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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4

최초의 점령운동과 항만 파업

 

현재의 „점령중환“(佔領中環) 그룹은 – 공식 명칭은 “양애여화평점령중환“(讓愛與和平佔領中環) – 홍콩의 최초 점령중환운동의 존재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점령운동처럼 홍콩의 2011년 점령운동 역시 시내 금융센터를 공략의 목표로 하여 홍콩 금융가의 심장부에 있는 HSBC 은행 빌딩 아래바닥에 천막을 치고 시위를 했다. 홍콩의 점령중환운동은 2011년에 시작한 그 어느 점령운동보다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점령운동에 속한다(2011년 10월 시작해 2012년 9월 쯤에 끝남). 그러나 홍콩의 점령운동은 다른 지역의 점령운동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고 운동의 절정기에 비로소 100명 단위의 참가자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민 소요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고, 최초의 점령운동 참가자 다수는 지속적인 운동으로 현재 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신제 개발에 맞서는 운동을 조직하거나 학생파과(罷課) 조직을 지원하는 등 "우산혁명"에 불을 당겼다.

 

Hong Kong's original Occupy movement

(홍콩 최최의 점령운동)


그러나 홍콩 최초의 점령운동 역시 다수의 다른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태동하는 아나키스트의 출현과 함께 점령운동은 음모설을 주장하는 무리들, 근시안적인 활동가들, 그리고 몇몇 안되지만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리버럴한 [진보]세력이 뒤섞여 있는 혼합체였다. 홍콩의 경우, 리버럴한 [진보]세력은 [좌파적이지 않는] 범민주파의 변종에 속한다. 그들의 정치적 관점이 기본적으로는 월가점령운동에 관여한 미국식 [좌파의] 리버럴한 세력이 내걸은 “정치에서 돈을 척결하라”는 얄팍한 비평과 동선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점령운동 주변에 있었던] 홍코의 리버럴한 [진보]세력과 [점령운동에 직접 가담한] 젊은 교수들, 학생들, 실업자들,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 등 [광범위한 배경을 갖는 사람들의] 한묶음인 최초점령자들의 지향점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리버럴한 [진보]세력이 최초점령운동을 [복제하게 되었다]. 이들은 최초점령운동이 퇴거된 뒤 그들이 갖고 있는 언론과의 [좋은] 관계에 기반해서 국제사회의 찬사를 유도할 줄 아는 역량을 동원하고 현상적으로(effectively) 재점령일뿐인 [양애여화평점령중환] 계획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중환점령운동 자체에 참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베니 타이 교수, 진건민(陳健民/찬킨만) 교수, 그리고 주요명(朱耀明/추이우밍) 목사로 구성된 [양애여화평점령중환] 대변인 3인방은 일련의 의회 심의안을 작성하고 제안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정부를 요구하는 개혁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홍콩에서 „보통선거“라고 불린다. 이 안이 국내 이주노동자 등 주민 일부를 선거권에서 배제하는 데도 말이다. 이 3명의 지도자는 이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중환에서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에 나서겠다고 위협하면서 이 새로운 운동을 „양애여화평점령중환“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는 새로운 점령운동이 “비폭력적”이며 홍콩 사람들 다수가 원하는 것에 反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름짖기였다.

 

 

The Logo for the new "Occupy with Love and Peace"

(재판(再版) 점령운동인 "양애여화평점령중환"의 로고: 화평점중)

 

