬팅한 자동차가 보기 드물다며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럴 때마다 속으론 ‘별것에 관심도 있네’하면서 “한국에서는 썬팅을 다 하나보죠”하고 마는데, 자꾸 같은 질문을 받다 보니 나도 “왜 그럴까?” 질문하게 된다.

그 이유를 조사할 툴이 없고 또 그럴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내 자신을 묻는 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동차 썬팅을 어떻게 생각하지?”

한마디로 말해서 유치하다.

독일에서 “투명성”은 아마 68세대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동인은 다양했다. 그 중 하나가 교수들의 권위주의적인 아비튀스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교수가운아래 천년 묵은 곰팡내”(“Unter den Talaren Muff von 1000 Jahren”)란 슬로건아래  권위주의적인 전통학문과 독일 제3제국 천년을 꿈꾸다 13년 만에 망한 나치에 기생하고 전후 독일로 연명한 교수들을 꼬집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은폐되어 썩은 것들을 활짝 열어제끼자는 말이었다.

이런 마인드는 학생들의 생활환경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당시 대학생들은 방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게 커튼을 걷어 치워버리고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런 마인드는 68세대가 차후 독일의 주류가 되면서 지배적의 멋 감각으로 (최소한 기능엘리트층에서) 일반화된다. 68세대에 의해서 사회화된 사람들은 바우하우스(Bauhaus) 스타일의 열린 공간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계에서는 복고풍 디자인의 벤츠 S 클래스보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감각을 보이는 Audi A8를 선호한다. 거기다 썬팅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마 신성 모독에 준한 행동일 것이다.

썬팅을 한 승용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썬팅을 한 승용차는 십중팔구 VIP용 고급 승용차이거나 아니면 뭔가를 보여주려는 20대 초반 시골 혹은 저학력 풋내기들이다. 썬팅에 대한 유치한 느낌이 여기에 있다.

썬팅에 대한 한국의 느낌은 물론 다를 것이다. 허구한 “멋”보다는 다른 기능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허구한 “멋”이 주요 이유라면, 다시 말해서 썬팅을 하는 것이 주류층의 멋이고 그것이 일반화되었다면 이건 한국사회의 유동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독일 사람들은 보통 상류층의 멋을 따라가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제멋대로 살고 나쁘게 말하면 사회 계층화의 골이 깊다. 이런 사회계층화가 가장 심한 부분이 교육이다. 한국에서는 독일 교육제도가 좋게 평가되는 것 같은데, 어린이를 3분류로 구분하여 교육하는 것은 그 근간이 비민주적이고 또 비민주적이다.

암튼, 나에게 자동차 썬팅은 좀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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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필터 틀었어?

„커피필터 틀었어?“

„응?“

짝지가 좀 짜쯩난 목소리로 반복한다.

„커피필터 틀었냐고?“

나는 되묻는다.

„커피필터 틀었냐고?“

짝지의 목소리 뚜겅 열리기 일보직전.

„커피필터가 터졌나고?“

그제야 짝지가 한 말이 그대로 뇌에 전달된다.

„아니, 필터를 버리는 과정에서 좀 흘렸나봐.“


부엌  라디오에서 팝송이 흘러나왔다. 티나 터나, 사이먼 가펑클 등 에버그린. 항상 듣는 라디오 방송이 아니다. 커피와 바질리쿰 향이 은은한다. 오래된 커피머신이 망가진 후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먹는다. 유리 주전자를 버릴 수 없어서 벼룩시장에서 사기 핸드드립를 구해다가 커피를 내려먹는다. 물이 완전히 다 내려가지 전에 성급히 커피 한잔을 따라 먹었다. 아직 축축한 커피필터를 핸드드립에서 꺼내는 과정에서 싱크대에 커피를 좀 흘렸다.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는 짝지에게 다른 방송을 틀였나고 물었다. 어제 저녁 잘못하다가 다른 방송을 틀게되었고 평소 듣는 방송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 뇌는 아직 이 대화의 말들을 재현하면서 부엌에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짝지는 아침 세면을 마치고 싱크대에 흘린 커피를 보고 나에게 이렇게 질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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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론

비지? 한국 사회주의권의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종종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의아해 할 때가 있다.

비지하면 얼른 떠오르는게 비지찌게. 고기가 귀한 시절 (1년에 한 두어번 정도 먹었었나?) 삼겹살을 넣고 끓인 비지찌게.

그래서 그런지 내 머리는 비지론에 비지와 삼겹살을 연상하고 침샘에 명령하여 군침을 흘리게 한다. 근데 뭔지 알고보니 맛이 싹 가신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비지론은 국공합작에 기대고 있다 (노정협의 <임박한 4.11 총선과 노동자의 전략 전술> 참조).

쉽게 말해서 삼겹살이 되자는 이야긴데, 오류가 심해도 보통 심한 게 아니다. 내 뇌주름의 오류야 연상착오라고 어여쁘게 봐 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근데 국공합작에 기대어 야권연대, 비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좌파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관념론에 빠질 수 있을까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우선 존재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한다.  아예 눈을 감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있지 않는 것을 어디다 갖다 붙였다  떼었다 한다. 한국에 중국의 공산당과 같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현안인데, 공산당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논증한다. 마오를 읽기 전에 먼저 비트겐슈타인 읽기를 권하고 싶다.

 기초적인 존재론적 오류가 범주의 오류로 이어진다. 계급 동맹을, 다시 말해서 조직된 계급, 즉 당 간의 동맹을 사안적인 동맹과 혼돈하고 있다. 예컨대 무상급식과 같은 사안적 동맹과 조직적 동맹을 혼돈하고 있다. 사안적 동맹은 조직, 즉 당이 부재해도 이야기될 수 있는 범주다. 그러나 조직적 동맹은 당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야기 될 수 없다. 고등교육이 필요없는 상식이다.

