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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9)


이때 뒷문으로, 규범[보통]적인 것(고정화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섣불리 문제시하는 반면, 이탈(Abweichung)은 (변화로서) 어떤 식으로든 항상 “좋은” 것으로 보는 시각의 뒷문으로 - 이론적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그리고 극도로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상태로  -  규범적인 관점이 잠입하여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에] 배어있는 규범성이 널리 퍼진 한 예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Cultural Studies에서 바로 눈에 뜨이는 경향을, 즉 미시실천들과 지역적인 투쟁들을 - 제도화된 (거시-)구조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 정치적으로 낭만화 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이에 대한 비판으로 Stäheli 2004 참조). 이런 맥락에서 빈번히 (미시-실천들이 갖는 의미의 핵심적인 참조로서의) 푸코에 기대어 푸코[의 참뜻]에 배치되는 “저기 저 위”의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에 “여기 아래”의 다양한, 이쪽저쪽 다방면으로 뻗어 나가는, 풀뿌리 실천들을 대립시키는 천진난만한/단순한 이분법적인 권력구도가, 미시-실천들이 [혹시] 반동적, 반해방적이지 않나  연구실천을 통해서 [그 사실여부를 따져보지 않고] 그걸 아예 개념적으로 배제한 권력구도가 복구된다.1)

 

실질적인 연구에서(Forschungspraxis/연구실천) - 그러지 않다고 하지만 - 빈번히 특정한 단절(Bruch)과 전위(Verschiebung)를 [선호하고] 강조하는 게 [알게 모르게] 배어있다는 게 드러나는 마당에서 [그걸 알아차리고 그렇다고] 자인하지 않은 규범성은 이때 자칭 반-제도적인 역동성들의 긍정을 넘어서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다. 규범성을 이렇게 이론적으로 자인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명시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모든 요구들이 다 같은-타당성을 갖는다는 이론적인 긍정이 [특정한] 사례와 연구영역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선택이 아카데미[대학]이란 정치적 환경(Umfeld)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겠지만, 네오파시즘적인 하위문화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진보적인 하위문화에 관심을 갖고, 억압적인 기구에 대항하는 반-제도적인 실천들에는 관심을 갖지만 사회적인 인프라구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등등의 연구실천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연구실천의 결과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본래 들고 일어서 대항했던 것의 재등장이다. 즉 규범적인 것의 기준들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좋은 것”과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취할 수 있다는 [기준의] 탈문제화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규범적인 요구를 더 이상 이론적으로 다루지 않고, 단지 폼[잡기](habituell)로만 해결하려는”(Niederberger/Wagner 2004: 185) 이론이 갖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수용하는 양식들과 그 이론들을 그렇게 이어나가나는 게 아카데미적인 생산조건들과 선별적인 읽기양식들에서 기인한 다소 우연적인 발전인가 아니면 그 문제성이 보다 깊은 곳에, 즉 앞서 참조하고 토론한 이론들 자체 차원에 이미 있는 것인가? 앞의 결론이 어쩌면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되는 질문은 사회와 주체들의 물질성(Materialität), 경제적인 구조 및 프로세스들이 갖는 의미, 그리고 나아가 사회적-개별적 행위자율 등을  파괴/해체하는데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그런 것들을 또한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서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는 최소한 같은 정열(Emphase)을 투자하지 않은 [이론들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시스템적인 추가결과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1)[이에 관한] 인상적이 예는 일상생활의 실천들에 소원(訴願)하는 드 세르토(de Certeau,1988)에서 볼 수 있는 반학(反學/Antidisziplin)에 기댄 분석이다. 나름대로의 의미(Eigensinn)의 성격이 꼭[필연적으로] 해방적이지 않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또한 Graefe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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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8)

2.2 포스트구조주의 수용들과 좌익아카데미 양심의 진정

 

내가 보기에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입장들의 대중화(Popularisierung)와 아카데미적인 정착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전위(轉位/Verschiebung)가 있었다. 이 전위는 두 번째 이해양식으로 눈을 돌리는 패러다임과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래서] 유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움직인다는 것 자체다.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 건 상관이 없다.”란 슬로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가운데, 요구들의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다들 같은-타당성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Everything we have been told is real and unchangeable will be revealed as lies, and in refusing them we will make them change. Into what? No one knows, but that is not important. What is important is the change itself.”(Jun 2011: 247). [사태를 이렇게 보는] 자세에선 구성적인 역동성과 [일시적인] 구체적인 폐쇄 간의 차이로 [따라 잡을 수 없게] 영구화된 [그래서 반복․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하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간극”이 비판적인 혹은 전복을 꾀하는 행위능력 가능성의 근거가 되지 않고, 오로지 바로 이런 가능성과 일치로만 여겨진다. [결과] 개념적으로 발굴된 간극이 그때마다의/개별적인 실증적-특수한 성격을, 나름대로의 성격을 혹은 해방적인 성격을 갖는지 그 여부를 조사하는 게 포기된다. 특히 포스트-들뢰즈적인 글 다수에서 이런 [그저] 흐름과 움직임을 긍정하는 [경향이] [물고가 터진 듯] 제어되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위험한 이론-클래스”로 근거지우는 한 예로 이런 말을 한다. “발명하는 힘을 협업 형식으로 [이해하면] 발명은 어디까지나 ‘발명 이전에 서로 대립했던 역량들의 연결’을 이룩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어떤 연결인가 하면] 그로 인해 새로운 흐름들이 개발되는 역량들의 연결, 담론적-사회적 기계들의 일시적인 중첩[이다]”(Lorey et al. 2011: 19)1).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생성됨(Gewordensein)의 재구성으로서의 탈자연화로만 만족해한다. 한 사태가 원리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라는 기준이 제공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이에 대한 비판으로 또한 Saar 2009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최종 근거의 거부와 함께 - 최소한 이론적으로 - 모든  기초다지기[=설립/제도화]시도를 포기하고, 어떤 입장을 취하고 [개입의] 간극이 [과연 얼마나 큰지] 재보는 것을 [항상] 동반하는 위험, 즉 [=취한 입장을] 다시 내버려야 하는 (일시적인) 고정화에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이런 식으로 이어나가는 일[연구]들은 이론적으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버틀러와 라클라우에게 말할 수 없게 자주 부당하게 전가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성한다. 푸코에 기대에 (푸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기댈 수도 있지만) 이런 경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어느 한 진리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 어떤 진리의 놀이와도 완벽하게 다른 놀이를 노느데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진리놀이를 달리 노는데 있다.”(Foucault 1984: 895)2)

