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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꿈과 희망, 다국적 밴드 스탑크랙다운


연영석의 노래 코리안드림을 듣노라면, 내가 제국의 시민이 된 느낌이 든다.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했다. 스탑크랙다운 밴드가 이 노래를 부른다면, 부끄러움 보다는 심각한 고통에 빠지지 않을까? 이 노래와 가사가 비슷한 스탑크랙다운 밴드의 노래가 있다.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한참동안 받지 못했던 월급을 돌려준데요 나의 소중한 가족들 사랑하는 부모님 이제는 나의 손으로 행복하게 해줄게요 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 사모님 내 월급을 주세요 나의 꿈과 희망이 담긴 조그맣고 소중한 내 월급 얼마 전 하얀 봉투 들고 퇴근했던 동료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 말라고 말하지 자정 시간이 넘어야 나의 일이 끝나네 봉투 없는 내 월급 오늘도 보이지 않네 나에겐 좋은 날이 언제 올는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 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 한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 돌려줘.
이 노래 월급날은 첫 가사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경쾌한 노래다. 그러나 뒤의 가사는 납득하기 힘든 현실의 고통이지만 여전히 경쾌하게 이어진다. 찌릿하다. 스탑크랙다운의 보컬 미누는 18년 동안 한국에 살았지만, 그의 억양에는 어색한 구석이 남아있다. 모르고 들어도 이 노래는 이주민이 부른 노래란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사장님 사모님께 간청하는 부분이 자존심 상한다기 보다는 왠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슬프다.
연영석의 코리안드림은 이주노동자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노래다. 그래서 무척 강하게 절규하는 노래다. 스탑크랙다운의 월급날은 이주노동자의 마음이 심하게 다치기 전, 그러니까 꿈과 희망이 심하게 짓밟히기 전에, 마지막 남은 꿈과 희망에 기대를 거는 착하면서도 불안한 노래다. 이들이 꿈과 희망을 놓치 않으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이미 오래 전에 실현되었고,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는 억울하게 죽은 이주노동자 동지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꿈과 희망을 가진 이주노동자는 결국 절망하게 되고,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한다. 그 악순환의 과정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스탑크랙다운의 음악이 바로 그렇게 돌아가는 이주노동자 일상의 노래들이다. 
보컬 미누가 지난 10월 8일 아침 출근길에 출입국관리소에 표적단속되었고, 얼마 뒤 강제추방 당했다. 미누는 이주민과 한국인들이 서로 잘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에 노래를 했고, 영상활동을 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이주민과 한국인들의 평화로운 소통이었다. 그러나 꿈과 희망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누구나 경계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나쁜 일은 벌어질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역시 한국은 그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았다. 그래도 스탑크랙다운은 6주년을 맞았고, 미누는 밝고 희망찬 축하메세지를 멀리서 보내오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던 만큼, 그 뒤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난이 싫어서 고향을 등지고 나홀로 돈벌러 나왔어 돈 많이 벌어서 가족을 돌보고 내 꿈도 돌보고 싶었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내돈을 돌려 주세요 내몸이 아파 머리가 아파 여기서 도망치고파 차가운 시선 난 그냥 일하지 난 그냥 일하고 싶을 뿐 백인도 아냐 흑인도 아냐 난 근냥 일하는 사람 나 온지 10년 내 몸이 아파 병들어 버린 몸뚱이 그래도 또다시 더럽고 힘든 일 내일은 불법체류자 코리안 코리안 드림 코리안 코리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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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는 영화, 로니를 찾아서

