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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6
    휴가(9)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8/08/21
    양심의 정의(2)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8/08/19
    허리 아파(12)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8/08/18
    2008/08/18(4)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8/08/07
    기록으로 보는 출근투쟁 69일(7)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8/08/07
    [500자 단상] 투쟁 106일째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8/08/07
    출근투쟁 8월말까지 유보...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8/08/07
    영화감상 - 이것이 민주주의(2)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8/08/05
    출근투쟁 68일째 풍경(2)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8/07/30
    출근투쟁 64일째 풍경(080730) - 매미(10)
    손을 내밀어 우리

휴가

어제와 오늘, 이틀간 휴가이다.

지난 금요일밤에 아내와 둘이서 Siem Reap으로 와서
토요일 하루 종일 앙코르 유적지를 하나씩 찾아다니고
일요일 하루 종일 앙코르 유적지를 하나씩 찾아다니고
월요일 오전까지 앙코르 유적지를 하나씩 찾아다니고
갔던 곳 중에서 좋았던 곳은 한번 더 가기도 하고
월요일 오후에는 싸들고 온 일 좀 하다가
오늘 오전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Tonle Sap 호수에 다녀오고
오후 1시에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나니까 갈 곳도 없고 쉴 곳도 없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다가 쉬다가

아내는 발마사지를 받으러 들어갔고
나는 피씨방에서 40분째 놀고 있다.

밤 10시 30분에 비행기는 출발할 예정이고,
공항까지 태워다 주기로 한 툭툭은 8시에 오기로 했고,
1시간 20분을 아직도 더 어디에선가 개겨야 하는 처지이다.

왜 앙코르 유적지에 오게 되었는지
와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쓸 수 있을까.
강행군에 지친 아내는 호텔에만 오면 잠에 취하고
술마실 상대도 없었던 나는 밤 시간이 펑펑 넘쳤으니까
조금씩 메모한 내용이 있으니 그래도 어느 여행보다 낫지 않겠나.

비용은 어떻게?
비행기삯은 내 마일리지로 처리했고(2명 72,000마일)
유류할증료는 아내가 카드로 그었고(1명에 19만원쯤?)
호텔비는 아내가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고 결제했고(얼마인지 몰라요)
내가 작년에 스페인가서 남겨온 120유로와
아내가 얼마 전에 영국 출장가서 남겨온 90파운드를 바꾸니까 336달러,
나와 아내가 갖고 있던 현금을 좀 꺼내서 150달러를 보탰고,
지금 30불 정도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현금으로 지출한 건 13만원 정도 되나...
(통장이 적자인데 그나마 다행이다)

주되게 지출한 내역?
앙코르유적지 3일 입장료 40불 * 2명 =80불
툭툭 전세내기 15 + 22 + 25 + 10 = 72불
입국 비자 21불 * 2 = 42불
똔레삽 호수 배 승선료 40불 (시간없어서 둘이만 타니까 곱배기더라)
나머지는 나중에 정리해서 올리도록 해야겠다.
(막 아내가 도착함)

일단 중간 보고 끝내고 피씨방에서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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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정의

점심 먹고 무심히 신문을 펼쳤다가 강용주 인터뷰 기사가 나와 있길래

신문지 두 면에 가득찬 활자들을 모두 읽었다.

 

그 중에 강용주의 한마디.

"...잠수함을 탈 때 토끼를 데려가거나 탄광에 카나리아를 갖고 가잖아요.  제 상황이 뒤집어진 상태의 카나리아라고 봐요. 나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비전향수, 보안관찰 처분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장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도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 카나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만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어요?"

 

그 옆에, 데스크가 박스쳐서 쓴 것 중에서 "양심의 정의"라는 말도 눈에 띈다.

 

헌법 제1장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또 헌법재판소는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인격적  존재 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양심을 정의했습니다. 가끔은 현실의 가치와 부딪히더라도, 양심의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에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하, 독백...

