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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4

전체 근속기간 중 5인 이상 해당 기간에는 퇴직금 지급해야

 ☞ 질문


안녕하세요.  본인은 한 2년 간 식당에서 주방 일을 했어요.  하루 온 종일을 근무한 것이 아니라 낮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저녁에는 오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는 일을 했지요.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하루에 총 4시간을 한 것이지요.  월급은 적지만 집이 식당과 가까워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집이 이사를 하게 되어 출퇴근이 곤란해서 식당일을 그만 두게 되었는데 식당 주인에게 퇴직금 얘기를 꺼냈더니 하루 종일 일한 것도 아니고 하루에 몇 시간 일했는데 무슨 퇴직금이냐, 그리고 직원 수도 얼마 안 되는데 퇴직금은 주기 곤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식당이 4명이었다가 5명이었다가 했는데요, 어림잡아 4명이었던 때가 한 7개월, 5명이었던 때가 한 1년 5개월 정도 되었던 같아요.  본인과 같은 경우 퇴직금을 받은 수 있는지요.



☞ 답변


현재 시행 중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사용자는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하여 퇴직급여제도중 하나 이상의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퇴직금제도를 설정하고자 하는 사용자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법의 시행일과 관련하여 “상시 4인 이하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은 2008년 이후 2010년을 넘지 아니하는 기간 이내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날부터 시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4인 이하 사업장은 이 법이 시행되지 않고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근로기간이 1년 미만인 근로자, 4주간을 평균하여 1주간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근로자”에 대하여는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를 면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님께서는 식당에서 1일 8시간을 근무하지 않고 시간제로 근무를 하셨는데 질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1일 4시간 근무를 하였으므로 1주간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은 족히 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식당 주인이 근로시간 문제로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을 명분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고용된 노동자 수와 관련한 것인데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 퇴직급여제도는 4인 이하 사업장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가 경우에 따라서는 4인 이하인 때와 5인 이상인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노동부에서는 “퇴직금계산을 위한 계속근로년수는 전체 재직 기간 중에서 상시근로자 수가 5인 미만인 기간 및 병역법에 의한 군복무기간 등을 제외한 기간을 합산한 기간으로 해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님께서 근무하신 총 기간 중 5인 이상인 때를 모두 합산하여 그 기간이 1년이 넘는다면 그 기간에 대한 퇴직금을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다시 한 번 관련 법을 알려주고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이야기하시고요 그래도 주지 않을 경우 식당 소재지를 관할하는 노동부에 진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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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 소식지 제20호

 
     
 
홈페이지
 
 

잘못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앞에서 최저임금 선전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남균사무국장은 교육을 받기위해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 섭니다. 실업급여를 받기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 섭니다. “민주노총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뼈아픈 반성을 하며 이제라도 여러분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죽노동인권센터는 민주노총이 이런 의지를 담아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법률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방문하시면 ..... 감사합니다.” 짝짝짝...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니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무료법률지원이니, 당신들과 함께하겠다느니’ 하는 말보다는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부끄럽다고 하는 그이의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그래, 자식! 잘해봐!” 하는 ....

이번 노동절에는 실업노동자와 함께 합니다. 비명같이 외쳐봅시다.
실업급여 수급기간 연장! 수급대상 확대! 실업부조 도입!

                                                                              호죽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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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의 활동현황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

 

호죽노동인권센터 활동보고

1. 상담 중 특기사항
①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법률지원하고 있습니다.
② **노동조합이 소속사업장 외주업체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외주업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하여 사측 및 외주업체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는 법적인 검토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③ 괴산에 소재한 **식품이라는 김치공장.  매일 30분의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토요일 3시간의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건으로 상담.
④ **복지시설이 운영하는 장애인 작업장 사례입니다.  
   70~80명 근무.  2007년 노사협의회 구성.  피상담자는 정년퇴직함.  
   남성노동자가 같은 장애인인 여성노동자에게 극도의 폭언을 퍼부어 분을 못 이긴채
   작업 중 쓰러짐.  치료받은지 3주 째이나 말을 크게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  
   현재 산재 신청 중이나 더 나아가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의함.
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3월 임금을 삭감함.  나중에 경기가 좋아지면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해 달라고 하여 삭감 동의 사인을 해줌.  
   이 30% 삭감분을 추후라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여 상담함.
⑥ **금고 부당해고판정서 도착. 절차상 하자 인정하고 사유는 평가 유보
   (매우 특이한 판정서임. 사유의 평가를 유보한 판정은 흔치 않음),추후 다시 해고우려.
⑦ **학원에서 15년이상 총장 개인기사와 미화원으로 근무하던 중 계약기간만료로
   해고당하여 상담. 연차수당, 연장근로수당, 해고예고수당 청구.
⑧ 4월 상담은 해고/인사관련 상담 및 임금체불 상담이 많았습니다.

* 정식품,LG화학,코스모링크,우진교통(주),가자투어 등 노동조합의 현안문제 법률지원.

 4) 상담 및 법률지원활동 현황
 ① 연** 부당해고구제신청 이유서 준비 - 취하 - 재접수 예정
 ② 한** 부당해고구제신청 재심 답변서 1, 2 제출/4.28 15:00 심문회의 예정
 ③ 전** (**운수) 부당해고구제신청 심문회의 - 화해
 ④ 김** (**요양원)부당징계구제신청 출석조사 - 심문회의 예정
 ⑤ 변** 외 (주성대) 임금사건 지원
 ⑥ 김** 임금사건 진정 (최저임금 홍보활동 중 상담)
 ⑦ 원** 임금사건 진정 (도산인정신청 및 체당금신청 지원예정)
 ⑧ **환경 임금 검토
 ⑨ 정** 외 임금사건 출석조사 (충주노동부)
 ⑩ **센터 일용직노동자 인권문제 상담
 ⑪ **고속 - 대의원선거 이후 구제신청 취하, 노조합병결의, 후원관계는 계속,
    추후 중요사안에 대한 상담 및 논의구조는 이어가기로 함  

 6) 노동인권활동
  ① KT공대위 - KT본사 선전전 (화,금 출근시간),4.28 기자회견,심문회의 참관
  ② 최저임금 선전전 - 고용지원센터(월, 수, 금) 13:00
  ③ 청주여성인력개발센터 노동법 교육, 파업학교 노동법 교육
  ④ 충청타임즈 등 상담글 기고 및 소식지 발송
  ⑤ 충남노동인권센터 방문 - 노동인권활동 방향에 대한 토론
  ⑥ 전략조직화연석회의 - 희망터(현정희분과장) 사례발표 및
      공공서비스 전략조직화 계획 검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 고통입니다.
땀을 흘릴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는 것은
...... 죄악입니다.

  한아름 흘린 눈물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 대외협력부장 김기연

23살. 한창 겉멋을 부릴 나이. 메뉴큐어와 마스카라를 바르는 것을 넘어 어느덧 화장법의 달인으로 등극할 나이. 꿈의 나래를 한창 펼쳐야 할 그 나이에 그녀는 절망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녀는 지난 4월 10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에서 애지중지하던 그녀의 머리를 내놓았다. 어깨를 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그녀의 생머리는 성큼성큼 잘려나갔다.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군 그녀의 눈엔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길에 따라 번져 흐르는 검은 마스카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그녀는 이제 23살의 대학생 ‘한아름’ 양이다.

‘취업성형’까지 마다하지 않는 시대에 한아름 양은 민둥머리를 택했다. “이제 4월의 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5명이 죽었다.” 4월 21일 방영된 PD수첩 <대학가면 개고생이다>편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녀는 말한다. “좀 허전하고 춥기는 하지만, 내가 자른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내 자신을 버린 것도 아니다. 정말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잘라내고 있는 건 이명박 정부에게 걸었던, 정말 서민을 위할 거구 민주적으로 나를 운영할 거라는 실낱같은 믿음과 기대였다.”

‘1,000만원 등록금 잔혹사’는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올해 벌써 5명이 스스로 숨줄을 끊었다. 살아있는 대학생들도 ‘이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아우성치고 있다. 지난해 학자금 대출을 받은 61만명의 대학생 중 1만명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신용불량자의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학비를 위해 ‘유흥업소 남자 도우미’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신분열증 치료제’ 성능실험에 참가하는 등 학비마련을 위한 ‘마루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자 발빠른 정부여당이 큰소리쳤다. ‘등록금! 반값으로 모시겠습니다.’ 2007년 1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씨는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대학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는 5대 입법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의 그 공약에 믿음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벌써 2년이 훌쩍 지났건만 감감무소식일 뿐이다.