 


1)들뢰즈와 가타리의 극도로 연상적인 글쓰기방식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상황의 초래에 (공동)책임이 있는 것 같다. [글쓰기 외에서는] 아주 정치적인 두 사람에 기댄 분석들을 읽는 동안에는 뇌가 만취상태가 되어 뭔가가 흐르고 분자가 되는 것을 [느끼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이미 정말 뭐가 어디로 [흐르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그런 만취상태에 빠졌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예컨대 Raul Zelik의 최근 고찰들이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서 그렇다. 그는 유목원리와 [행을 바꾸거나 삐딱하는] 편차운동들의  해방 잠재력을 들어 올려/건져서 이것들을 현재진행중인 사회 운동들을 위해서 깃털까지 규범적으로 다시/계속 사유하는 걸 꺼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변화가 해방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변화가 단지 탈영토화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또 역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편차(偏差)운동들은 연대관계를 강력하게 해야 하고,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의 개선해야 하고, 지배관계를 감소해야 한다.” (Zelik 2011: 127)

 

2) 이런 탈정치화의 경향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모든 비판적인, 전복적인, 그리고 비타협적인 충동들이 다 접수된다고 단정하는 진단들로 뒷받침되는데, 이런 식으로 [반자본주의적] 충동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엔진으로 정의적(正義的)으로 전복된다 (참조 예컨대 Bröckling 2007: 133ff.; 이런 진단에 대한 비판으로 van Dyk 2009). 시스템과 비판이 서로 구별될 수 얽혀지는데, 이건 비판의 실천과 전복에 끔직한 결과들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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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8)


(보다 넓은 의미의) 포스트구조주의 논쟁에서 [각자의] 이론구조에 따라 각양각색의 받침대로 뒷받침되는 구성적인 통제 불가능성과 역동성은 매우 차이 나는 양식으로 긍정된다. 첫째,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폐쇄와 고정화의 토대와 함께 이것의 지속적인 훼방․횡단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둘째, 특히 포스트모던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아래 모든 요구와 욕망들이 다 같은-타당성(Gleich-Gültigkeit)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불안전성과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긍정으로, 셋째, 규정 저편의 [反헤겔적인] 것이 중심에 있는 (예컨대 알랑 바디우에서 두드러지는) 사건철학들과 존재론들에서처럼 예견할 수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가 [동일자의, 그게 비록 타자를 변증법적으로 끌어 안는 동일성이라 할지라도, 연속성 안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를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발생을(ereignishafte Entstehung) [예비하는] 가능공간으로 긍정된다. 여기서 토론된 대부분의 저자들은 -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하지만 - 첫째 이해양식에 속한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읽는 것은, 근본적으로 폐쇄․완성될 수 없는 운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운데, 그때마다의 특수한 고정화들과 함께 이들의 [반복]․지속적인 불안정화(탈-고정화)에 관심을 두고, 이때 [반복]․지속되는 불안정화보다 기존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로서의 사건들에 더 관심을 두는 셋째 이해양식과 전적으로 교차․중첩된다. 이 두 이해방식의 중첩에 대해선 3장에서 다시 거론하겠다. 여기서 토론된 모든 저자들은 모든 요구들이 “같은-타당성”을 갖는다는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둘째 읽기방법과는 매우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반-근본주의”와 (허무주의로 선언된) 상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자신을 지켜 [보호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이해방식이 되는 첫 번째 이해방식은 반면 “기체로서의 역동성과 그것의 ‘표현’간의 범주적 차이”의 전제에 기반한다(Niederberger/Wagner 2004: 185). 바로 이 차이가, 우리가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정치와 경찰 간의(랑시에르) 혹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 간의 “정치적인 차이”(Marchart 2010)로 발견하는 이 차이가 사회적인 것이 교섭되는, 달리 표현하면 (끝을 맺을 수 없지만 그러나 [허공으로 부상하지 않는] 기반위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둘러싼 것을 놓고 싸우는 “공간 아닌 공간”(Nicht-Ort [=ou topos])(Butler)을  표지(標識)한다. 이와 같은 이해방식이 지향하는 바에 의하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중요한 것은 구성적인 역동성과 차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긍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특정한 헤게모니적인 경직화/고정화들을 비판적으로 횡단/훼방하는 역동성과 차연에 배어있는 잠재력이 중요하다는 걸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1)

 

 