나한테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지? 그렇게 행동하거나 말하면 내가 불편해지고 힘들어지는 어떤 것?^^  근데, 내가 그 소리를 (어쩌다가 and/or 애써) 따라가는데, 왜 나 아닌 사람(들)이 못견뎌하고 힘들어할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또 왕창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거냐? 음, 하고 싶은대로 맘대로 사는 것과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쫓아가는 건 다르겠구나. 암튼...그렇다구. (불현듯, 당신 맘대로 살더라도 그것이 옆에 함께 사는 사람의 삶에까지 영향을 주니깐 당신한테 간섭하고 잔소리를 하는 거라고 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남...양심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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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아파

8월 7일, 그러니까 출근투쟁을 멈추자마자 그 날로 허리에 심한 통증이 왔다. 81년에 한번, 99년쯤에 한번 더 허리 통증을 겪었고, 그 후로는 독감이나 심한 몸살보다 허리 통증이 더 걱정될 정도로 심하게 무리한 듯하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최근 5년 동안에 세번째 겪는 통증인가 보다. 허리 근육이 뒤틀려서 반듯하게 일어설 수도 없고, 누어도 아프고 엎드려도 아프고, 허리를 굽힐 수도 펼수도 없고, 이건 당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끙끙 앓으며 잠도 깊이 자지 못한다. 이번 통증이 특히 그랬다. 이전에는 이만큼은 아니었다.

 

8월 8일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데 현기증과 갈증이 밀려오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한의사가 건네 준 약같은 물 한모금 마시니까 곧 진정이 된다. 이전에 허리 아프면 침놔주고 나선 술이나 한잔 하자고 나서기도 했던 한의사는 이번엔, 자기는 맨날 데모하면서 허리 근육들이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데모하는 목소리에 귀 좀 기울이고 살아라고 도움말을 준다. 자기가 낫게 할 수는 없어도 자기한테 침맞을 때 그나마 좀 쉬는 걸테니까 맨날 오라고 했는데, 이틀 가고는 말았다. 몇 번의 경험으로 그야말로 두문불출하고 이삼일 쉬는 게 약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술 마실 일들은 꾸물꾸물 이어졌다. 8월 6일 저녁에 서울로 술마시러 오라는 것은 마다하고 오랜 만에 대전에 온 동지와 다른 동지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한 동지는 우리 집에 재웠다. 허리통증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 그 동지와 나는 술을 한잔 즐겁게 마셨다. 그 다음 주에도 그랬다. 12일이었구나,  연맹의 동지들이 산청에서 모인다고 해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운전까지 해서는 갔다.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남들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두번의 주말이 지나갔는데 한주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내가 아파서 드러누운 것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그래서 적응도 잘 되지 않는) 식구들과 함께 먹자고 밥과 반찬을 해야만 했고, 지난 주말 3일 연휴 중에 이틀은 스페인에서 온 남동생 식구들과 필리핀에서 온 여동생들을 포함해서 17명의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푸짐하게 상을 차려야만 했다. 기꺼이 했다. 좀 낫는 듯하다가 허리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서 속보를 편집하다가 일어서면 허리가 곧바로 펴지지 않고 한참이나 끙끙 앓아야 했다. 엎드려서 쓰다가 앉아서 쓰다가 하면서도 부실한 속보는 날마다 나가기는 했다. 그래도 한 동지가 고정 코너를 하나 맡아주어서 고마웠고, 날마다 배포하느라 고생한 사무실의 동지들도 너무 감사하다.

 

정말이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던 이틀(8/9-10)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뭔가를 하노라고 움직였던 것 같다. 그래서 완전히 낫기까지는 좀 오래 걸리는 듯하다. 이번에는 특히 그렇다. 그래도 어쩌냐. 일도 있고, 술도 있고, 회의도 있고, 오늘처럼 서울까지 와서 해야 되는 일도 있다. 노동자역사 "한내"의 감사랍시고, 오늘 한나절은 회계서류만 뒤적이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휴가간다. 조용한 곳에 가서 세상과 담을 쌓으면 다 나으려나. 이번에 나으면 허리근육의 데모하는 목소리를 일상적으로 귀담아 들어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글쎄다. 암튼, 하필이면 허리가 한창 아프던 날에 대전에 오기로 했다가 아직까지 만남을 미루고 있는 서울의 한 동지에게 미안하고 미안하다.

