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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시안은 마음만 급해서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고

두번째 시안이 나왔다

독립영화(현재로서는 '다큐멘터리'로 제한되어있지만) 감독들이

직접 자기영화를 알리고 상영회를 조직하고 배급을 고민하는

알찬 공간이 되길 바라는데

이제 겨우 첫 삽을 뜬 것이다

디자인 작업을 해주신 분께 감사를...

 

2006/03/11 11:46 2006/03/1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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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들은 ‘영화노동자’와 ‘비주류 영화’에게

스크린쿼터의 혜택이 적용되는 정책을 생산하라!


지난 2월 8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일동은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대해 입장을 발표했다. 위원들은 영화 진흥 정책으로 스크린쿼터의 힘을 대체할 유력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며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강력히 항의하고 재점검을 요구했다. 잘못된 정부 정책에 침묵하지 않고 항의하며 올바른 정책으로 이끄는 것은 위원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이며 이는 분명 높이 평가되어야 할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발표한 입장 중에는 ‘스태프 처우개선’이라는 영화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주류 영화 산업 발전을 통해서만 ‘영화노동자’도 ‘영화의 다양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언급을 포함하고 있어 우리의 실망과 우려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노동자의 생존권과 영화 다양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의미 있는 목소리들이며 영화 정책에 책임이 있는 위원들은 이러한 비판을 경청해야 할 것이지 억압하고 묵살해서는 안 된다.

정글의 법칙에 내맡겨진 영화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 정책 대안이 필요하다

스크린쿼터는 영화 산업의 안전판이라고 한다. 영화진흥위원회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국 영화 산업은 지난 몇 년간 두 배 이상 급성장했다.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장이라고 영화계는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영화인 모두가 골고루 누리고 있는가? 영화노동자들의 연봉은 평균 640만원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평균 임금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루 13시간 이상 노동, 절반 이상은 4대 보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영화가 완성되지 않으면 계약은 허공에 날아가기 일쑤이다. 천 만 관객 동원, 백 억대 제작비를 투여하는 영화도 만들어지는 한국 영화의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에 영화노동자의 현실은 노예 노동과 다름없다. 우리가 스크린쿼터 유지에 찬성하는 이유는 ‘영화’라는 문화적 표현이 초국적 자본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이를 유지하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사회적 안전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생산의 주체가 되는 영화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스크린쿼터로 인해 벌어들이는 이윤은 영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주체인 영화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영화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위원들은 정글의 법칙에 내맡겨진 영화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터져 나오고 있는 영화노동자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지지를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묵살할 것이 아니다. 노예 노동이나 다름없는 열악한 상황이 수 십년 째 계속되고 있는데도 아무런 정책 대안을 내놓지 못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역량을 반성해야 할 때이다. 국민적 관심이 영화계에 모아지고 있을 때 사회적 약자인 영화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가시화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것이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핀잔을 줄 일이 아닌 것이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는 영화인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비주류 영화는 주류 영화의 머슴이 아니다

주류 영화가 존재하고 그 규모가 유지되어야 비주류 영화도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은 마치 주인의 밥상이 화려해야 종들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많다는 것처럼 불쾌하다. 영화 자본가의 무뢰한 발언도 아니고 영화 정책을 생산해내야 하는 영화진흥위원회 위원들의 인식이기 때문에 더욱 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경제적 속성뿐 아니라 문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단순히 상업적 가치로 취급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크린쿼터와 같은 보호 장치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는 산업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상업 영화에 대한 보호만이 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양한 영화적 표현을 보호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스크린쿼터가 필요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국제기준인 문화다양성협약 역시 영화를 산업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 표현으로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빈국과 부국간의 국가간 간 불균형을 비롯해, 상업영화와 비주류 영화 간의 문화적 표현의 불균형도 극복하려는 것이다. 협약은 정부가 이러한 불균형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스크린쿼터가 일부 영화 자본을 살찌운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영화진흥위원들은 경청해야 한다. 스크린쿼터라는 안전판이라도 없으면 비주류 영화들이 영화 자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철저히 압살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스크린쿼터만 있다고 해서 비주류 영화의 문화적 다양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진흥위원회가 흥행분석을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비주류 독립영화 스크린쿼터와 같은 스크린쿼터의 수혜를 비주류 영화에게도 골고루 분배할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스크린쿼터라는 울타리 속에서 비주류 영화와 주류 영화의 생존 게임만이 되풀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국민들은 지난 몇 년간 스크린쿼터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스크린쿼터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데 변함이 없지만, 그 혜택을 결코 영화 산업의 이윤을 거머쥐고 있는 기득권층이 독식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 변화에 대해 영화진흥위원들을 포함한 영화인들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지지는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영화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시급히 마련하라!
- 스크린쿼터의 혜택이 비주류 영화에도 골고루 적용되는 정책을 생산하라!
- 영화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억압하는 말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2006. 2. 15
인권운동사랑방

2006/02/18 16:53 2006/02/18 16:53

그녀들

from SHOUT! 2006/02/10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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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글짓기 공부에 몰두하던 시절

한 선생님께서 '그녀'라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라고 했다

여자든 남자든 '그'라고 부를 수 있고

'그녀'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있었는데

'그녀'에 밀려 사라졌다고 했다

(정확한 소식통의 보완이 필요함!)