1)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첫째 이해양식과 관련해서 참조한 저자들에게서 위의 중요한 구별을 약간 불식시키는 모종의 역동성 강조를 부인할 수는 없다(예컨대 Butler 2009: 69f.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거슬리게 비틀거나 삐딱 하는 미세한] 편차운동(Absatzbewegung [Absetzbewegung/분리운동이 아님]), 탈영토화, 미시차원에서의 분자운동 등을 그 자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지만, 그들이 [생각을 펼친] 글에서는 사실 경향적으로 최소한 탈주선과 유목민되기사유(Nomadologie [이게 사유의 유목민되기인지, 유목민되기의 사유인지 불투명하게]에 대한 긍정적으로 채색된 현혹이 엿보인다(Deleuze/Guattari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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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7)

2.1 포스트구조주의에 배어있는(implizit) 규범성

 

포스트구주주의가 취하는 비판자의 [=비판적인] 관점은, 좁은 의미로 보자면, [전혀] 규범적이지 않다. 오히려 보편[주의]적으로(universal) 통용되는 규범카타로그를 [전면] 필히 거부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적용가능]성(Universalität), 안정성, 그리고 해방강조를 문제화하는 [자세로] 특징지어진 [反규범적인] 것이다. 규범(성)의 억압적인 성격을 들춰내 보여주는 일이야 말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사안 중 그 하나라고 표시할 수 있다. “권력 혹은 [억제할 수 있는] 힘과 [무관한] 저편의 [터전에서] [자양분을 먹고 자라나] 스스로 자리한다는 일개의 규범복합체를 구축하는 일 자체가, 권력이 풍부하고 [억제하는] 힘이 있는, 개념적인 실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실천은 자신의 권력놀이를, 규범적인 보편성이 [이런저런 장소에서 이때저때에] 뒤집어쓰는 외피[=특수성 혹은 관계]를 거론하는 가운데(im Rückgriff auf Tropen der normativen Universalität), 숭고한 것으로 만들고, 베일로 씌우고, 동시에 확장한다.” (Butler 1993: 36f.) 계보학적-포스트구조주의적인 윤곽으로 다듬어진 비판프로그램이 말하는 것은 “나는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르다.”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그들이 옳다고 주장한다.”(Veyne 1991: 214)란 것이다. 이건 그렇다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구조주의가, Andreas Reckwitz가 꼬집어 지적하듯이, 다 이야기 된 건 아니다: “이와 같이 규범을 멀리하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화적인 코드들의 통제 불가능성이란 전제가 긍정적인 규범적인 함의(Konnotation)를 갖고 있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분명해진다. 즉, 문화적인 시스템들이, 그들의 요구와는 배치되게, 분명 고정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통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 [자체가] 바람직한 경향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Reckwitz 2008: 295, 강조는 SvD). 선택에 의한 가족관계를 맺어주는, 차이이론-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제스처를 출발점으로 삼아, 바람직한 경향으로 {떠올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aufscheinen} 통제 불가능성과 구성적인[=의미이해에 따라 잡을 수 없게 이미 삼투되어 있는] 의미차연(Sinnverschiebung)은 별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의해서 각양각색으로 다듬어졌다. 이게 푸코에게는 우연적인 역사적인 조건들에 대한 계보학에 근거한 분석으로서 개별성들(Singularitäten)의 형태변화를 [초래하는] 잠재력을 밝히는 분석이었고, 들뢰즈와 가타리를 보자면 탈영토화로 향하는 다층적인 운동들로 [짜여진] 미시차원이 영토화/고정화의 거시구조들을 횡단․훼방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인 읽기는  - [비슷하게]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데리다에 기대는 버틀러(아래 참조) - 의미의 구성적인 비종결성과 이에 따른 되풀이, 즉 반복을 타자성/차연과 연결하는 되풀이에 초점을 맞춘다. “되풀이는 기생적인 방식으로 [고정된 의미로] 확인하고 반복하는 바로 그것에 변화를 가하고 [이물질이] 스며들게 한다. 되풀이는 (항상 [따라 잡을 수 없게 앞서가는] 이미[란 시간성의 지배아래], 또한)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싶고, 말하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뭔가 다른 것을 이해하는 등등”의 결과를 초래한다(Derrida 2001: 120).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의 의미구조(Sinngefüge)안에서 파악될 수 없는 (구성적인) 외부가 있고, 그게 외부지만 사회[안]의 의미구조를 지속적으로 성가시게 하고 싸움을 건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걸 정치적으로 착용하여 이 둘은 결정불가능성(필연적인 외부에 기인한 사회적 총체성/전체성의 불가능성)과 결정(일시적인 고정화)간의 간극을 [정치적인] 행위능력의 공간으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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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6)

2.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정착과 비판 잠재력의 침식

 