 

업무상의 메일에 대해 급하게 답하려고 피씨방에 들렀다가 잠시 주절주절 쓰고 간다.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있으면 나중에 고쳐야지. 일단 나간다. 나가서 할일이 많다. 참, 허리가 아프다는 얘기를 의자에 앉기가 힘들어서 여기다가 못썼는데 이 정도라도 쓰는 걸 보니 좀 덜 아프긴 한 모양이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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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연일 비가 온다

마른 장마가 달구었던 대지는 촉촉하고 쿨하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다가

혼자서 다시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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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출근투쟁 69일

*출근투쟁 참석현황(4/25-8/6)

 

            -5/19-6/20: KAIST 정문 앞 1인 시위 포함.

-6월 13일 퇴근투쟁 30여명은 포함하지 않음.

차수

날짜

참석인원

차수

날짜

참석인원

1일차

4.25(금)

8

36일차

6.20(금)

32

2일차

4.28(월)

8

37일차

6.23(월)

37

3일차

4.29(화)

17

38일차

6.24(화)

32

4일차

4.30(수)

13

39일차

6.25(수)

41

5일차

5. 2(금)

11

40일차

6.26(목)

40

6일차

5. 6(화)

8

41일차

6.27(금)

23

7일차

5. 7(수)

12

42일차

6.30(월)

34

8일차

5. 8(목)

11

43일차

7. 1(화)

40

9일차

5. 9(금)

10

44일차

7. 2(수)

38

10일차

5.13(화)

10

45일차

7. 3(목)

27

11일차

5.14(수)

15

46일차

7. 4(금)

29

12일차

5.15(목)

16

47일차

7. 7(월)

30

13일차

5.16(금)

18

48일차

7. 8(화)

34

14일차

5.19(월)

17

49일차

7. 9(수)

37

15일차

5.20(화)

30

50일차

7.10(목)

32

16일차

5.22(목)

29

51일차

7.11(금)

22

17일차

5.23(금)

21

52일차

7.14(월)

23

18일차

5.26(월)

36

53일차

7.15(화)

34

19일차

5.27(화)

350

54일차

7.16(수)

27

20일차

5.28(수)

167

55일차

7.17(목)

27

21일차

5.29(목)

28

56일차

7.18(금)

18

22일차

5.30(금)

41

57일차

7.21(월)

21

23일차

6. 2(월)

64

58일차

7.22(화)

31

24일차

6. 3(화)

152

59일차

7.23(수)

26

25일차

6. 4(수)

72

60일차

7.24(목)

21

26일차

6. 5(목)

72

61일차

7.25(금)

23

27일차

6. 9(월)

132

62일차

7.28(월)

19

28일차

6.10(화)

163

63일차

7.29(화)

26

29일차

6.11(수)

132

64일차

7.30(수)

23

30일차

6.12(목)

121

65일차

7.31(목)

24

31일차

6.13(금)

29

66일차

8. 1(금)

28

32일차

6.16(월)

34

67일차

8. 4(월)

12

33일차

6.17(화)

32

68일차

8. 5(화)

28

34일차

6.18(수)

26

69일차

8. 6(수)

24

35일차

6.19(목)

42

연인원

2,907명

 

4월 25일부터 시작하여, 정부중앙청사 앞 상경집회가 있던 5월 21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빠짐없이 진행되었던 출근투쟁을 오늘(8/7)부터 8월말까지는 유보하기로 하였습니다. 연구단지에서 유래가 없이 길고 끈질기게 진행된 이번 출근투쟁에 관한 기록을 중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1. 69일 동안 연인원 2,907명, 하루 평균 42.1명이 출근투쟁에 참가했습니다. 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던 5월 27-28일과 연구소 비대위가 부서별로 요일을 정하여 집중했던 6월 9-12일을 제외하더라도 하루 평균 29.3명이 꾸준히 참가하였습니다.