반값 등록금 해결에 필요한 정부재정은 5조원 정도다. 내년부터 20조원 이상 깎아주는 ‘부자감세’의 반에 반값에 불과한 액수다. ‘부자우대 대학생천대’ 정책만 바꿔도 능히 실현될 수 있는 금액이다. 신용우량자인 부자들은 ‘더 부자되세요.’외치고, 대학생들의 등골 빼먹고  신용불량자로 내모는 일을 중단하면 된다. ‘반값 등록금’이 단지 민심을 낚기 위한 ‘낚시공약’이자 ‘떡밥공약’이 아니라고 강변할게 아니라 실현가능하도록 추경예산에 5조원을 반영하면 된다.

2008년 OECD의 국민총생산 대비 공교육비 정부 부담의 평균치는 1.1%다. 한국의 정부지출 부담은 0.6%로 ‘반값 지출’에 머물고 있다. 2007년 한국의 국민총생산액은 9,571억달러. 현재 환율(1,300원)을 대비한 국내총생산의 0.5%는 6조 2천억원에 해당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OECD 평균치만 준수하면 ‘반값 등록금’은 해결될 수 있다.

어느 개그우먼의 말마다나 ‘스텝 1. ‘반값 등록금’에 필요한 예산을 추경예산에 반영한다. 스텝 2. OECD 국내총생산 대비 공교육비 정부부담분의 평균치인 1.1%로 맞춘다. 스텝 3. 추경예산 5조원을 즉시 사용한다. 반값 등록금 참~ 쉽죠잉’ 이렇게 쉬운 일을 정부는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이다. 되레 ‘반값 등록금’ 대신 ‘반값 월급’ ‘반년 고용’에 지나지 않는 인턴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처럼 믿음과 기대가 무너진 현실이 그녀에게 민둥머리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한 ‘희망의 품앗이’를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다. 4월 10일에 이어 5월 1일과 2일 개최될 큰 집회에서 ‘품앗이’를 함께 할 ‘세상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한아름 양은 말한다. “1분 1초가 급하죠. 너무나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거든요. 누군가 더 알리고, 더 뛰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5월 1일 범국민대회 있는거 아시죠?” 참고로 한아름 양이 흘린 눈물은 순도 100%짜리 진심어린 눈물이다. ‘실천’은 없고 ‘감성’만 있는 ‘악어의 눈물’이 결코 아니다.


 

▲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 입구
  청운동사무소앞에서
 '등록금 인하, 청년실업 해결' 등을
  촉구하는 전국대학생대표자
  농성선포식에서
  홍익대 총학생회장 한아름씨가
  삭발 도중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나는 왜 청와대 앞에서 머리를 밀었나 - 오마이뉴스

 
 
 
 
 

의료연대 부설 ‘희망터’를 소개합니다.

 

- 이름도 거창한 ‘미조직전략조직화연석회의’에서 희망터 현정희분과장을 모시고 ‘희망터’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산삼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의료연대를 꾸리며 밤을 세우는 토론 끝에 활동가들은 기업을 넘어 지역조직의 형식을 갖추고 중소병의원 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를 실현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미조직비정규직의 실제 조직화를 위해서는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를 일상적으로 전담하는 활동가와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화센터가 필요했다. 이것이 희망터이다. 이 고민은 노조의 미조직비정규직조직화에 대한 노조상근자들의 고민과 사업은 있었으나 정규직노조의 투쟁기간 혹은 임단협기간동안에는 상근자로서 노조에 집중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미비활동은 단절되는/반복되는 한계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4월 의료연대는 인력과 재정을 통일하여 ‘희망터’를 설립하고 3명의 상근활동가가  활동을 시작했다. 희망터는 활동가 교육훈련, 요양간병노동자 조직화 활동, 중소병의원노동자 조직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요양간병노동자는 노동조합과는 다른 틀로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활동가들이 ‘협회’ 등 요소요소에 들어가 간부자리를 장악하고 계속 선전선동활동을 하면서 제도와 정책문제에도 적극 개입해 나가고 있다.

중소병의원노동자의 조직화 전략은 지역문화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한두명의 개별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에는 여러 가지 넘지못할 산이 있었다. 그래서 지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지역에서 문제화하고 지역에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도록 하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정당 및 전문가조직과 연대하여 매주 지역캠페인 활동을 통해 꾸준하게 지역의제로 만들어 가고 있다.

희망터의 운영은 의료연대 부설이기는 하지만 의료연대에서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하지는 않으며, 재정만 부담하는 형태로, 희망터에서 조직화사업을 주도하고 지도하도록 전권을 주고 있다. 물론 의료연대에 희망터 활동보고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고, 노조에서도 선전활동 등 역할분담할 일은 연대하여 추진하고 있다.

희망터의 희망은 모든 지역에, 산별 ‘희망터’같은 조직화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즉 지역별, 산별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코디네이터로 자리하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터는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화센터로 호죽노동인권센터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충북은 충분히 힘이 있다. 지역에서 호죽센터를 만든 것만 봐도 알수 있다.  

- 산삼을 먹은 듯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고, 불끈 힘이 솟았습니다. 막(이 대책없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뭔가 하고 싶습니다. 막 뭔가 시작하고, 막 열심히 뭔가 하고 싶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공적인프라와 서비스질 강화하라.-기자회견사진

⊙ 병원노동자희망터는

병원이나 의원, 각종 보건복지시설 등 보건의료관련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해고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 노동자와 중소영세 병원 노동자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주 48시간이 넘는 근무, 생체리듬을 완전히 무시한 교대근무를 하면서도 100여만원이 조금 더 되는 저임금은 법적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임금체불, 퇴직금과 수당 미지급, 부당한 인사 등의 불이익 뿐만 아니라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어나는 부서장 및 의사들의 폭언· 폭행 사건을 비롯한 술자리 보조 등 비인격적인 대우 등등,,,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가슴에 눌러온 문제에 대해 드러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전국의 보건의료노동자의 권리확보를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곳입니다. (홈피-희망터소개글)  

 

속터지는 노동자... 처벌은 원치 않습니다.

 


청주고용지원센터에서 최저임금 홍보 및 상담을 진행하면서 만난 아저씨 이야기입니다.

아저씨께는 죄송하지만 처음 말을 걸으셨을 때는 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 될 만큼 아저씨의 말투는 느리고 순박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다니던 직장에서 두달정도 임금을 못 받으셨다고 상담을 하셨고, 센터를 방문하시어 임금체불 진정을 하였습니다. 나이도 있고, 말씀이 워낙 느리시고 하니 직장잡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직장에서 생산직으로 두달반정도 근무하였는데, 임금도 못 받고, 해고당했다고 합니다. 사업주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본인도 어려워 빌려주지 못했더니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노동부에서는 사업주가 지불할 능력이 없어 체불금품확인원을 발급해주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려고 하는데 처벌을 원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나에겐 큰돈이지만 백만원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게 할 수가 있느냐며 극구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답니다.

사실, 아저씨는 7년동안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퇴직하고는 몇 년동안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업급여도 이전에는 자발적 퇴직이라 받지 못했고, 이번에는 고용보험기간이 짧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열심히 고용지원센터를 오가지만 아저씨의 착한 심성을 알아차릴 사업주는 아직 없나봅니다.

근로감독관도 아저씨의 사정이 측은했나봅니다. 이 사업주를 상대로 다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낸 임금체불 진정사건 조사가 끝나면 아저씨를 위해 ‘지불각서’라도 받아줄 생각이라고 합니다. ‘지불각서’가 아저씨의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감독관도 짐작하겠지만 어떻게든 돕겠다는 것이니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저씨께 물었습니다. 왜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하셨냐고요. 사람이 살면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하십니다. 돈 빌려주지 않는다고 나가라고 한 사람인데, 임금도 싹뚝 떼어먹은 사람인데, 미안하단 말도 안하는 사람인데......

아저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아저씨의 노동권 실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아저씨와 의논하며 계속할 것입니다. 그깟 백만원이 아닌 억만금보다 더 값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최저임금 홍보 및 노동상담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앞입니다.

 

 "끌어"   -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

 

* 이번 소식지에는 궁금한소식 대신 재미있는 글 하나 소개합니다.
* 조광복노무사 블러그에 실린 글입니다.

"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글쎄, 내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남긴 긴 곡선의 끝자락 같이 가물가물한 시절.  오래된 화상 자국 마냥 아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때때로 아릿한 고등학교 문예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어린 시절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짓눌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어린 아들 현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과 아이의 미래가 겹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찾아간 서클(당시는 동아리를 서클이라 했다)이 문예반이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너의 소원이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면 시인, 소설가, 작가 이런 그럴듯한 말은 알지 못하여 그저 “문학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의 학교 특활(특별활동)은 문예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끝 촌구석에서 말단 공무원 녹을 잡수시는 와중에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식들을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에 실려 서울로 올려 보내신 아버지의 그 “청운의 꿈”을 와르르 무너뜨린 곳이 바로 문예반이었다.

