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박사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7/03/21 16:25며칠 전 대안생리대 만들기 워크샵을 하러 안성에 있는 어느 생협에 갔다.
거기 모인 분들은 생협운동을 하는 분들인지라 다들 월경이니 여성의 몸이니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것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더러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하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몇몇 누리집이나 지식검색 등에서 긁어낸 피상적인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모두 아는 체하며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본전도 못뽑고 망신만 톡톡히 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나는 월경도 하지 못하는 사람 아닌가.
아무리 피자매연대 활동가들을 통해, 그리고 홈페이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월경경험들을 전수받아왔다고는 하지만, 그런 식의 간접 경험만 가진 사람이 수십 년 월경을 하며 자신의 몸과 그것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온 사람들 앞에서 무엇인가 떠들어야 한다는 낭패감이 컸다.
일단 주눅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월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나의 위치가 때로는 나를 직접 월경을 하는 많은 여성들보다 한 발 떨어진 자리에 놓일 수 있게 하며,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월경들을 보다 객관적인 자리에서 관찰하고 각자의 외모만큼이나 다른 각자의 월경을 자신의 경험으로 착종시키지 않으며 분석해낼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또한 중요했다.
(실제로는 이것이 장점은 아니다)
워크샵이 진행되는 2시간 30분 동안 먼저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2003년부터 피자매연대 활동을 하고 홈페이지를 관리해 오면서 내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라앉아 있던 지식들이 누군가 손을 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해올 때마다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라 오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의 폭이란 그리 넓지 않은 것이어서 이를테면 '한국철도공사로 하여금 KTX 승무원들을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거나 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벽은 어떻게 깨부술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면융 한 마로 만들 수 있는 중형 달거리대는 몇 개인가', '한 사람이 평생 일회용 생리대를 구입하는데 소비하는 금액은 모두 얼마 정도인가' 같은 질문들이 나오고 '건강한 삶이란 무엇인가' '지속가능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나' 같은 문제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고민을 설파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그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 나는 목이 쉬도록 떠들었다.
지식의 전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깊이 교감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어떤 고귀하신 나으리나 전문 이론가들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서로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처음 워크샵이 시작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스무 명 가까이 모인 이곳에서 생물학적 남성은 나밖에 없네'라는 자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워크샵이 진행되어 가면서 나는 그런 사실조차 완전히 잊은 채 일종의 '강의'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열띤 자리에서 나의 성별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워크샵이 끝난 뒤 참가자 한 명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완전히 월경박사시네요'라고 했다.
모든 질문들에 대해 나는 막히거나 주저함이 없이 술술 대답을 해나갔는데, 그런 날 월경박사로 부른 것이다.
그 여성분은 그저 나의 열정과 지식에 순수한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다시 나의 남성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곤 그 말이 곧 불편해져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박사라는 말이 가진 함의 때문이다.
박사라는 말은 주로 남자를 지칭하며, 또한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권위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무엇인가 일반인들과는 다른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이 박사인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저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또는 이어야 한다)라는 각성이 주어졌다.
그렇다.
나는 남성이었던 것이다.
아마 내가 여성이었다면 날 '월경박사'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월경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월경에 대해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워크샵에 참가한 한 분은 "우리 남편은 '왜 하루종일 생리대를 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기도 했다.
나 역시 실제로 워크샵을 하면서 그렇게 물어본 남자들이 있었다.
'생리, 그거 꾹 참으면 안 되는 거에요?'
남자들이 가진 이런 무지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고 나름 확신을 보태 역설했다.
무지와 오해 때문에 생겨난 차별이 얼마나 많은 법인가.
그렇긴 해도 여전히 난 '월경박사'라는 권위적이고 먹물냄새나는 말보다는 '피자매연대 활동가'라는 말이 더 좋다. tag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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