그러나 새로운 중환점령 그룹이 온라인 선거를 실시하자 (최종적으로 홍콩 인구 10명 중 단 1명이 참가함), 점령 반대세력도 역시 도시 전역에서 청원과 서명운동을 지원했다. 여론 조사 결과 다수가 재점령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베니 타이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선언하게 된다. 점령운동이 현실화되면 이른바 “실용주의적인” 시민들 중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프로그램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가 실패선언의 배경이었다. 이즈음 대중버스에 반포된 광고에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 홍콩인부터 나이든 기업인까지 모두 나와 중환점령 계획이 소상점의 영업과 주말 쇼핑을 망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위운동이 시민사회의 지지를 잃게 될까봐 하는 이 두려움은 홍콩 정치에서 변함없이 유지되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대부분의 운동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숨통을 죽이게 하는 효과적인 강요를 행사한다. 이 모든 게 예의(politeness)라는 이름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거로 소급하지만 과거와의 단절을 야기하는 (post facto)  브랜드로서의 점령운동 복제는 또한 손쉽게 최초 점령운동의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새로운 리버럴한 플랫폼으로 덮어 은폐했다. [여기에 함유된] 중요성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뚜렷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초 점령운동은 “No Future세대”의 구성원 일부가 함께 모여 홍콩의 정치 전반을 집단적으로 비판하는 몇몇 안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범민주파도 비판 대상에 포함되었고 예의는 빌어먹을 것으로 규정되었다. 점령운동 핵심구성원의 일부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명쾌한 비판을 배포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이런 비판은 결과적으로  홍콩의 “성우“(聖牛)인 자유민주주의를 „잡는“ 비판이었다. 이것은 89년 이후 이 도시의 역사 대부분에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환경(milieu)을 배경으로 하는 학생과 젊은이들 사이의 보다 급진적인 계열이 결국 양애여화평점령중환 운동 지도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주의 깊은 심사“(deliberations)를 멀리하고 학생파과를 발의하고 중환뿐만 아니라 금종, 망라만, 그리고  왕각으로 이어지는 긴 구간을 점거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원로들과 충돌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최초 점령운동이 축출된 이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새롭게 형성된 적대적 대립이 [내부모순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외부화되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대중파업이 홍콩항 규용화궤마두(葵涌貨櫃碼頭/쿠이칭구 컨테이너터미널)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이 파업은 수십년 동안 홍콩에서 볼 수 없었던 규묘가 가장 크고 장기간 진행된 노동쟁의로 이어졋다.  최초 점령운동, 이 파업, 그리고 현재의 시위들 간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하지만 모두 다 동일한 경제적 침체와 심화하는 계급의 적대적 대립에 의해서 생성된 것만은 분명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운동이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정치의식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이런 새로운 인식이 다시 차후의 운동을 지지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파업은 크레인 운전자들의 주도하에 항구 내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홍콩노총 및 노동당과 연계되어 있는 항만노동자노조 향항마두업직공회(香港碼頭業職工會/UHKD)가 급히 끼어들었다. 이 셋 모두 범민주파 원로들이 이끄는 집단들이다. 교섭을 주도하는 노동조합 대표단들은 급히 파업 노동자들의 초기 에너지의 방향을 틀어서 파업이 종업원 전체 대다수로 확산되는 걸 차단하였다. 리자청의 주력기업인 허친슨 왬포어가 소유한 이 항구는 홍콩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핵심적이다. 이 항구가 정말 폐쇄될 경우 홍콩과 본토 양쪽 모두에 있는 가장 부유한 지역자본가들의 이윤의 흐름이 고갈되어 전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노동당은 그렇게 항구가 폐쇄될 경우 언론 - 그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 동원되어 反노동자 입장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파업이 개시된지 겨우 며칠이 지난 후에 파업노동자들의 항구출입을 금하는 법원의 가처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시켰다.

 


이것이 의미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들이 항구 자체를 점거하는 대신 항구 외부 한쪽 보도에 천막을 치고 항구 진입로 하나의 정면에서 상징적이지 밖에 못한 봉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전세계의 언론들은“파업”에 대해 보도했지만 이런 쇼의 뒤에서 항구는 평소보다 단지 살짝 느리게 가동됐을 뿐이다. 파업이 절정을 달했을 때에도 항구는 여전히 80% 정도의 가동율을 보였다. 항구 내 노동자들 중 조직된 조합원은 소수였다. 게다가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항구의] 경제적인 가동 차단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조합원들은 소외되거나 무시됐다. 보다 젊은 지지자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과 접촉하려고 했지만 역시 노동조합의 주류를 이루는 자유주의자파의 원로들에 의해서 주변화되었다.

 

노동조합은 도로변 점거로 인한 사소한 방해도 (암튼 파업기금의 주여 기부자인) 시민사회의 구미가 감당할 없을 만큼 크다고  우려하면서, 곧 천막캠프를 다 해산하고 허친슨 왬포어 본사가 있는 시내 장강집단중심(長江集團中心/쳉콩센터) 아래에 훨씬 더 작은 제 2 농성장을 차렸다. 이후 “파업노동자들“은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고  파업은 시내 빌딩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일로 축소되었다. 결국,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는 일부만이 해결되고 노동자 다수는 파업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매스컴은 이 파업을 전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번 파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많은 나이든 노동자들은 1997년 반환 이전에 이 항구에서 두번의 파업이 일어난 사실을 지적했다. 당시 노동당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다수의 노조도  불법이었다. 이들 나이든 노동자들은 예전의 파업들이 실제로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시민사회의 입맛에만 어필하게 노동자들을 밀어붙이는 노동조합이나 정당 대표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불법파업들에 순수하게 가담하고 항구의 실제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그들 요구들의 상당부분을 쟁취했다. 이와 비교하면 최근의 파업은 암울한 패배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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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정보는 최초점령운동계열의 여러 명과 진행한 인터뷰 기반한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조직하고 파업개시 후 최초 며칠 동안 파업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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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주주의자들과 열혈공민(Passionate Citizens/열정적인 시민들)

 

이들 각각의 저항운동은, 이집트에서든, 그리스 또는 미주리에서든, 잠재력 면에서는 뿌리가 깊었지만 정치적인 지리멸멸과 실천적인 미숙함 때문에 반신불구가 되었다. [다행히도] 그리스와 스페인 같은 몇몇 지역들은 보다 응집력 있는 좌파 정치의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이 젊은이들에 의해서 지금 재발견되고 재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또는 태국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극우 그룹들이 운동을 사수하고, 확장하고, 조정하는 능력 면에서 다른 그룹들을 전술/전략적 차원에서 능가하면서 [운동 전체가] 급격하게 우경화되는 사조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불만을 가진 세대의 더 많은 사람들이 우익의 대열로 흡수되었다.