나의 입학년도가 82년이고 기수가 41기니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클이다.  이름도 매우 오만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00문예반이라 부르겠다.  또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필력이 높기로 알아주는 서클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세습되어 온 말도 안 되는 전통이니, 또 어린 것들의 치기 이런 것이 얼마나 우세스러웠을까.  우리 기수는 처음 8명~10명 정도가 서클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4명만 남았지만.  서클 입회 절차가 다 끝나고 첫 소집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근처 뒷골목 짱깨집(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을 모시고 신고식을 치렀다.  짜장이 들어오고 소주가 들어오고 선배들은 고약스럽게 갖은 폼을 잡고 담배들을 꼬나물었다.  그리고 1학년부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니라 악다구니를 내야 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선배들은 틈만 나면 짱깨를 갔다.  1,2학년끼리 혹은 3학년을 모시고 가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1,2학년끼리 갈 경우에는 절대 2학년 선배들이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  단골 짱깨에는 1학년들이 맡긴 시계나 돈 될 만한 품목들이 쌓여갔다.  나는 맡길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문예반은 매일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선배들보다 일찍 서클실에 와 청소를 하고 정자세를 한 채 앉아서 선배들을 기다려야 한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저녁 8시까지 정자세를 한 채로 선배들의 훈계를 듣고 써온 글을 평 받아야 한다.  1학년이 앉은 곳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창문 너머에는 “창밖의 여자”를 대신하여 벽돌 건물의 붉은 벽이 노려보고 있다.  그 붉은 벽이 어둠을 콱 깨물어 칠흑이 번질 시간이면 그 어린 가슴 속에도 서글픔이랄까 비애랄까 이런 감정이 울컥 번지는 것이다.

문예반에서는 1학년들은 매일 글을 한 편씩 써가야 한다.  우리는 시와 수필 중 하나를 자신의 장르로 선택해야 했고 나는 시를 선택했다.  매일 시와 수필을 써오라는 지시가 참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 때가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무인천하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거부할 권리와 배짱이 우리에겐 없었다.  조건도 까다롭다.  맞춤법, 띄어쓰기 틀리지 말 것, ‘그리움’, ‘슬픔’ 같은 추상명사는 절대 쓰지 말 것 따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빳다(좋은 용어는 아닌데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맞아야 한다.  그 환경에서 매일 주옥같은 시가 나온다면 나는 천재시인 랭보의 반열에 서야 하겠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천재성을 주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 전까지 시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 한다.

문예반이 선생들 사이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전교1등을 했던 아이도 몇 달 안에 꼴찌의 반열로 내려앉힐 수 있는 기적을 행하고 학교 대걸레를 남아나지 못하게 하는 빳다 덕택이었다.  문예반에 입회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얼마를 못 버티고 탈퇴를 햐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탈퇴 빳다는 50대라고 엄포를 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어머니가 바카스 1박스를 사들고 와서 탈퇴를 시켜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탈퇴를 하려는 놈과 그걸 붙잡아 본보기로 응징을 하려는 놈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퇴하려는 후배들은 선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등교시간을 넘겨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 결석까지도 감행한다.  한 보름 동안의 눈물겨운 숨바꼭질에 성공한 일부는 그 대가로 성적 최상위 클라스에 저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붙잡혀온 일부 친구는 가엾게도 50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스무 대는 치도곤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후드득 떨어지니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너 문예반 하는 것 안다.  그거 탈퇴하면 안 되겠냐, 문예반이 빳다가 세고 공부도 하기 힘든 곳인데 잘 생각해봐라 이런 보약 같은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라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들끓는 청소년기에 나는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었고 문예반 외에는 달리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전부나 다름없는 문예반으로부터 나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억압받았다.  몇 번 고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문예반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문예반 빳다는 유명하다.  빳다를 맞을 때보다 그 전의 분위기가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배들은 한 번씩 수업 끝나고 저녁 때 대걸레 자루를 모아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교실을 돌면서 대걸레에서 걸레를 떼어내고 자루만 모아온다.  그렇게 모아온 것이 한 번에 20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창밖의 붉은 벽이 어둠을 어금니 물듯 쿡 물어버릴 때,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가 선배 하나가 마침내 입을 뗀다.  “끌어”  우리는 긴 탁자를 뒤집어 또 하나의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서클실 한 쪽으로 끌어 붙인다.  탁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그르륵 끌리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학교들은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하였다.  수업을 빼먹어서 좋은 날이다.  그런데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많은 중요한 상을 우리 문예반이 휩쓸어왔다.  내 동기들도 다들 몇 차례씩 장원도 타고 그랬는데 유독 나만 상을 타지 못했다.  난들 왜 상을 타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한계를 금방 깨닫고 2학년 중반부터 백일장에 가도 더 이상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다 3학년 봄철에 대학 백일장에 참가할 때다.  1학년 후배 하나가 제출 시각 15분 전까지도 시를 전혀 쓰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대로 적어라 하고 한 10분간 불러주었는데 그게 덜컥 차하(3등상)에 입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상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탔지만...

문예반 활동의 절정은 1학기 때 00지라는 문예지를 한 차례 내는 것도 있지만 뭐니 해도 2학기 때 00문학회라고 이름을 달았던 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국화가 활짝 피는 가을철에 문학회가 열리는데 각자 준비한 시와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이다.  이 짧은 한 때를 위해서 한 달 동안을 초죽음의 수준으로 연습을 한다.  작품집에 실릴 시와 수필을 쓰고 낭독 연습을 보통 밤 10시~11시까지 한다.  한 밤 내내 발성연습을 시킨다고 소리를 꽥 꽥 지르게 한다.  모두들 더 예민해져 빳다도 심해진다.  문학회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어린 가슴이 설레지 않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떤 때는 여학생으로부터 종이학을 선물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여학생이 내 시낭송을 듣고서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로 이어진 적이 없다.

이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예외 없이 졸업한 선배들을 합쳐 수십 명의 인원이 짱깨를 향한다.  1학년 때는 몰랐으나 2, 3학년 때는 왜 이리 슬픔과 허무함이 복받쳐 오르는가.  나는 술에 만취가 되어 엉엉 울고, 토하고, 또 울었다.  모두들 그랬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일어나서 문예반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정자세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래가사를 마치 유언을 써내려가듯 비장하고 또 비장하게 읊조리는 것인데 그 가사가 이렇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이도 변하시기 잘하시는 여자의 마음 보아라 믿지 못할 여자의 마음 /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와서 믿었지 살자고 믿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남자의 마음 // 우리 집에 부모님 나를 낳고 길러서 문예반 가서 요 모양 요 꼴 되라고 나를 낳고 길렀나 보아라 믿지 못할 자식의 마음 / 기를래서 길렀나 낳으니까 길렀지 기르고 싶어 길렀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부모의 마음”

1학년 때 그토록 싫어했고 닮고 싶지 않았던 선배들을 나 또한 닮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매 맞는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듯이 서글프지만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짱깨에서 후배들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술잔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슬프게도 나도 빳다를 휘두를 때가 있었다.

졸업을 하고 한 동안 후배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다시는 나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어리지만 성적에 목매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을 기특한 후배들이 문예반으로 인하여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후배들을 찾았지만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내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고 89년인가 전교조가 설립되고 학교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가 퍼지고 얼마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노래가 또 온 세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 땐가 우연히 동기들로부터 문예반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학년 재학생들이 전원 탈퇴하였단다.  그 후로 문예반은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은 일탈을 하고 싶어 들끓었던 내 청소년의 한 시절이 의지하였던 피난처요, 또 어린 열정을 쏟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절에 목말랐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고 억압하였던 곳이다.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배웠으나 가슴과 몸으로 쓰는 시를 배우지 못하고 단지 시 쓰는 기술만을 익혔을 뿐이다.  나와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시와 수필의 형식을 빌려 상을 타기 좋게끔 꾸미도록 통제받았다.  그 덕에 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하였던 문예반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군사정권이 퇴락하듯 전교조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점점 쇠락하여 해체되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억압받고 갇혔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에돌아가야 했다.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문예반은 기억에서 흐려져 갔다.  그 문예반과 당대의 서클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시학원이 성적 성적 오로지 성적을 위해 들어찼다.  나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현이 더 크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때는 자위하듯이 아빠의 학창시절이 그래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은 있었다고, 뜨거운 눈물 한 번 받아줄 곳이 그나마 있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아들 현에게 그런 돼먹지 않은 얘기는 해주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문예반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나 그 때의 억압이 자유와 감성과 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나 힘겨웠으므로.  나중에는 그 억압을 은연중에 즐기는 나를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내 아들 현에게만큼은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의 시절에 걸맞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마음껏 누리라고.  그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조광복노무사 블러그
http://blog.daum.net/hojug
http://blog.jinbo.net/hojug/
많이 방문해 주세요.