 

두번째 다큐를 기획하면서 여성음악인을 취재하고 싶었고

제목을 짓다가 '그녀들'이라는 말을 쓰긴 했는데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목이 아니라 자료다

 

아직 꼼꼼하게 찾아보질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자료 자체가 드문건지

한국여성음악인에 대한 책이나 기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아, 그 연재기사가 있었지!

 

요즘은 아주 게으른 독자가 되었지만

한때 날마다 들렀던 그 곳 '일다'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었다

 

관련기사: 한국여성음악인 재조명 1~10 (여성주의저널 일다 / 2004.3.1~5.9)

(링크가 안되네요...프리챌 자료실에 퍼다날랐던 기억이 나는데...)



내 두번째 영화는 그 기사에 빚을 지고 있다

'한국여성음악인'이라는 단어가 좀 부담스럽다면

'언니들'이라고 불러볼까

 

어린 시절부터 내가 흥얼거리던 많은 노래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부분 '언니들'의 노래였다

(한대수와 산울림과 아주 가끔 서태지와 초창기의 패닉과 불독맨션과...

 아직도 가끔 흥얼거리는 몇 몇 남자가수들의 노래도 좋지만)

김추자에서 박향미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니들 노래가 좋다

그 언니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중매체에서 그 언니들을 다루는 방식은 불쾌하다

스캔들, 아니면 외모

패션, 아니면 춤실력

섹시한가 아닌가, 아니면 노골적인 사생활 들추기

어쩌다 가끔 '개성적'이라는 말로 대충 넘겨버리는

언니들에 대한 시선과 평가는 인색하다

 

아직은 그저 '더듬더듬 흥얼거리는' 얼치기 팬의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그들의 실력과 삶과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향미에게서도 많이 배워야 하지만

싸토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그 두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오래 좋은 친구로 남아있기를 바라고

특히 싸토가 노래하듯이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건강해야해요!

 

 

 

 

 

2006/02/10 01:46 2006/02/10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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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연말, 당대비평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었다

영화제 관련 기사 몇 군데에서 제목을 언급한 것 외에는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해 따로 기사화한 매체가 없었기에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나중에 문부식 선생이 직접 전화를 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선명하지 않고 여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테잎은...그냥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왜 나는 그것을 굳이 돌려받았을꼬...

나중에 우편으로 다시 보내드려야겠다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문부식,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중에서

<돌 속에 갇힌 말>에 관한 부분만 발췌 (226~230p)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환멸(幻滅)역에서

 

 

 

(전략)

   최근 <돌 속에 갇힌 말>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실체보다 말에 끌리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나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이라는 사건의 이름보다 제목에 관심이 더 갔었다. 멀고 가까운 과거의 사건들이 온통 다시 개화하고, 이야기되지 못한 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시대 분위기에서, 여전히 돌 속에 갇히고 실어증에 걸린 것 처럼 발설하지 못하거나 이야기되지 못한 말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 기억이 맞다면, 이미 ‘민주화 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판정한 한 사건에 대해 아직 절실하게 이야기되어야 할 무엇이 남았다는 것일까. 혹시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승자들에 대한 보고서인가. 아니면 패배와 상처의 눈물겨움을 호소하는 탄원서인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TV 다큐멘터리 프로를 볼 때면, 나는 짖굳게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이 선언은 아직도 말할 수 없고 말해지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자칫하면 마치 이 시대 이 체제가 모든 역사적 사건의 사회적 실체와 정치적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다 허용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혐의를 갖곤 했다. 구로구청 사건도 지금까지 말해질 수 있는 수준에서 대략 알만큼은 알려진 사건 중 하나다.

 

   1987년 6월, 독재정권의 권력연장 음모에 항의하여 전국적인 항쟁이 전개되었고, 시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노태우의 이른바 6.29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노태우와 갈라진 양김의 대결. 군정종식에 대한 사회적 여망을 거역하기 위해 저질러진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 구로구청 사건은 선거 당일인 16일 서울의 변두리 한 구청에서 바로 이 선거 부정행위가 적발되면서 시작되었고, 18일 새벽 부정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하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공권력이 해산하고 1000명 이상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시킴으로 강제종결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무엇을 더 알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제2의 광주였다!”는 어느 참가자의 증언에서 느낄 수 있는 벌거벗은 폭력에 대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사망자들에 대해? 20년이 지나도록 개봉된 적이 없는 그 날 그 부정투표함에 대해? 부정선거를 고발하기 위해 투표함을 피흘리며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거나 보상받지 못한 역사가 빚진 사람들에 대해? 동시대의 예의없음에 대해? 아니면 진압의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고는 대학 초년생들과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남겨두고 쥐들처럼 빠져나가서는 나중 자신들의 정치 이력서에 그 날의 사건들을 적어넣은 재야의 명망인사들에 대해?