아카데미에서의 정착 과정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 특히 미국에서 그랬지만 미국으로 제한되지 않고 - [인문]과학의 몇몇 영역에서 교전이 되었다. 이걸 두고 일련의 비판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가 초창기에 연결되어 있었던 많은 정치적인 함축들을 상실했다고 책망한다(참조. 예컨대 Lichtblau (2002년)의 비판). John Sanbonmatsu(2011: 230)는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던적인 영역에 대한 거친 비판에서 “이론[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점점 더 “섹시”한 형식을 장려하는 인센티브”와 “이런 형식을 발에 치이도록 북적거리는 아카데미 영역에서 [이른바]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입지․자리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향상시키는데 [용이한] 수단으로 사용한다.”(“incentives for increasingly “sexy” forms of theorizing as a way for ‘sympathetic’ or left intellectuals to maintain or advance their position in a crowded academic field”)고 진단한다. 어떤 아카데미 이론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사용가치, 즉 사회비판에 [용이한] 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곳: 231). 이건 “외부”의 비판일 뿐이라고 [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이론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영역에서 자라나 분명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요란한 비판자로 [부상한] 슬라보이 지젝은 “착취되는 소수집단들의 편에서는 진정한 사회개입”과 “다문화적인/포스트식민주의적인, 아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아카데미 미국의 ‘급진적인’ 무리들이 자화자찬하는 유유자적한 반항들”(지젝 2002: 20)을 구별한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Cultural Studies 의 탈-정치화를 비판한다. Cultural Studies가 정치적[이어야 하는] 투쟁을 “미미한(marginal) 정체성들의 인정과 차이들에 대한 관대를 둘러싼” 문화투쟁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지젝 2001: 302). 여기다 Robert Misik은 독어권의 토론에서 “소수의 [자기]삶 꾸려나가기들(Lebenspraxen/삶의 실천들)을 우쭐하는(exaltiert) 이론들과 딱 들어맞게 하려고 노력하는” 제멋을 찾는 위대한 인물들(unorthodoxe Geister)을 발견하고 [비꼰다](Misik 2006: 190). 지배, 착취,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정녕 문제가 된다면, 탈-정치화로 이어진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 [격양된 목소리로] 우쭐하는 복잡성의 강조와 추상, 그리고 [양자대립적인] 모순들을 끝없는 차이들의 짜임새로 해체한 것에 대한 반복되는 책망은 뭘 보고/뭘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이런 책망이 포스트구조주의를 싸잡아서 신용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가 제시한 [짚고 넘어서야 할] 과제들을 아예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드물지 않다 할지라도, 개별적인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들은 분명 [아니라고] 털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 주목하면 실지로 극단적으로 붕 뜬, 용어가 [애매모호해서 바깥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게] 밀폐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텍스트들로의 경향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비판적인 쟁론과 수용(Rezeption)을 현저하게 어렵게 한다. 이와 같은 만연한, 전적으로 엘리트적이고 아카데미란 [지식]공장(Betrieb)에서 기능을 [발휘하는데] 전혀 위험하지 않는 추상으로의 도주는, 내가 아래서 논증하겠지만, 유동성, 편차, 풀뿌리적인 조직들 및 가동성 등으로의 내용적인 도주와 일치한다. 문제는 이런 운동 속에 배어있는 - 그때마다의 특수한 조건들 아래 실현되어야 하는 가능성이란 의미로서의 - 비판 잠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놀라운 일은 이렇게 도주하는 가운데 슬며시 전혀 “포스트구조주의지 않는” 손놀림으로  그들 자신이 적대적인 주류로부터 탄압받는 Underdog이란 자화상을 만들어 [그게 깨질까봐] 싸고돌고, 그런 식으로 [바로] 그들 스스로가 아카데미로의 편입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못 보게 한다. “[지식인들의 이런] 무식, 접수[하여 굴레 씌우기](Vereinnahmung), 그리고 아카데미로의 편입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효과들은 ‘위험한 이론-클래스’의 방종을 최대한 [제어하여]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일반적․담론적 ‘봉기토벌’의 구성요소들이다.” (Lorey et al. 2011: 18). 이 이론클래스가 근래에 와서도 (아직) 얼마나 위험한지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고찰되지 않고 있다. 내 테제의 핵심은 대학 좌파와 좌파 이론가들로 하여금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패러다임에 열광하게 한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내포하는 - 보통 그렇다고 스스로 시인하지 않지만 - 규범성에 있고,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규범성이 비판적인 (이론-)입장을 꼭 끝까지 다듬어 내놓지 않아도, 아니 그런 입장을 취하려고 [아예] 감행하지 않아도, 비판적인 제스처에 대한 욕구는 채워주는데 기여했다/한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의] 문제되는 결과는 단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분석들의 탈정치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좌파 일부가 [진정제를 먹은 듯이] 이론적으로 잠잠하다는 점이다. 이 비판이 겨냥하는 건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아직] 규범성이 잔재한다는 [자가당착 지적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좌파 양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규범성의 잔재를 이론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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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5)

1.3 정치적인 것 사유하기

 