- 궁금한소식 전합니다. -

* KT공대위 기자회견 예정
- 2009.4.28. 14:30
- 장소 : 중앙노동위원회
- 노동부의 공정한 판정 촉구
- 15:00 부당해고구제신청재심
   심문회의


* 교육연대
- 이기용교육감 퇴진투쟁
- 월~금 교육청 앞 1인시위


* 평등교육실현을위한충북학부모회
- 집행위원회
- 자율형사립고 반태투쟁 전개
- 일제고사반대 체험학습 참여학생
 무단결석처리에대한 법적대응준비
  (소송인단 모집중)


* 센터에서 매월 강좌를 준비함다.
- 소박하게, 사랑방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수다같은 강좌를
- 부지런히 준비해서
  5월에는 시작하려고 합니다.
-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노동절 실업자대회 합니다.
- 실업자대회 깃발아래로 모입시다.
- 5월 1일 13:00 청주체육관으로




 

충북 청주시 상당구 흥덕구 미평동 35-17번지 2층 호죽노동인권센터 공동대표 조순형. 이정훈.
Tel : 043) 286-9596, Fax : 043) 286-9598,http://www.cbnodong.org/hojuk/hoju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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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탱크를 치워주세요, 당신의 손주를 생각한다면

제발 탱크를 치워주세요, 당신의 손주를 생각한다면



내 집은 충남 천안입니다.  직장은 청주에 있긴 하지만요.  천안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들 느끼는 일이겠지만 참 갈 곳이 적습니다.  산으로 치자면 광덕산, 성거산, 태학산, 태조산 정도이고요, 물가로 치자면 광덕산 계곡, 북면 개울가 정도이지요.  이렇게 몸을 쉴 만한 곳이 드문 땅에 그래도 가족들이 오순도순 쉴만한 곳, 직장 동료들이 흠뻑 땀에 젖어 뛰어 놀만한 곳이 있지요.  태조산 공원이예요.

 

 

비록 산자락을 깎아 만들어 아쉽기는 하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잊을만하지요.  지금은 천안 사람들이 공을 차면서 땀 한 번 흘리고 싶을 때, 그늘에 앉아 편하게 쉬고 싶을 때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지요.  아마도 천안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곳이 여기 아닐까 싶어요.

거기 넓디넓은 잔디밭이 있어요.  잔디가 막 새순을 틔울 때 빼고는 들어가 놀 수 있지요.  베드민턴 치는 아이, 공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 무작정 뛰는 아이, 그 잔디밭은 아이들이 넘어져도 상처 하나 없이 다 받아주는, 말하자면 아이들의 천국이예요.  작년 6월인가 아들 현이를 데리고 모처럼 태조산을 갔지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져졌어요.  정말 쫙 펼쳐졌지요.  탱크와 대포와 전투기들이 도열해 있는 거예요.

 

  

 

 

1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탱크와 대포들은 하나 같이 포신을 태조산 놀이공원 중심부를 향하고 있어요.  내 아들 현이를 향해 있고 현이 또래 아이들을 행해 있어요.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하나하나마다 친절하게도 안내판을 세워놓았지요.

 

 

 

 

무슨 심사로 천안 시청의 나으리들께서 거기다 저런 것들을 갖다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람 할 짓이 아니지요.  가족들이 오순도순 도시락을 까먹고, 아이들이 까르륵대며 뛰어노는 공원과 살상무기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릴 수 없는 사이 아닌가요?

 

 

 


아이들의 가슴에 전쟁과 살상과 무기를 찬양하는 피폐함만 가득 들여앉히려는 의도 없이는 저런 황당한 일을 감히 꿈꿀 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할 일은 아니지요.  그러니 제발 저 탱크들을 치워주세요.  천안 시청 나으리들, 전쟁나면 당신들이 사랑하는 손주들의 생명도 저 탱크 앞에서 다칠 수 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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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중 상사의 언어폭력으로 발병하였다면 산재 인정될 수도

☞ 질문


본인의 직장 동료 이야기입니다.  본인들이 근무하는 직장은 사회복지시설이 운영하는 장애인 작업장입니다.  70명 정도가 근무하는 아주 작지는 않은 장애인들의 고용시설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회사의 작업반장이 일을 하다가 작업 동료인 여성 직원이 하는 일이 성에 차지 않은지 계속 지적을 하다가 그 여성 동료가 왜 본인이 하는 것만 갖고 뭐라 하느냐고 대들자 갑자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요.  우리가 주위에서 달려들어 작업반장을 말리고 여성 동료를 다독거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20분 정도 후에 일을 하던 그 여성 동료가 작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서 119 구급대에 실려 갔지요.  그게 3주 전의 일입니다.  병원에서는 치료할 때까지는 3개월은 필요하다고 진단을 했다고 하고요, 지금 상태는 그 동료가 말을 전혀 크게 하지 못하고 안면 근육도 뭉쳐 있다고 합니다.  동료로부터 병명은 정확히 듣지는 못 했습니다.  이런 경우도 산재로 인정될 수 있는지요.



☞ 답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말하는 업무상 재해란 업무상 사유에 의한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말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인정기준의 하나로 노동자가 근로계약에 따른 업무나 그에 따르는 행위를 하던 중 발생 한 사고로 인한 부상· 질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님의 동료께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첫째는 업무를 하던 중 직장상사의 폭언으로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지금의 상병에 걸렸을 것, 둘째는 직장상사와의 충돌이 오로지 사적 감정이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업무와 관련이 있을 것 등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동료 분의 구체적인 상병 명을 알 수 없어 상병 명의 특성에 따른 상담은 곤란하나 일단 님의 동료께서는 근무 중에 직장 상사의 폭언을 듣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현재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상사가 폭언을 하기까지는 오로지 사적인 감정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업무지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차이가 발단이 되어 폭언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님의 동료에게 찾아온 상병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상병 명에 따라서는 좀처럼 업무와의 관련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므로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네요.


일단 요양급여를 청구하시고요, 구체적으로 준비하여야 할 것은 상병명과 그 원인이 상사의 폭언으로 인한 충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는 의사의 소견, 상사가 폭언을 하고 발병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기재한 동료들의 확인서를 첨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무쪼록 잘 치료하시고 건강 회복하여 직장에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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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글쎄,

내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남긴 긴 곡선의 끝자락 같이 가물가물한 시절.  오래된 화상 자국 마냥 아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때때로 아릿한 고등학교 문예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어린 시절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짓눌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어린 아들 현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과 아이의 미래가 겹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찾아간 서클(당시는 동아리를 서클이라 했다)이 문예반이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너의 소원이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면 시인, 소설가, 작가 이런 그럴듯한 말은 알지 못하여 그저 “문학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의 학교 특활(특별활동)은 문예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끝 촌구석에서 말단 공무원 녹을 잡수시는 와중에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식들을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에 실려 서울로 올려 보내신 아버지의 그 “청운의 꿈”을 와르르 무너뜨린 곳이 바로 문예반이었다.


나의 입학년도가 82년이고 기수가 41기니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클이다.  이름도 매우 오만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00문예반이라 부르겠다.  또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필력이 높기로 알아주는 서클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세습되어 온 말도 안 되는 전통이니, 또 어린 것들의 치기 이런 것이 얼마나 우세스러웠을까.  우리 기수는 처음 8명~10명 정도가 서클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4명만 남았지만.  서클 입회 절차가 다 끝나고 첫 소집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근처 뒷골목 짱깨집(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을 모시고 신고식을 치렀다.  짜장이 들어오고 소주가 들어오고 선배들은 고약스럽게 갖은 폼을 잡고 담배들을 꼬나물었다.  그리고 1학년부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니라 악다구니를 내야 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선배들은 틈만 나면 짱깨를 갔다.  1,2학년끼리 혹은 3학년을 모시고 가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1,2학년끼리 갈 경우에는 절대 2학년 선배들이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  단골 짱깨에는 1학년들이 맡긴 시계나 돈 될 만한 품목들이 쌓여갔다.  나는 맡길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문예반은 매일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선배들보다 일찍 서클실에 와 청소를 하고 정자세를 한 채 앉아서 선배들을 기다려야 한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저녁 8시까지 정자세를 한 채로 선배들의 훈계를 듣고 써온 글을 평 받아야 한다.  1학년이 앉은 곳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창문 너머에는 “창밖의 여자”를 대신하여 벽돌 건물의 붉은 벽이 노려보고 있다.  그 붉은 벽이 어둠을 콱 깨물어 칠흑이 번질 시간이면 그 어린 가슴 속에도 서글픔이랄까 비애랄까 이런 감정이 울컥 번지는 것이다.


문예반에서는 1학년들은 매일 글을 한 편씩 써가야 한다.  우리는 시와 수필 중 하나를 자신의 장르로 선택해야 했고 나는 시를 선택했다.  매일 시와 수필을 써오라는 지시가 참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 때가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무인천하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거부할 권리와 배짱이 우리에겐 없었다.  조건도 까다롭다.  맞춤법, 띄어쓰기 틀리지 말 것, ‘그리움’, ‘슬픔’ 같은 추상명사는 절대 쓰지 말 것 따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빳다(좋은 용어는 아닌데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맞아야 한다.  그 환경에서 매일 주옥같은 시가 나온다면 나는 천재시인 랭보의 반열에 서야 하겠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천재성을 주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 전까지 시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 한다.