2. 처음엔 노동조합 간부들과 연대 조직을 중심으로 10명 안팎으로 진행되던 것이 5월 19일부터는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연구소 차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5월 23일 교과부의 통합방침이 확인되고 5월 27일 연구소가 통합 거부입장을 명확히 하고 나서는 일반 직원들까지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힘을 보탰습니다.

3. 연구소 비대위가 적극적으로 조직했던 6월 9일부터 12일까지는 연일 120-160명의 직원들이 출근투쟁에 나와서 통합 반대의 의지를 연구단지 전역으로 떨쳤습니다. 논란 끝에 1주일 만에 끝나서 아쉽긴 했습니다.

4. 6월 13일부터 8월 6일까지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투쟁을 전개한 기간입니다. 날씨는 점차 더워지고 휴가기간으로 접어든 이후에도 20명 이하로 떨어진 날은 단 3일(7/18, 7/28, 8/4)에 불과할 정도로 조합원들과 일부 직원들이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5. 휴가기간이고 불볕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출근투쟁 참가인원이 급격히 감소하지 않은 상태, 즉 투쟁을 이어갈 힘을 보존하면서 휴식을 맞게 된 것은 앞으로도 필요한 경우에 투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투쟁의 전망을 밝게 하는 것이고, 열성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더없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6. 평가모임은 따로 갖고 종합 보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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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자 단상] 투쟁 106일째

“출근투쟁 잠시 휴식이라는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이 소식이 기쁨이 될 그 날까지 홧팅!” 8월말까지 출근투쟁을 유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 문제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투쟁을 쉬어간다는 것은 결코 흔쾌한 문제가 아닙니다. 회의에서 어렵사리 결정은 했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만들 때까지 저마다 일하는 자리에서 홧팅해야겠죠! 아자아자~.~” 하고 답을 보내면서도 마음이 활짝 개이지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오늘 출근길에 KAIST 앞을 지나면서 왠지 썰렁하고 야릇한 생각이 들더라는 조합원의 말에서 느끼는 마음도 그랬습니다.
암튼, 날마다 출근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아침에 1시간쯤의 여유가 생겼다고 하면, 바쁜 시간 쪼개서 애써 나온 동지들을 서운하게 만드는 말일까요?^^;; 출근투쟁을 하던 그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틈틈이 우리 연구원의 장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좋은 결론이 있으면 즉시 노동조합으로 알려주시구요! (2008. 8. 7)
......출근투쟁이 잠정 유보되면서 투쟁속보에 출근투쟁 풍경란이  비게 생겼다.
궁리 끝에 [500자 단상]이라는 것을 연재하기로 했다. 뭘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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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투쟁 8월말까지 유보...

노동조합은 어제(8/5) 생공투 정례회의를 갖고 KAIST 앞 출근투쟁을 8월말까지 잠정 유보하는 등 8월 투쟁계획을 심의, 결정하였습니다.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공투 결정사항

1. 노동조합은 KAIST 서남표 총장에게 공문을 보내어, 통합을 배제하는 두 기관의 발전적인 협력방안을 논의할 것을 주문하고, 이러한 입장을 우리 노동조합과의 면담이나 공문을 통해서 8월 27일까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2. 서남표 총장이 8월 27일까지 아무런 회신이 없거나 통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9월 1일부터 출근투쟁을 재개한다.

3. 교과부는 강제통합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서 밝히고 있는데, 생명연-KAIST 통합에 대한 방침이 있는지 공문과 면담 요구를 통해서 확인하도록 한다. 교과부의 전향적인 입장이 확인될 때까지는 교과부 앞 1인 시위는 지속한다.

4. 그 밖에 연구원측이 요청하고 있는 연구원 내외부에 설치된 유인물 등 통합반대 운동의 잠정 중단의 건은 노동조합이 이미 요청한 보충교섭을 통해서 연구원측과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에 판단하도록 한다.

5. 생공투 속보는 계속 발행한다. 다만, 그동안 조합원들이 식당 출입구에서 대대적으로 배포하는 방식을 8월에는 한시적으로 변경하여, 노동조합 전임자들을 중심으로 식당 안에서 조용하게 진행하도록 한다.