<한국체육관 개관 10주년 기념 국가대표 초청 시범대회>라 쓴 현수막을 다는 인부에게 김관장은 “오른쪽 오른쪽 아 거 오른쪽도 몰라요?” 그런다. 김관장 옆의 사범 하는 말, “저기서 보면 저기가 오른쪽 맞지. 자존심은 강해서 빡빡 우겨요 빡빡” 김관장은 자존심 강한 남자다. 거기다 한국체육관이란 태권도장 관장이다. 그래도 사범이 알로 본다. 그런 남자다보니, “외국놈들 땜에 뒤숭숭하니 소주나 한잔하자”는 짱께 사장 말에 꾀여 얼떨결에 자율방범대 대장 완장을 찬다. 별로 할일은 없고 짱깨 사장과 오락실 사장이랑 소주나 한잔 하다가 별거 아닌 술자리 시비에 껴들어 태권도 관장 가오 상하게 눈탱이 밤탱이 된다. 그리하여 잠자리 라이방을 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노란 완장에 빨간 경광등까지 들고 보니 가오 제대로 나왔다. 가오부린 김에 이주민 노점 한번 깨부숴 주고, 몸 좀 풀었다고 노래방에서 도우미랑 신나게 논다. 거기서 지역유지가 시범대회 잘 하라며 봉투를 찔러주는데, 이거 작은 돈 아니다. 오랜만에 마누라에게 큰 소리도 친다.
드디어 시범대회 날. 아이들 시연, 송판 격파, 대리석 격파, 호신술 시연까지 다 마친 김관장 열화와 같은 박수에 마무리 인사하는데, 느닷없이 “저기요, 잠깐만요”하며 이주민이 결투 신청을 한다. 전에 돈 찔러 준 동네 유지가 “김관장 한번 해봐.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겁도 없이” 하며 응원하고, 김관장 “그럼 좋습니다. 다쳐도 책임지지 않습니다”하고 결투를 받아들인다. 동네 유지, “거 김관장 쇼를 알아 쇼를.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말야. 으하하하” 김관장 멋진 발차기로 공중을 날았는데, 로니란 이주민 주먹에 맞고 뚝 떨어진다. 오 마이 갓. 다시 눈탱이 밤탱이 된 것이다.
자존심 강한 태권도 관장 김관장 3일간 이불 속에 있다가, 로니를 찾아 나선다. 짱깨집 갔더니, “그냥 조용히 술이나 한잔하고 가소” 소리 듣고, 오락실 갔더니 동전 주며, “오락이나 하지” 소리 듣는다. 자존심 강하던 김관장 동네 천덕꾸러기 신세됐다. 마누라 다시 일 나가고, 놀이방 가서 딸 찾아오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로니를 포기하지 않고 사립탐정 흉내 내다가 “로니 항상 웃고 참 착한 사람인데 요즘 안보여 걱정”이란 소리를 듣고 똥씹은 표정이다. 하여간 어렵게 잡은 단서를 쫓다가 로니와 함께 왔던 뚜힌을 만난다. 불쌍한 뚜힌 열나게 터졌다. 그러나 뚜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이다. 엄청 터지고도 김관장한테 앵긴다. 거처가 불분명한 뚜힌은 김관장 체육관에 얹혀 살겠다는 속셈이었다. 김관장 이새끼 저새끼 하며 아무리 때리고 협박해도 뚜힌 굴하지 않고 앵긴다. 뚜힌도 “야 새끼야 너도 호랑이띠라매? 나도 호랑이띠야” 하며 맞먹는다. 김관장이 확인해 보니 자기는 74 호랑이, 뚜힌은 86 호랑이다. 뻔뻔한 뚜힌 “그래서 뭐?” 그래서 이새끼 저새끼하는 친구가 되고 거나하게 취해 방글라데시 식당에 간다. 영화에서 좋은 일 있으면 나쁜 일 따른다고. 예전에 잡자리 라이방끼고 때린 이주민 노점상 거기서 만난 것이다. 한국체육관 김관장 또 작살난다. 
이제 로니는 때려치고 그날 그 빡빡머리 추적에 나서는 김관장. 한번 해 봤다고 탐정질 이제 도가 텄다. 빡빡머리 미행하다 노래방 들어간 김에 출입국관리소에 꼰지른다. 신고전화하는 중에 어마 자기 띠동갑 친구 뚜힌이 들어가는 것을 못 본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뚜힌 2층에서 뛰어 다리 부러지고, 끝내 강제출국. 
원생 다 떨어진 한국체육관 정리한 김관장, 화사하게 하얀 남방에 청바지 입고 방글라데시 오지를 탐험하다 어느 작은 농장 허름한 건물 앞에 선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이 열리고 역광 속에서 환하게 웃는 김관장. 잘생긴 배우 유준상이 영화 내내 악전고투하며 똥씹은 표정이었는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해맑은 웃음을 보여준다. 오래오래 남는 장면이다. 그렇게 따라 웃었다.
이주민을 보는 정주민의 고까운 시선을 참 세세하게 표현한 영화다. 난 의식적으로 다른 문화에 호의의 웃음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유준상의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웃으면 그렇게 환해지는지 대충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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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를 프로파일링해봐?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
크리미널 마이드란 미국 드라마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FBI 행동분석팀의 이야기다. 5시즌이 방영 중이니까 상당히 인기 있는 드라마다. 행동분석팀은 연쇄살인사건에서 남겨진 모든 흔적을 통해 범인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하고 범인 행동의 패턴과 소재를 예측해 다음 사건을 예방하고 범인을 잡는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프로파일링이라 한다. 첨단 전산망과 조직력이 이들의 주요 무기지만, 기본적으로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 주된 내용이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대부분의 싸이코패스들은 성장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욕망이 억압되었다. 성장 후에 억압된 욕망을 푸는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방법 때문에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그 스트레스 요인은 폭력적 해결방법을 택하게 만들고, 그것이 첫 살인으로 연결된다. 첫 살인의 과정에서 스트레스 요인을 피하고 욕망을 해결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면, 더 큰 해방감을 위한 계획 살인으로 진화하고,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 싸이코패스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행동분석팀은 싸이코패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유형도 분석한다. 드라마가 회를 더해 가며 몇몇 특출한 싸이코패스들은 행동분석팀에게 직접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래서 팀 동료를 프로파일링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동료들 간의 프로파일링은 금지되어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어떤 시청자는 문제 해결이 막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이런 걸 계산한 드라마는 동료들 간의 존중을 바탕으로 암묵적 프로파일링 허용을 통해 다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 드라마를 프로파일링 하는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패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돋은 닭살을 비벼 피부의 안정을 취한다.
서설이 길었는데, 키워드는 패턴과 존중이다.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끔찍한 이야기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조직과 조직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조직과 사람의 관계들 속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충돌들과 그 해결의 노력들에서 섬세한 프로파일링은 기본이 된다. 패턴을 찾는 것은 프로파일링의 기술이고, 존중은 프로파일링에서 상대적인 의미의 정서 같은 것이다.