문예반이 선생들 사이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전교1등을 했던 아이도 몇 달 안에 꼴찌의 반열로 내려앉힐 수 있는 기적을 행하고 학교 대걸레를 남아나지 못하게 하는 빳다 덕택이었다.  문예반에 입회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얼마를 못 버티고 탈퇴를 햐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탈퇴 빳다는 50대라고 엄포를 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어머니가 바카스 1박스를 사들고 와서 탈퇴를 시켜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탈퇴를 하려는 놈과 그걸 붙잡아 본보기로 응징을 하려는 놈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퇴하려는 후배들은 선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등교시간을 넘겨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 결석까지도 감행한다.  한 보름 동안의 눈물겨운 숨바꼭질에 성공한 일부는 그 대가로 성적 최상위 클라스에 저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붙잡혀온 일부 친구는 가엾게도 50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스무 대는 치도곤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후드득 떨어지니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너 문예반 하는 것 안다.  그거 탈퇴하면 안 되겠냐, 문예반이 빳다가 세고 공부도 하기 힘든 곳인데 잘 생각해봐라 이런 보약 같은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라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들끓는 청소년기에 나는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었고 문예반 외에는 달리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전부나 다름없는 문예반으로부터 나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억압받았다.  몇 번 고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문예반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문예반 빳다는 유명하다.  빳다를 맞을 때보다 그 전의 분위기가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배들은 한 번씩 수업 끝나고 저녁 때 대걸레 자루를 모아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교실을 돌면서 대걸레에서 걸레를 떼어내고 자루만 모아온다.  그렇게 모아온 것이 한 번에 20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창밖의 붉은 벽이 어둠을 어금니 물듯 쿡 물어버릴 때,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가 선배 하나가 마침내 입을 뗀다.  “끌어”  우리는 긴 탁자를 뒤집어 또 하나의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서클실 한 쪽으로 끌어 붙인다.  탁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그르륵 끌리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학교들은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하였다.  수업을 빼먹어서 좋은 날이다.  그런데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많은 중요한 상을 우리 문예반이 휩쓸어왔다.  내 동기들도 다들 몇 차례씩 장원도 타고 그랬는데 유독 나만 상을 타지 못했다.  난들 왜 상을 타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한계를 금방 깨닫고 2학년 중반부터 백일장에 가도 더 이상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다 3학년 봄철에 대학 백일장에 참가할 때다.  1학년 후배 하나가 제출 시각 15분 전까지도 시를 전혀 쓰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대로 적어라 하고 한 10분간 불러주었는데 그게 덜컥 차하(3등상)에 입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상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탔지만...


문예반 활동의 절정은 1학기 때 00지라는 문예지를 한 차례 내는 것도 있지만 뭐니 해도 2학기 때 00문학회라고 이름을 달았던 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국화가 활짝 피는 가을철에 문학회가 열리는데 각자 준비한 시와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이다.  이 짧은 한 때를 위해서 한 달 동안을 초죽음의 수준으로 연습을 한다.  작품집에 실릴 시와 수필을 쓰고 낭독 연습을 보통 밤 10시~11시까지 한다.  한 밤 내내 발성연습을 시킨다고 소리를 꽥 꽥 지르게 한다.  모두들 더 예민해져 빳다도 심해진다.  문학회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어린 가슴이 설레지 않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떤 때는 여학생으로부터 종이학을 선물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여학생이 내 시낭송을 듣고서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로 이어진 적이 없다.


이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예외 없이 졸업한 선배들을 합쳐 수십 명의 인원이 짱깨를 향한다.  1학년 때는 몰랐으나 2, 3학년 때는 왜 이리 슬픔과 허무함이 복받쳐 오르는가.  나는 술에 만취가 되어 엉엉 울고, 토하고, 또 울었다.  모두들 그랬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일어나서 문예반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정자세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래가사를 마치 유언을 써내려가듯 비장하고 또 비장하게 읊조리는 것인데 그 가사가 이렇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이도 변하시기 잘하시는 여자의 마음 보아라 믿지 못할 여자의 마음 /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와서 믿었지 살자고 믿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남자의 마음 // 우리 집에 부모님 나를 낳고 길러서 문예반 가서 요 모양 요 꼴 되라고 나를 낳고 길렀나 보아라 믿지 못할 자식의 마음 / 기를래서 길렀나 낳으니까 길렀지 기르고 싶어 길렀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부모의 마음”


1학년 때 그토록 싫어했고 닮고 싶지 않았던 선배들을 나 또한 닮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매 맞는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듯이 서글프지만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짱깨에서 후배들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술잔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슬프게도 나도 빳다를 휘두를 때가 있었다.


졸업을 하고 한 동안 후배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다시는 나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어리지만 성적에 목매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을 기특한 후배들이 문예반으로 인하여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후배들을 찾았지만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내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고 89년인가 전교조가 설립되고 학교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가 퍼지고 얼마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노래가 또 온 세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 땐가 우연히 동기들로부터 문예반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학년 재학생들이 전원 탈퇴하였단다.  그 후로 문예반은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은 일탈을 하고 싶어 들끓었던 내 청소년의 한 시절이 의지하였던 피난처요, 또 어린 열정을 쏟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절에 목말랐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고 억압하였던 곳이다.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배웠으나 가슴과 몸으로 쓰는 시를 배우지 못하고 단지 시 쓰는 기술만을 익혔을 뿐이다.  나와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시와 수필의 형식을 빌려 상을 타기 좋게끔 꾸미도록 통제받았다.  그 덕에 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하였던 문예반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군사정권이 퇴락하듯 전교조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점점 쇠락하여 해체되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억압받고 갇혔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에돌아가야 했다.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문예반은 기억에서 흐려져 갔다.  그 문예반과 당대의 서클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시학원이 성적 성적 오로지 성적을 위해 들어찼다.  나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현이 더 크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때는 자위하듯이 아빠의 학창시절이 그래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은 있었다고, 뜨거운 눈물 한 번 받아줄 곳이 그나마 있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아들 현에게 그런 돼먹지 않은 얘기는 해주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문예반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나 그 때의 억압이 자유와 감성과 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나 힘겨웠으므로.  나중에는 그 억압을 은연중에 즐기는 나를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내 아들 현에게만큼은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의 시절에 걸맞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마음껏 누리라고.  그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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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노동자의 투쟁과 법에 관한 짧은 생각

(교안)노동자의 투쟁과 법에 관한 짧은 생각

 


1. 노동법 무슨 의미가 있나?


2009년도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파업학교 중 노동법과 관련한 교육을 맡았다.  교안을 보내달라고 하니 이것을 교안이라고 지금 작성하고 있다.


개별노동관계법 특히 근로기준법은 그 내용을 “사용자는 ... 해야 한다” 주로 이렇게 적고 있다.  즉, 법의 목적이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하는데 있는데 그러기 위해 사용자에게 최저 기준을 정해 놓고 이것은 준수해라 라고 의무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는...” 라고 입을 떼서 “... 해야 한다”라고 입을 닫는 것이다.


노동조합및노동관계법 중에서 파업과 관련한 내용을 보기로 한다.  주로 “쟁의행위는(또는 노동조합은)....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적고 있다.  즉,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중에서도 노동조합의 가장 강력한 힘인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주로 노동조합에게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강제하고 있다.  근로기준법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여기서 노동법의 목적, 존재 이유가 분명해진다.  노동법이 없던 시절 기업주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그러한 관계를 갖고 계약을 한 이상 계약의 효력에 대하여는 누구도 간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노동자를 착취하였다.  이 계약자유의 원리를 지극히 불평등하고 자유롭지 못한 노동관계에 적용하니 공장주가 10살 갓 넘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하루 16시간 일을 시키고 월급은 죽지 않고 살만큼만 주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저항이 생기고 반자본주의 이념이 널리 퍼지고 저항의 수준은 체제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노동법은 자본주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노동자 개인에 대하여는 최저 생활을 보장하되 노동자 집단에 대하여는 체제를 넘보는 투쟁을 하지 못 하도록 규제하는 양면의 필요성 때문에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 내용은 노동자의 생존권은 보장하면서 노동자의 집단적인 투쟁을 규제하는 양쪽 칼날을 갖게 된 것이다.



2. 우리는 법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법은 무엇인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므로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아예 무시해버려야 하나, 아니면 모든 투쟁 과정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악법은 어겨서 깨뜨려야 하나 아니면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다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따라야 할까.