이번 결정의 배경과 의미

노동조합의 이러한 결정은 외형적으로는 8월 5일자로 접수된 연구원측의 협조요청 공문에 대한 토론의 결과로 나온 것이지만, 기실은 통합논란이 소강국면을 지속하는 가운데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나게 될 9월 이후를 대비하여 투쟁의 전열을 가다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투쟁을 완전히 끝내는 것은 섣부르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판단입니다. 노동조합은 8월 하순까지 그동안의 투쟁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한편, 새 원장 취임과 출연(연)에 대한 구조조정 등 앞으로 변화하는 내외부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력을 유지하고 보강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제 날짜 생공투 속보 66호에서 일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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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 이것이 민주주의

민망하게, 팔자에 없이 영화평을 기고했네요. 미디어충청 꺼 그대로 옮겨요...

2008년 한국의 촛불에 바치는 헌사

[영화] 다큐멘터리 “이것이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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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7 02시08분 이성우

99년 시애틀과 08년 서울


1999년 11월 30일 아침, 시애틀에서 열리기로 한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서 5만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시위대는 시애틀의 회의장(Convention & Trade Center)을 둘러싸고 각국의 장관들의 입장을 막았다.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각국 대표자들을 둘러싸고 시위대가 외친다. “누구의 거리인가?” “바로 우리의 거리이다!” “Our street!”를 연호하며 시위대는 손과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 춤을 추고 노래한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현장에서 벌어지고 사람들은 마치 축제에 참여한 듯이 활력이 넘친다. 2008년 5월부터 시작한 한국의 촛불집회를 미리 보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미국 주정부도 발끈한다. 시애틀 시장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병력을 요청했다. WTO에 관한 어떤 깃발과 복장과 시위가 금지되는 25블럭에 걸친 “시위금지구역”을 설정했다. 시내에는 통행금지령이 떨어졌고,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서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무차별 발사했다. 연좌하고 있는 시위대를 한명씩 떼어내어 양 손목을 케이블 타이(전선 따위를 묶어서 고정하는 장치로 절단하기 전에는 풀리지 않음)로 묶어 짐승처럼 사지를 들고 연행했다.


시위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방식에 흥분한 시위대는 12월 1일에 다시 엄청난 기세로 시애틀 시내로 쏟아져 나왔고,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맨홀에서도 차안에서도 나왔고 50명이 100명으로, 150명이 300명으로 금세 불어났다. 경찰은 변함없이 강경하게 대응했다. 버스를 세워서 시위대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끌어내렸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추적해서 3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했다. 12월 1일 밤에 시애틀 경찰은 업무방해, 경찰 폭행 등의 죄목으로 630명을 체포했다. 한 철강노동자가 얘기한다. “어제 5만여명이 거리에 있었지만 겨우 몇 명만이 유리를 깼을 뿐이다. 그런데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대를 잡아가서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 역시 한국의 경찰을 판박이라도 한 듯하다.
12월 2일에 시위대는 체포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행동에 나선다. 감옥 안에서 체포된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연대의식이 형성되는 사이에, 감옥 밖에서는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항의농성을 벌여서 변호사 접견을 성사시키고, 이윽고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시킨다. 12월 3일에 제3차 WTO 각료회의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폐회되었고, 신자유주의의 심장부에서 통행금지와 시위금지구역과 최루가스와 총탄을 뚫고 역사적인 시애틀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촛불은 반신자유주의 투쟁