패턴들
예를 들어, 쌍용차 파업에 여러 단체들이 공동투쟁을 진행하던 상황을 회상해 보자. 자신이 관련 없었다면 상상만 해도 좋다. 단체마다 사람마다 국유화를 두고 조금씩 다른 견해가 있었다. 옥쇄파업 전술을 두고도 다른 견해가 있었다. 어떤 견해가 올바른가 이전에 각 단체마다 사람마다 고유의 경험과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몰라도 ‘저쪽은 이럴 것이다’는 예상치가 있다. 먼저 주장을 펼친 쪽에게 ‘그럴 줄 알았다, 저 조직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상대를 분석하고 예측했다는 말이다.
한 조직 안에서도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고,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조직의 입장이 이러니 조직원은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입장의 차이가 적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 안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이 흔히 나온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속에서 예측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패턴의 근거들은 나이, 성별, 계급, 직위, 직업, 경제력, 학력, 지혜, 성격, 외모, 취향, 기호, 출신지 등이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위계적인 관계, 억압적 관계, 친한 관계, 불편한 관계, 부적절한 관계 등의 패턴들이 만들어진다. 평등한 관계라는 패턴은 존재할까?

존중
평등은 사회주의의 매우 중요한 가치다.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는 조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 장치들과 싸우기 위해 사회주의 실현 전까지 전술적으로 부분적인 평등을 포기해야 할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노준 안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대단히 평등하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묘한 위계와 억압의 패턴들을 발견한다.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느끼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목격하고,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목격하고 있다. 특히 지난 총회 자리에서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서 복잡한 문양과 수학식이 매우 위험한 곡예 쇼를 펼쳤다.
동지애라는 말이 공식발언으로 몇 번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을 크리미널 마인드에 대입하면, 동료들 사이의 프로파일링 금지에 해당한다. 프로파일링 금지가 공식적 방침이지만 암묵적 프로파일링은 누구나 하듯이, 동지애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동지애가 없었거나 발언자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뜻이다. 뒤에 동지애가 무시되었던 상황에 대한 사과가 따랐고, 동지애에 입각한 화해도 따랐다. 약간 닭살이 돋긴 했다. 이런 과정도 하나의 패턴이다. 패턴은 복잡한 과정의 한 단면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이 경과하는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다.
사노준이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패턴이 흘러가는 방향이 평등을 향하기 때문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은 언젠가 빗나가고 만다. 그의 패턴이 진화하거나 내 프로파일링 방식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 진화가 좋은 방향, 곧 평등의 방향으로 진행하게 만드는 동력이 존중이라 생각한다. 동지애라 표현해도 무방하지만, 조직에 너무 국한된 느낌이라 존중이란 표현이 더 좋다.


조심해야 할 것들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일선 수사관들에게 행동분석팀이 범인의 프로파일을 공개할 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밝힌다. 발표하는 프로파일은 부족한 증거를 통해 얻은 결과라는 점과, 범인이 이 프로파일을 미리 프로파일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을 프로파일링할 줄 아는 범인이라면, 행동분석팀의 프로파일을 조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말 특출한 싸이코패스는 프로파일링할 단서를 하나도 안 남겨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을 수 있다. 수십 명을 살해한 싸이코패스 중에 경찰을 수십 년간 농락하다가 끝내 숨어버린 자들이 극소수 실존했다. 가까이서 찾으면 화성 연쇄살인사건 같은.
자신과 주위의 관계 속의 다양한 패턴을 객관화 시켜보는 시도는 평등한 문화를 향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노력을 하겠지만, 스스로를 객관화 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편 자신만 잘 객관화 시키는 사람을 사회에서는 바보라 부른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서 훌륭한 프로파일을 만들더라도 상대와 세계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악마적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치조직 안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은 조직이 건강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칫 치열함에 압도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를 동지라 호칭하면서도 존중 없이 사상투쟁을 일삼는다면, 히틀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치조직이 악마가 되면, 싸이코패스의 위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을 낳을 수 있다. 인류는 이미 그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몇 가지 피해야 할 길은 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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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글쓰기, 그리고 말하기