노동자의 투쟁이 모두 생각 같지만은 않다.  법으로는 보호받을 수 없는 싸움이 있다.  민영화 반대 파업이라든가, 노동법 개악 저지 파업이라든가 이런 것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법파업이라는 법원의 딱지가 완강하게 찍혀있다.(물론 터무니없는 논리이기는 하지만)  이때 나는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할까?  악법도 법이므로 파업을 투쟁 전술에서 빼야 옳을까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불법파업도 강행해야 옳을까


굳이 대정부 투쟁이 아니라도 사업장 내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싸움을 놓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경우가 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그러했을 것이다.  200명도 안 되는 사업장에서 두 명의 열사가 나온 세원테크 노동자들이 소위 불법파업을 멈출 수 없었던 상황도 비슷할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단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분명 여기서 파업을 하면 불법이긴 한데 투쟁을 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노동조합을 지켜내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 때도 있다.  이 때 또 나는 투쟁과 법 사이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옳을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택시회사의 노동조합은 회사를 상대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팽팽한 파업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사장의 집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이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어 집행부가 해고되었고 노동조합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 위원장이 만약 명예훼손인 줄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는 안 했을 거라고 말했다.


모든 투쟁의 고비 고비마다 우리는 법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노동자와 다수 민중의 삶에 보탬이 되는 입장과 원칙에 서는 것이 옳다고 본다.  지금 한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투쟁에 법을 고려하는 것이 보탬이 된다면 법을 활용할 수 있는 방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해고 또는 피할 수 있는 해고를 자초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거나 사용자의 부당한 행위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데 법을 적극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을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의 투쟁을 가로막고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때로는 법을 무시할 수 있는 결단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중요한 순간 순간에 현명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니 법은 크게 따지지 말자는 입장도 함부로 취할 것은 아니고, 더욱이 모든 투쟁을 법을 중심에 놓고 법에 의존해서만 해결하려는 자세는 더더욱 우리가 경계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3. 파업 전후로 특히 고려해야 할 법적인 문제


예전에는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다”는 이야기가 제법 있었지만 요즘은 파업 한 번 하기가 참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노사관계가 파업까지 갈 정도면 뭔가 원만히 타결되지 못한 쟁점(이슈)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업의 목적이다.  파업의 목적사항은 그것이 적어도 사업장 내의 문제라면 사용자측과 교섭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교섭하자고 내건 요구사항 중에는 법원의 판례의 태도에 비추어 적법한 파업의 목적사항이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겉으로나마 파업의 목적이 적법함을 유지하려면 교섭사항에 대하여 기술적으로라도 미리 고려를 해두어야 한다.


노동조합은 파업의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고 반대로 사용자는 파업의 효과가 미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때 사용자가 파업의 효과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전에 할 수 있는 조치들이 무엇인지 파악해 두어야 한다.  예를 들면 파업 전에 대체인력을 미리 확보해 두는 방법, 파업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조합원 사이를 개입하는 방법, 물량을 밖으로 빼돌리는 방법, 사원협의회 같은 노동조합을 상대할 수 있는 비조합원 또는 구사대를 조직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업주의 행태들을 면밀히 체크해 두고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두어야 한다.


파업하는 도중에도 노동조합은 파업의 힘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사용자 측 역시 파업의 힘을 약화 또는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별 노력을 다 한다.  이를테면 대체근로 투입, 파업의 김을 빼는 각종 선전활동,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충돌, 직장폐쇄, 심지어는 용역깡패의 투입에 이르기까지 사용자측은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노동조합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동원한다.  반대로 무모한 전술을 구사하거나 돌발적인 사고로 뜻하지 않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파업 도중에 발생할 여러 사안들에 대하여 다양한 대응전술을 마련하되 그 속에는 법적인 대응 수단들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파업이 종료되고 업무에 복귀할 때도 복병을 만날 수 있다.  파업이 끝날 때 합의서에 반드시 넣어야 할 문구들도 실수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파업 중 힘이 많이 소진된 노동조합의 경우 그 기회를 틈타 사업주측은 업무 복귀 과정에서 아예 노동조합을 무력화 또는 와해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허약한 곳을 공격할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모 회사는 힘이 많이 소진된 노동조합을 경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선별 복귀시키고, 부서배치전환을 시키고, 거기에 응하지 않는 조합원은 해고를 시키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여 결국 노동조합이 해산된 경우까지 있다.  따라서 파업 후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충분히 고려해 두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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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에 해당하는지는 전에 근무하던 직장의 업무경력도 고려하여야

☞ 질문


저는 샴푸와 린스용기에다 인쇄를 하는 회사에 근무하다 얼마 전에 퇴사한 주부사원입니다.  저는 쭉 같은 업종에서 근무를 해 왔는데요,  1999년부터 2007년까지 한 회사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후 두 달 정도 쉬었다가 다른 회사에 입사하여 2008년까지 근무했으나 또 두 달 가량을 쉬고 또 다른 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한 후에 2009년도 최근에 퇴직을 하였습니다.  모두 같은 업종의 회사이지요.

 

제가 이렇게 두 차례 퇴직을 하고 쉬었다 다른 회사에 입사를 한 이유는 손목이 아파서 치료를 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본인이 하는 일이 한 쪽 손목을 반복해서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면 당연히 손목이 시큰거리지요.  그러더니 2007년도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 물리치료를 받고 좀 괜찮아져서 다른 회사에 근무를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통증이 재발을 하였습니다.  또 쉬었다 마지막 회사에 갔는데 이제는 아예 손목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절대 손목을 놀리면 안 되고 한 동안은 치료만 받으라고 하더군요.  본인과 같은 경우 산재처리가 가능하겠는지요.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마지막 회사에 근무할 때는 손목이 너무 아프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부서로 배치해줄 것을 사장께 부탁을 했는데 거절을 하길래 그러면 좀 쉬었다 다시 일을 하면 안 되겠느냐 했더니 그것도 허락을 해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경우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답변


산재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업무상 재해란 업무상 사유에 의한 부상, 질병, 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말합니다.  특히 직업성 질병의 경우 장기간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상병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재해 노동자가 비슷한 업종에 해당하는 여러 직장을 근무하였다면 마지막으로 근무한 직장의 근무경력만 가지고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비슷한 업종의 모든 회사의 근무경력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님께서는 한 쪽 손목을 계속 반복하여 움직이는 작업을 하게 되어 그로 인해서 극심한 통증을 갖게 되었는데 님의 근무경력을 보면 마지막으로 근무한 직장 뿐 아니라 모든 직장을 통틀어 1999년부터 같은 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손목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작업을 해 왔다면 님께서 호소하시는 현재의 상병도 오랜 기간 동안 님이 수행해온 업무로 인하여 발병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청구를 하시고요 아울러 3년 간 자비로 치료한 금액이 있다면 그 금액까지 청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실업급여를 받으실 수 있는지는 만약 님께서 개인 질병으로 퇴직 직전의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고 달리 회사로부터 배치전환이나 휴직을 허용 받지 못해 부득이 퇴직을 한 것이라면 비자발적인 이직에 해당하므로 실업급여 수급자격은 인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을 하여 휴업급여를 지급받을 경우에는 별도로 그 기간에 대하여 실업급여가 지급되지는 않으므로 일단 그 결과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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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 소식지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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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세요! 아자!

 


2009년 최저임금 선전전을 고용지원센터 앞에서 주3회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리도 실업자가 많은지요. 실업급여 대상자 교육을 위한 강의실은 빈틈이 없습니다. 어림잡아 백여명쯤 되는 듯합니다. 고용지원센터에서는 월별로 만명쯤 늘어나고 줄어드는 실업급여 대상자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는 기업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고 예산을 더 편성하여 지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고용유지지원금은 고용유지를 하라고 사업주를 지원하는 제도인데 실업자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오가는 말도 없이 고용지원센터 강의실을 숨 막히게 채운 노동자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다니며 전단을 나눠줍니다. ‘제발 힘 좀 내세요!’ 소리소리 지르고 싶습니다. 실업은 죄가 아니잖아요. 주눅들 거 없잖아요.

다음 주도 내내 고용지원센터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미소라도 지을 수 있는 선전물을 만들어야겠어요. 아주 서글퍼서 몸살이 날 것 같습니다. 힘나게 할 좋은 생각 있으시면 전해주세요.

                                                                              호죽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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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의 활동현황 3월 25일부터 4월 8일까지>

 

호죽노동인권센터 활동보고

1. 노동상담 현황 및 특기사항
 
① 인쇄회사의 여성노동자의 산재상담으로 이전 회사에서도 같은 일을 하였는데, 장기간 손목을 써야 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손목이 아파 병원에 다니고 있는데 산재로 인정될 수 있는지가 주요내용입니다. 직업병으로 인정될 수 있을지 검토하려고 합니다.