사회적인 것을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와 는 좀 빗나가게 몇몇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인 것의] 부분적인 지배체제들로의 응집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인 차원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들은 우연성폐쇄를 목적하는 제도화된 정치(존재적 영역에 자리한 [=죽은 껍데기인] “정치적인 시스템”)에 정치의 질서를 끊임없는 운동으로 훼방․횡단하고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살아 움직이는]) 뭔가를 새로 세우는 에너지․힘을  대립시킨다. 여기에 좁은 의미에서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정치이론들 외에 (이런 좁은 의미에서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샨탈 무페) 앞에서 이미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뿐만 아니라 클로드 르포르, 알랑 바디우 또는 쟝-뤼크 낭시 등의 이름과 연계되어 있는, 전적으로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정치철학 맥락에서 진행된 연구들로 보충되어야 한다. 앞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제도화와 폐쇄의 프로세스가 항상 필연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투쟁을 동반하고 [그 결과가] 우연적인바, 최종근거 및 기초의 부재가 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필드/영역을 구성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점, 기체(基體)적인 공유물,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된 [절대적인] 가치 등을 차용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가 속해 있는 제도가 번번이 [포기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Aufgabe:포기, 과제] 과제로 등장한다.”(Marchart 2010: 17).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포스트구조주의가 反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포스트-근본주의적인 바탕색을 갖는다는 점이다. 하나로 [사유되는] 최종근거와 토대의 자리에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판자들이 개탄하는 “anything goes”가, 혹은 이와 비슷하게 자주 예언된 상대주의적인 허무주의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기초다지기 시도들을 둘러싼 분쟁, 지나가는 안정화 및 제도화, 그리고 [이어서] 불안정화가 들어서는 것이다. “[동일철학적으로 스스로 자명한 근거로서의] 본연의 본질주의적인 보편주의의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생성 배경이 되는 우연적인 근거들(다수)과 그것을 구성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들에 주목하게 하였다.”(Laclau 1994: 2). Andreas Reckwitz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버틀러의 관점을 아우르면서, 방금 이야기된 것을 더욱 날카롭게 표현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세 가지 “방법론적인 훈령들”을 다듬었다. 이에 따르면 포스트구조의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이 되는 훈령들은 “1) 언뜻 보기에 해방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강요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2) 언뜻 보기에 필연적이고 대안부재적인 것을 문화적으로 우연한 것으로 보기, 3) 이렇게 문화적으로 확립된 것에서 언뜻 보기에 고정된 것, 폐쇄된 것을 통제 불가능한 것, 문화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지각하기”(Reckwitz 2008: 294) 등이다. 이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질적인 이론프로그램은 - 이제 분명해졌을 것인데 - 지배적인 질서와 함께 자칭 진리들 또는 사태(事態)[내재]적 불가피성(Sachzwänge)을 퍼뜨리는 짓을 비판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용이한] 교량(橋梁)들(Anschlüsse)을 제공하고 동시에 균열들과 삐딱들(Abweichungen [= 루크레티우스의 clinamen/미세한 편차, 이탈] 그리고 배제와 타자의 가시화를 위한 장비, 나아가 [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지향하지 않는 것(Nicht-Hegenoniale)1)을 위한 장비가 된다는 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핵심적으로 문제화하는 세 가지 것, 즉 진리의 문제화, 구조의 문제화, 그리고 독자/독립적인(souverän) 주체에 대한 긍정의 문제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결국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의] 바탕에 깔린 반권위주의적인, [배제가 사회의 구성적인 요소인바] (전체 혹은 “大총체”로서의) 사회의 구성적인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동기다. [그러나] 일시적인 폐쇄화프로세스들이란 의미로서의 역관계들의 응집들이 이론구조상 이미 고려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그리고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접근들이 연구실천에서는 (제도화된, 지배의 [한] 형태로 호명된) 거시구조(예컨대 국가, 자본주의적 경제)보다는 (권력으로 두로 점철된) 미시정치들에, 反제도적인 지역운동들에, 그리고 일상생활실천에서의 혁명화에, 나아가 (힘을 실어줌[임파워먼트]과 동시에 억압하는) 주체성의 구성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얼마 전부터 이와 같은 관점이 갖는 비판적인 잠재력이, 소수적인 실존양식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차이 없이 다 자본주의적 기계(Gefüge)의 윤활유가 되었다는 걸 내세우면서, 다 소모되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유행한다. 잘 알려진 사례로는 흑인 동성애자, 장애자 세르비아인, 혹은 결혼한 신부 등 수많은 소수 사례들을 [들러리로 즐비하게] 치장하고 페워웰파티를 벌인다는 비난이 있다 (예컨대 Badiou 2002: 11). Katja Diefenbach는  이런 비판가들에 맞서 “[새로운 역능의 원천을 찾아 가동하게 하는] 자본의 방출역동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가족적, 종교적 가치의 신보수주의적인 고착은 밑을 나도는 수준으로 밖에 주제화되지 않는다.”고 한다(Diefenbach 200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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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4)

1.2 불안정한(prekär) 폐쇄프로세스들

 

[앞의 지적은 그렇다 치고 여기서 살펴 볼 점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과 이들이 취하는 진리 및 명증의 생성에 관한 관점에서 결정적인 점은 앞에서 언급된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조작된 안정화가 항상 불안한(prekär), 깨지지 쉬운, 그리고 소요(騷擾)들로 속속들이 [점철된] 상태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런 분석의] 특징은, 모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에게 같은 비중으로 핵심적이지 않다 할지라도, 권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분산된, 다원적인, 생산적인, 그리고 필연적으로 편재(遍在)하는 역들관계로 파악하는데 (“권력의 존재론”) 있으며, 이런 역들관계는 단지 일시적으로만 항상 불안정한 지배국면들로 응집된다는데 있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자기서술은 현대화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다는] 우연성개방을 강조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이와 대조적으로 권력집중에 기반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우연성폐쇄에, 그게 헤게모니(라클라우 & 무페)를 통해서든, 디스포지티브들(푸코)을 통해서든, 재영토화들(들뢰즈 & 가타리)을 통해서든, 아니면 경찰(랑시에르)을 통해서든  - 아무튼 이런 우연성폐쇄와 나아가 이것이 [다시] 불안정하게 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안정화된 것을] 규범과 실천사이의, [기도/염불과 같은] 호소와 [플라톤이 동굴비유에서 사용한 ‘뒤집어지기’(periagoge/Umwendung)를 다시 뒤집어 눈길을 피안에서 현실로 돌리는, 호소만 일삼케하는 억압적인 사슬을 누가 채웠는지 보게 하는] 현실직시(Umwendung)사이의, 규율과 적용사이의, 그리고 텍스트와 읽기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함으로써 다시 불안정하게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는 일이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의 심장부이며, 이때 행위능력의 가능성을, 주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그 어느 때도 간과하지 않으면서, 긍정한다.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은 시종일관 구체적인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독자/독립적인 주체성(souveräne Subjektivität)과 개별적인 행위자율(individuelle Handlungsautonomie)을 주어진 상수로  전제하는 모든 접근들에 대한 근본적인(radikal) 비판을 개발한다. 그리고 주체의 해방이라는 현대화이론의 합창단에 화창하지 않고 역으로 주체화프로세스를 주체구성과 주체예속이란 동시성에 주목하면서 주제화한다.1)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인간의 주체되기에 억압이 어떻게 그 안에서 작동하는지 감지하게 하고 “주체들이 생산되고 차별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잔인성들을 폭로한다”(Butler 1992: 131). 이와 함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눈길은 [특정집단을 배제하는] 우연성폐쇄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사회질서에서 배제된 주체성들과 실존양식들로, “인간-남성-백인-도시인-표준어사용자”(Deleuze 1980: 27)란 다수 규범의 저편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내팽개쳐진 것들로 향한다. 여기서 Bude가 비판적인 사회학을 염두하고 요구한 “사회적 관계에서의 이득자와 손질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그런 지위를 매기는 “놀이” 자체가 주제화된다는 면에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제기된다.