그 2년 후에 도하에서 열렸던 제4차 각료회의,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각료회의(한국의 농민 이경영 열사가 할복했던 회의),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린 제6차 각료회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민중운동진영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표류했다. 이렇듯 WTO 체제에서 다자간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기는커녕 도리어 미국이 고립되는 현상까지 빚어지자, 미국은 다자간 협상보다는 양자협상을 통해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것은 곧 2006년 벽두부터 한미FTA 체결을 요구하며 한국을 압박하였고, 결국 2008년 4월 굴욕적인 한미 쇠고기협상으로 이어졌으니, 지금의 촛불집회는 1999년 미국의 시애틀 투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애틀 투쟁은 5대양 6대주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과 연대하면서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전 지구적 민중운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72분짜리 다큐멘타리 영화 <이것이 민주주의>(원제: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는 시애틀 투쟁 당시 100여명의 미디어활동가들이 수집해 온 생생한 화면들로 구성되어, 시애틀 투쟁에서 맛본 감동과 가능성과 한계를 잘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등장하는 많은 장면, 이를테면 시위대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적인 퍼포먼스, 자유로운 연설,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인터뷰 등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촛불집회를 연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감동을 받는다. 함께 영화를 봤던 동지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들이다. 경찰의 폭력 침탈과 시위대의 비폭력 대응과 (말로만 투쟁하는 노동조합 상층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연대투쟁은 2008년의 한국에서도 흡사하게 나타난다.
시애틀 투쟁으로부터 9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의 촛불집회는 시애틀 투쟁을 압도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촛불민주주의라고 하고 일각에서는 네트워크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어떻게 규정하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민중은 다양성, 자발성, 창조성에 있어서 기존의 운동세력을 능가하고 있고,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체제가 양산하는 반민중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법과 제도에 전면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촛불집회가 없었더라면 <이것이 민주주의!>가 주는 첫 감동은 훨씬 컸을 것이다. 1999년에 시애틀에 모였던 5만의 시위대가 서울시청 광장에 지금 다시 모인다면 수십만의 함성에 파묻혀서 흔적 없이 녹아버리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이것이 민주주의!>


한 가지 부러운 것은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에는 나오지 않지만, 강경진압을 지시했던 시애틀 경찰서장은 해임되었고, 시애틀 시장은 다음해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리고 경찰의 강경진압을 놓고 법정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위금지구역 바깥에서 체포된 157명에게 불법 체포를 이유로 정부가 25만불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2007년에 와서는 시위 금지 구역 ‘안(內)’의 공원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연좌 농성을 벌이다가 체포된 175명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나 확실한 증거 없는 불법 체포였다는 이유로, 100만불을 배상하고 체포 기록도 삭제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의 판단은 경찰의 진압 자체가 미국 수정 헌법 4조의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촛불집회를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한국이라면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자못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이고 볼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욕심을 부리자면, 이 땅의 동지들이 아마도 곧 만들게 될 “2008년 촛불민주주의”에 관한 영화가 <이것이 민주주의!>를 뛰어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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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투쟁 68일째 풍경

 

자전거를 타고 KAIST 정문으로 오는 길에 소담스럽게 핀 나팔꽃무리를 만났습니다. 코스모스가 봄에도 피는 하 수상한 세상인데, 제 철에 피는 꽃을 만나니 절로 기분이 상큼하고 가벼워집니다.

어제 아침에 TV에서 들었던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이 불현 듯 떠오릅니다. 무슨 법칙이냐구요?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6단계만 거치면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회자되던 이 법칙이 최근에 메신저에서도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2006년 6월 인터넷 메신저 사용자 1억 8,000만명이 한달간 대화한 기록 300억건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무작위로 추출한 한 쌍의 사람들이 평균 6.6명을 거치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미국처럼 넓은 땅덩어리에서 그러하다면 이 좁은 한반도에서는 6.6명까지 갈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사돈의 팔촌만 거치면 다 아는 공동체 사회가 우리 옛 모습이었습니다. “너는 아비도 없냐?”고 묻자 “없다!”하고 칼을 휘두르는 무정한 도시의 뒷골목 풍경을 떠올리면 참 비감한 생각까지 듭니다.

구태여 도시의 뒷골목을 들먹일 것도 없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관료들이나 KAIST의 서남표 총장, 장순흥 부총장이나 우리 연구소 직원들이나, 몇 명만 거치면 아는 관계로 맺어질텐데 투쟁 100일이 넘도록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 전에 속보에 소개한 적이 있지만, 출연(연)에 대한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이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이고, 졸속적이며, 폐쇄적이라고 여기는 연구원들이 90%나 되는데, 정부는 왜 아무런 느낌도 없고 응답도 없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도 나팔꽃을 만난 듯이 환하게 웃을 수 있고 말하지 않더라도 교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도 있지만, 이즈음의 출근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꽃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애써 확인하지 않아도,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주는 느낌이 꽃처럼 아니 꽃보다 진한 감동을 줍니다. 우리 투쟁이 어떤 결말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투쟁의 시기에 만난 동지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좋은 느낌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길 것입니다.