성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성폭력사건을 가해자개인이 저지른 파렴치한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성적권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이 성폭력이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성별위계적인 사회구조적 문제, 가부장제적인 조직문화에 따른 일이라 규정합니다. 그런데 가부장적이고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를 어떻게 쇄신하고 혁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일이 단순히 반성폭력교육 또는 성평등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교육프로그램을 하는데 머무르구요. 그래서 조직 뒤에 숨은 ‘비주체적 개인’이 조직을 이루는 ‘주체적 개인’으로 조직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실천으로 ‘여성주의적 말하기와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
“여성주의 글쓰기? 그럼 남성주의 글쓰기도 있나?”라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있겠지요. 통속적인 예입니다만, 제주도에서 봤을 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남해(南海)바다는 어디일까요? 제 3세계는 어디죠? 유색인종은 누구인가요? 우리가 아는 언어는 누구의 언어이고, 지금까지 객관이라고 불리던 것은 누구의 시각일까요?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기존의 언어와 해석틀이 (남성)지배권력의 경험을 보편화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배제되어왔던 타자의 시선에서 새로운 시각과 언어, 해석틀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남성)지배권력 중심의 기존인식, 언어, 법, 제도, 규범 등의 사회적 구조를 여성중심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남성)지배권력중심의 구조가 형성되어 왔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제되어왔던 타자들의 눈과 목소리로 세계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또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알겠는데, 그게 조직문화랑 뭔 상관?”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한 조직문화 혁신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단지 개별 단어들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문장구조, 사유방식의 변화까지 요구합니다. 노동형제를 쓰지 말자는 주장이 단순히 형제가 남자가족만을 부르는 단어라서가 아니라, 형제로 표현되는 운동사회내의 가부장제적인 문화를 지적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알았던 하나의 목소리(남성중심)말고도 또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답과 모색을 가능하게 하자는 겁니다. 권위주의와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만들어진 논리적이고 인과관계를 따지는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관용하며 공감하는 말하기방식(rapport-talk)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남성위계질서로 굳혀져있는 운동사회 조직문화 전반의 변화와 구조적 혁신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와 조직문화 혁신은 아주, 매우 상관있는 일이구요.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하는 일인지 뤼스 이리가레이의 「나, 너, 우리」의 한 구절로 대신하려 합니다.

“사회 정의, 특히 성과 관련된 정의는 언어의 법칙과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진실과 가치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화적 수단의 변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적 재산의 분배만큼이나 장기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다른 하나가 없이는 나머지도 얻을 수 없다.”    - 뤼스 이리가레이, 「나, 너, 우리」
 

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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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를 아시나요?

 
기관지 편집팀에서 일하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비폭력대화에 관한 원고를 하나 써달라는 취지였다. 워낙에 글재간도 없는데다 비폭력대화센터에서 초급과정을 잠깐 듣긴 했지만 글을 쓸만큼의 배움도 없다고 나름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가 어떤 점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한계도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판단도 안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전화를 건 동지는 ‘부탁’이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하며 ‘무조건’ 써달란다. 이 경우 그 동지의 요청은 과연 ‘부탁’이었을까? 상대방에게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요구는 그것이 아무리 공손한 말들로 표현됐다 하더라도 ‘강요’다. 비폭력대화에서는 부탁과 강요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한다.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 cation)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에 의해 제안된 대화방법(말하기와 듣기)이다. ‘관찰-느낌-욕구-부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연민이 우러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본 골격은 상대의 행동이나 말을 비디오로 찍은 듯 관찰하여, 그것을 보거나 들은 나 자신의 내면에 든 느낌을 확인한 다음 그 느낌 뒤에 존재하는 욕구를 확인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이다.
회의에 자주 늦는 동지가 있다고 치자. 이 동지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은 “넌 왜 항상 늦냐!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고도 네가 활동가냐!”라는 것이다. 비폭력대화는 이럴 경우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회의에 늦게 오니까(관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도 되고, 회의 시간 내내 다음 약속 때문에 초조했어(느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제때 회의를 시작하는 게 나한테 중요하니까(욕구) 다음부터는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부탁)”라는 식으로 얘기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회의에 늦게 온 입장이라면 어느 쪽이 더 편안한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변명하거나 물러나거나 반격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회의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게 하는가?
누구에겐가 화가 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기분이 불쾌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은 될수 있어도, 결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상대방에게 융단폭격같은 분노를 쏟아 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낼 때,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터운 방탄복을 걸쳐 입고 그와의 일대결전에 나서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결국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쓰라린 상처만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사람의 행복을 창조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우리는 서로 받아주고, 성숙해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관계맺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비폭력대화는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을 듯싶다.
집회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갔다가 우연히 보았던 「보고서 작성요령」이란 책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지침은 “운동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경찰 내부에 운동권의 사상을 자기도 모르게 유포하는 경우가 있으니 순화해서 사용하라”였다. 일테면 ‘가두투쟁’은 ‘가두불법시위’로, ‘민중문학’은 ‘좌경의식화문학’으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을 때에는 ‘소위’나 ‘이른바’등의 부사를 붙여서 쓰라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언어정치가 낳은 대표적인 사례가 ‘민노총’이란 불가사의한 명칭이다. ‘민주’노총이란 말을 쓰기 싫어 ‘민노총’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썼던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저들은 이렇게 단어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계급적 입장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말글살이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자유와 평등의 이념, 그리고 동지에 대한 애정이 우리의 언어에는 얼마나 올곧게 담겨있는가? 이제 동지들과 무심결에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에도 차별과 착취의 폭력적인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다운 희망과 의지를 새겨보자.
 
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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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보다 중요한 연대의 정

몸짓선언 + 좌측통행



몸짓선언
몇 달 전 국가인권위 입구에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50여명의 시위대가 수백명의 전투경찰에 포위되었다. 경찰의 해산명령 방송이 흘러나오는 중에 포위된 대오 안에서 몸짓선언의 문화공연이 있었다. 저 상황에서 공연이 되나 싶었다. 그날 연행된 사람이 수십명이었다.(사진) 몸짓선언은 그런 예술가들이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춤이란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바로 그 현장에서. 멋지다. 그러나 그들이 멋 부리느라 저렇게 투쟁하는 것일까?