 

 


1)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연결해주는] 핵심인물로서 알튀세르의 지대한 영항은, 그의 후기 이데올로기이론의 핵심적인 사안/동기들이 수정된 양식으로 거의 모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는 부분에서 명료하기 그지없게 드러난다. 여기에 그의 결정론 비판, 위계적인 권력모델 비판이, 나아가 특히 사회적인 권력의 주체화 효력에 어두운 쇼트-컷 적인 주체이해에 대한 그의 비판이 속한다(참조 Saar 2008: 196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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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3)

1.1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

 

모든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게서는 Stäheli가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Stäheli 2000:7)라고 명했던 [통일적인] 것을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 아래서 보게 되겠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의 보다 가장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련의 정치이론들도 포함된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적인 제스처는 차이이론적인 사유, 즉 사회현실의 그 어떤 요소도 동일논리에 따라 그 자체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그것이 아닌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비로소 규정된다는 사유에 있다.1)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요점은 다수를 이루는 개별적인 차이들이 [그저 다수에 머물지] 일정한 근거 혹은 [그것들을 하나의 총체로] 조직하는 원리(예컨대 생산관계, 현대, 혹은 가부장제)로 귀속되거나 그런 근거․원리에 의해서 안정화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으로 - 그럼으로써 우연으로 - 머문다는 사정에 있다. 이와 같은 최종근거를 포기한 대목에 주목하면 대부분의 포스트구주주의적인 접근들은 “포스트-근본주의(post-foundationalist)”(Stäheli 2000: 9)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포스트근본주의적인 관점은 [예컨대 어떤 형식적인 가치의 실현과 관련된 자원/재원분배, 법규, 기구 등 총체적인 사회현실로서의] 구체성(Materialität)과 제도화의 저편에서 [놀아나는] 담론­이상주의 혹은 언어놀이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제도화된 형태들, 신체들, 그리고 실천들의 구체적인 실존(materiale Existenz)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있다. 현실이 담론으로 구성된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담론 저편의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의 경험불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화할 뿐이다. “사유 밖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대상으로 부상(浮上)하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담론적인 조건과도 무관하게 대상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Laclau/Mouffe 1991: 158; 담론­이상주의와 거리를 두는 것과 관련해서는 또한 Butler 1997: 30f.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기독교적-서유럽 서양의 역사에서 그 중심의 중심을 차지했던 관념들, 즉  “진리” 혹은 “이성”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인식주체와 구별된, 역사 혹은 자연에 의해서 증명된 것이라는 관념들의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탈정당화를 제공한다. 철학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대질서”와 목적론이 차지한 자리에 중심을 해체하는 (dezentrisch),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부정하는(anarchisch) 세계관과 함께 “유기체론적인 사회개념”(Moebius 2010: 269)과 선을 긋는 단념이 들어선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밀착하여 애쓰는/Anliegen] 핵심사안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성이 자신의 필연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보다 더 엄밀하게 표현해서 이성이 합리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자신의 필연적인 현존[양식](“étant”)으로 내놓는 것은 역사를 갖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특수한 형태의 이성이 출현한 조건들로서의] 역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열하고 [그 특수한 이성형태로서의] 역사를 그런 우연성들의 [재]조직(Geflecht)으로 다시 획득[재현]할 수 있다.”(Foucault 1996: 179). 이런 - 단지 푸코로만 제한되지 않는 - 계보학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은 보편개념들을 판독(判讀)하고 익숙해진 사유도식들을 의문시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자명함들을 배출한 역관계들의 특수한 짜임새를 파헤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Heinz Bude가 시대에 적합한 사회학을 요구하면서 사회학이 해야 할 일은 “어디서 좌우명들이 발신되고, 어디서 규율들이 정립되는지”를(Bude 2011: 13) 알아내는 일이라고 한 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제공하는 관점보다 더 적합한 이론적인 관점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허위적인 대안부재[론]이 조작되는지 질문하는 일이2) 포스트구조주의의 다른 핵심 사안이다. 다만, [푸코의] 권력과 주체 그리고 권력과 주체화를 함께 다루는 분석기법이 [바로] 그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사회적으로 분배된] 역량에 기반하여 [그 범위 내에서] 자율적(souverän)으로 움직이는 개별 주체들이 서로 속이고 기만하는 일로 파악하는 걸 방해한다.