오현우, 김지훈, 이종우, 한영칠, 김석원, 조인묵, 김미선, 고애숙, 이정희, 정선경, 박용권, 김은아, 김건래, 정원중, 배종옥, 이강현, 김대겸, 이성우, 김병혁, 박미진, 이재상, 이문수, 김형열, 흐엉(Vietnam), 김두영, 민성란, 황규섭(KAIST노조), 정상철(〃), 오늘 아침을 함께 한, 멋진 동지들입니다. 짝짝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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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투쟁 64일째 풍경(080730) - 매미

오늘 아침, KAIST 정문의 육중한 돌기둥 꼭대기에 매미가 날아와서 맴-맴-매앰~~ 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자동차 소리보다 더 크고 (오늘은 틀지 않았지만) CD카세트의 최대 볼륨보다도 더 크게 울었습니다.

우는 매미는 수컷입니다. 매미가 우는 이유는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우렁차고 더 크게 울수록 암컷이 많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도시의 매미는 소음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골에 사는 같은 종의 매미보다 더 강한 소리로 웁니다.

나무 그늘도 없는 뜨거운 돌기둥 위에서 매미가 짝짓기에 성공하나 보려고 되풀이해서 올려다봅니다. 매미는 한자리에서 5분 이상 울지 않습니다. 2-3분 정도 울다가 암컷이 오지 않으면 자리를 바꾸어 다시 웁니다. 이런 행동은 짝짓기를 할 때까지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출근투쟁을 하다가 보면 모든 사물과 사건이 투쟁과 결부되어 보입니다. 이 시간에 하필이면 매미가 저 뜨거운 돌기둥 위에 와서 울고 있을까, 하고 갸우뚱하다가, 그렇구나, 매미도 출근투쟁에 같이 하고 싶은 것이야, 하고 혼자 싱긋 웃으면서 독백처럼 내뱉습니다.

연구소 정문과 후문에서 시작하여, 중앙과학관 앞 4거리와 장대동 하이마트 앞 4거리를 옮겨 다니다가, KAIST 앞에서 출근투쟁을 고정적으로 해온 것이 6월 23일부터였습니다. 교과부 앞 1인 시위를 포함해서 우리도 매미(의 짝짓기)처럼 (강제통합 중단이라는) 결말이 날 때까지 옮겨 다니면서 우는(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우는 것과 투쟁하는 것을 나란히 써놓으니 ‘투쟁’이 ‘투정’으로 읽히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절대로 아니라는 것, 아시지요?!!)

매미는 성충으로서의 수명은 짧지만 생각보다 훨씬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곤충입니다. 산이나 들과 같이 공기 좋은 곳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매연까지 견디며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유충의 경우엔 땅 속에 오염물질이 스며들어도 웬만하면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성충으로 우화하는 때를 기다리며 성장합니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땅 속에서 기다리는 매미의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투쟁은, 모든 자연이 그러하듯이, 인간을 경건하고 겸허하게 합니다. 오래도록 쉴새없이 이어지는 투쟁의 과정에서 가끔은 뜬금없는 상상력이 발동하고 장난스런 얘기가 오가더라도, 출근투쟁을 통해서 쑥쑥 성장하는 내 영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구름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눈부셨던 아침에, 오현우, 김형렬, 이성우, 정선경, 박미진, 이재상, 김건래, 김은아, 김두영, 전국체, 김정아, 김정희, 이종우, 박두상, 성주희, 한영칠, 이강현, 조정숙, 김지훈, 이문수, 김세동(KAIST노조), 정상철("), 이경진(본부) 동지들이 매미의 울음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강제통합 저지투쟁의 승리를 염원하며 출근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오늘은 동지들이 우뚝 딛고 있는 그 발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보았습니다~.~ (2008.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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