몰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공합작이 있기 전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생사를 건 싸움을 했다. 그리고 당의 생존을 위해서 국민당 치하로 들어가지 않고 대려 국민당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합작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 했을 때 했다. 이게 국공합작의 역사적 교훈이다.

암튼, 삼겹살은 좋아하지만 비지론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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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천당가자

„예수 믿고 천당가자“가 기독교의 키포인트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의 „지옥에 가도 예수를 따르겠다“, 즉 예수 믿는 걸로 족하겠다는 무조건적인(kategorisch) 고백에 견주어 보면 예수 믿는 것과 천당가는 걸 수단과 목적 혹은 전제와 결론의 관계로 추락시키는 천박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 점은 차지하고 이 표현을 좀 살펴보자.

이게 기독교의 가장 역겨운 표현이라는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작은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은 25장 31절 이하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33절-46절 이하 이렇게 쓰여있다.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강조는 ou)

여기에 누가 뭘 척도로 하여 최후심판을 하는지 분명히 적혀 있다.

척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야훼가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다.

이런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믿음이 관계의 표현이라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직접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와 관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주렸고,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나 였으며, 이런 형제와 관계하는 것이 직접 나와 관계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과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도 아니다. 구별할 수 없는 하나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와 관계하는 것은  마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따라 누구의 이름으로, 예컨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원문„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βασιλεὺς ἐρεῖ αὐτοῖς,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ἐφ' ὅσον ἐποιήσατε ἑνὶ τούτων τῶν ἀδελφῶν μου τῶν ἐλαχίστων, ἐμοὶ ἐποιήσατε.“에서 이런 직유, 은유, 혹은 누구의 이름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 살던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가 역사적인 예수를 알던 모르던, 예수와 직접 관계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야훼의 나라를 업으로 받는 행위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는 항상 읽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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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3

블로그 공간에서 날 보여줄 때도 있다. 여기서 „나“라는 건 나의 옛이야기다.  그러나 블러그 공간에서 보여주는 이런 나는 극복되었거나 이상화된 나다. 보여줘도 쑥스럽지 않는 나다.

오늘 이곳 블로그에 올려진 김지하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들으면서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들어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금관의 예수> 공연 중 불렀던가? 어딘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삐쩍 말라 윤곽이 뚜렸했던 누님의 모습은 생생하다.  보고 싶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짐을 자주 챙기게 된다. 뭘 버리고 뭘 가지고 가지? 가지고 가는 양은 점점 준다. 전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 버리고 가게 된다. 버리고 가면 뭔가 내 한쪽을 버리고 가는 것 같아서 망설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누님이 보냈던 엽서들을 읽는다. 생일 때 내가 어려워 할 때 날 챙기고 위로하는 엽서들이다. 무심히 읽었던 것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갈 때  누님의 마음이 물씬 다가온다. 몸이 그립다. 안아주고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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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

1.

붉은 색은 좌파의 전용으로 알고 있는데 새누리당이 붉은 점퍼를 입고 다닌다. 노란색은 독일의 경우 친기업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색인데 매우 헷갈린다.

2.

야권연대란 걸 이해할 수 없다. 독일의 경우 진보적 좌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야권연대를 거부해 왔다. 1차대전 전쟁신용법안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독립사민당이 떨어져 나와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원자력과 나토이중결정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반전.반핵.평화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와 녹색당을 결성하였고, 비정규직, 노동자파견법, 실업자수당 사회수당으로 하락 등 신자유주의 개혁정책 <아젠다 2010>를 실행한 사민당에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이 떨어져 나와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을 결성했다. WASG의 경우 심지어 사민당 당수가 탈당하여 WASG에 합류했다. 통합진보당으로, 그러니까 결국 민주통합당으로 간 한국의 진보거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권연대란 게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3.

4.11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 관련,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언론은 총선결과에 잠깐 얼어붙더니 금새 회복하고 긍정적인 평가로 말머리를 돌린다. 야권연대가 수도권에서는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물음표를 달고 싶다. 여야를 왔다갔다하는 17대, 18대, 19대 총선의 결과를 보면 서울이란 대도시의 특성이 더 작용한 게 아닌가 한다. 서울을 몰라서 이렇다저렇다 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일정한 정당에 투표하는 밀리외(millieu)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없거나 다양해서 투표결과가 매우 유동적이지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수도권에서의 총선결과를 대선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판단은 속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총선결과는 여촌야도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  인증샷수준의 순간포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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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백화점이 아니다

당을 백화점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강령없이 이것저것 늘어논 무리들이 참패.

 

유권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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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꺼운 조선일보 칼럼

종종 성경책을 들여다 본다. 신앙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성경책 읽기가  메스꺼운 느낌에 약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의 "젊은 친구, 현실에는 '메시아'가 없네"란 글을 읽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음식이라면 시원한 소주 한잔으로 속을 달랠 수 있겠지만 글로 그렇게 되면 달리 방법이 없다.

마태복음 5장 37절의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가 성경의 말하기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읽기 힘들고 속이 탈 때도 있지만 메스꺼운 느낌은 주지 않는다. 아니 소주와 함께 성경 읽기가 메스꺼운 느낌엔 최고의 약이 된다.

„오십줄“이 아니라 오학년 인생으로, 그것도 스스로 삶을 향유하지 못하고 „직업상 세상의 잘난 인물들을 만나“온 전형적인 기생의 인생으로 젊은이들에게 뭔가를 은근슬쩍 권한다.

대화체를 차용해서 배려의 제스춰까지 취하지만 말 그대로 차용일 뿐이다. 자질구레한  걸 홀로 나열하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리저리 구불거리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용이 아니라 찌라시 미꾸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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