 

 


1) 동일논리적인 사유에 대한 비판이 포스트구조주의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Harald Wolf가 (이 잡지에 실린) Castoriadis에 관한 논문에서 보여준다. 역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가 모두가 같은 비중으로 차이이론적인 사유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푸고의 사례가 보여준다.


2)Bude는 “누가 거짓말을 하면서 세상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저렇다고] 자신을 속이는지, 누가 대안이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기만당하는지” 들춰 보여줘야 한다고 표현한다(Bude 20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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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2)

1. 포스트구조주의 재방문. 없는 것이 있게 된 경위

 

그들의 이름들은 다 잘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는 이론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봉자의 수는 아마 마르크스만을 별로 놀라게 하지 않을 정도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때그때의 표어를 제공하는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크 데리다의 영향은 2004년 그의 [때] 이른 별세가 문예란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대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진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무대에 등장하면 수천 명이 환호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 경계인이며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슬라보이 지젝이야 더 말할 나위없다. “포스트구조주의”란 본래적인 의미가 없고 [단지] 외부로부터 부여된, 아무런 사상체계가 그 바탕에 있지 않는 에티켓[일 뿐]이라고 근거 있게 지적된다(참조: 예컨대 Lorey et al. 2011: 11). 그러나 이런 주장의 저편에서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 [위기를 직면한] 바로 근래에 들어서 - 비통일적인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들을 [하나의] 이론영역으로 측정하려는 시도가 상당 수 이루어지고 있다(참조: 예컨대 Moebius/Reckwitz 2008; Stäheli 2000; Angermüller 2007). 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미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1) 사회인문과학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그 맥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런 문화적 전환이 관철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것들의 문화적, 그리고 상징적인 구조화에 [연구의] 눈길이 미치게 되었다. 68년 5월의 파리가 포스트구조주의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역으로] 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이 60년대 및 70년대의 운동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68년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국가론과 이데올로기비판이 제시한 전략적 전제들과 억압에 기초한 권력모델로 방향이 잡혀진 좌파 정치와의 즉각적이고 근본적인(radikal) 절단을 알리는 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점은 (경향적․점차적으로) 미시정치로 바탕이 색칠된 주체화와 욕망의 문제들로 이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학생운동은 [물대포장갑차가 쏘는 물에 쓸려] 거리에서 세척되어 담론이란 지하로 밀려 내려갔다.”(Eagleton 1994: 127)고 논박한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 이런 논박은 이글턴뿐만이 아니었지만 -, 일반적인 탈정치화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된 거의 모든 이론가들의 정치적인 개입과 운동근접성은, 프랑스 감옥운동에서의 푸코의 역할, 인종주의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개입,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태리 자율주의와의 긴밀한 관계, 또는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활동에서의 역할 등과 함께 다면적으로 검증되었다.2) 이와 같은 이론과 정치의 긴밀한 연계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이, 특히 (물론 여기에 제한되지 않고) 퀴어 운동들의 발생[과정]에서 수행했던 지대한 역할들을 두고 볼 때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서 오로지 상아탑에 올라간, 고도로 추상적인 아카데미주의만을 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1) 포스트구조주의가 다양한 “물결”과 함께 상이한 학과들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다사다난하게 수용된 이후 (이런 식으로 특히 철학에 이어서 언어학 및 문예학에서) 얼마 전부터 독일 사회학과에도 도착하고(Moebius/Reckwitz 2008: 7) 문화학적으로 방향이 잡혀진 분석기술로 독일 대학에 계류하게 되었다. Gender Disability Studies, Postcolonial Studies, 문화 및 신체사회학 등과 같은 개별연구영역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분석의 아주 큰 영향을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및 산업사회학, 불평등 및 복지국가연구, 뿐만 아니라 경제비판 및 국가론 등과 같은 독어권의 다른 영역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프로그램이 여전히 이물질이다.

 

 

2) 참조 Kuhn (2009: 56f.): “언급된 모든 이론가들은 정치적으로 활동했고 일부는 (..) 매우 급진적/근본적인 맥락에서 그랬다. 이들이 참여했던 맥락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서 [그들의 혁명적인 성격을 의심하고] 모든 혁명적인 성격을 박탈하려는 비판자들이 참여했던 맥락보다 현저하게 더 급진적/근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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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1)

2012년 Prokla 2호에 실린 질케 판 다이크(Silke van Dyk)의 논문 "Poststrukturalismus. Gesellschaft. Kritik - Über Potenziale, Probleme und Perspektiven"을 번역하여 올린다.

'Prokla'는 '계급투쟁의 문제들'(Probleme des Klassenkampfes')의 두자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71년 창간되었다.