 

홍콩은 불행히도 많은 관점에서 전자의 사례보다 후자의 사례에 가깝다. 1967년 뒤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는 대중적 기반을 대량 상실하고 경찰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해체되었다. 동시에 홍콩정부는 노동자, 학생,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경제 재구조화 프로젝트에 자진 동참하는 것을 반대급부로 하여 어는 정도 양보하는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홍콩 특유의  냉전 분위기, 즉 중국과의 관계상에서의 냉전은 중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개방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됐다. 결과 도시국가 홍콩에서의 냉전은 모든 자생적인 급진 소그룹들로 하여금 „중국문제“에 관하여 [중국을 멀리하는] 입장을 취하게 강제함으로써 견실한 공산주의자 좌파가, 그게 어떤 류가 되었든, 소생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어떤 항의에 „폭력“이 동반되면, 그게 어떤 형식을 취하든, 지금까지도 어김없이 본토 중국공산당이 보낸 앞잡이의 공작으로 호도된다.

 

결과, 홍콩에서 "좌파"로 일커어지는 세력은 수십 년 동안 본토의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주의"라는 천진난만한 담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북경 천안문광장 봉기에 의해 고무됨과 동시에 이를 분쇄한 무자비함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1989년 이후 홍콩의 급진적 학생 대부분은 천안문 봉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주도의 운동으로 묘사한 주류 매체의 회화(繪畵)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북경에서 학생이 아닌 사람들의 폭넓은 참여에도 불구하고, 북경공인자치연합회(北京工人自治联合会)의 [자생/자율적인] 결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학생의 범죄행위보다는 노동자의 그것을 더 중대하고 다루고 장기징역형에 처하는 등 더 심각하게 처벌한 국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메시지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귀에 익숙한 정치경제 체제의 자유화를 촉구함으로써 서구에 어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과 유럽에 전달된 천안문 운동의 왜곡된  이미지다. 그리고 이런 왜곡된 이미지의 영향은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게 있다면 단지 더 증폭되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왜곡의] 즉각적인 효과는 첫째 „향항[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의 결성이었다. 사도화(司徒華), 마틴 리, 그리고 이척얀과 같은 인물들이 이 연합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모두 어김없이  본토 정부에 의해서 비난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다. 2년 뒤인 1991년 홍콩은 첫 번째 직접 선거를 실시했다. 향항[홍콩]민주동맹(香港民主同盟)과 자유주의적 성향인 회점(匯點/Meeting Point)당 간의 선거연합이 보다 작은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들의 병합과 함께 대승을 거뒀다. 1991년 선거를 계기로 하여 "친민주파"(Pro Democracy)진영이 탄생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진영은 그 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쪼개졌다가 다시 결합했다. 현재 이 선거 정당들이 지식인, 활동가, 그리고 NGO들의 느슨한 결합과 함께 대략 "범민주파"고 불린다.

 


범민주파의 한 날개인 활동세력의 핵심 구성원은 중국 정부의 “정치 교육” 수업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된 학민사조(學民思潮)와 같은 중등학교 조직들과 홍콩의 7개 주요 대학 학생연합이 발기한 향항[홍콩]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HKFS)다. 이 조직들은 현상적으로 매우 폭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지도부는 대개 어떤 문제에서나 범민주파들과 한통속을 이룬다. 법률에 엄격히 따르고 예의의 경로(polite path)를 통해서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 학생 조직들이 종종 범민주파의 다른 날개인 보다 제도화된 세력을 밀어붙혀 불확실한 상황일지라도 우선 행동하도록 할지라도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홍콩의 공손"(Hong Kong civility)에 자부심을 가지며, 이런 자부심은 심지어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할 때 반격하는 이들까지 비난할 정도로 팽배하다. 최근 홍콩의 정치적 사건의 모든 단계에서 HKFS와 학민사조와 같은 그룹들이 선두적이었지만 결국에는 모두 운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신제(New Territories) 개발에 맞선 시위부터 올해 7월 1일 연례 행진 뒤 잠깐 동안 진행된 점거에 이르기까지, 시위가 날개를 펼치고 이륙하는 데에는 학생조직들이 필수적이었지만 실제 경찰의 탄압에 직면했을 때에는 거의 모두가 날개를 접고 말았다.

 


이런 관계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즉 홍콩의 젊은 시위대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약하지만 자금은 넉넉한 "범민주파" 자유주의와 범민주파의 모호한 변종인 人民力量(인민역량/People Power)을 중심으로 해서 느슨하게 그룹화된 熱血公民(열혈공민/Passionate Citizens)이라 불리는 극우 정당과 그 추종자들 사이에서 둘로 찢어지는 상황이다. 범민주파 변종 세력들은 이주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어떤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열혈공민의 경우 홍콩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조직내에서 활동하는 걸 폭넓게 받아들인 상황이다. 그래서 이주민(특히 본토 중국인)은 떠나라고 말하는 反이주민 집회에서 열혈공민의 멤버쉽의 상징인 흑황색 티셔츠가 자주 눈에 띄는 일이 되었다.

 

Wong Yeung-tat, a leader of the right-wing Civic Passion group, with an anti-CCP banner behind.