 

2009년 전국노동자대회 본대회에 민주노총이 제시한 모토는 ‘지루한 집회는 이제 그만’이다. 확인할 길 없는 어떤 기대감이 있는 말이지만, 그 정도의 불안감 또한 짙게 느껴진다. 집회에 동원되는 노동자들이나 그런 집회를 기획하는 문화활동가들을 구분할 것 없이, 집회가 지루해 진 것은 사실이고 이런 지루한 집회 문화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마저도 지루해진지 오래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그동안 노동자 집회를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집회 문화에 대해 들어본다.

 


몸짓패는 풍물패, 노래패 보다 후발 주자지만, 몸짓선언이 1999년 만들어졌으니 그 역사가 짧진 않다. 공식적으로 팬클럽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크고 작은 무대와 현장에서 공연할 때,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매우 광범위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몸짓선언은 현장 몸짓패들과 강습으로 끈끈하게 묶여있다.

연합팀, 연합공연
몸짓선언은 가끔 현장 몸짓패들과 연합팀을 만들어 공연한다. 작년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전에 좌파문화활동가들 중심으로 기획한 ‘Say NO 문화제’에서 그 연합팀이 구성되어 ‘바리케이드’란 연합공연이 있었다. 준비과정에 대해 묻자, 안무를 연출했던 박현욱 씨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한 달 정도 전에 기획했고, 3번 연습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 경기권 현장패 활동가들로 팀을 구성했는데, 다들 모여 연습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3번밖에 연습하지 않았지만 대충 연습한 것도 아니었다. 어렵게 모이는 만큼 모일 때 제대로 연습하기 위해 매우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고, 집중을 위해 대단히 빡센 연습을 강행한다. 연습이 빡세면 사람들 입술이 파래지는데, 좀 더 하다보면 입술이 까매진다고 한다.
아무리 빡센 연습을 했다치더라도 3번 모여 연습해서 그 정도였다. 프로인 몸짓선언은 당연히 그렇다치고, 연합공연의 현장 몸짓패 활동가들도 정말 멋지다. 이들도 멋 부리는 건 아닐텐데.

 


부산 몸짓패 좌측통행
몸짓선언의 박현욱 씨가 2주에 한번 강습하는 좌측통행은 10명의 지역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누구누구까지 하면 10명이니, 대략 7~8명 정도가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중에는 몸짓패 경력이 10년 넘은 사람도 있고, 1년 남짓한 사람도 있다. 소속 사업장은 다양하고, 해고자도 있고, 전업주부와 학생도 있다. 작년 3월에 결성했는데, 결성 배경은 부산 지역 문화 활동가들 사이의 복잡하고 끈질긴 역사 속에서 개인적인 감정들까지 들어간 어떤 결과물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 문화 운동의 측면에서 재구성하기로 하고, 이번 호에선 생략한다.
좌측통행은 촛불집회나 작은 사업장들에 결합하면서, 시민들이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만, 작은 사업장들의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는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작은 사업장들의 노동자 투쟁에 결합하려고 노력한다.

생생한 강습
박현욱 씨와 함께 하는 좌측통행 모임은 지난 공연에 대한 평가와 보고로 시작했다. 10월 10일 “이명박정권 공공서비스 파괴 저지! 노동기본권 쟁취” 공공부문노동자대회 공연에 좌측통행이 함께 했었다. 준비과정에서부터 세세하고 평가하고, 그 내용을 공공연맹에 전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다음 안무 연습이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비정규철폐연대가, 단결투쟁가, 또다시 앞으로 세 곡의 안무 연습을 했다. 주로 박현욱 씨가 좌측통행 멤버들의 동작을 교정하는 시간이었다. 프로니까 그렇겠지만, 박현욱 씨는 좌측통행 멤버들의 미묘한 손동작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매 동작마다 그것이 멋진 안무로서 보다는, 그 동작이 가지는 의미를 노동자투쟁의 계급성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직 배우지 않은 ‘철탑 위에서’를 시작하기 앞서 노래를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몸짓선언에서 창작한 안무를 좌측통행이 배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강습 과정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먼저 노래를 주의깊게 듣고 그 노래에 대한 느낌들을 토론한다. 안무는 그 느낌에 대한 집단 창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짓선언이 강습하는 현장패마다 같은 노래라도 버전이 다른 경우가 있다. 먼저 연습했던 ‘또다시 앞으로’에서도 따로 배운 사람이 있어 다른 버전의 안무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연대의 정
몸짓패 경력 10년 넘은 이태호 씨(사회보험노조)에게, 왜 몸짓패를 하는지, 무대에서 관객의 환호에 대해 어떤 감동이 있는지 물었다. “처음엔 부산역에서 민주노총 집회의 20평짜리 무대에서 공연하며 그게 몸짓패 활동인 줄 알았다. 몸짓패 1년 정도 됐을 때, 신신기계란 곳에서 와서 공연한번 해달라 그래서 갔더니, 50대들이 초라하게 앉아, 카세트에서 나오는 ‘철의 노동자’ 한 곡만 가지고 박수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뭐 이런 집회도 다 있나 싶어 충격받았다. 어쨌든 몸짓공연하고 나니까, 그거 좋다고 가르쳐 달래서 가르쳐 주고, 노래 모른다고 그래서 열 댓곡 하고, 지쳐서 나오려니까, 그 때 한 아주머니가 불러서 갔더니, 다음에도 올 수 있냐고 다음에도 꼭 와요 하는데, 문화활동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큰 집회가서 감명 같은 거 없다. 가봐야 속터지는 거지. 진짜 좋은 건 아무도 부르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 문선하고 같이 놀고 막걸리 한 잔하고 오는 게 제일 좋은 거다.”
옆에 있던 농협노조의 이민주 씨에게 왜 몸짓패를 하는지 또 물었다. “2007년 파업 때 옆에 있는 이태호 동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지원해주셨다. 내가 도대체 뭘 바라고 그러냐고 되라지게 물었다. 다음에 우리같은 사람들 생기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해주면 그걸로 된다고 말하더라. 그 말에 진실성을 느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고 싶다. 어떤 집회, 어떤 무대냐가 아니라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는 느낌에 감동받은 적이 많다. 그리고 우리끼리 하는 것보다 다같이 함께 문선하는 게 무척 좋았다. 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중에 사진 찍어 논 걸 보면, 모두들 입이 찢어지는 표정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함께 주고받는 분위기가 좋은 것이다. 그 때 우리패가 없어졌지만, 살아있는 동안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또 사람들은 모일 것 아니냐? 그런 때를 위해 이렇게 다른 사업장 사람들끼리 모여 연습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좌측통행은 나에게 맘편하게 놀 수 있는 해방구다.” 해방구란 말. 그 순간을 잠깐 얼려버렸다. 이태호 씨가 “우리는 니 노리개가 아니다”는 말로 얼음을 깼다. 농담도 멋있다.
멋은 연대의 정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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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하지 말자