 

원문은 여기

 

[번역]

 

 

포스트구조주의. 사회. 비판

 

잠재력들, 문제들, 그리고 관점들에 관하여

 

최근 위기들의 뒤를 이어 비판[이론]을 강조하는 새로운 바람이 거의 폭풍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독일 일간지들의 문예란은 금융시장위기의 전모를 다시 한 번 짚어가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급진적인 말하기를 동원한 자본주의 비판을 그들이 당면한 [과제]로 발견한 모습이다. 점거활동가들은, 보통의 경우 운동을 꺼리는 (또 앞으로도 그럴) 시민들의 [이상적인] 다른 자아와 초자아가 되었다. 스테판 에쎌의 얇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서점의 계산대 바로 옆에 놓여 있다. 동시에 잘 나가는 과목들의 주변으로 밀려나갔던 비판(사회)과학자들은, 그들의 집단따돌림표징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 중심부에서 (비록 새로운 징후아래 그렇다 할지라도) 입맛을 돋우는 식거리가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8년 가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후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는 일이 이제 다시 해도 되는 일이 되었다. 이런 배경아래 마르크스적으로 다듬어진 분석들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의 영향력이 꼭 더해졌다곤 할 순 없지만, 뜻밖에 새로운 반향공간이 열린 반면, 지난 몇 년 동안 대유행(hype)하고 대학 안팎의 좌파가 이론적으로 애지중지했던 아이들은 한방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과 문화연구들의1) 중심에 놓여 있는 주체, 진리, 그리고 大질서의 문제화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미시정치들, 복잡한 역관계들, 그리고 해석을 둘러싼 투쟁들을 선호하는 일이 (새로 등장하는) 여러 사회비판가들에 사이에서는 대위기에 직면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퀴어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들이 일궈낸 배척된 존재양식들의 가시화 등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비판의 영역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다시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는 목소리에 눌려 왜소한 놀이터로 퇴색되었다2).

 

2011년 12월 베를린에 있는 ‘세계 문화의 집’에서 저명한 지식인들 한 무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모였을 때,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은 마르크스 절망했을 만큼 단순했다. 이 점에서는 푸코도 아마 예외적으로 마르크스와 통했을 것이다. 이 행사를 창안했던 사회심리학자 하랄드 벨쩌(Harald Welzer)는 15살 땐 세상이 자본의 과두정치로 지배된다고 믿었다가 나이가 들어선 다년간 푸코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을 읽고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고 아주 정말 복잡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내가 15살 때 생각했던 것과 똑 같다.”고. 이렇게 벨쩌와 같이 그다지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청년기의 냄비근성에 못 이겨 참수한 마르크스를 [참수된 모습으로=정치경제학비판 이전의 마르크스로 제한하여] 다시 꺼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위기들을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사회학이 다시 돌아올 시간이 도래했다고 자신한다. 뭐가 진리이고. 뭐가 옳은지 아직 헷갈리지 않았던 문화적, 그리고 담론적 전환 이전의 평온했던 시대로 시간의 수레바퀴를 30년 뒤돌리는 가운데, 위기에 알맞은 사회학의 과제가 뭔지 새롭게 측정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하인쯔 부데(Heinz Bude)는 “불평등, 지배,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Bude 2011: 13)3) “사회 분열에 관한 진리, 인간들의 억압, 그리고 공공청중[을 모델링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그들에게 가해지는] 응징”(같은 곳)을 말하는 사회학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회학(들)의 의미상실을 [진단하고]․확언하였다. 이렇게 전통적인 두루마리를 걸친 새로운 사회학의 과제는 복잡한 역관계들과 지식질서들을 [직면하지 않고] 문화[차이]의 문제로 돌려 분석하는 쪽으로 빠져나가는 대신에 “사태 자체로” (같은 곳: 14) 돌아가는데 있다고 한다. 중단하라,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영역이라고 문화에 반하는 짓 그만둬라. 중단하라, 지역적인 전술들을 선호하는 짓 그만둬라. 사회로 귀환하여 사회를 분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라. 이것은 부데만의  단언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의 분석력과 작용범위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비판 잠재력에 관해서도 구구절절 표현된 불편한 심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패러다임을 비판과 진리, 불평등과 지배, 그리고 사회를 “대전체”로 분석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질문들과 대결시키는데 있다. 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근거 있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듯이 곧바로 이론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십 년 뒤로 돌려야 하는 것과 동등한 의미가 아니라, 그러지 않고도 그런 관점들을 흘리지 않고 어떻게 포착하고 가공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나의 테제는 포스트구조주의가 현재 안고 있는 사회이론적인 면과 이에 따른 사회비판적인 면에서의 부족함은 [포스트구조주의] 패러다임의 사유유형 자체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포스트구조주의가 대학[과 대학물을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떠드는 속물이 되는 과정에서 관찰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부분적인 “자기파괴”와 탈정치화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4)

 

 

1) 1950년대 말 대영제국에서 신좌파(New Left)란 정치적이고 문화비판적인 운동의 맥락에서 생성된 [다층적인=그래서 study가 아니라 studies] 문화연구들(Cultural Studies)은 초기 경제적 환원주의와 선을 긋고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이 알튀세르와 연계하여 사회 생산에서 독자적인 영역이 되는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문화연구들은 점점 더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고 결과 특히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행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하 문화연구들은 포스트구조주의 패러다임 영항아래의 것으로서 파악된 것이다.


2) 2000년대 중반에 이미 Terry Eagleton은 이렇게 논박했다: “In some cultural circles, the politics of masturbation exert far more fascination than the politics of the Middle east. Socialism has lost out to sado-masochism.” (Eagleton 2004: 3)


3) 이 부분에서 부데가 하필이면 [자유주의자인]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와 에르빈 쇼이히(Erwin K. Scheuch)를 보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것은 [코멘트하지 않고] 지나가겠다.


4) 이런 발전에 대한 둘로 나뉜 심기불편과 관련해서 스테파니 그래페(Stefanie Graefe)와의 시사하는 바가 많은(instruktiv) 대화에 감사한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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