중국공산당 반대 배너 앞에 선 우익 열혈공민 그룹 지도자 황양달(黃洋達/Wong Yeung-tat)

 


다른 곳의 민족주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열혈공민은 민족적 소속으로 점철된 언어로 계급 대립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열혈공민의 정치 분석을 보면 이들 다수가 어찌되었든 알아볼 수 있는 좌파라기보다는 론 폴과 앨릭스 존스와 같은 사람들과 더 유사하다. 이들은 홍콩의 미래의 약탈 과정에서 국제 자본가 계급의 진정한 역할은 보지 못하고 중국본토 자본가들이 취한 역할에만 주목한다. 더욱 위험한 짓은 이들이 홍콩으로 이주한, 그들보다 더 가난한 수많은 본토 중국인들을(아니면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관광객으로  그저 홍콩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을) 홍콩의 모든 자원을 빨아먹고 고갈시키려고 떼거지를 지어 들어온 메뚜기들이라고 호도하는 등 완전히 왜곡된 꼬리표를 붙이는 짓이다.

 

反본토중국 감정은 홍콩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아주 공공연한 형식을 취하는 인종차별주의다. 이건 일상생활의 표면에서 가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인종차별주의다. 베이징의 직간접적인 검열을 받지 않는 소수 언론 매체 중 하나인 빈과일보(蘋果日報/Apple Daily)는 2012년 홍콩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메뚜기를 묘사하는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홍콩이 본토 부모들에게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데 매 18분마다 100만 홍콩달러를 지불하기를 원하는가?” 이어서 올해 초엔 100명 이상이 „반메뚜기“ 캠페인에 합류해서 „중국으로 돌아가라“, „홍콩을 되찾자“와 같은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북경어를 사용하는 구경꾼들을 싸잡아서 큰소리로 욕설하면서 부유한 본토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보석매장이 많이 있는 관동도(廣東道)로 행진했다. 사회적 긴장이 악화된 매 순간마다 이 같은 일상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손쉽게 억눌린 자의 감정을 배설하게 해주는 밸브가 된다. 이 밸브의 작동구조는 한편으로는 시위대를 분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들어 경계를 넘어 주강 삼각주에서 저항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의 천연적인 동맹자를 찾는 걸 가로막는데 있다.

 

An anti-mainlander ad run in one of Hong Kong's biggest newspapers

(홍콩 최대 일간지의 반중국인 광고)

 

그러나 범민주파동맹의 보수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극우적인] 인민역량이나 열혈공민과 같은 그룹들 외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그룹이 없다. 이들은 보다 전투적인 행동에 기꺼이 나서는 몇몇 안되는 그룹들의 일부로서 제일 먼저 가시적인 대안그룹으로 떠오른다. 젊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촛불시위와 같은 평화적인] 시위와 정당의 영합주의가 성취한게 아무것도 없는 걸 지켜보고 난 다음 단지 몇 년 만에 이들 그룹의 대중성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장 자주 인용된 사례를 보자. 주류 민주파 정당들은 매년 6월 4일에 1989년 천안문 광장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연례 촛불 시위를 진행한다. 열혈공민도 연례적으로 대안집회를 치르기 시작했다. 이 집회는 보다 전투적이다. 그러나 이 집회는 (그들은 ‘지역주의자’라고 부르는) 민족주의자와 인종차별주의자 슬로건으로도 점철된 집회이기도 했다. 2013년 이들의 대안 집회에는 200명만 참가했지만 올해에는 7000명이 모였다. [민주파 정당들의] 본 행사가 여전히 훨씬 크지만 공식 시위 참가자는 같은 기간 수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현재의 “우산 혁명”에서 반중국 그룹은 다시 주변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범민주파가 활동 부족으로 날개를 내리면, 극우만이 전술적인 우세를 획득하기 위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과거 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전술적인 우세는 점점 더 전투적인 청년세대를 한 다발 한 다발 자기편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홍콩의 정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이 벽에 부딪혀서 와해되었다.

 

A flyer in the umbrella movement protesting "Colonialism" and "New Hong Kong People" -- i.e., mainlanders.

(우산운동 개시 전야 왕각지역에서 찍은 식민주의와 본토중국인을 반대하는 스티커. "불요식민", 불요신향항[홍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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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 2

No Future 세대 (The Generation with No Future)

 

홍콩의 붐시대는 홍콩 특유의 붐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개 처음에는 중일전쟁 기간에, 그리고 이어서 1940년대 후반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사이의 내전 기간에 이 섬으로 피난해 온 이주민의 자손들이다. 이 베이비 붐세대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본토에서 그랬듯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 저항운동의 일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런 운동들의 패배로 인하여 [심정적으로] 각인된 세대다. 그리고 이 세대의 상당수가 재구조화된 지구적 경제구조 안에서 안전한 지위를 차지하는 걸 반대급부로 하여 저항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홍콩의 경우 이것은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의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실험 중 그 하나를 의미했다. 대체로 보수적인 논평가들이 여전히 칭찬하는 실험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또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들을 쥐어짜는 효과를 낳았다. [남을 등쳐 먹지 못해서] 혈안인 사람들이 들끓는 심천(深圳)의 전성기 당시 아무런 규제가 없는 산업 도축장에서 [한 마리를 때려 잡아] 한밑천을 잡은 부모들에 의해서 리자청과 같이 자수성가했다는 백만장자의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사례로 하여 교육된 홍콩의 젊은이 다수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이제 삭막한 서비스 일자리와 1997년, 그리고 2007년에 반복되었던 경제 위기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경쟁자의 목을 따서라도 최고 명문대학이 제공하는 몇 자리에 들어가려는 살인적인 경쟁의 도가니 안으로 강제되고, 이런 제도에서 살아남은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옥같은 장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고 삶을 짓눌러뭉개는 [대]기업에서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강요된다. 그렇게 해서 벌어도 여전히 소득의 평균 40%를 주거비로 지출해야만 하는 삶이다.