② **택시에서 근무하던 중 무단횡단으로 인한 인사사고로 해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정년이후에도 계속근무를 하였던 터라 구제신청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상담이 있었습니다. 정년이후라 하더라도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면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습니다. 추후 법률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③ **조합에서 활동가로 근무하고 있는 여성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이를 시정하려는 건의를 하던 중 조합측에서 갑자기 규정을 신설해 근로조건을 이전보다 더 불이익하게 변경하려고 하는데 어찌해야 하는지 상담을 오셨습니다. 규정의 효력여부는 단정하기 곤란하나 일방적인 처우악화에 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합 이사회와 활동가, 상근자, 조합원들이 함께 노동인권의 시각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야 할 듯 합니다.

④ 체불임금 문제로 민사소송 중인데 임금체불 발생여부를 두고 법원에서 다투고 있는 상황, 이 경우 체불임금에 대한 지연이자를 청구할 수 있는지 검토를 요청받았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체불임금에 대한 지연이자 20%를 인정하고 있으나, 위와 같이 임금체불 존부를 다툴 사정이 인정될 때에는 지연이자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 법률지원활동

1) 해고 등 구제신청사건
 ① 연** 부당해고구제신청 이유서 제출
 ② 전** 부당해고구제신청 출석 조사
 ③ **금고 남** 부당해고구제신청 심문회의 - 부당해고 인정
 ④ 한** 부당해고구제신청 재심 답변서 준비
 ⑤ **요양원 김** 부당징계구제신청 이유서 제출

2) 임금 등 노동부사건 및 업무상재해 등 사건
 ① 한** 임금사건 외 임금체불 진정 지원
 ② 한국JCC 임금사건 3차 출석조사 및 면담
 ③ 우진교통(주) 규정제정에 관한 법률지원



3. 노동인권활동

① KT충북공대위에서는 KT본사 앞에서 주2회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부당해고구제신청 재심 사측이유서를 받았고 답변서를 준비 중입니다. 4월27일 심문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휴일근로수당 등 임금진정의 건은 모든 조사는 끝났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② 최저임금 선전전 및 노동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월,수,금 고용지원센터 앞에서 민생연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③ 일제고사 반대 체험학습 다녀왔습니다. 센터는 지역의 여러단체와 함께 교육연대에 참여하여 평등교육을 실현하기위한 활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④ 청주여성인력개발센터 노동법 교육, 엘지생활건강노동조합 간부 교육

 

일제고사 반대 체험학습
냉이도 캐고
비빔밥도 먹고
장난감도 만들고
식물도 관찰하고
게임도 하고....

 19禁 교육열전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 대외협력부장 김기연

빨간원 한가운데에 또아리를 튼 숫자. 19. 언제부턴가 케이블 화면 한 쪽 귀퉁이에 자리잡은 19禁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19禁에 홀릭하던 시절. 성인영화만 콕찝어 동시상영하는 극장가를 맴돌고, 형형색색 무지개빛 불빛이 열기를 휘감는 무도회장. 수색조의 안전사인에 과감한 침투를 감행한다. 일단 침투에 성공하면 과장되고 과감한 작전이 필수다. 아슬아슬한 스릴감을 넘어 이제는 해방감으로 치닫는다. 무도회장의 불빛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검지와 중지손가락을 사방팔방 정신없이 찔러댄다. 허공을 향한 독수리 타법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무릎들기 에어로빅 동작. 온몸이 흠뻑젖어들때면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듯하다.

흥취가 붉게 달아올 무렵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공습경보. 표적을 찾는 야광 레이져눈이 번득이기 시작한다. 암행사찰에 임하신 ‘샘’이 출동한 것이다.

청소년 선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샘’. 경계를 넘어선 ‘탈선’을 만끽하고자 하는 ‘까까머리’. 그 둘 간의 숨바꼭질은 ‘뺨’ 동영상으로 사회적 충격을 안겨준 일진들의 탈선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교육은 교실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교실 밖의 탈선과 비행을 막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인성교육이 중시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육의 중요한 목표는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야광 레이져 ‘쌤’이 분주함에 동인은 여기에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못 가도록 하는 것. 주변인, 경계인이 아닌 사회의 중심인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헌데 요상한 일이 요즘 벌어지고 있다. 성적조작이 학교 행정의 필수과정이 된 것이다. 19세기 방식인 채찍과 당근이 교육현장에 횡횡하고 있다. ‘상품권’과 ‘현물’이 성적향상의 미끼로 등장한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1점 하락당 1대의 회초리가 최고의 교육방식으로 부활했다. 학생들이나 만들던 족집게 문제집을 학교가 돌려 ‘시험족보’가 나돈다.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있어선 안될 탈선행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위 일제고사가 빚은 살풍경이다.

‘교육의 탈선’에 여지없이 ‘샘’들이 나섰다. 딸각발이 샌님처럼 올곧음을 위해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해직교사들이 일제고사 중단을 외쳤다. 만개한 봄꽃을 즐기는 상춘객의 마음으로 기꺼이 ‘해직’을 각오한 일제고사 불복종 선언으로 꽃이 피기를 바랬다. 아이들도 이번엔 뱃심을 부렸다. 5,0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오답찍기 선언을 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1,500여명의 학생들이 성적 숫자놀음을 거부하고 ‘삶’을 위한 체험학습에 함께 했다.

그들이 먼저 ‘교육의 탈선’을 지도하기 위한 ‘시대의 샘’을 자처한 것이다. 이들이 탈선 교육 행정을 향해 보여준 모습 그 자체가 새로운 교육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럼없는 행정당국은 ‘교육의 탈선’을 ‘교정’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다. 이들을 교정시킬 ‘샘’은 누가 되어야 할까? 교육당국의 행태는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관전자’로만 남을지 아니면 야광 레이져를 밝힐 ‘샘’이 될지를 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탈선’에 맞선 ‘딸각발이 선생님’들에 대한 탄압은 이어지고 있다. 선택의 시간이 그리 넉넉한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인권을 말한다'에
김기연동지가 4번의 글을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신선하지요? ^ ^

 
 
 
 
 

다같이 더좋게!

 


현대환경노동조합위원장 김홍천님과의 인터뷰입니다.

노동조합 설립계기는?
한마디로 말하면 억울해서입니다. 사장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직원들 중 한사람말만 듣고 일처리를 한다든지, 종량제봉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민원인의 잘못임에도 민원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무조건 책임 추궁을 하는 등등 급기야 감정적으로 폭발하게 되었고 싸움이 되어 ‘그만두겠다.’하고 회사를 나오는데 갑자기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6명이 모여 2008.8.1일로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조합 소개 및 임단협 이야기?
현재는 모든 노동자가 조합원입니다. 이것도 협상과정에서 얻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과장도 조합원이었는데, 노동부에서는 과장은 조합원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노동조합과 함께여서 과장으로부터 회사의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청주시 위탁사업과 관련된 일들도 잘 알고 있어 전략과 전술을 짜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처음의 협상에 몇가지 중요한 단서조항을 넣은 협상안을 내놓았었고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준법투쟁을 결의하였습니다. 사측은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했고 협상은 타결되었습니다. 임금25%인상, 상여금지급, 유니온숍 등을 명시한 단협을 체결하였습니다. 작은 것을 양보하고, 큰 것을 얻어낸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조합원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다투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단협이 있은 후 바로 조합원들과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허물은 모두 덮고, 절대 제3자의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오해가 생기니까 당사자가 아니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현재 노동조합은 일단 맑음입니다. 허허.

동종 사업장의 반응은?
동종 사업장 노동자들은 현대환경노조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단협도 모두 알려져 타 사업장의 노동조합설립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발빠른 사장들은 알아서 임금을 올려주면서 노조결성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어찌되었든 현대환경노동조합이 지역의 동종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환경노조의 영향으로 제일환경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울 수 있는 모든 일을 도우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조합원이 3명이지만 함께 투쟁하면 곧 힘 있는 노동조합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노동조합의 활동방향은?
지역에서 같은 환경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싶습니다. 다같이 해야 더 좋게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뿐 아니라 지역의 환경개선을 위한 일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제고사 반대 체험학습
신나게 놀았습니다.

 

속터지는 노동자...

 

최근 임금체불 상담을 하면서 혹은 함께 노동부에 출석하면서 겪었던 속터지는 노동자들의 말을 전합니다.    

1.일용직이지만 5년동안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했습니다. 퇴직금을 받고 싶습니다. 신용불량자라 4대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월급도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다행이 동료들이 확인서를 써 주었고, 작업내역을 적은 노트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부에서는 3번이나 불러 사장한테 들을 말, 못들을 말 다 듣게 해놓고,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50% 어쩌구 그럽니다. 어쩌라는 것인지.

2. 정근수당을 받고 싶습니다. 7월1일 현재 재직 중인 직원에게만 준다고 합니다. 노동부에서는 당시 근무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을 대라고 합니다. 동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 것 같다고 답합니다. 사장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면서 전화를 바꿔줍니다. 동료는 모른다고 말을 번복합니다. 잘먹고 잘살길 바랍니다.