관성화된 집회문화
한국이라는 나라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 들이 아주 많은 고약한 나라다. 공식적인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민, 노동, 사회단체 등이 1년에 하는 집회 숫자를 비교해보면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 것이다. 왜 그렇게 집회를 많이 하는 걸까? 억울하고, 분해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권력자들에게 읍소하고, 협박하고, 청원하고, 사정하는 것일 게다. 집회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제대로 성숙되지 않은 후진 한국에서는 특별한 방법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집회공화국이다.
노동단체의 집회는 의례화 되고, 관성화 되어버렸다. 정해진 순서, 의례 하는 행진, 더 이상 긴장감도, 진지함도 없다. 특히 노동절이나 전국노동자대회처럼 대형화 되고 고정된 행사는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한다. 위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선 많은 숫자를 참가 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주최 측은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린다. 지도부가 순회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산별노조는 동원되는 숫자만큼 일당을 챙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모인 조합원들이 행사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해의 주요한 이슈나 쟁취할 목표에는 별로 관심도 없다. 집회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옛날 얘기나 하면서 술 한잔 하는 걸 더 원한다. 집회 규모가 점점 커지고 무대가 높아갈 수록 참가자들의 관심은 더 떨어진다.
주최 측은 모처럼 모은 군중들을 이용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 한다. 언론을 위해서 억지 그림을 만든다. 단체로 만들어 나누어주는 손 피켓은 관례가 되어버렸다. 재미없는 집회를 보완하기 위해, 더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문화선동도 준비한다. 문화선동대는 이것  저것 새로운 것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별로 효과가 없다. 조합원들의 눈은 높아져 버렸고, 관심도도 떨어져버렸다. 이젠 문화선동대를 꾸리기도 버거워졌다. 대부분의 집회 주최자들이 문화선동을 잠시 쉬어가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문화는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영역이지만 집회 주최자들에게는 이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니까.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길 원한다
조합원들은 이젠 예전의 조합원이 아니다. 깃발만 꽂으면 굳은 신념과 의지로 눈을 빛내며 모여들던 예전의 조합원이 아닌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조합원들도 이젠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길 원한다. 촛불 시위를 봐라. 그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선전하고, 연설하고, 행진 방향도 정한다.
지도부가 주연이 되는 행사는 이젠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재미없고 식상하다. 지도부만 올라가는 무대, 이제는 신물이 난다. 도대체 집회를 왜 하는지,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지 곰곰이 따져 봐야한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이제 재미없는 집회는 그만 하자. 화면발을 잘 받는 게 목적이라면 차라리 집회를 하지 말고 그 돈을 가지고 다른 걸 하면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현수막을 만들어 걸든지, 애드벌룬을 띄우든지, 경비행기를 날리든지, 상징물을 만들어 설치하든지...
 

박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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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시위문화와 풀뿌리 미디어