 

현재 연소득이 100만 달러 혹은 그 이상인 홍콩 가계는 8.5%에 달하고 [이런 고소득층을 위한] 홍콩의 슈퍼 프라임 주택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동시에 심각한 주택 부족 상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택 가격과 부자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하여 구입한 수십만 채의 비어있는 아파트와 함께 존재한다. 홍콩은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하며 주택[임대]가격이 너무 높아 많은 젊은이들은 30대에 들어서까지도 부모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변두리 „신도시“의 공공주택으로 내쫓겨 일하기 위해서 다시 왕각(旺角/몽콕/왕자오) 만자(灣仔/완차이)로 출근해야만 한다. 다른 이들은 슬럼가에서 불안전하고 -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쥐어짜게 하는 - 비좁은 방을 구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된다. 예컨대 빌딩 꼭대기나 골목길의 작은 틈에 지어진 방이다. 5만 명 이상이 말 그대로 새장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http://www.ultra-com.org/wp-content/uploads/2014/10/public-housing.jpg

(홍콩 공공주택 대다수는 주요 도심과는 먼 신제(New Territories)에 있는 신도시에 위치해 있다. 이와 관련 상세한 내용은 여기 원천소스에 있다.) 

 

 

대체로 이 도시의 지니계수는 0.537로 선진국에서 가장 불평등한 수준이며 인구의 20% 이상이 빈곤선을 밑도는 수준에서 살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학대의 대상이 되고 법적으로 단체교섭을 할 수 없다. 2010년 까지만 해도 최저임금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해 도입된 시간당 28 홍콩달러라는 최저임금은 만자에서 공항까지 가는데 필요한 지하철 교통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부유한 외국 직장인들의 급여는 식민지 시대에 전염병이 발발한 저지대를 떠나는 영국 관료들의 수용하기 위해서 산 중턱에 지어진 고급주택을 구매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홍콩이 결코 그리스와 같은 지역들의 „아노미적인 파탄“에 처해있는 건 아니지만 과잉노동에 시달리고 과잉쇼핑에 시달리면서 비좁은 곳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해야 하는 이 도시의 청년들은 아테네를 떠나는 실업 혹은 저임금 청년들과 공통점이 많다. 미래가 저당 잡히고 그 저당권이 이미 행사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청년들은 떠나기로 작정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홍콩을 떠나는 이주는 현재 1990년대1 초 반환 전 대량 이민 사태 이래 가장 빠른 비율로 증가하고 있다. 아직 부상하는 동아시아 덕분에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4-5%)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알리는 미묘한 징후들이 있다. 정신 건강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지난 십년 간 2배 이상 증가했다. 홍콩의 문화적 ‘죽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예전엔 정부 개발계획 또는 중국본토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일상적인 [잔잔한] 현상에 불과했는데 이젠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커져 점점 더 통제가 불가능한 규모로 불거진다. 최근 학생휴업과 중환(中環)가(그리고 이제 금종(金鐘站/애드머럴티), 왕각, 동라만(銅鑼灣/코즈웨이 베이)와 이 도시의 여러 다른 주요 교점)의 (재)점거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최근 현상일 뿐이다.

 


홍콩의 젊은층은 [국제]분업에서 보다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들 역시 2007/8년에  발생한 금융 위기의 뒤를 이어 전세계에서 일어선 젊은이들이 선봉에 선 저항운동의 지구적 역동성에 똑같이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에 참여한 사람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극단주의자들(ultras)이다. 이들은 우리의 “No Future 세대”의 구성원들로서 그들 주위를 맴도는 어렴풋한 경제적, 생태적, 그리고 사회적 파멸을 직감하고 반격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이런 활동들에 적극 가담하는 이들의 출발점과 경험에는   중대한 차이들이 있다. 일부는 학생들이고, 일부는 거리에서 사는 아이들, 축구 훌리건 또는 서비스 노동자들이다. 이렇게 분분(分分)한 배경에서 발생한 저항운동들은 공산주의자 이론 집단인 Endnotes제기한 „구성문제“(composition problem)로 특징 지어진 바 있다. “속성상(typically) 서로 거리를 두는  계급분파들이 서로 인정하고 때로는 함께 생활하도록 강제됐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질문에 깔려있는 문제[의식]은, 분분한 경험들로 [구성된 운동이란] 관점에서, 어떻게 „각각의 투쟁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분파들을”, “조직”, “조절” 또는 “단일화”시켜 통일된 하나의 운동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특히 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결론은 홍콩의 운동들이 주민의 대부분과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지만 현장에서의 운동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로 밖에 생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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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현재 홍콩을 떠나는 이민이 매년 약 6만 명 정도가 떠났던 1990년대 초기 보다 여전히 훨씬 낮은 수준이라는 점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재번역: "흑대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참세상 정은희 기자가 번역소개한 글 „흑 대 황 –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을 재번역해 본다.

원문 „Black vs. Yellow: Class Antagonism and Hong Kong’s Umbrella Movement“는 여기

참세상이 참조한 버전: 블로거 “나오(Nao, 鬧)”가 재게재한 버전은 여기

참세상 번역문은 여기

이 번역은 참세상 정은희 기자의 번역을 참조했다.