3. 퇴직하기 전까지 얼굴도 못 본 팀장이란 사람이 혀를 차며 거짓말이면 받은 돈은 뱉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개**. 주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시든지.

4. 일용직노동자고 신용불량자고 주민등록증도 없습니다. 그날그날 운이 좋으면 일용직으로 일합니다. “운수 좋은 날”이지요. 신용불량자라서, 노숙자라서 그날그날 바뀌는 수십명의 사장들로부터 개무시 당하는 “운수 좋은 날”이지요.

5. 어머니 연세의 사장이 남같이 않아 월급이 밀려도, 턱없이 적게 줘도 ‘언젠간 주려니’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악다구니. 생활이 어려우니 밀린 월급 달란 말에 그렇게 어려우면 사채라도 쓰라나. 그게 말이라고...

6. 사장님 운전기사로 일했습니다. 술집에 가도, 주말에 등산을 가도, 노래방에 가도 대기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는데다 자기니까 늙은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라며 협박 비슷한 면박을 주니 울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 거라고 하니 술에 취해 욕지거리를 해도 참고, 참으며 일했는데, 갑자기 나가라는 군요. 어느 누가 그 비위를 맞추오리까. 그동안 못 받은 법정수당을 받고 싶습니다. 새벽이고 자정이고 부르면 달려가야 했는데 임금은 매월 똑같으니 뭔가 잘못된 거 같습니다.

7. 일도 안주고, 휴업수당도 안주고, 아르바이트처럼 부려먹으니 잘못된 거 아닌가요? 고용유지지원금을 타먹는지 서류가 왔다갔다하고, 그만두라고도 않고, 스스로 그만두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노동부에 상담하러 왔다간 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가지고 우리 몇 명만 일을 안주니 속상합니다. 노동부에 진정했다가 우리 몇 명만 지난번처럼 또 피해를 볼까봐 망설이고 있습니다.

- 생각해봅니다. 퇴직을 했어도, 법위반을 했어도 언제나 자신의 아랫사람인양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당당한가? 센터를 찾는 노동자들을 법적인 지식으로만 기계적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도 됩니다. 위풍당당 노동자로 변신할 수 있는 힌트를 마음속에 꼭꼭 채워두었다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겠습니다. -

               

 

최저임금 홍보 및 노동상담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앞입니다.

 

궁금한 소식 전합니다.

 

* 일제고사 반대! 비리교육감 퇴진!
- 교육연대는 매일 비리교육감 퇴진을 위한 선전전을 교육청 앞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 후원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 정식품노동조합에서 후원결의 해 주셨습니다.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 후원계좌 알려드립니다.
- 호죽노동인권법률센터 / 농협 / 401821-51-001634

 

조광복노무사 블러그
http://blog.daum.net/hojug
http://blog.jinbo.net/hojug/
많이 방문해 주세요.

 

충북 청주시 상당구 흥덕구 미평동 35-17번지 2층 호죽노동인권센터 공동대표 조순형. 이정훈.
Tel : 043) 286-9596, Fax : 043) 286-9598,http://www.cbnodong.org/hojuk/hoju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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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주도하는 경찰노조, 파업을 협박하는 판사노조...

 

파업을 주도하는 경찰노조, 파업을 협박하는 판사노조, 파업에 앞장서는 대학총장


내일 LG생활건강노동조합 간부 수련회에 강의가 있어서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주제는 “우리 사회와 나를 들여다보는 노동인권이야기”로 잡았다.  목차를 죽 잡아가는데 그 중에 한 꼭지가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해온 것들이 정말 상식이라 부를만한 것인지 한 번 뒤집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의사와 버스기사의 월급이 5배가 차이 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월급이 비슷하면 안 되는 것인지 뭐 이런 내용이다.


그러다가 경찰이 노동조합을 만들면 안 되는지, 판사가 노동조합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취합하느라고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웬걸... 프랑스에서는 경찰노조가 파업을 주도하고, 판사노조는 정부에 대고 파업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대학 총장은 아예 파업대열의 제일 앞에서 행진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래 글은 한겨레21의 2001년 12월05일자(제387호) 기사 내용이다.

「지난 11월22일 파리의 레퓌블릭광장에서 오페라광장까지, 프랑스 전국에서 몰려든 경찰들이 까맣게 거리를 메웠다. “이제 샐러드는 지긋지긋하다. 닭(프랑스어로 경찰을 칭하는 은어)들에게 곡식을 달라”, “못으로도 목숨 잃는 경찰”, “시간당 5.25프랑 버는 세일경찰” 등의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들고 그날 모인 경찰들은 3만 여명을 헤아렸는데, 바로 전날의 2만 여명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지난 한 달 간 파리에서만 6번째며, 지방 곳곳에서 경찰들이 거리로 나선 참이었다. 한 달 동안 총 경찰의 1/3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수치이다. ...... 프랑스 경찰들의 시위가 이렇듯 우렁차게 연이어 메아리치는 주요 요인들을 짚어보면 첫째, 경찰들의 노조가입률이 총 70%로, 타공무원에 비해 월등히 높은 노조활동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 둘째, 사회안전과 관련해 경찰의 업무가 나날이 위험성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세 번째 요인으로 업무조건의 개선을 위해 내년 정부예산안과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고려한 전략을 들 수 있다. ......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들의 90% 이상이 경찰들의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까지 호응하는 경찰들의 분노를 그냥 방치할 수 없게 된 내무부는 11월26일부터 총 13개로 대표되는 경찰노조들과 새로운 합의에 들어갔으며, 11월29일 밤 합의를 보는 데 성공했다.」


또 아래 글은 2007년 11월 13일자 연합뉴스 기사 내용이다.


「佛 정부-노조 대립 부문별 현안, 프랑스 노동단체가 13일 저녁부터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기로 해 일대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정부와 노동단체는 그러나 '개혁강행', '파업강행'을 외치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기세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 현재 노동단체가 반발하고 있는 정부의 개혁안을 부문별로 정리해 본다. ◆공기업 특별연금 제도 ......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런 공기업의 특별연금 시스템은 민간 부문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고 재정적자를 심화시키고 있어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정부의 특별연금개혁 시도를 1995년과 2003년에 파업을 통해 무산시킨 바 있다. ◆공무원 감축=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무원 사회의 일대 쇄신을 위해 공무원 감축을 골자로 하는 공직사회 개혁방안을 발표해 공무원 노조의 반발을 사고 있다. ...... ◆법원 감축= 정부는 예산 절감을 위해 법원 정비계획을 마련, 지방법원의 통폐합과 폐쇄를 추진하고 있다. 판사와 사법공무원, 변호인 등은 이런 정부의 법원 축소방침에 반발해 29일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기타현안= 경찰들도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20일 파업을 예고하고 있고, 지난달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5일간 한시파업을 벌인 에어프랑스 노조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다시 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나라는 허구한 날 파업을 하느냐는 생각을 하며 또 검색을 하는데 프랑스 대학교는 2009년 4월 현재 두 달 이상을 파업을 하고 있단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대학개혁법안이라고 해서 법을 개정하려고 한다는데 대학교수, 연구원들 특히 인문학과 사회학 계열의 학자들이 대학 고유의 학문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적극 파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파업 시위 대열 맨 앞에서  ‘소르본’으로 알려져 있는 파리 4대학 총장과 8대학(이 나라는 대학교 이름이 없고 일련번호를 매기고 있다) 총장이 시위 맨 앞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이 파업에 국민들의 지지가 커서 정부에서도 양보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자, 여기까지 내용을 되짚어보자.  파업을 하고 있거나 하겠다는 이들은 경찰, 판사, 공무원, 대학교수(심지어 총장까지)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모두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다.  파업을 하겠다는 목적도 법안 반대,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 반대 이런 내용이다.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이쯤에서 무엇이 생각나시는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경찰과 신성한 사법부의 권위를 받들어야 할 판사와 학문의 전당을 수호해야할 교수들이 불법노조를 만들어서 가당찮게도 국민의 생명과 사법부의 권위와 학문의 전당을 담보로 불법파업을 일으켜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렸으니 국민 앞에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다.  죄목만 해도 불법노조 조직과 관련한 죄, 불법파업과 관련한 죄, 공무원들의 집단행동 금지와 관련한 죄, 공무집행방해죄,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들 중 주동자는 국가변란죄도 적용되어야 할 듯싶다.  저 나라의 감옥과 거리는 범죄자들과 해직자들로 차고 넘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감옥과 거리가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는 아직껏 통 무소식이다.  OECD 국가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같은 OECD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전면파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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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다.  술이 덜 깰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 누구에게나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면서 나에겐 있었나.  열무가 제 꽃을 피워 나비에게 쉴 곳을 내어주듯...  그래서 나는 문태준 시인의 시 ‘극빈’을 찾는다.  술이 덜 깰 때 한 번 씩...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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