중국 천안문 광장의 학살이 팩스, 전화와 함께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하여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알려지며 항의집회가 조직된 것, 인터넷을 통해 곧바로 국제연대와 지원이 이루어진 1994년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봉기,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파업 관련 웹사이트를 만들고 글, 사진, 동영상을 통한 파업의 정보를 신속히 배포한 1997년의 총파업 통신지원단의 활동, 그리고 10년전인 1999년의 시애틀 전투와 인디미디어센터의 활동은 네트워크 시위문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계기들이었다. 점차 확산된 네트워크 시위문화는 풀뿌리 미디어 행동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우선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임박했던 2003년 2월 15일 동시다발 반전행동이다.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을 넘는 대규모의 시위는 미디어 활동가들의 노력과 독립적인 풀뿌리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화는 아주 단순하게 시작되기도 한다. 2002년 촛불시위는 한 네티즌의 제안이 여러 게시판들에 퍼날라진 것으로 시작되었고, 2008년 촛불시위 역시 연애인, 패션, 요리, 쇼핑, 성형수술, 스포츠, 디지털 기기, 동문 등의 비정치적인 온라인 공동체들에서 반정부 여론이 형성되고 시위 제안이 삽시간에 퍼져나간 것이 지속적인 대규모 시위 동원의 근거였다.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활용 사례도 점차 많아져 왔는데, 2001년 에스트라다 독재정권을 끝장낸 필리핀의 민중권력 운동의 ‘문자의 힘’(txtpower)이었다. 이러한 모바일 미디어는 시위를 조직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거리 행동과 전술을 실시간 조정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2008년 말 그리스 봉기는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유럽 전역의 연대 투쟁으로 확산되었고, 촛불시위에서는 휴대전화와 함께 인터넷 생중계가 결합하여 시위 행진의 경로나 전술에 대한 조율과 조정이 현장에서 곧바로 그리고 온라인과의 실시간으로 연결된 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네트워크 시위와 풀뿌리 미디어의 위력이 높아져온 만큼 그에 대한 탄압과 법제도적 억압도 거세지고 있다. 이란, 온두라스, 중국(위구르) 등에서 인터넷과 모바일 네트워크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는 빠짐없었다. 우리의 인터넷 실명제, 모욕죄 신설 시도, 인터넷과 휴대폰의 도감청, 저작권법의 삼진아웃제 도입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지난 9월에 있었던 쥐(G)20 반대 시위에서 ‘트위터’를 이용해 경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시위대에 제공한 활동가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사이버 망명과 같은 수동적인 대응보다는 익명성과 신뢰성을 보장하는 독립 미디어 기술과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활용하는 일이 향후 네트워크 시위문화를 결정할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촛불집회에서 교보생명 빌딩에 한 레이저 낙서

그러나 네트워크 시위문화라고 해서 꼭 첨단기술과 뉴미디어만 적극 활용된다고 봐서는 안 된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도, 다양한 길거리 미디어·낙서, 손팻말, 현수막, 티셔츠, 사물놀이와 거리악단, 민중가요나 대중가요, 율동, 경찰해산방송 패러디, 거리 퍼포먼스, 페이스페인팅에서 대형 집단그림까지 다채로운 직접 표현 양식들이 있었다. 특히 길바닥이나 차벽의 낙서는 온갖 풀뿌리 미디어 실천 중에서도 가장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발언이자 직접 행동의 미디어 행동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영화 포스터나 예고편, 광고음악 등을 이용한 패러디나 ‘정치적 되섞기’(political remix) 같은 미디어 제작이다. 친숙한 대중 상업 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하며 정치적 의미를 되섞는 손쉬운 방법으로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오픈소스 문화와 대중 미학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의 정치화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의 시위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이었다.

조동원 (dongwon@riseup.net 미디어운동/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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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노동문화, 그 변화와 모색

[22회 인천노동문화제]

가을로 접어들며 지역마다 지자체와 예총이 주관하는 지역 문화제 또는 예술제를 흔히 볼 수 있다. 지역색이나 전통에 따라 이런 문화제들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라서 무턱대고 한통속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지만 그런 문화제들은 대략 구리다. 하지만 인천노동문화제는 그 이름부터 여느 지역문화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인천노동문화제는 올해 22회를 맞았고, 지난 10월 10일~11일 인천 부평공원에서 ‘이 땅에 우거지고’란 주제로 열렸다.

내부에서 외부로
인천노동문화제가 운동사회의 문화 예술계에서나 문화에 관심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다. 동시에 ‘노동문화’ 또는 ‘노동자문화’라는 말조차도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22돌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만한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노동’이라는 주제명과 22돌은 민주노조운동과 그 역사를 함께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인천의 지역성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독특한 역사이며, 그 영향은 인천 지역을 넘는 문화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천노동문화제란 이름을 쓰기 전에는 1997년까지 가을문화제였다. 현장의 문화패들이 모여 체육대회하고, 장기자랑하는 독자적인 내부 행사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8년부터 인천노동문화제로 이름을 바꾸고 시민들과 만나기 위해 외부로 방향을 바꾼 것은 당시 민주노조운동이 가진 사회적 힘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더 넓은 지평으로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원회는 크게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인천노동문화연대, 인천 민예총이라는 3조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위원회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초기의 주요한 동력은 현장의 문화패와 문화단체들이었다. 그러나 노조의 힘도 사회적으로 약화되고, 현장 문화패들도 차츰 사라지는 추세에 인천노동문화제는 내부적인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올해도 첫날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부평공원 근처에서 집회를 한 뒤 집회대오의 집단적 참여가 예정되었지만, 그 집회가 무산되는 바람에 인천지역 노동자들이 참가하는 문화제는 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오래되고 익숙하다. 한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인천노동문화제는 이제 노조의 집회 동원을 통한 연결이 아닌 다른 방식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노동운동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지금의 중요한 화두이듯이, 노동문화도 정규직 노조의 현장 문화패 보다는 조직되지 않았거나 조직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리고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소외된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한편에서 이야기되는 현장의 노동문화가 사라진다는 우려에 대한 문화운동의 대담한 역공이거나 노동(자)문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문화제에서도 그러한 단편들을 다각도로 포착할 수 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조직위에서는 그 이름에서 ‘노동’을 대치할 단어를 찾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내부적인 행사가 외부적인 행사로 탈바꿈하며 이름을 바꿨듯이, 인천노동문화제가 더 넓은 지평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한번 더 이름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이름과 상관없이 실험은 이미 진행중이다. 인천 땅에 이 실험이 어떻게 우거질지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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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살아있는 풍경 “미래를 돌아보다”
 

재개발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재래시장의 일상 풍경을 담은 사진전. 친숙한 일상모습들로 보이지만 지역공동체 문화의 말살이 전제된 암울함을 함께 읽는다.