번역소개된 글을 재번역하는 동기는 우선 ① 이 글이 운동 서술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는 생각에 이어서 ② 번역이 글을 천천히 읽도록 강제하는데  있다. 마직막으로 ③ 번역된 글을 편집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재번역의 동기가 되었다.  

 

 

 

 

 

흑 대 황

 

적대적 계급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일러두기: 이 기사에 직접 입수한 정보와 사진을 제공해준 홍콩의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Translation: "Civil Disobedience"

 

제 1 부 : 역사

 

글로벌 시티(Global City)

 

상품사냥에 분주한 행인들이 잠시 멈춰 포즈를 취하고 녹색과 노란색 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만(灣) 건너편 금융가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하여 셀피를 찍는다. 그 불빛 아래 유다리아항(維多利亞港/빅토리아 항)에서는 조용히 이는 물결이 다가올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바닷물은 휘돌고 있지만 거기 한 유람선은 거의 움직임이 없다. 그렇게 보인다. 첨사저(尖沙咀/침사추이) 부두에 정박한 이 유람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호화로운 쇼핑몰 중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 트랩을 내리고 있다. 세계 도처의 부유한 방문객들이 냉난방 시설이란 구조적 안전과 잘 훈련된 보안의 혜택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이 통제된 한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편리의 트랩이다. 일단 배에서 내리면 승객들은 이 도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식당과 매점에서 면세로 돈을 쓸수 있다. 이런 식이다. 우선 일식 바비큐로 배를 채운 다음 윤기나는 실내 바닥 위로 브랑우징하듯이 미끄러지면서  20세기 20년대의 스타일인 식민지 멋을 마케팅하는 부티크에서 복고풍 영국 복장들을 둘러보는 식이다.

 

바깥 부두에선 셀프를 찍기 위해 쭉 뻗은 팔의 아이폰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 어린 소녀가 남자친구의 어설픈 기타반주에 맞춰 흘러간 광둥어식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다. 이젠 모두가 K 팝을 듣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톱니 모양의 홍콩 동전 [2홍콩달러 동전]  몇개를 기부금 통에 떨어트린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치 마이크의 잡음을 쓸어내리기라도 하듯이 광둥어식 어투를 말끔히 삼켜버린다. 그녀 뒤에는 유람선이 하앟게 그리고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이것이 홍콩의 전투이며, 이 전투가 바로 홍콩이다. 태풍으로 일어나는 바람 속으로 힘껏 내던져진, 그러나  무심한 유람선의 벽과 금융가의 불빛 아래 어렴풋한 모습인 쇼핑몰에 도달하기 전에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흘러간 광둥어식 사랑 노래들. "글로벌 시티"의 전형인 이곳에서 스펙타클은 완고한 인류에 닥치는 스펙타클이다. 자본이 항구를 통해서 흘어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은행들과 부동산시장들이 [자본 통제의 저편에서도] 결코 환경 통제라는 구조적 안전과 보안 저지선을 떠나는 법이 없이 아시아 본토 약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설계된 글로벌 시티의 스펙타클.

 

오랫동안 홍콩은 식민시대가 남겨논 벽지 이상이 아니었다. 생활수준도 아시아에 진출한 유럽열강의 다른 허브들에서 볼 수 있었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더 나은 게 없었다.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혁명 이후 산업 개발과 농업 개혁을 위한 외부의 지원이 봉기를 억제하기 위한 울타리 구축을 목적으로 하여 이 도시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생활 수준과 복지 프로그램은 즉각 진척되지 않았다. 식민정권은 여전히 악랄한 정권이었다. 불안정한 사회를 통치하고 범람하는 이민자를 수용하려고 발버둥이 치는 정책은 잔혹했다. 본토 혁명 후 수십년 동안에는 뜬금없이 일어나는 봉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956년에 들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56년의 봉기들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이 봉기들은 차후 대영제국 [식민]정부에 대항하는 반복되는 충돌로 이어진다. 1966년 봄 또 다른 봉기의 물결이 시작됐고 1년 후 1967년 홍콩 봉기로 절정에 달한다. 이 봉기는 홍콩 역사상 가장 큰 내부 혼란이었다. 경찰에 맞선 전시민적인 시가전과 함께 대중파업이 진행되었고,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공격과 우익 언론사 대리점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8개월간의 공공연한 저항운동 이후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이 파괴되었으며 5천여 명이 투옥되었고, 2천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본토로 추방되었다.

 

1967년 봉기들의 영향아래 홍콩 식민정부는 대대적인 복지국가 확대에 착수했다. 거의 1백만 명에게 정부출자로 새롭게 건설한 공공 아파트 단지들을 통해서 주택을 공급한다는 ‘Colony Outline Plan’이 그 골자였다. 1950년대 이후 가시화된 제조업의 대대적인 증강은 궁극적으로 절제된 임금 인상과 병행되었고, 초기 ‘아시아의 호랑이’ 경제국 하나로서의 홍콩의 위상은 안전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홍콩은 최근에 개방한 중국본토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물 건너 중국의 첫 경제특구인 심천(深圳)과의 지리적인 근접성 그리고 중국 본토와의 역사적인 연관성이란 양대요소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몇 십년동안 “글로벌 시티”를 위한 토대가 깔렸다. 대체로 말 그대로 깔린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리자청은 1967년 봉기 후 부동산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형성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바로 이런 부동산들이 홍콩의 척추를 이룬다. 그리고 리자청은 금융가의 주요 고층빌딩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에 속하는 홍콩의 항구까지도 소유하고 있다.