 

   <돌 속에 갇힌 말>은 그런 사실들 너머로 더 나아간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사건에서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나열하는 보고서들-그것이 문서이든 다큐멘터리이든-에는 별반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나의 빈약한 암기능력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리없이 통합되어있는 가식된 현재와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즉 ‘위험하지 않은 과거’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인간의 고통과 기억은-그것이 설사 모순과 수치심으로 채워진 것이라고 할 지라도-역사의 시장에 나앉아 좌판에 나열된 채 자신들의 시선을 구걸토록 방치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고통의 기억을 전유하여 자기정당화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현세적 권력의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하기의 고통’을 수행하지 않은 기록을 기억의 정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들이 <돌 속에 갇힌 말>에는 틈새 속에 박혀있다. 기억의 혁신은 거의 언제나 틈새 속에서 일어난다.

 

   기록하는 자의 주관이 불필요한 해석의 흔적을 남겨놓기도 하는, 매끄럽지 못한 화면속에서 증언자들을 감싸고 있는 감정의 분위기는 패배의식이다. 물론 그것은 한 현직 정치인이-앞서 이 글에서 언급한 재주많은 신주류 정치인과 동일인물이다-그 사건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라 표현한 것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는 패배감이다. 증언자들이 오늘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날 그들이 사수하려했던 투표함의 행방만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은 당시 대학1학년 여학생으로 구로구청에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 전국적인 선거감시운동-나는 그것이 6월 항쟁의 성과인줄로만 알았다”는 화면속의 캡션은 본인의 진술이다. 대통령 직선제는 지배권력의 선거기획의 변경이 던져준 ‘떡고물’ 이자, 권력에의 참여와 ‘집권의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민주화를 주도해온 야당 지도자들과의 타협의 소산이다. 증언자들이 말하듯이 ‘인터넷도 《한겨레신문》도 없는 상황’에서 더구나 양김으로 분열된 현실에서 1987년 대선은 노태우가 이기게 되어있는 선거였다. 아니 다르게 표현하면 이 선거는 양김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이 지기를 각오하고 분열된 선거였다. 그들이 권력참여의 기회를 자진포기하기에는 모처럼 복원된 직접 선거의 유혹은 너무 컸고,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참여 자체가 자유주의라는 그들이 지닌 신념의 결과였을 것이다.

 

    선거무효와 정권타도를 주장하며 구로구청에 당원들을 투입했던 그들은 개표 결과와 동시에 신속히 퇴각해버린다. 시청에서부터 행진해올테니 구로구청을 사수하라던 재야지도그룹과 시위행렬은 시청 앞에서 자진해산해버렸다. 그것은 1980년대의 변혁적 상상력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직접선거의 쟁취라는 목표로 제한되고 스스로 함몰되어간 과정이 가져온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모른다. 구로구청의 남은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간 투표함을 끌어안고 피흘렸던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은, 언제나 그런 것 처럼, 정치적 묵계의 선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야당지도자 중 한 사람에게 건네진 부정선거의 증거들은 설명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1987년 이후 오랫동안 대림역(구로구청역)에서 내리지 못했다. 내릴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돌 속에 갇힌 말>은 그같은 진술로 시작된다. 나는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양원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이름을 어디에선가 무단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구로구청의 옥상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어 지금까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사는 그는, 자신의 고통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짧게 대답한다.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용납될 수 있다면, 불구가 된 그의 신체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참담한 실체를 상징한다. 그는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함으로써 아직은 물신화의 영역안에 뭉뚱그려지지 않은 다른 정신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 시대 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치주체들로 부상한 자들이 ‘386’이라는 의미없는 숫자들의 조합으로 사물화해버린 1980년대의 시대경험과 기억들이 간절히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후략)


2006/02/07 02:33 2006/02/07 02:33

예고편-2

from SHOUT! 2006/01/2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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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곡: 우리는 사막을 건너가야 한다

 

           (박향미 작사, 이지은 작곡, 이승완 편곡)

 

2005. 12. 21  풍물패 더늠 연습실

        12. 29  인천 학산소극장(공연 첫 날)


SHOUT-노래하는그녀들 예고편2



마음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을

화면의 색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습하는 동안 날마다 초조하고 피로했으나

무대 위에선 반짝이는 날개를 달았던 그들을

별다른 기술적 장치없이 나타낼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어설프지만 색과 속도를 테스트해보면서

예고편2를 올린다

모두가 예술하는 세상을 꿈꾸는 W

그들을 응원하는 내 마음이 조금은 묻어나기를 바라면서...

 

*21일날 아침에 잠시 올렸다가 수정해서 다시 올려요

 

2006/01/23 10:17 2006/01/23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