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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왜곡된 기억의 조각

알엠님의 [잠깐 외출] 에 관련된 글.

 

 

생각해보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을 내 어린 시절을,

나는 늘 한 가닥 그리운 마음으로 기억하곤 한다.

말해선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답답했고,

뛰노는 대신 동생을 보는 것이 귀찮았는데,

그런데, 그 시절이, 그 골목이, 그 작던 단칸방이,

때로는 정말 애틋하게 그립기만 한 거다.

 

알엠님의 글을 읽다가 애틋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떠올릴 거란 문장을 보고

문득 우리 엄마가 예전에 써 놓았던 글이 생각나 옮겨 본다.

맞아요, 언젠가는 그런 기억들은 한 장면 그림처럼 애틋하게 기억이 나요.

정말, 그래요.

 

 



작년 무슨 촛불집회 때, 우리 가족들 같이 가서 웃고 떠들다 온 적이 있다.

그리고 아마 그 맘 때쯤, 엄마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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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들 어릴 때 나는 비장한 각오로 거리로 나섰었지요.
봐줄 사람도 없는 아이들만 달랑 남겨둔 채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연락해 달라고 친정 전화번호만
앞집 아주머니한테 맡겨두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 외롭게 남겨두고,
나 역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간신히 보채서 나갔더랬지요.
그때 나를 버텨준 논리는 단 한가지였어요.
지금 내가 여기서 막아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커서 이 짓을 해야 해.
나는 그 꼴 못 봐.
  
이렇게 단순무식한 엄마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참 외롭고, 고달프게 컸답니다.
밤 늦게 최루탄을 뒤집어 쓴 채 골목길을 접어들면
어두운 골목 안에 불이 켜진 방은 우리 집 뿐이었지요.
아이들은 골목으로 나있는 부엌문을 활짝 열고 잠들어 있다가
(아무리 말해도 그랬어요. 문을 닫고 있는 게 더 무섭다고)
내가 들어서면 매운 냄새에 잠결에 재채기를 하곤 했지요.
당시의 내가 아무리 확고한 무신론자 유물론자였다 할지라도
그럴 때, 어떻게 신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부엌문을 닫고, 세수를 하고,
아이들을 이부자리 위에 제대로 누인 다음,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껴안고 자리에 누우면
그저 온마음은 환하게,
보이지 않는, 내가 그 이름을 모르는 신에게,
내 대신 내 아이들을 돌봐준 그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이었지요.
이렇게 키웠으니, 우리 아이들, 내가 키웠다고 감히 말 못한답니다.
그저 하늘이 키워주셨으려니, 송구스러울 따름이지요.
그렇게 하늘이 키워준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아름다운 이런 집회의 대열에 함께 있자니,
나는 이번 생을 참 재미있게 살고 있구나,
그런 감회가 사무치더란 말씀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제대로 되려면 멀었지요.
하지만 세상이 거꾸로 갈 때,
적어도  '목숨은 걸지 않아도 되는' ,
'개심심하고 맹숭맹숭한' 데모를 할 수 있는 정도라도
세상을 바꿔냈다면(우리 모두 이만큼 바꿔낸 것이죠. 각자 모든 자리에서)
우리도 꽤 잘 해낸 게 아닌가 싶어요.^^
일상의 한 풍경인 집회에 다녀온 흥분에
주저리주저리 옛날 얘기까지 풀어놓았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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