 
바로 이 항구와 이를 중심으로 하여 짜여진 금융구조가  홍콩으로 하여금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제조업의 역할에서 발을 빼고 지구적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센터 하나로서의 역할로 발을 내딛게 할 수 있게 하였다. 제조업이 중국 본토 항구 도시들로 이동함으로써 홍콩은 이런 신산업 허브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고 아시아 본토의 입장에서는 역수출의 핵심적인 통로가 되었다. 중국의 신공장단지들 다수가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대만의 자본에 의해서 기획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화교 디아스포라의 자본까지 여기에 참여했다. 현재 중국 내 아시아계 외국인 직접 투자는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의 직접투자를 초과한다. 미국과 유럽의 직접투자는 흔히 일본과 파트너 관계이거나 일본 자본을 대신한다.1

 

오늘날 경계를 이루면서 맞붙어 있는 중국 본토와 홍콩은 이런 분활의 완벽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심천(深圳)쪽으로는 인사불성의 개발이 강변 쪽으로 어지럽게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개성이 없는, 절반은 빈 아파트 타워들이 오염물질의 연무 아래 집단을 이루고 있다. 홍콩 쪽으로는 경계지역 전체가 군대가 지키는 자연보호구역과 농업지역으로 전환되어 녹지가 강변을 꾸미고 있다. 여기선  숲에 들어가려고만 해도 특별 허가가 필요하다. 언뜻 보기에 이 2개의 세계는 중재 불가능한 대립처럼 보인다. 통제 불가능한, 환경을 완전히 파괴하고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심천(深圳)의 성장이 “후기산업적인” 이웃의 목가적인 녹지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대립은 매우 깊은 상호 의존을 의미하는 징후다. 분할된 양측은 서로 상대에 의해서 구성되는 상호구성관계를 갖는다. 홍콩의 자본이 없었다면 심천(深圳)이 건설될 수 없었을 것이고 심천(深圳)의 공장들이 없었다면 홍콩은 결코 쇼핑몰들과 오피스 타워들이 꽉 들어선 삭막한 사막과 주의 깊게 조성된 농경지적인 전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심천과 홍콩 사이의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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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 경제 개방에 대한 보다 세부적인 역사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자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중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 중국의 시장 경제”를 보라 (훙호펑 편, 존스홉킨스대 편집부 편찬, 국내에서는 ‘미지북스’에서 2012년 출간함. 하남석 외 옮김)텍스트로 돌아가기

독일 기관사노조 파업에 대한 단상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의 전국적인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중 자의 반 타의 반 독일의 모델을 참조했다. 독일 노조관계자들이 독일노총(DGB)을 소개할 때 늘 등장하는 표현이 있었다. „한 기업 한 노조“(ein Betrieb, eine Gewerkschaft)란 표현이었다.

 

물론 기독교노조, 사무직노조 등 DGB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노조도 있었다. 그러나 DGB의 영향력이 절대 우세였다. 조직된 노동자의 80%이상을 대표했다. 그래서 최소한 90년대 말까지는 DGB산하 산별노조가 어디서나 임협의 주체였고, 한 기업 내에 한 임협만이 유효한다는 이른바 Tarifeinheit(통일임협)의 사회적.조직적 실체가 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의 점진적인 도입과 이에 대응하는 조직된 노동자세력의 대표인 DGB의 후퇴로 통일임협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아웃소싱으로 한 기업 내에 여러 임협이 적용되기 시작하였고, 1998년 적녹연정(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 금속노조 부위원장 출신인 리스터가 노동부장관)하에 관철된 파견노동의 합법화로 독일 특유의 ‚노사정합의자본주의’의 상징인 통일임협은 정규.비정규 노동자의 현저한 임금차이로 붕괴되었다. 마침내 노동쟁의 관련 최고법원인 연방노동법원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복수임협(Tarifpluralität)의 합법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근데 최근들어 흑.적 연정(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사민당 소속 날레스가 노동부 장관)은 다시 통일임협을 입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사민당과 제도화된 노조의 협조하에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모델이 소수의 파워집단이 특수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모델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에 대한 대응/대항으로 기관사노조(GDL), 조종사 노조(Vereinigung Cockpit e.V.) 등 전문직노조(Sparatengewerkschaft)들이 결성되었다. 독일노총에 가입하지 않는 이 노조들을 소수이지만 높은 조직율에 기반하여 막강한 파워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인프라의 정상적인 가동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

 

이런 노조를 '소수의 횡포'로 규정하고 이를 근절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론의 협공아래. (중도우파로 간주되는 FAZ가 이런 여론공세가 가담하지 않는 게 재밌다. "Ein Sozialmodell namens Entsolidarisierung"(탈연대화의 사회모델) 제하 전문직노조의 파업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을 우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라인강자본주의’란 독일 특유의 ‚정원’을 망친 멧돼지가 과거의 정원을 다시 가꾸는  정원사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자본의 지구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실락원은 복락원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기본법이 보장하는 단결권을 제한하는 입법은 연방헌법재판소가 회수할 게 빤하다.    