 

공연, ‘마리오네따의 역사’
베네수엘라에서 온 극단 Ponix의 공연.
두 사람은 친구로 보였지만, 곧 권력투쟁의 상대가 된다. 여기서 권력은 꼭두각시를 조정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권력관계가 바뀌기도 하지만, 나중엔 조정당하는 꼭두각시가 더 작은 꼭두각시를 조정한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코믹한 몸짓으로 연기해 많은 웃음과 박수를 받기도 했다.

 

공연, 거리예술단 빵빵유랑버스의 거리공연
환경, 노동, 여성, 이주민의 문제들을 저글링, 타악, 무용, 연극, 국악, 큰 인형(Backparpuppet)극 등을 접목시켜 독특하고 새로운 형태의 거리공연을 시도하고 있다. 운동권 집회문화의 틀을 깨고 직접 거리의 시민을 찾는 실험.

 

참여마당, 도시농업 ‘유기순환 이야기와 상자텃밭 나누기’
퀴즈) 저 근처엔 꾸리꾸리한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젊은학생들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공연, 김중배(현대제철 색소폰 동호회) 색소폰 연주
노동문화제에 웬 뽕짝? 토요일 밤 공원 산책을 나온 노친네들 무척 좋아하셨다. 사실은 남녀노소 다 좋아하더라.

 

공연, 공생을 염원하는 풍물굿
풍물패 더늠, 인하대 청소용역 노동자 풍물패, 서울에서 연대 온 풍물패 터울림 등의 공연으로 22회 인천노동문화제의 막을 내렸다. 한마당 끝날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풍물패에게 “한판 더 해라”라 “첨부터 다시 해라”고 농을 던지는 것이 죽이려는 것인지, 같이 살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완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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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화가 무엇입니까?

[인터뷰] 최기수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원회 상임활동가


문화가 뭐냐? 어려운 질문이다. 노동문화가 뭐냐? 가을 서리같은 무서운 질문이다. 이 어려운 장르를 붙들고 사는 최기수씨에게 이 질문을 약간 돌려서 던졌다.

오래전부터 활동을 했지만, 노동문화라는 것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동문화가 뭐냐, 노동자 문화가 뭐냐, 민중 문화가 뭐냐는 질문이 추상적으로 떠 다니지만, 구체적인 근거들이나 물질성에 대한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그 질문 주위를 항상 맴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보고 싶다. 노동문화가 뭔지, 그 속에서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현상은 뭔지, 또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방향은 뭔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인천노동문화제이기도 하다. 올해 무대를 세우지 않았고, 행사장도 좁혔고, 문화패가 아닌 아마추어 동아리들을 출연시킨 이유가 모두 노동문화가 뭔지 찾으려는 목적이다. 이틀 공연하고 보여주는 것 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이 문화를 노동문화라 해얄지 노동자문화라 해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중문화와는 다른 점이 있을텐데, 가장 중요한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자발성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향유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 본다. 스타시스템과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대중문화를 잡고 있는 현실에서는 문화적으로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촬영현장을 찾아가 의견을 피력한다는 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제 왔던 색소폰 연주자의 경우, 자기가 좋아서 동아리를 스스로 만들고 즐기고 그것을 통해 활동을 만들어낸다. 이에 비해 예전 노동자 문화패들 같은 경우엔 너무 의식적이었다. 자신에게 맞고 안맞고를 떠나 의식적으로 했기 때문에 돌아보면 남는 게 없다. 예전 표현으로는 건강성, 연대성을 노동문화의 성격으로 이야기했는데, 자발성은 건강성과 비슷한 말이다. 내가 정말 스스로 원해서 하느냐? 그게 내 생활과 어우러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런 문화적 양식들을 만들어가고, 문화적 비전들을 제시하는 것들에서 기업에 비해 많이 위축돼 있다. 문화적 인식이나 조직 관리 방식 같은 건 기업이 더 앞서 있다. 아쉽다.

노동문화 말고 다른 이름을 찾아본다면? 그런 논의도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이름을 바꾸기 보다는 노동문화의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쪽이다. 어쨌든 ‘공동체문화’란 표현이 자주 언급된다. 삶의 관계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공동체 아닌가? 관계도 생겨나고 공간도 재배치되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생기기도 한다. 서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통해 그 삶의 내면들을 함께 통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동체다. 그러나 경제적 조건이라든지 여러 가지 교란 요인들이 많다. 우리는 아직 교란 요인들을 회피하거나 감내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것이 별로 없다. 그 방법을 잘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문화 운동도 좋다. 그러나 나는 노동문화의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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