 

선진 노동자들이 항상 그랬듯이, 기관사 노조 등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노동자 조직이 연대파업의 선두에 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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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갈림 (Bifurcation)

1. "윤리.정치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려는 좌파의 모순

 

"코바니의 저항과 연대하자! 미국의 폭격을 끝장내자!"

출처: Christine Buchholz, 독일 좌파당 국방대변인 Facebook: https://www.facebook.com/buchholz.christine/photos/pb.328453390630548.-2207520000.1413974090./478820092260543/?type=1&theater

 

2.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코바니의 저항과 연대하자! 미국아, 폭탄을 더 퍼부어라!" 이렇게?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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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Our Countries لبلادي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티나

 

오래된 전쟁

 

참조: 슈피겔 http://www.spiegel.de/politik/ausland/youtube-hit-to-our-countries-ueber-syrien-libanon-und-irak-a-9984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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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9 메모

1. 20세기의 비동시성

 

에릭 홉스봄은 유럽의 20세기가 100년을 못 채웠다고 한다. 1917년에 시작해서 1989년에 끝났다고 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보다 어쩜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찌히의 시위대를 유혈진압하지 않았던 게 20세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럼 아랍의 20 세기는 끝났는가? 북동아시아의 20세기는 끝났는가? 그리고 언제 시작했는가?

 

중동의 20세기는 현재의 판을 결정한 1916년 5월 16일 사이크스 피코 협정으로부터 시작한 게 아닌가? 이  판도가 존재하는데 중동의 20세기가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2.“이슬람 국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ISIS(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 아니면 ISIL(이라크 레반테 이슬람 국가)를 사용했는데, 이젠 머리를 떼 버리고 “이슬람 국가”라고 표기한다. 뭔가 은폐하고 있다.

 

ISIS/ISIL의 아랍 원어의 번역문제에 앞서서 분명한 건 이들이 사이크스 피코 협약에 의한 중동의 판도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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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메모

1. 닭머리

 

벵가지 이후 카다피의 정예군은 나토의 어떤 폭격을 받았던가? 탱크를 폭격할 때 아스팔트에는 전혀 손상을 주지 않고 탱크만 부수는 정밀 폭격을 하지 않았던가?

 

2003년 이라크 전에서 모래로 쌓아 숨겨놓은 전차까지 적외선으로 다 색출해 파괴하지 않았던가?

 

코바니에서는 왜 그게 불가능해? 주변이 우거진 숲이나?

 

2. R2P?

 

물 건너 먼 나라에는 R2P를 적용하더니 왜 나토의 문 앞 코바니는 보고만 있어?

 

Right to protect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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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번역] 리어왕 3막 2장

(거친 들판. 앞과 다른 장소)  (지속되는 무서운 폭풍)

 

리어:
바람아  불어라, 볼이 찢어지게 [불어라]!  미쳐 날뛰어라!  불어라!
너희 물벼락과 폭풍아, 내뱉어라,
종탑이 물을 먹을 때까지, 풍항계가 잠길 때가지!
생각처럼 번뜩이는 너희 유향 불이여!
참나무를  쪼개는 벼락의 전신이여!
내 흰 머리를 그을려라! 그리고 너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이여!
두꺼운 원형 지구를 때려 납짝하게 만들어라! 자연의 주형을 깨부수고
배은망덕한 자를 만드는 씨를 당장에 엎질러버려야!

 

바보:
아저씨, 아늑한 집 안에서 [궁중의 성수(聖水)] 아첨의 침을 뒤집어 쓰는 것이 문밖에서 이런 비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현명한 아저씨, 들어가서 따님들의 자비를 구해요. 오늘같은 밤은 무자비해요. 현인, 바보 가리지 않아요.

 

리어:
그래 네 뱃속 가득히 우르렁 거려랴!  불아, 토해내라, 비아, 뱉어내라!
비, 바람, 번개, 천둥, 너희 그 누구도 내딸이 아니다.  
너희 [자연의] 원소들이여, 나는 너희들이 타락했다고 비난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에게 왕국을 내주지 않았고 너희들을 자식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너희는 내 앞에서 길 필요가 없다. 그러니 맘껏 퍼부어라
너희 참혹한 즐거움을. 나 비켜서지 않겠다. 너희들의 노예가 되겠다.
가난하고, [물러]설곳 없고, 병들고 멸시받는 이 늙은 사람 나.
그러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너희들이야말로 비굴한 들러리들이라고.
악독한 두 딸의 편에 더하다니
저 높은 곳에 뿌리를 둔 전사들을, 이렇게
늙고 허연 머리를 상대로 하여. 아니야, 이건 아니야.

 

바보:
자기 머리를 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은
좋은 머리보호대가 있는 셈이지.
불알보호대만 만들고    
[귀]두의 집은 생각하지 않으면
[귀]두와 불알에 다 이가 들끓게 되지.
거지들의 짝짖지가 많은 경우 이래.
발가락을 심장이 차지해야 할 자리에 모신 사람은
티눈에 비명을 지르고
편안한 잠을 뜬눈으로 셀거야.
지금까지 얼굴이 판판한 여자치고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려보지 않은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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